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84화: 목소리를 찾으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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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4화: 목소리를 찾으러 가는 길

도현이의 목소리는 전화 너머에서 작았다. 아니, 정확히는 목소리 자체는 작지 않았다. 목소리 뒤에 있는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16살 남자아이의 목소리인데, 그 안에 담긴 것은 훨씬 어린 아이의 것 같았다. 두려움. 외로움. 누나를 잃었다는 그 공허감.

“누나, 어디야? 진짜로. 엄마한테 막 물었는데 엄마가 제주라고만 했어. 제주? 왜 제주야? 누나 미쳤어?”

도현이가 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도현이는 무언가를 할 때의 그 버릇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는 소리. 그 소리는 세아에게 낯설지 않았다. 세아도 어릴 때 그렇게 했었다. 불안할 때,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손가락으로 리듬을 만들며 생각했었다.

“누나가 잠깐 필요한 시간이 있었어. 그래서…”

세아가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은 중간에 끊어졌다. 목이 아팠다. 강리우의 손가락 자국이 목 안쪽까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손가락이 아직도 세아의 목을 쥐고 있는 것처럼.

“필요한 시간? 누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뭐야? 엄마는 뭐야?”

도현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이가 감정을 참을 수 없을 때 나오는 그 떨리는 음성. 세아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였다. 자신이 외면함으로써 생긴 그 상처의 흔적.

“도현아, 미안해. 정말로.”

세아가 말했다. 이번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왼쪽 뺨을 타고, 목을 지나, 쇄골 아래의 타투 위에 떨어졌다. 하늘이 그려진 그 타투 위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세아는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것이 따뜻한 것과 만나는 그 감각.

“미안한 건 알겠어. 근데 그게 뭐하는 소리야? 미안하면 돼? 누나 넌 진짜…”

도현이가 말을 멈췄다. 전화 너머에서는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 도현이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분노, 상처,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두려움. 누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

“넌 학교 다녀?”

세아가 물었다.

“뭐? 누나가 자기 문제는 안 챙기고 내 학교를 물어? 진짜 미쳤어.”

도현이가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분노의 기세가 꺾인 것처럼.

“다녀야지, 공부 해야지.”

세아가 말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낡은 누나의 목소리로.

“누나는 뭐 하는데? 공부 하라고? 넌 뭐 하고 있어?”

도현이가 반문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있어”라고? “강리우라는 남자의 손에서 벗어났어”라고? “내가 누구인지 다시 찾으려고 하고 있어”라고?

“누나, 너 혹시…”

도현이가 말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분노에서 물음으로. 물음에서 진짜 걱정으로.

“혹시 누나 자해하는 거 아니야?”

그 질문에 세아는 숨이 멎었다. 도현이가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있었는지.

“아니야, 도현아. 누나가 사라진 게 아니라…”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세아는 사라져 있었다. 강리우와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태우면서, 마치 성냥불처럼 천천히 소멸되고 있었다.

“누나한테는 우리가 뭐야? 나는? 엄마는?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도현이가 물었다. 16살 남자아이의 목소리인데, 그 안에 담긴 것은 훨씬 더 오래된 슬픔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 남겨진 아이의 슬픔. 누나까지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그 절박함.

세아는 전화기를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것처럼.

어머니가 옆에서 세아를 봤다. 세아의 얼굴을 읽고 있었다. 아, 어머니는 알았다. 누가 전화했는지. 도현이가 뭐라고 했는지. 그 모든 것을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물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해녀처럼.

“도현이한테 줘.”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전화기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손이 떨렸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을 쓰고 있는 것처럼.

“응, 도현아. 엄마야. 누나는 지금 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래서…”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모든 것을 용인하는 그런 톤으로.

“근데 엄마, 누나가 왜 그래요? 누나가 뭘 한 거예요?”

도현이가 물었다.

“누나가 뭘 한 게 아니라, 누나가 누군가한테 뭘 당했어. 그리고 그 누군가를 떠나기 위해서 여기 왔어.”

어머니가 말했다. 단순하게. 명확하게. 어떤 수식도 없이.

세아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봤다. 어머니의 등은 구부러져 있었다. 병으로 인한 구부러짐이 아니라, 이 세상을 견디기 위한 구부러짐. 그렇게 구부러진 등으로 세아의 아들 같은 도현이를 감싸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의 말이 도현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이가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한 울음.

“괜찮아, 도현아. 괜찮아. 누나가 돌아올 거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반드시 돌아올 거야. 엄마가 약속해.”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세아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하는 말은 도현이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자신에게도 말하고 있었다. “넌 돌아올 거야. 반드시.”

전화를 끝낸 후, 세아는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통해 제주의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햇빛. 정오를 넘긴 햇빛. 강하고, 뜨겁고, 정직한 그런 햇빛.

“누나가 뭘 당했어?”

어머니가 갑자기 물었다. 세아는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동자가 세아를 꿰뚫었다. 마치 물속에서 미역을 찾는 해녀의 눈동자로.

“그 강리우라는 남자. 누나가 그 남자를 왜 만났어?”

어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것처럼.

서울에서의 모든 것을 말했다. 강리우를 처음 만난 그 밤. 그의 따뜻한 손. 그의 달콤한 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가 자신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목을 조여올 때,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어머니는 말 없이 들었다.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오직 세아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세아가 말을 다 했을 때, 어머니는 세아를 안아줬다. 말 없이.

“그 남자, 누구야? 이름이 뭐야?”

어머니가 물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해녀가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단단함.

“강리우. 음악 산업에 있는…”

세아가 말했다.

“알았어. 그 남자는 넌 다시 보지 마. 절대로. 알겠지?”

어머니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어머니의 명령.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강리우를 떠났지만, 강리우를 완전히 떠난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물속에 있으면서 물 위의 세상을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은 물 위로 올라와 있지만, 자신의 일부는 여전히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누나가 할 일은?”

어머니가 물었다.

“뭐… 하면 돼요?”

세아가 물었다.

“노래해. 그게 누나의 일이잖아.”

어머니가 말했다. 단순하게.

“엄마, 저 이제…”

세아가 말하려고 했다. 자신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목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태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자신 안에 남은 불꽃이 거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는 주방으로 가서 라디오를 켰다. 오래된 라디오. FM 채널.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트로트 음악이었다. 어머니가 해에 나갈 때 항상 듣던 그런 음악. 따뜻하고, 슬프고, 그러나 어딘가 희망을 담고 있는 그런 음악.

“이 노래를 들어봐. 이 여자가 얼마나 열심히 부르는지 봐. 인생이 이렇게 힘든데도, 이렇게 부르고 있어. 우리도 그래야 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해.”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강리우를 떠났다는 것은, 단순히 한 남자를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떠난 것은 자신의 불꽃을 타인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그 삶이었다는 것을.

이제 자신은 자신을 위해 노래해야 한다. 도현이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아닌,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 노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세아는 천천히 일어섰다. 신체는 여전히 무거웠다. 목은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무언가가 바뀌었다. 아주 작은 변화지만, 확실한 변화. 마치 물속에서 올라올 때의 그 첫 번째 움직임처럼.

“엄마, 저 한 가지 할 수 있을까요?”

세아가 물었다.

“뭔데?”

어머니가 물었다.

“하늘이한테 전화를 하고 싶어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 자신이 버렸던 그 친구. 자신이 외면했던 그 음성. 그 친구에게 말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미안하다는 것. 자신이 이제 돌아왔다는 것. 자신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는 것.

어머니는 세아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제주의 햇빛이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하늘이의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세아는 잠깐 멈췄다. 이 통화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삶이 이 순간 이후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필요했다.

버튼을 눌렀다.


홍대의 타투 가게 지하실. 하늘이는 새벽 3시에 누군가의 등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살아있다.” 두 글자. 고객의 요청이었다. 최근에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그래서 이 글자를 새기고 싶다고.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하늘이의 손가락이 멈췄다. 세아. 3주 만의 전화. 자신이 수십 번을 걸었지만, 받지 않던 그 여자의 전화.

“여보세요?”

하늘이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하늘아, 미안해. 정말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쉬어 있었지만, 확실했다. 마치 물속에서 올라와서 처음 공기를 마시는 사람의 그런 목소리로.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울음이 나왔다. 타투 가게 지하실에서, 고객의 등 위에서, 하늘이는 눈물을 흘렸다.

“너 지금 어디야?”

하늘이가 물었다.

“제주야. 엄마 있는 곳에서.”

세아가 말했다.

“제주? 진짜? 혼자?”

하늘이가 물었다.

“엄마랑 있어.”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다시 울음이 나왔다. 그 말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 세아가 누군가를 신뢰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이. 그것이 하늘이에게는 가장 큰 안도였다.

“언제 와? 서울로.”

하늘이가 물었다.

“모르겠어. 아직 모르겠어. 근데…”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는 조금 더 강해졌다.

“근데 뭔데?”

하늘이가 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내가 먼저 살아나야 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제주의 햇빛은 여전히 강했다. 세아의 방에서, 세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냄새는 들었다. 염분을 머금은, 어머니의 냄새. 해녀의 냄새.

그리고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이 왜 제주로 왔는지. 자신이 왜 강리우를 떠나야 했는지.

자신은 불꽃이 아니라, 불꽃을 밝히는 그 불씨여야 한다. 자신이 타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해 누군가 다른 것이 밝혀져야 한다. 그것이 노래였다. 그것이 자신의 불꽃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을 다시 밝히기 위해, 자신은 먼저 물속에서 나와야 했다. 완전히.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12,847자

# 버튼을 누르기 전에

## 1부: 결정의 순간

화면에 떠 있는 그 버튼을 바라보며 하늘이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클릭하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흐를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필요했다.

밤 11시 45분.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 방에서 하늘이는 혼자였다. 노트북의 화면 빛이 얼굴을 밝혔고, 그 빛 속에서 그의 표정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이었다.

“이거… 정말 해야 하나?”

하늘이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없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손가락만이 아니라 전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방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리, 창밖으로 들리는 저 멀리의 자동차 소리, 그리고 그의 숨소리만이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만 개의 불빛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선택이, 누군가의 후회가, 누군가의 희망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하늘이도 자신의 불빛을 켜거나 끌 수 있었다.

버튼의 텍스트는 명확했다. “삭제”. 최종 삭제. 이 버튼을 누르면, 그동안 구축해온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었다. 3년간 모아온 팔로워 50만 명. 그동안의 모든 포스팅. 모든 댓글. 모든 메시지. 모든 기억.

하늘이는 손을 떨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냥 몇 주 쉬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이 계정을 유지한다면, 자신은 계속 이전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죽음과 같다는 것을.

“살아있다.”

하늘이가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등에 새길 글자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살아있다.”

다시 한번.

“살아있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 2부: 새벽의 타투 가게

화면이 검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계정이 삭제되었습니다.”

하늘이는 숨을 내쉬었다. 긴 숨. 마치 물속에 오래 잠수했던 사람이 수면으로 올라와서 처음 공기를 마시는 듯한 그런 숨.

노트북을 닫았다. 소리가 작게 났다. 클릭. 그 소리가 하늘이에게는 매우 컸다. 마치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밤 12시 30분. 하늘이는 방을 나왔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몸에 떨어졌다.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열감 속에서 그는 감정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피부에서 독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화장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30대 초반의 남자.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 하지만 눈은 다르게 보였다. 눈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결정.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른 두려움과 해방감의 혼합물.

밤 2시. 하늘이는 홍대의 골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새벽의 홍대는 독특했다. 낮에는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이 거리가, 밤이 되면 조용해졌다. 몇몇의 클럽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하늘이가 일하는 타투 가게가 있었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면, 그곳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어 하늘아, 오늘따라 빨리 왔네.”

가게 주인인 성준이가 말했다. 그는 50대의 남자였고, 얼굴 전체에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하늘이는 그가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성준이는 하늘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이었다.

“네. 잠을 못 잤어요.”

하늘이가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타투를 새기려면 정신이 맑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피곤하면 손이 떨린다.”

성준이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책망보다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정신이 맑아요.”

하늘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계정을 삭제한 후로, 하늘이의 정신은 오히려 더 맑아졌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밤 3시. 타투 가게의 지하실에서는 하나의 고객이 누워 있었다. 남자, 30대 중반. 등을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근육질의 등. 하지만 그 등에는 상처가 많이 있었다. 삶의 흔적들.

“살아있다. 이 글자를 새겨주세요.”

고객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왜 이 글자를 선택하셨어요?”

하늘이가 물었다. 그는 항상 고객에게 이 질문을 했다. 타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타투는 선언이었다. 약속이었다. 자기 자신과 맺는 계약서였다.

“최근에 깨달았어요. 내가 정말로 살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살아있고 싶어요. 정말로.”

고객이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바늘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하늘이가 말했다.

## 3부: 전화

새벽 3시 15분. 하늘이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소리. 그리고 고객의 약한 신음. 그것이 타투 가게의 유일한 소리였다.

“살”

첫 번째 글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검은 먹물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영구적으로. 지워질 수 없도록.

그 순간, 하늘이의 주머니에서 울음이 났다.

진동. 진동. 진동.

휴대폰이었다.

“잠깐만요.”

하늘이가 고객에게 말했다. 그리고 손을 멈췄다. 바늘을 내려놓았다.

화면을 봤다.

“세아”

그 이름을 보는 순간, 하늘이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세아. 그 이름. 그 여자. 3주 만의 전화. 자신이 수십 번을 걸었지만, 받지 않던 그 여자의 전화.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에는 버튼을 누를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떨렸다.

“여보세요?”

하늘이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진 도자기를 다루듯 신중했다.

“하늘아, 미안해. 정말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쉬어 있었지만, 확실했다. 마치 물속에서 올라와서 처음 공기를 마시는 사람의 그런 목소리로.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울음이 나왔다. 타투 가게 지하실에서, 고객의 등 위에서, 하늘이는 눈물을 흘렸다. 어깨가 떨렸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객이 고개를 돌아 하늘이를 봤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눈물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너 지금 어디야?”

하늘이가 물었다. 목소리는 쉬었다.

“제주야. 엄마 있는 곳에서.”

세아가 말했다.

그 말 한 문장. 그 문장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나. 세아가 누군가를 신뢰했다는 것. 누군가에게 의존했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하늘이에게는 가장 큰 안도였다.

“제주? 진짜? 혼자?”

하늘이가 물었다.

“엄마랑 있어.”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다시 울음이 나왔다.

“언제 와? 서울로.”

하늘이가 물었다. 목소리는 간절했다.

“모르겠어. 아직 모르겠어. 근데…”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는 조금 더 강해졌다. 마치 안개를 헤치고 햇빛을 찾아가는 목소리처럼.

“근데 뭔데?”

하늘이가 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내가 먼저 살아나야 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 4부: 제주의 햇빛

제주의 햇빛은 여전히 강했다. 오전 10시. 세아의 어머니 집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거의 신성할 정도였다. 황금색의 빛이 방 안 전체를 밝혔다.

세아는 그 창가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냄새는 들었다. 염분을 머금은, 어머니의 냄새. 해녀의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서 세아는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 6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바다에 들어가는 그 여자. 그 여자의 손은 주름이 많았다. 나이와 바다가 만들어낸 주름들. 하지만 그 손으로 만지는 것들은 모두 따뜻했다.

“하늘아, 미안해. 정말로.”

세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화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하늘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숨소리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아파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행한 것들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를.

“미안해.”

세아가 다시 말했다.

“미안하지 말아. 니가 뭘 한 거 아니야.”

하늘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야 해. 너한테, 그리고 나 자신한테.”

세아가 말했다.

“뭔데?”

하늘이가 물었다.

“내가 깨달았어. 여기서. 엄마랑 있으면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제주로 와야 했는지. 내가 왜 강리우를 떠나야 했는지.”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결정이 담겨 있었다.

창밖으로 제주의 산들이 보였다. 초록색의 산들. 그리고 그 너머로는,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에서 매일 어머니는 잠수했다. 숨을 쉴 수 없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돌아왔다. 매일.

“나는 불꽃이 아니었어. 내가 타서 사라지는 그런 불꽃이 아니었어.”

세아가 말했다.

“그럼 뭔데?”

하늘이가 물었다.

“불씨. 나는 불씨야. 내 자신을 통해서 누군가 다른 것이 밝혀져야 해. 내가 밝혀지는 게 아니라, 내가 빛을 비춰줘야 해. 그것이 내 역할인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그게 뭔데?”

하늘이가 물었다. 목소리에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노래. 노래가 그거야. 내가 노래로 누군가의 삶을 밝혀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울었다. 그 울음 속에는 안도가, 그리고 희망이 담겨 있었다.

## 5부: 물속에서 나오기

세아는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6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가는 피부. 하지만 그 피부 위에는 시간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봤다. 주름진 손. 바다가 만든 손. 그 손이 자신의 손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깨달았다.

‘나도 이렇게 될 거야.’

세아가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이렇게 주름진 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웠다. 시간이 만든 그 주름들이, 살아온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세아.”

어머니가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어머니의 첫 행동은 세아를 보는 것이었다.

“엄마, 깼어?”

세아가 말했다.

“음. 좋은 꿈을 꿨어. 너와 아버지가 나올 때.”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 주름진 손. 바다가 만든 손.

“엄마, 나 노래 다시 시작하려고 해.”

세아가 말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언제부터?”

어머니가 물었다.

“모르겠어. 아직 모르겠어. 근데 먼저 여기서 좀 더 있고 싶어. 엄마 곁에서.”

세아가 말했다.

“좋아. 이 집이 너의 집이야. 항상. 돌아올 집이.”

어머니가 말했다.

그 말 한 문장. 그 문장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조건 없는 사랑. 무한한 신뢰. 그리고 돌아올 수 있는 곳.

세아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세아.”

어머니가 말했다.

“뭐, 엄마?”

세아가 물었다.

“넌 항상 불씨였어. 내가 물속에 있을 때, 넌 나의 불씨였어. 그것을 잊지 말아.”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듣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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