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2화: 돌아가지 않는 것들
편의점의 형광등은 여전히 깜박였다. 세아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강리우의 별장에서 나온 지 3일. 서울로 돌아온 지 2일. 그리고 지금 새벽 2시 47분의 GS25 편의점에서 다시 그 깜박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박, 깜박.
마치 심장 박동처럼. 혹은 신호등처럼. 무언가가 죽었다 살아난다.
“손님, 이거 얼마예요?”
할머니가 물었다. 같은 할머니였다. 월요일마다 오는 그 할머니. 세아는 그녀를 ‘편의점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이름도 없었다. 단지 ‘손님’이거나 ‘할머니’였다. 이름을 아는 것은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3천 원입니다.”
세아가 바코드를 스캔했다. 삐 소리. 기계의 목소리. 인간이 아닌 것의 언어.
“비싸졌네. 작년엔 2천 5백이었는데.”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동의를 의미했고, 동의는 진정성을 의미했다. 진정성은 피로했다.
할머니는 돈을 내놓았다. 동전. 동전의 무게. 세아는 그것을 받아서 카운터 옆의 작은 상자에 넣었다. 그 상자는 점심 때가 되면 비워진다. 매일. 매일 같은 방식으로.
할머니가 나갔다. 편의점은 다시 고요해졌다. 세아와 형광등과 냉동실의 윙윙거리는 소리.
제주에서의 3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강리우의 별장. 바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들. 한준호. 베를린. 3년 전의 죽음. 그 모든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마치 영화처럼. 혹은 책처럼. 세아의 삶이 아닌 무언가처럼.
하지만 손가락은 기억했다. 강리우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았던 느낌. 물 위에서. 새벽 5시의 파도 소리 사이에서. 그 온기. 그 떨림.
“그래서 내가 너를 봤을 때… 넌 준호 같았어.”
말을 미완성으로 끝내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아챘다. 어제 밤 침실에서. 강리우가 잠든 후에도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넌 준호 같았어. 그 다음은? 넌 준호 같았어서 내가 너를 구해야 했어? 넌 준호 같았어서 내가 너를 사랑했어?
아니면 더 어두운 것. 넌 준호 같았어서 내가 너를 잃을까봐 무서웠어.
세아는 카운터에 기대앉았다. 손가락이 또 떨렸다. 자신의 손가락이 떨렸다. 강리우의 손가락처럼. 마치 전염되듯이. 감정이 전염병처럼 옮겨간다. 그것을 세아는 알았다. 음악에서 배웠다. 하나의 음이 다음 음을 결정한다. 하나의 음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진동이 고막을 때린다. 그리고 그 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귀에 남아 울려 퍼진다.
핸드폰이 울렸다.
하늘이었다. 카톡. 여러 개.
[야 좀 봐줄래? 문신 새로 하나 했는데. 내일 점심때 만날래?]
[아니 뭐해 이렇게 안 본지 오래야]
[제주도 다녀왔다더라고 도현이가 말했어. 뭐한 거야???]
[진짜 난 너 좀 미쳤다 싶음]
세아는 핸드폰을 봤다. 하늘의 목소리가 화면 너머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크고, 직설적이고, 정확한. 하늘은 항상 정확했다. 세아가 놓친 것들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세아는 답장을 했다.
[내일 2시 합정역 앞. 괜찮아?]
3초. 답이 왔다.
[오케이. 뭐 먹을래?]
[상관없어.]
[역시 너다. 떡볶이 먹자. 떡볶이는 모든 것을 해결해.]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하늘의 말이 맞았다. 떡볶이는 뭔가를 해결했다. 아니, 해결하는 척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더라도, 2시간 정도는 잊게 해주니까.
시계는 2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3시가 지나자 손님이 줄었다. 편의점은 더 고요해졌다. 세아는 냉동실을 정리했다. 만두, 순대, 떡국. 모두 차갑게 얼어 있었다. 그것들은 원래 차가운 것이었다. 손가락이 문 닿으면 언다. 냉동실에는 체온이 없었다. 혹은 반대로, 체온을 빼앗아가는 곳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들이 냉동실의 차가움에 떨고 있었다. 아니,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떨고 있는 척하는 건가. 구별이 안 됐다.
“넌 준호 같았어.”
다시 그 말이 들렸다. 강리우의 목소리로. 세아는 눈을 감았다. 냉동실의 불이 꺼졌다.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한준호. 베를린에서. 피아노 앞에 앉은 청년. 우승 트로피를 들고 웃는 청년. 그리고 그 일주일 후에 죽는 청년.
세아는 눈을 떴다. 냉동실의 불이 다시 켜졌다. 현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오후 2시. 합정역 5번 출구.
하늘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타투 소매가 보였다. 팔뚝에서 목까지. 새로운 디자인도 있었다. 작은 성냥 모양. 불이 타오르는 성냥. 하늘이 말했던 대로다.
“이거 봐!”
하늘이 팔뚝을 들었다. 자랑스럽게.
“이쁜데.”
세아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근데 너는? 뭐 생겼나?”
하늘이 세아를 훑어봤다. 한 달 사이에 뭔가 달라진 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보이지 않던 건지, 어쨌든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늘은 항상 그렇게 했다. 보지 못한 것도 본 척했다. 그리고 그 척이 진실이 되어버렸다.
“없어.”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말 쟁이.”
하늘이 웃었다. 큰 웃음. 거리의 사람들이 돌아봤다. 하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떡볶이 먹자.”
세아가 방향을 돌렸다. 떡볶이 가게는 골목 안에 있었다. 좁은 골목. 세아가 자주 지나가던 곳. 하지만 이 가게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돈이 없어서였다. 떡볶이는 사치였다.
“오늘은 내가 쏠게.”
하늘이 말했다. 마치 그것이 자명한 것처럼.
“괜찮아.”
“아니야. 내가 좀 번 거 있어. 새로운 클라이언트. 유명한 사람이더라고. 타투 한 번에 200만 원. 미쳤지?”
세아는 놀랐다. 하늘이 벌 수 있는 돈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축하해.”
“너도 뭐 잘됐을 거 아니야. 제주도 갔다왔다더라.”
식당에 들어갔다. 작은 식당. 스테인리스 테이블. 벽에는 메뉴판. 떡볶이, 순대, 튀김, 김밥. 간단한 것들. 서울의 변두리 음식점의 메뉴였다.
“이 집 떡볶이 진짜 맛있어. 내가 자주 오던 곳인데, 너한테 처음 가져와.”
하늘이 앉으면서 말했다.
세아도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 앉으면 삐걱거렸다.
“떡볶이 두 개. 그리고 순대도 한 개. 튀김은… 야 세아, 뭐 좋아?”
하늘이 물었다.
“상관없어.”
“너 정말 이 말만 해. 뭐 상관없어, 뭐 괜찮아. 인생이 상관없냐?”
그것은 가벼운 말 같았지만,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아챘다. 하늘은 항상 그렇게 했다. 중요한 말을 웃음 같은 톤으로 던진다.
“가지튀김도 줘.”
“오케이.”
주문이 들어갔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식당의 소음. 냄비 끓는 소리. 다른 테이블의 대화. 그것들이 배경음처럼 흐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뭐 했어?”
하늘이 먼저 말을 끊었다.
“그냥…”
“뭐 그냥? 제주도를 그냥 다녀왔어? 그 사람이랑?”
“네.”
세아가 대답했다. 짧게. 최소한으로.
“그 사람 누군데? 계속 물어봐도 안 말했잖아. 도현이한테도 안 말했고.”
하늘이 기울어진 몸을 다시 바로 폈다. 심각해지는 톤.
“그냥… 음악 관련 사람이에요.”
세아가 대답했다. 진실이었다. 강리우는 음악 관련 사람이었다. 아니,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
“음악 관련? 그래서 뭐야? 프로듀서? 작곡가? 엔지니어?”
“그런 건 아니고…”
“뭐 하는 사람이야?”
하늘의 질문이 점점 직설적으로 변했다. 마치 칼로 층층이 벗겨내듯이.
떡볶이가 나왔다. 그 타이밍이 아주 정확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한 것처럼. 세아는 그것에 감사했다. 침묵의 이유를 만들어주었으니까.
“맛있어.”
세아가 떡볶이를 집어먹었다. 뜨거웠다. 입 안이 화상을 입었다. 그것도 좋았다. 고통은 명확했다. 떡볶이의 매움.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감각이었다.
“너 또 피해.”
하늘이 물컵을 건넸다. 세아는 마셨다. 물도 뜨거웠다. 끓인 물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너를 어떻게 대해?”
하늘이 다시 물었다.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잘해요.”
“그래? 어떻게 잘해?”
“그냥… 좋아해요.”
“좋아해? 뭐, 사귀는 거야?”
“네.”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도 진실이었다. 아니,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하늘은 떡볶이를 멈췄다. 집게로 든 떡이 공중에 떠 있었다.
“진짜?”
“네.”
“그럼 넌 괜찮은 거야? 저 계약이나 그런 거. 다 잊어버린 거야?”
하늘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장난스럽지 않았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떡을 더 집었다.
“세아.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그냥 살고 있어요.”
“살고 있다고? 너 그게 살고 있는 거야? 편의점에서 하루에 3시간 잔다고? 그리고 그 사람한테 매달린다고? 그게 살고 있는 거야?”
하늘의 목소리가 커졌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이 돌아봤다. 하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너 자기 꿈 기억해?”
“네.”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지?”
“네.”
“그럼 뭐해? 왜 아직도 편의점에 있어? 왜 그 사람한테 의존하고 있어?”
세아는 하늘을 봤다. 하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하늘은 화난 게 아니라 걱정하고 있었다. 세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떡볶이의 끓는 소리보다도 작았다.
“뭐?”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계약은 이미 했고, 돈은 도현이한테 줬고, 음악은… 더 이상 제 것이 아니에요.”
하늘은 집게를 내려놨다. 떡이 국물 속에 빠졌다.
“그래서 포기했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요.”
침묵. 식당의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냄비 끓는 소리. 다른 식탁의 웃음소리. 주인장의 음성. 모두가 세아와는 무관한 세상의 음향.
“그 사람이 뭐라고 말했어? 뭐라고 해서 넌 다시 노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늘이 물었다. 차갑게.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리우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같이 있자”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세아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아. 내가 좀 직설적으로 말할게. 그 사람은 널 구하려는 게 아니야. 자기 죄책감을 없애려는 거야. 대부분의 남자가 그래. 자기 상처를 다른 여자한테 치료받으려고. 그리고 넌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어. 진짜로.”
하늘의 말은 정확했다. 마치 칼처럼. 마치 누군가 세아의 마음을 정확하게 해부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알아요.”
세아가 말했다.
“알아? 그럼 뭐해?”
“모르겠어요.”
하늘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 참은 숨처럼. 마치 물 위에서 올라온 해녀처럼.
“너 어머니 생각해봤어?”
“네.”
“도현이 생각해봤어?”
“네.”
“그럼 자기 생각도 해봐. 자신에 대해서. 그 사람 옆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아?”
세아는 떡볶이를 집었다. 다시. 계속.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울 것 같았다. 울지 않으려고 씹었다. 뜨거움으로 고통을 덮었다. 고통으로 눈물을 예방했다.
하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을 잡았다. 떡볶이를 집은 손. 뜨거운 손. 떨리는 손. 하늘은 그 손을 잡고 있었다.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의점으로 돌아온 건 저녁 6시였다.
세아는 일을 했다. 진열대를 정리하고, 계산을 하고, 손님들의 물음에 대답했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일어났다. 마치 누군가 세아의 몸을 제어하는 것처럼. 마치 세아는 이미 부재한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너 뭐해?]
세아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안녕? 답장 안 할 거야?]
또 울렸다.
[내일 제주 다시 가자. 하루만. 시간 되지?]
세아는 여전히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새벽 2시 47분. 형광등이 깜박였다. 깜박, 깜박.
세아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늘이 맞다는 것을. 자신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강리우의 손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손이 따뜻했고, 세아는 이미 너무 오래 추웠으니까.
불과 얼음의 차이.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세아는 그 차이를 알면서도, 계속 불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12,847자]
# 불과 얼음 사이에서
## 1부: 진실의 칼날
카페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세아의 귀를 적시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회색빛 오후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세아는 손가락으로 찬 커피잔의 테두리를 따라갔다. 따뜻함이 사라진 지 오래인 커피. 자신처럼.
하늘이 앉아 있었다. 세아의 정면에. 손에는 핫초콜릿을 들고 있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 속에 무언가 답이 있을 것처럼.
“강리우를 만났어?”
하늘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날카로웠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심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느꼈다.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응.”
세아의 대답도 짧았다.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짧을수록, 덜 거짓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글쎄요.”
세아는 여전히 커피잔을 만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차갑게 식은 도자기 표면에서 미끄러졌다. 만지다, 놓다, 다시 만지다. 작은 반복 행동. 불안의 신호. 자신도 알고 있었고, 하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은 얼마나 자주?”
하늘이 물었다. 핫초콜릿을 마셨다. 입술에 초콜릿이 묻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일까? 아니면 세아를 직시하기가 힘들어서일까?
“주에… 두 세 번? 음, 모르겠어요. 자주봐요.”
거짓이 아니었다. 근데 왜 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자신이 이 장면을 밖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한 소녀가 앉아 있다. 찬 커피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막지 못하는 소녀.
하늘은 잠시 침묵했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 세아는 그 음악이 너무 슬펐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하늘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마치 검사실의 조명처럼 밝고, 숨길 수 없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리우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같이 있자”고 했을 뿐이다. 그 말을 몇 번 들었는지 세아는 이제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말에 설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미래를 향한 약속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세아가 느끼는 것은 설렘이 아니라, 허약함이었다. 불안감이었다. “같이 있자”는 말 속에 숨겨진 조건부. 내일도 함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불확실성. 그것이 세아를 서서히 삼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같이 있으라고.”
세아가 겨우 말했다.
하늘은 세아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무거워서 세아는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대신 테이블 모서리의 흠집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뭔가를 세는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세아.”
하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내가 좀 직설적으로 말할게. 그 사람은 널 구하려는 게 아니야.”
세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도 이미 알고 있던 말인데, 왜 가슴이 철렁하는지 몰랐다. 아마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서 들리는 것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있지만, 들리는 말은 피할 수 없으니까.
“자기 죄책감을 없애려는 거야.”
하늘이 계속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누르고 있던 것을 터뜨리는 것처럼.
“대부분의 남자가 그래. 자기 상처를 다른 여자한테 치료받으려고. 자기 외로움을 채우려고. 자기 죄책감을 씻으려고. 그리고 넌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어. 진짜로.”
하늘의 말은 정확했다. 마치 칼처럼. 마치 누군가 세아의 마음을 정확하게 해부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세아는 떨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가슴이 떨렸다. 왜냐하면 모든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강리우는 자신의 옛 여자친구 때문에 자책하고 있었다. 세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리우는 그 여자를 상처 줬고, 그 죄책감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씻으려고 자신을 선택했다. 자신은 그 여자와는 다르다고 증명하기 위해. 자신은 따뜻하고, 착하고, 그 여자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사랑인가?
세아는 떡볶이를 주문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니, 지금도 먹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였지? 명동의 작은 떡볶이 집이었나? 아니면 강리우가 자주 가던 그곳이었나? 세아는 더 이상 기억을 신뢰할 수 없었다.
“알아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 놀란 표정으로 세아를 바라봤다.
“알아? 그럼 뭐해?”
그 질문이 가장 어려웠다. 왜냐하면 세아도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새벽 두 시경에 편의점에서 혼자 서 있을 때. 형광등의 찬 불빛 아래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자신에게 자신이 묻는 질문.
“모르겠어요.”
세아가 대답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답변이었다.
하늘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 참은 숨처럼. 마치 물 위에서 올라온 해녀처럼. 공기를 원하지만, 공기 위에 올라가기가 힘들어하는 해녀처럼.
“너 어머니 생각해봤어?”
하늘의 음성이 바뀌었다. 더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더 무거워졌다.
세아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눈. 세아가 강리우를 처음 만났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 “좋은 사람이니?” 세아는 대답했다. “응.” 거짓이었나? 아니었나? 세아는 더 이상 모르겠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도현이 생각해봤어?”
도현이는 세아의 남동생이었다. 열여섯 살. 세아의 인생을 바라보고 배우고 있는 남자아이. 세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아이.
“네.”
세아가 또 대답했다.
“그럼 자기 생각도 해봐. 자신에 대해서. 그 사람 옆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아?”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하늘이 세아의 눈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창밖을 바라봤다. 빗소리가 더 커졌다. 또는 세아의 귀가 더 민감해졌을 수도 있다.
세아는 떡볶이를 집었다. 다시. 계속.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울 것 같았다. 울지 않으려고 씹었다. 뜨거운 맛이 혀 위에서 타올랐다. 고통으로 눈물을 예방했다. 신체적 고통으로 정신적 고통을 덮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떡볶이는 맵고, 뜨거웠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맵기 때문에 나온 것인지, 슬픔 때문에 나온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 그것이 세아가 원했던 것일 것이다. 혼동. 불분명함. 명확한 답이 없는 상황.
하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을 잡았다. 떡볶이를 집은 손. 뜨거운 손. 떨리는 손. 하늘은 그 손을 잡고 있었다.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아는 손가락을 느꼈다. 하늘의 손가락. 따뜻했다. 강리우의 손처럼 따뜻했다. 아니, 더 따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강리우의 손에는 조건이 있었으니까.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줘야 한다는 조건. 자신을 사랑해줘야 한다는 조건.
하지만 하늘의 손에는 조건이 없었다. 그냥 손이었다. 누군가를 껴안으려는 손. 누군가를 지탱해주려는 손.
그 차이가 세아를 더 울게 했다.
—
## 2부: 자동인형의 저녁
편의점으로 돌아온 건 저녁 6시였다.
세아는 일을 했다. 진열대를 정리하고, 계산을 하고, 손님들의 물음에 대답했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일어났다. 마치 누군가 세아의 몸을 제어하는 것처럼. 마치 세아는 이미 부재한 것처럼.
“어서오세요.”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세아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편의점 직원의 목소리였다. 세아라는 개인이 아닌, 직원이라는 역할의 목소리였다.
손님이 과자를 들고 계산대로 왔다. 세아는 손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스캔했다. 계산했다. “3800원입니다.” 손님이 돈을 냈다. 세아가 거스름돈을 줬다. 모든 것이 기계적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팔을 봤다. 움직이고 있었다. 상품을 정렬하고, 이동하고, 배치했다. 하지만 그 팔이 자신의 팔이라는 감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팔을 조종하는 것처럼.
형광등이 세아의 위를 비추고 있었다. 차갑고 하얀 빛. 그 빛 아래에서 세아는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 검은 그림자. 실체 없는 그림자. 혹시 자신이 이미 죽어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미 사라진 것은 아닐까?
“이거 얼마예요?”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상품의 가격을 확인했다.
“5900원입니다.”
대답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처럼.
시간이 흘렀다. 몇 시간? 몇 분? 세아는 더 이상 시간을 인지할 수 없었다. 단지 손님들이 들어왔고, 나갔고, 또 들어왔다. 반복되는 행동의 연쇄. 의미 없는 반복.
밤 11시쯤, 강리우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했다. 세아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봤다.
[너 뭐해?]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세아를 더 괴롭혔다. “뭐해?”라는 질문 속에는 “너를 생각하고 있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세아는 지금까지 믿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것은 단지 호기심일 뿐이었다. 아니, 단순한 시간때우기일 수도 있었다.
세아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분 뒤, 또 메시지가 왔다.
[안녕? 답장 안 할 거야?]
세아는 여전히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바라보기만 했다. 화면이 자동으로 꺼졌다. 다시 켜졌다. 또 꺼졌다. 반복.
[내일 제주 다시 가자. 하루만. 시간 되지?]
마지막 메시지였다. “제주”라는 단어가 세아의 가슴을 쥐어짰다. 제주. 그곳에서 강리우와 함께했던 시간들. 그곳이 세아의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 그곳에서 강리우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 단지 옆에 있어줬을 뿐이다.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답장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
## 3부: 새벽의 깨달음
새벽 2시 47분.
편의점은 조용했다. 오직 형광등의 부드러운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 주기적인 깜박임이 있었다. 깜박, 깜박. 전구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형광등의 깜박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심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약해지는 박동.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심장.
이 시간대에 손님은 거의 없었다. 가끔 술 취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세아는 그들을 봤지만, 보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그들을 지각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들을 인식하지 않았다.
세아는 생각했다. 하늘이 맞다는 것을. 자신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 강리우를 만난 처음부터였을까? 아니면 강리우가 자신을 “같이 있자”고 말했을 때였을까? 아니면 더 최근에였을까?
세아는 자신의 몸을 들여다봤다. 팔, 다리, 몸통. 모두 여기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영혼일까? 정신일까? 자아일까?
강리우는 세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강리우는 세아의 이름을 알지만, 세아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강리우에게 세아는 누군가였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줄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 자신의 옆에 조용히 앉아줄 누군가.
하지만 세아는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세아는… 누구였을까?
핸드폰이 또 울렸다. 새벽 2시 52분. 강리우였다.
[너 진짜 무서워. 뭐하는 거야? 답장 좀 해.]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진짜 무서워”라는 표현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강리우가 무서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아가 자신을 떠날까봐? 아니면 자신이 선택받지 못할까봐? 아니면 자신이 다시 혼자가 될까봐?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