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6화: 계약서 이전의 것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Prev6 / 23Next

# 제6화: 사인하기 전에

세아가 JYA 엔터테인먼트 본사 건물을 처음 본 것은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3번 출구를 나오면서였다.

건물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박인철이 토요일 카페에서 건네준 명함에 주소가 적혀 있었고, 세아는 오는 길에 지도 앱으로 위성 사진을 확인했다. 그러나 위성 사진과 실제로 눈앞에 서는 것은 달랐다. 유리와 검은 화강암으로 된 이십삼 층짜리 건물이 오후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1층 로비가 통유리여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입구 옆 기둥에 JYA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폰트가 얇고 차갑고 자신 있었다.

세아는 건물 앞에서 삼십 초쯤 섰다.

주머니 안에서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오늘 입은 건 검은 슬랙스와 흰 셔츠, 그 위에 회색 코트. 하늘이 어제 전화로 “제발 패딩은 입지 마라”고 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패딩 대신 코트를 입었는데, 코트 안감이 얇아서 이미 허벅지가 차가웠다. 서울의 십일월이 이렇게까지 추울 필요는 없었다.

그냥 들어가자.

세아는 자동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렸다.


로비 안은 따뜻했다. 아니, 따뜻한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 온도가 일정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바깥의 바람이나 냄새가 전혀 없었다. 대리석 바닥에 세아의 운동화 소리가 났다. 세아는 운동화를 신고 온 것을 잠깐 후회했다가 — 운동화 말고 다른 신발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안내 데스크에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JYA 로고가 새겨진 재킷을 입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박인철 팀장님 약속 있어요. 나세아입니다.”

직원이 화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세아는 데스크 옆에 섰다. 로비 왼쪽 벽에 JYA 소속 아티스트들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박소진의 포스터도 있었다. 이번에 나온 싱글 〈창가에서〉 프로모션용 사진 — 흰 드레스, 창문 앞, 빛이 들어오는 구도. 세아가 그 곡의 멜로디를 처음 만든 건 고시원 방에서 새벽 두 시였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포스터를 보지 않기로 했다.

박인철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오늘은 야구 모자 대신 정장 차림이었다. 토요일의 카페에서 본 것보다 키가 더 커 보였다. 회사 안에 있으니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아가 더 작아진 것인지.

“왔어요. 올라가죠.”

인사가 없었다. 세아도 인사 대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8층이었다. A&R 팀과 계약 관련 부서가 있는 층이라고 박인철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설명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배경음악이 흘렀다 — JYA 소속 아티스트의 곡이었다. 세아는 그 곡의 프로덕션이 좋다고 생각했다. 좋은 프로덕션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오늘은 먼저 A&R 팀장이랑 간단히 얘기하고, 그다음에 계약 관련 내용 들어볼 거예요.”

“계약이요?”

“어, 뭐 정식 계약은 아니고 — 일단 들어봐요. 형식적인 거니까.”

형식적인 거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잘 몰랐다. 형식적이면 왜 여기까지 오라고 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박인철이 먼저 나갔고, 세아는 따라 나갔다.

8층 복도는 조용했다. 카펫이 깔려 있어서 발소리가 흡수됐다. 왼쪽에 통유리로 된 회의실이 보였다 — 안에 사람들이 뭔가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에 개방형 오피스. 여러 개의 모니터, 헤드셋, 커피 컵들. 세아는 지나치면서 모니터 화면들을 봤다. 차트 데이터, 스트리밍 수치, 그래프들. 음악이 숫자로 변환되어 있었다.

박인철이 복도 끝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안에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짧은 머리, 금속 프레임 안경, 잘 다린 셔츠. 그는 세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A&R 팀장 유재원입니다.”

세아가 악수를 했다. “나세아입니다.”

“앉으세요.”

세아는 앉았다. 유재원이 마주 앉았다. 박인철은 옆에 앉았다. 회의실 테이블이 컸다. 세아와 유재원 사이에 빈 공간이 많았다.

유재원이 먼저 말했다. “직접 뵙고 싶었어요. 〈창가에서〉 들었을 때부터요.”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리지널 데모 들었거든요. 편곡 전 버전이요. 박 팀장이 가져왔을 때. 솔직히 말하면 — 편곡 후 버전보다 데모가 더 좋았어요.”

“…그렇군요.”

“멜로디 구성이 독특한데 직관적이에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세아는 유재원의 말이 칭찬인지 분석인지 판단하려 했다. 둘 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둘 다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곡들도 있어요?”

“있어요.”

“들을 수 있을까요?”

세아는 잠깐 박인철을 봤다가 다시 유재원을 봤다. “오늘요?”

“가능하면요.”

세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음성 메모 앱에 저장된 파일들이 있었다. 가장 최근 파일 — 제목 없음, 십사 분 전에 수정된 것. 세아가 어젯밤 새벽 두 시에 완성한 것이었다. 아직 아무한테도 들려준 적 없었다.

이걸 여기서?

세아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파일을 재생했다.

음성 메모라서 음질이 좋지 않았다. 세아가 혼자 부른 것이었고, 반주는 없었고, 방 안의 에어컨 소리가 배경에 약간 깔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멜로디가 흘렀다. 세아의 목소리가 흘렀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유재원이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박인철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듣는 것이 불편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밖에서 들으면 늘 낯설었다 — 자신이 생각하는 목소리와 실제로 녹음된 목소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서.

이 분 사십 초짜리 데모가 끝났다.

잠깐의 침묵.

“이거 제목이 뭐예요?” 유재원이 물었다.

“아직 없어요.”

“언제 만든 거예요?”

“어젯밤이요.”

유재원이 박인철을 봤다. 박인철이 뭔가 눈빛으로 대답했다. 세아는 그 눈빛 교환의 내용을 읽으려 했지만 읽지 못했다.

“나세아 씨,” 유재원이 다시 세아를 봤다. “우리 회사에서 일해볼 생각 있어요?”


세아가 JYA 건물에서 나온 건 두 시간 후였다.

손에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A4 용지 열두 장. 유재원이 마지막에 건네줬다. “읽어보고 생각해봐요. 급한 거 아니에요.”

세아는 신논현역 방향으로 걸었다. 서류 봉투를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걸었다. 그 봉투가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실제 무게는 가벼웠다. 종이 열두 장이었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세아는 멈췄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늘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나 지금 강남이야. 시간 돼?

답장이 십 초 만에 왔다.

ㅇㅇ 왜 강남에 있음. 나 홍대 타투샵인데 언제 와


하늘의 타투샵은 홍대 정문 근처 골목에 있었다. 2층짜리 건물의 2층. 계단을 올라가면 문에 ‘SCAR TISSUE’ 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하늘이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월세가 얼마인지 세아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연고 냄새와 잉크 냄새가 섞인 공기가 났다. 하늘이 작업 의자 위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손님이 없었다.

“왔어?” 하늘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뭐야 그 봉투. 이직 서류야?”

세아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JYA에서 계약 제안 왔어.”

하늘이 잠깐 굳었다. “…JYA? 그 JYA?”

“응.”

“박인철 그 인간이 엮은 거야?”

“A&R 팀장이 직접 얘기했어.”

하늘이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을 꺼내 펼쳤다. 한 장 한 장 훑기 시작했다. 하늘은 계약서 같은 걸 읽을 줄 안다고 세아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 생각보다 진지하게 읽었다. 미간이 좁아졌다.

“전속 작곡 계약이네.”

“응.”

“2년이고.”

“응.”

“이 기간에 쓰는 곡은 전부 JYA 소유.”

“……응.”

하늘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세아를 봤다. “세아야, 이거 읽었어?”

“다 읽은 건 아니야.”

“다 읽어야지.”

“알아.”

“아니, 알면서 왜 다 안 읽어. 봐봐, 여기 3페이지.” 하늘이 서류를 다시 집어 세아 앞에 내밀었다. “독점 조항이잖아. 이 2년 동안 다른 데에 곡 팔면 안 된다는 거야. 언더스코어에서 쓰는 것도 해당될 수 있어.”

세아는 3페이지를 봤다. 읽었다. 하늘 말이 맞았다.

“그리고 이거.” 하늘이 손가락으로 한 항목을 짚었다. “크레딧 부여는 회사 판단에 따른다. 세아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

“〈창가에서〉처럼 또 이름 없이 나올 수 있다는 거야.”

“알아.”

“알아, 알아 하지 말고.” 하늘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탁 놓았다. “그러면서도 왜 여기까지 들고 온 거야. 이미 마음 기운 거야, 아니면 내가 말려주길 바라는 거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 작업 의자를 끌어당겨 세아 맞은편에 앉았다. “얼마야, 계약금.”

“월 고정 급여 이백오십만 원이랑 발매 시 추가 인센티브.”

하늘이 세아를 봤다. 세아도 하늘을 봤다.

이백오십만 원이 무엇인지 둘 다 알고 있었다. 세아의 현재 수입 — 편의점 알바 월 백삼십만 원, 언더스코어 세션 월 육십만 원, 가끔 하는 레코딩 세션 비정기적. 다 합쳐도 이백만 원이 안 되는 달이 반이었다. 거기서 고시원 월세, 어머니 약값, 도현이 용돈, 생활비를 빼면 — 매달 마지막 주에 세아의 통장 잔고는 이만 원에서 오만 원 사이였다.

이백오십만 원은 달랐다.

“야,” 하늘이 조용히 말했다. “나 지금 ‘하지 마’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도 알아.”

“근데 세아야. 이거 사인하면 네 이름이 또 없을 수 있어.”

“…알아.”

“그게 괜찮아?”

세아는 창밖을 봤다. 홍대 골목의 저녁이 시작되고 있었다. 카페들에 불이 켜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왔다 — 누구의 곡인지 모를 기타 소리, 가사가 들릴 듯 말 듯한 거리.

“괜찮은 게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근데 지금 당장 도현이 수능 원서비가 없어.”

하늘이 입을 다물었다.

“엄마 다음 달 검사 있어. 그 병원이 강남이야. 거기 진료비가 얼마인지 알아?”

“……세아야.”

“나 이번 달 마지막 주에 통장에 삼만 이천 원 있었어.” 세아는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건조했다. “그게 현실이야. 내 이름이 크레딧에 있고 없고가 — 지금 당장 그것보다 다른 게 더 급해.”

하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깐 그렇게 있었다. 타투샵의 연고 냄새와 잉크 냄새 속에서. 밖에서 음악 소리가 계속 흘러왔다.

“밥은 먹었어?” 하늘이 물었다.

“……아니.”

“그럼 일어나. 떡볶이 먹으러 가자.”


홍대 정문 앞 떡볶이 포장마차는 일곱 시가 되면 문을 열었다. 하늘이 단골이라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했다. 둘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떡볶이 이인분을 시켰다. 하늘이 어묵 꼬치도 두 개 추가했다. 세아는 말리지 않았다.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국물이 끓는 소리. 밤 공기와 섞인 기름 냄새. 세아는 손을 냄비 가까이 가져갔다 — 열기가 손등에 닿았다. 이번 달 들어 처음으로 손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야, 그 A&R 팀장 어땠어?” 하늘이 어묵 꼬치를 들면서 물었다.

“똑똑해 보였어.”

“좋게 봤다는 거야, 나쁘게 봤다는 거야.”

“그냥 사실이야.”

하늘이 어묵을 씹으면서 세아를 봤다. “거기 A&R이면 강민준 밑이잖아. JYA 대표.”

“알아.”

“강민준 아들이 A&R에 있다고 했잖아. 거기서 일하면 그 사람도 만나겠네.”

세아는 떡볶이 한 조각을 집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강리우. JYA 대표 아들이자 A&R 팀원이자 — 야, 인스타 팔로워 팔십만이야. 그냥 잘생겨서.” 하늘이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했다. “봐봐, 이 사람.”

세아는 하늘의 핸드폰 화면을 봤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이었다. 검은 배경에 흰 글씨로 ‘KRU’라고만 적혀 있었다. 최근 게시물은 — 피아노 건반 사진, 오래된 LP 레코드, 서울 야경. 사람 얼굴은 없었다. 팔로워가 팔십이만이었다.

“곡 작업 같은 걸 올리더라. 근데 얼굴은 안 올려. 미스터리 콘셉트인가.”

“관심 없어.”

“아니 세아야, 관심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 만약에 JYA 들어가면 마주칠 사람이라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

세아는 떡볶이를 씹었다. 매웠다. 좋았다.

“JYA 들어간다고 아직 결정 안 했어.”

“그래?” 하늘이 다시 어묵 꼬치를 집었다. “근데 세아야, 아까 수능 원서비 얘기하면서 — 그거 이미 결정 거의 된 거 아니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세아를 봤다. 잠깐. “야, 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뭐.”

“이름 없이 곡 쓰는 거. 그거 얼마나 더 할 수 있어? 그니까, 진짜로. 몸이 버티는 거 말고 — 마음이.”

세아는 국물을 봤다. 끓고 있었다. 표면에서 작은 거품들이 계속 올라오다가 터졌다.

마음이.

그게 얼마나 버티는지 세아는 정확하게 몰랐다. 측정하는 방법을 모른다기보다 — 측정하는 것 자체를 피해왔다는 게 더 맞았다. 측정하면 숫자가 나올 것이고, 그 숫자가 생각보다 작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은 돼.”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 잠깐 세아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떡볶이를 마저 먹었다. 밖에서 바람이 왔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세아는 머리를 다시 묶으려다가 — 그냥 두었다.


고시원으로 돌아온 건 밤 아홉 시였다.

세아는 방 안에 들어와서 외투를 벗어 문 뒤에 걸었다. JYA 서류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이라고 해도 폭이 오십 센티미터 남짓인, 접이식 테이블이었다. 그 위에 노트북, 이어폰, 음성 메모 파일들이 적힌 수첩, 어머니 약 영수증들이 있었다.

세아는 의자에 앉아 서류를 다시 펼쳤다.

이번엔 처음부터 제대로 읽었다.

1페이지. 계약 당사자. 甲: JYA 엔터테인먼트 주식회사. 乙: 나세아.

2페이지. 계약 기간. 2025년 1월 1일부터 2026년 12월 31일까지, 2년.

3페이지. 독점 조항. 계약 기간 중 乙은 甲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음악 저작물을 제공, 판매, 양도할 수 없다.

세아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사전 서면 동의’. 언더스코어에서 세션 보컬로 노래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었다. 하늘 말이 맞았다.

4페이지. 저작권 귀속. 계약 기간 중 乙이 작성한 모든 음악 저작물의 저작재산권은 甲에게 귀속된다.

세아는 잠깐 멈췄다.

저작재산권이 甲에게. 즉 세아가 만드는 모든 곡이 JYA의 것이 된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만든 멜로디, 화성, 가사 — 전부.

5페이지. 크레딧 및 공표. 음악 저작물의 크레딧 표기는 甲의 판단 및 마케팅 전략에 따라 결정되며, 乙은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세아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창가에서〉에서 이름이 없었던 것.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세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계약서에 명문화해서 서명을 받겠다는 것은 —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이건 실수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6페이지. 급여. 월 고정 급여 이백오십만 원. 발매된 음악 저작물의 상업적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별도 협의).

세아는 이백오십만 원이라는 숫자를 봤다.

도현이 수능 원서비. 어머니 강남 병원 진료비. 고시원 월세. 이 세 가지를 계산하면 — 이백오십만 원에서 얼마가 남았다. 지금보다는 많이 남았다.

마음이 얼마나 버틸 수 있냐고.

하늘의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세아는 서류를 덮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고시원 방의 창문은 작고 높은 곳에 있었다. 발끝을 들면 바깥 골목이 보였다. 지금 시간에 골목은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 편의점 불빛 하나.

세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도현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야, 수능 원서 마감이 언제야

답장이 삼십 초 만에 왔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인데 왜요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번 주 금요일. 사흘 후.

세아는 다시 서류 봉투를 봤다.

그리고 음성 메모 앱을 열었다. 가장 최근 파일 — 오늘 JYA 회의실에서 재생한 것. 세아는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주 없이, 에어컨 소리 배경으로, 새벽 두 시에 혼자 부른 목소리. 고시원 방에서 만든 멜로디. 창문이 없는 방에서 쓴 〈창가에서〉처럼, 이 곡도 제목이 없었다. 이름 없는 곡이었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이게 내 거다.

아직 JYA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어떤 계약서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아직 이 멜로디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사인하면 이것도 甲의 것이 된다.

세아는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멜로디가 계속 흘렀다. 이어폰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만 듣는 공간에서, 끝까지 흘렀다.

곡이 끝났다.

세아는 이어폰을 뺐다.

책상 위에 서류 봉투가 있었다. 안에 계약서가 있었다. 도현의 수능 원서비가 있었다. 어머니의 강남 병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 방금 이어폰 안에서 흐른 멜로디가 있었다. 아직 이름 없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완전히 자신의 것인 무언가가.

세아는 수첩을 집었다. 펜을 들었다.

서류 봉투를 열지 않았다. 서명을 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멜로디 위에 얹고 싶었던 가사 조각,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들. 손이 움직였다. 고시원 방의 형광등 아래서.


다음 날 아침은 월요일이었다.

세아는 편의점 오전 알바 전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늘에게서 카카오톡이 와 있었다. 새벽 두 시에 보낸 것이었다.

야 나세아 자고 있지. ㅋㅋ 아닐 것 같지만. 아까 떡볶이 먹으면서 하고 싶었던 말 있는데 그냥 못 했어. 너 아까 이름 없이 곡 쓰는 거 마음이 얼마나 버티냐고 물었을 때 ‘아직은 돼’라고 했잖아. 그거 듣고 나서 좀 무서웠어. ‘괜찮아’가 아니라 ‘아직은 돼’잖아. 그 말이 자꾸 생각나서. 아무튼 밥은 꼭 먹어. 편의점 삼각김밥도 아니고 진짜 밥.

세아는 메시지를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아직은 돼’가 ‘괜찮아’와 다르다는 걸 하늘이 알고 있었다.

세아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 말을 했던 것은 — 그게 지금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것이었으니까.

답장을 쳤다. ㅇㅇ. 밥 먹을게.

그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삼각김밥 하나를 집었다. 계산하고 먹었다. 진짜 밥은 아니었지만 — 하늘이 말했으니까.


편의점 알바가 끝난 오후 세 시, 세아는 합정역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서류 봉투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 펼쳤다. 어젯밤에 읽은 것을 다시 확인했다. 3페이지 독점 조항, 4페이지 저작권 귀속, 5페이지 크레딧 조항.

세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네이버에 검색했다. ‘전속 작곡가 계약서 독소 조항’. ‘음악 저작권 귀속 계약’. ‘크레딧 표기 계약서 확인’.

검색 결과들이 쏟아졌다. 블로그 글들, 음악 관련 커뮤니티 게시글들. 세아는 읽기 시작했다. 법률 용어들이 많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의 구분. 저작재산권을 양도해도 저작인격권 — 저작자 표시권 — 은 원칙적으로 양도 불가. 그러나 계약서에 ‘저작인격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있을 경우 사실상 무력화됨.

세아는 계약서 5페이지를 다시 봤다. ‘크레딧 표기는 甲의 판단에 따른다. 乙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것이 저작인격권을 사실상 포기하는 조항이었다.

세아는 카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해져 있었다.

계속 읽었다. ‘음악 산업 계약서 협상 포인트’. ‘작곡가 계약 시 주의사항’. 어딘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 “대형 기획사일수록 계약서 조항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수정 협상이 가능한 항목과 불가한 항목을 구분하고, 수정 요청 전에 상대방의 협상 마진을 파악해야 한다.”

협상.

세아는 그 단어를 오래 봤다.

협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그 두 가지였다. 그런데 협상이 가능하다면. 크레딧 조항을 수정할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할까.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봤다. 합정동 골목의 오후. 지나가는 사람들. 한 여자가 이어폰을 끼고 걸어갔다 — 입술이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를 따라 부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곡을 듣고 있었다. 그 곡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그 여자는 아마 모를 것이다.

세아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유재원에게 문자를 보내기 전에 — 잠깐 멈췄다.

대신 다른 번호를 눌렀다.

두 번 신호음이 갔다.

“여보세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강리우 씨 맞나요.”

잠깐의 침묵. “…맞는데요. 누구세요?”

“나세아입니다. 어제 JYA 8층에서 A&R 팀장님 미팅하고 갔어요.”

또 잠깐의 침묵.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아, 그분이요.”

“계약서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팀장님 말고 — 다른 시각이 필요해서요.”

이번 침묵은 달랐다. 세아는 그 침묵 안에서 무언가가 계산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이 이 전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대응할지를.

그리고 나서 강리우가 말했다.

“지금 어디 있어요?”


세아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심장이 약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세아는 싫어했다. 계산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서.

유재원의 번호가 아닌 강리우의 번호를 선택한 것은 — 이유가 있었다. 유재원에게 물으면 JYA의 입장에서 대답할 것이었다. 강리우는 JYA 사람이지만 JYA의 사람은 아닐 수 있었다. 어젯밤 하늘이 보여준 인스타그램이 생각났다. 피아노 건반 사진, LP 레코드, 얼굴 없는 프로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계정처럼 보였다. 음악을 상품으로만 보는 사람의 계정은 그런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그것이 맞는 판단인지 틀린 판단인지 — 지금은 몰랐다.

“지금 합정동 카페예요.”

“합정동 어딘데요.”

세아는 카페 이름을 말했다.

“사십 분 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거기 근처 갈 일 있었어요.”

세아는 시계를 봤다. 오늘 저녁 언더스코어 공연이 없었다. 시간이 있었다.

“있어요.”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커피 잔을 손으로 감쌌다. 완전히 식어 있었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서류 봉투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아직 서명하지 않은 계약서가 그 안에 있었다.

사흘 후 금요일이 도현의 수능 원서 마감이었다.

그리고 사십 분 후에 강리우가 이 카페에 올 것이었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해가 낮게 기울고 있었다. 합정동 골목 위로 주황빛이 얇게 깔렸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크게 틀었다 — 잠깐 세아의 귀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세아는 그 멜로디가 자신이 어젯밤 수첩에 적은 가사 조각과 박자가 맞는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우연이었다.

그러나 세아는 수첩을 꺼내 그 박자를 적어두었다.

습관이었다. 어디서든 멜로디를 건지는 것. 사라지기 전에.

6 / 23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