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4화: 제주 땅의 첫 숨
활주로에 닿는 순간, 세아의 귀가 울렸다.
비행기의 바퀴가 검은 아스팔트를 문지르며 내는 그 소리—마치 누군가 크레용으로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밤의 제주도였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건물들, 멀리 보이는 산의 윤곽, 그리고 짙은 남해의 검은 물. 6년. 세아는 6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 사이 제주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어떻게 변했을까.
세아는 창밖에서 눈을 거두지 못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했을 때, 기내 방송이 울렸다. 여승무원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안전벨트를 풀기 전에 잠깐 기다려주세요.” 세아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강리우의 손처럼.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강리우의 손은 베를린에서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떨림이었다면, 세아의 손은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떨림이었다.
짐칸에서 캐리어를 내릴 때, 옆자리 여자가 세아를 봤다. 그 여자는 50대쯤 보였고, 손에는 여행 가이드북이 들려 있었다. 그 여자의 표정은 친절했다. 하지만 세아를 보는 시선에는 미묘한 동정이 담겨 있었다. 아, 이 여자도 세아를 “쓸쓸한 여행자”로 분류했구나. 혼자 오는 젊은 여자. 아마도 연인과의 이별 때문에 온 것일지도. 아니면 자살 시도를 하려는 걸까. 아니면 그냥 도시 피로증. 제주도는 그런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다. 도시의 상처를 씻으려는 사람들.
“첫 방문이세요?”
여자가 물었다. 세아는 잠깐 멈췄다. 첫 방문? 아니다. 이것은 귀향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네. 처음이에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공항 도착 로비는 밤 11시 반인데도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행객들, 귀향객들, 공항 직원들. 모두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세아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강리우는 “제주에 가”라고만 했다. “거기서 내가 찾을 때까지 기다려”라고.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도현이에게서 온 메시지가 17개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것도 6개. 하늘에게서는 11개. 그리고 강리우에게서는 한 개도 없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1시간 전에 온 것이었다. 도현이에게서. “누나 제주 잘 다녀와. 나 잠깐 자. 내일 아침에 전화해.”
세아는 도현이에게 답장했다. “응. 잘 자. 내일 봐.”
그리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와 하늘에게는 아직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남해의 바람. 그것은 서울의 바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서울의 바람은 건설 소음과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고 왔다면, 제주의 바람은 소금기와 무언가 살아있는 것의 냄새를 들고 있었다. 바다. 세아는 코를 깊게 마셨다. 그리고 6년 전의 기억이 한순간에 밀려들었다.
“세아야! 조개 봤어? 이것 봐!”
어린 도현이의 목소리. 그때 도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검게 탄 피부, 항상 웃고 있는 얼굴. 세아는 어머니가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도현이를 봐줬다. 모래사장에서 함께 조개를 주웠다. 그때는 행복했다. 아니, 행복한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살고 있었다. 호흡했다. 움직였다. 존재했다.
지금 세아는 존재하고 있는가?
택시를 탔다. 기사는 40대 남자였고, 세아가 짐을 들고 앉자마자 물었다.
“어디 가세요?”
세아는 대답을 못 했다. 어디를 가야 하나. 강리우가 구체적인 주소를 말하지 않았다. 그냥 “제주에 가”라고. 마치 제주 전체가 하나의 도시이고, 자신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디… 가야 하나요?”
세아가 중얼거렸다. 그 말은 기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기사가 거울로 세아를 봤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마치 “또 하나의 쓸쓸한 여행자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호텔 가세요? 아니면 펜션?”
“아… 네. 호텔로… 중심지 근처로.”
세아는 대충 말했다.
“그럼 제주시 중심가로 갈게요. 거기 호텔들이 많으니까.”
기사가 시동을 켰다. 택시는 공항 주변의 밤거리로 빠져나갔다. 가로등, 편의점, 작은 음식점들. 낮에는 관광객들로 가득했을 이곳도 밤이 되니 조용했다. 세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6년은 충분히 오래된 시간이었다. 어린 뇌는 빠르게 잊어버린다. 아니, 어린 뇌뿐만 아니라 모든 뇌는 불편한 기억부터 지워버린다.
휴대폰이 울렸다.
하늘이었다. 밤 12시 2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하늘은 항상 11시면 자는 사람이었다. 내일 문신 작업이 있으면 일찍 자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전화를 한다는 것은—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로 카톡이 왔다. “야. 넌 뭐하는 거야. 통화 안 돼?”
세아는 답장했다. “지금 택시 탔어. 신호 안 터질 수도.”
거짓말이었다. 신호는 잘 터지고 있었다. 화면에 4G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 근데 강리우 그 새끼가 너한테 뭐했어? 도현이가 미쳤다고 자기한테 전화했어. 넌 왜 야무것도 말 안 해?”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도현이가 하늘에게 전화했다고? 도현이와 하늘은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지? 아, 맞다. 하늘은 세아의 친구이면서 동시에 도현이의 선배 역할도 했다. 도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하늘은 홍대에 자주 나가는 도현이를 봤고, “넌 세아 동생이네?”라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이후로 도현이는 하늘을 “누나”라고 부르게 됐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해?”
세아가 답했다.
“뭐라도. 뭐라고라도. 지금 도현이는 심각해. 너 제주 간다고 강리우가 도현이한테 직접 전화했대. 그 사람이 도현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세아의 손이 떨렸다. 맞다. 강리우는 도현이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세아가 말해준 적이 없는데. 아, 그렇겠지. 강리우는 JYA 회장의 아들이다. 원하면 누구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현이의 번호까지 알 필요가 있었을까. 강리우는 왜 그런 일까지 했을까.
“모르겠어. 근데 하늘, 나 지금…”
“뭐냐?”
“제주 왔어.”
침묵이 흘렀다. 몇 초간. 택시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바깥은 어두웠다.
“뭐? 제주? 지금?”
“응.”
“미쳤어. 진짜로. 너 그 강리우 때문에?”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아야. 그 사람 위험해. 진짜로. 너 뭐하는 거야. 왜 자꾸 그런 사람들 한테 끌려가?”
“그게 아니라…”
세아가 말을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자신도 모르는데.
“아무튼 조심해. 그 사람 손에 뭔가 이상해. 손가락이 떨린다고 했잖아. 그런 건 보통 트라우마 때문이거든. 그리고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예측이 안 돼. 알겠어?”
“응. 알겠어.”
“그리고 내일 아침에 어머니한테 전화해. 어머니가 지금 걱정해서 미쳤어. 내가 어머니한테 넌 제주 간다고 말했어. 그래서 어머니가 조금 진정했는데, 넌 꼭 전화 받아. 알겠어?”
“응. 내일 아침에 할게.”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내 번호는 꺼두지 마. 뭐 있으면 바로 전화해. 언제든. 밤 3시든 4시든. 내가 받을 거야.”
“고마워. 하늘.”
“고마워하지 말고 정신 차려. 그리고 그 강리우 새끼, 제주에서 뭐한다고 했어?”
“안 말했어.”
“안 말했어? 그냥 가라고만?”
“응.”
“진짜 미쳤네.”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강리우가 세아에게 했던 것처럼.
택시가 제주시 중심가에 들어섰을 때, 시계는 오전 12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리는 거의 비어 있었다. 몇몇 호텔과 펜션의 간판만 밝혀져 있었고, 가끔 늦게 돌아오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여기 어때요? 동문 거리 근처인데 호텔들이 많아요.”
기사가 물었다.
“네. 여기 좋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기사는 가까운 호텔 앞에 택시를 세웠다. “라하이” 호텔. 간판은 오래되어 보였지만, 건물은 깨끗해 보였다.
“요금은 2만 8천 원입니다.”
세아는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강리우가 자신의 계좌에 입금해준 용돈—그것을 쓰고 있었다. 아직도 그것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돈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강리우의 것인지.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밤 근무 직원이 세아를 봤다. 그 직원도 역시 미묘한 동정의 표정을 지었다. 혼자 오는 젊은 여자. 짐은 캐리어 하나. 예약은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들어온다. 그 직원은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서 오세요. 예약이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한 밤 숙박하시는 거죠? 가장 저렴한 방이 6만 원입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텔 카드키를 받았다. 3층 301호. 세아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누가 저 사람인가.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공허한 눈. 마치 자신이 유령인 것처럼 보였다.
301호 방은 작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창문 하나. 그리고 욕실. 그것이 전부였다. 세아는 캐리어를 침대 옆에 놨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밤의 제주도. 멀리 바다가 보였다. 어두운 물.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위안이 되었다. 바다는 변하지 않았다. 6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바다는 여전히 물이었다. 여전히 밀물과 썰물을 반복했다. 여전히 누군가를 품었다 놨다 했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흰색 천장. 아무것도 없는 천장. 그리고 그 천장 위에서 강리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리우는 내일 오는가.
아니면 내일도 오지 않는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강리우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였다. 확실함이 없다는 것은, 계획이 없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이미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었을 수도.
휴대폰을 들었다. 강리우에게서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오전 1시 12분. 세아가 호텔 방에 들어온 지 20분 후.
“도착했어? 충분히 쉬어. 내일 아침에 보자.”
세아는 답장했다. “응. 잠깐 기다렸어. 근데 너는?”
답장은 1분 후에 왔다. “내 일은 끝났어. 이제 내려가는 중이야. 새벽 5시쯤 도착할 것 같아. 그때까지 자.”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새벽 5시. 그럼 자신은 4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잘 수 있을까. 자신이 강리우를 기다리는 동안 잠들 수 있을까.
아니. 잠들 리 없었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으로 나갔다. 발코니는 작았다. 하지만 거기서 바다가 보였다. 제주의 밤바다. 검고 깊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아는 발라코니의 난간에 팔을 얹었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봤다.
6년 전, 어머니는 이 바다에서 전복을 채취했다. 해녀의 일. 물속으로 내려가 산소를 참으며 전복을 따는 일. 세아는 항상 어머니가 올라올 때까지 숨을 참았다. 어머니가 올라올 때까지, 자신도 숨을 쉬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그런가. 지금도 자신은 누군가를 위해 숨을 참고 있는가.
강리우를 위해.
도현이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아의 손이 떨렸다. 강리우의 손처럼. 아니, 강리우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그 손을 보면서,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도 이미 누군가의 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움직이는 손.
통제되는 손.
자유롭지 않은 손.
제주의 밤바다는 계속 소리를 냈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이 빠져나가고, 그 반복 속에서 모든 것이 씻겨 나갔다. 또는 더 깊게 묻혔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챕터 끝: 12,487자 (공백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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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바다의 기억
바다는 6년이 지나도 여전히 물이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물은 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물은 또한 모든 것이었다.
세아는 창밖의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바다는 시간을 모른다. 바다는 6년 전의 파도와 지금의 파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밀물과 썰물의 리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누군가를 품었다가, 놨다가, 다시 품는다. 그것이 바다의 숙명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숙명은 무엇인가.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호텔 방의 침대. 이 도시에 도착한 지 겨우 30분밖에 되지 않은 낯선 침대였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모든 호텔 방은 비슷했고, 모든 침대는 같은 냄새를 풍겼고, 모든 천장은 동일한 공허함을 드러냈다.
세아는 천장을 바라봤다. 흰색. 완벽하게 흰색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모든 색상을 씻어내려 한 것처럼. 그 흰색 천장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저 허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허공 위에서, 세아는 강리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리우는 내일 올 것인가.
아니면 내일도 오지 않을 것인가.
아니, 내일은 아니다. 그는 새벽 5시에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다. 지금 이 밤이 지나가면, 새벽이 올 것이고, 그 새벽 5시에 그가 나타날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일 뿐이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강리우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그 전에는 세상이 명확했다. 계획이 있었다. 내일이 있었고, 모레가 있었고, 다음 주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강리우의 손 위에 모든 것이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였다. 확실함이 없다는 것은, 계획이 없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누군가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미래는 자신의 손에 있지 않으므로, 자신은 책임을 져야 할 의무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아니면 자신이 이미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이 세아의 가슴을 틀어쥐었다. 마치 강리우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것처럼.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이 밝았다. 시간은 새벽 1시 32분. 강리우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정확한 발신 시간은 오전 1시 12분. 세아가 호텔 방에 들어온 지 정확히 20분 후였다.
어떻게 그는 자신이 언제 도착했는지 알았을까. 세아는 강리우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메시지를 읽었다.
“도착했어? 충분히 쉬어. 내일 아침에 보자.”
그의 문장은 항상 이렇게 짧고, 명령조였다. 문장부호도 마침표로 끝났다. 부드러움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단호함 속에는 확실함이 있었다. 강리우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세아는 답장했다. “응. 잠깐 기다렸어. 근데 너는?”
문장을 보내고 나서,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천장을 다시 바라봤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강리우의 답장이 올 때까지.
1분.
정확히 1분 후에 답장이 왔다.
“내 일은 끝났어. 이제 내려가는 중이야. 새벽 5시쯤 도착할 것 같아. 그때까지 자.”
새벽 5시.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1시 33분. 그럼 자신은 3시간 27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새벽 5시까지는 3시간 27분이 남아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자야 한다고 강리우가 말했다. “그때까지 자.”
하지만 잘 수 있을까. 자신이 강리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그를 만나기 위해 이 도시까지 온 동안,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모른 채로, 잠들 수 있을까.
아니. 잠들 리 없었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앉았다.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카펫의 부드러움이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호텔 카펫의 그 특유한 냄새—먼지와 향수와 누군가의 발자국이 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아는 일어섰다. 창으로 나갔다.
발코니는 작았다. 2미터 정도의 폭. 1미터 정도의 깊이. 호텔의 수많은 방들 중에서, 이 방이 특별한 이유는 이 발코니 때문이었다. 발코니는 바다를 향해 있었다.
제주의 밤바다.
세아는 난간에 팔을 얹었다. 밤바다를 바라봤다. 검고 깊고,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이 물 위에 부서져 떨어졌다. 은빛의 파편들. 하지만 그 아래는 여전히 어둠이었다. 깊은 어둠. 사람이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만큼 깊은 어둠.
세아는 숨을 쉬었다. 바다 냄새를 들이마셨다. 소금과 해초의 냄새. 생명과 죽음의 냄새.
6년 전, 어머니는 이 바다에서 전복을 채취했다. 해녀의 일. 물속으로 내려가 산소를 참으며 전복을 따는 일. 그것은 세아가 본 것 중 가장 용감하고, 가장 절망적인 일이었다.
어머니는 검은색 잠수복을 입고 바다로 들어갔다. 세아는 해변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머리가 물에 잠겼다. 그 순간, 세아도 숨을 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올라올 때까지, 자신도 숨을 쉬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이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산소 부족이 어머니의 산소 부족을 덜어줄 수 있다고,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든, 생각했다.
30초.
1분.
1분 30초.
어머니가 올라오지 않았다.
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어머니가…
2분.
그 순간, 어머니의 머리가 물 위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세아를 보며 웃었다.
“세아, 숨 쉬어. 넌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세아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세아도 어머니처럼 크게 숨을 쉬었다. 눈물이 났다.
“엄마, 무서워.”
“알아, 알아. 엄마가 올라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넌 뭐 하지 말고 그냥 기다려.”
하지만 세아는 기다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기다리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지금도 그런가. 지금도 자신은 누군가를 위해 숨을 참고 있는가.
강리우를 위해.
도현이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아의 손이 떨렸다. 난간을 잡은 손이 떨렸다. 마치 강리우의 손처럼. 아니, 강리우보다 더 심하게. 강리우의 손은 통제된 떨림이었다면, 세아의 손은 통제되지 않는 떨림이었다. 두려움의 떨림. 절망의 떨림.
그리고 그 손을 보면서,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도 이미 누군가의 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움직이는 손.
통제되는 손.
자유롭지 않은 손.
마치 인형의 손처럼.
## 제2부: 기다림의 무게
세아는 발코니에서 물러났다.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았다. 다시 누웠다. 다시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1시 47분. 겨우 14분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세아는 화면을 끈 후 다시 켰다. 1시 48분. 1분이 더 지났다. 그 1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숨을 쉬었다. 심장이 뛰었다. 시간이 지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은 간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기다린다고 빨라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는다고 느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같은 속도로, 끝없이 나아간다. 모든 사람을 같은 속도로 데려간다. 준비가 됐건 안 됐건.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흰색.
여전히 흰색이었다.
강리우는 언제 도착할까. 새벽 5시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략’이었다. 강리우는 정확한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 “새벽 5시쯤”이라고 했다. ‘쯤’이라는 말의 범위는 무엇인가. 4시 50분인가. 5시 10분인가. 아니면 6시인가.
강리우가 그 정도로 늦은 적이 있던가.
없었다.
강리우는 항상 정확했다.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다. 1분 늦은 적도 없었다. 마치 그가 시간을 통제하는 것처럼. 마치 시간이 그의 손 위에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럴까.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다렸다.
## 제3부: 밤의 깊이
새벽 2시.
새벽 3시.
새벽 4시.
시간은 흘렀다. 세아는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TV를 켜고 껐다. 영화를 봤다. 영화의 스토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얼굴을 봤을 뿐이다.
새벽 4시 30분.
이제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로 나갔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창백했다. 눈 아래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여행으로 피곤한 얼굴. 기다림으로 지친 얼굴.
세아는 화장을 했다. 아이라이너를 그었다. 립스틱을 발랐다. 자신을 다시 만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강리우가 좋아하는 색깔. 강리우가 좋아하는 모습. 강리우가 원하는 여자.
세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낯선 여자가 거울 속에 있었다.
새벽 4시 45분.
세아는 창밖을 봤다. 아직 어두웠다.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곧 올 것이었다. 15분 후.
세아는 발코니로 나갔다.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밤바다는 여전히 검었다. 여전히 밀물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전히 누군가를 품고 있었다.
이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묻혀 있을까.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잠들어 있을까.
어머니가 이 바다에 내려갈 때마다, 세아는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6년 전에 현실이 되었다.
어머니가 올라오지 않은 날.
세아가 어머니를 위해 숨을 참다가, 자신이 먼저 의식을 잃어버린 날.
의식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꺼냈다. 파란 옷을 입은 남자들. 그들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했다. 마치 바다 속에서 자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어머니를 위해 계속 숨을 참았다.
지금도.
새벽 4시 58분.
2분만 더 기다리면 된다.
세아는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었다. 손가락이 차가운 금속을 만졌다. 손이 떨렸다. 여전히 떨렸다. 강리우의 손처럼. 아니, 자신의 손처럼.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이 아니라, 전화였다.
강리우.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끊겼다.
새벽 4시 59분.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강리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창밖을 봐.”
세아는 빠르게 발코니로 나갔다. 아래를 봤다. 호텔의 주차장. 검은색 차 한 대가 방금 들어오고 있었다.
강리우의 차였다.
## 제4부: 재회
강리우가 올라왔을 때, 세아는 도어 앞에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강리우가 카드키를 사용했다. 문이 열렸다.
그가 들어왔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 마치 밤바다를 닮은 남자.
“하이.”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항상 차가웠다.
“안녕.”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도 차가웠다.
강리우가 걸어왔다. 세아를 바라봤다. 자신의 손으로 세아의 얼굴을 들었다.
“기다렸어?”
“응.”
“얼마나?”
“3시간.”
강리우가 웃었다. “그것만? 내가 너를 위해 기다린 건 6년이야.”
세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6년?”
“응. 넌 모르지. 내가 어떻게 너를 찾았는지. 내가 어떻게 너한테 도달했는지. 내가 몇 번을 너한테 손을 내밀었는지.”
강리우의 손이 세아의 얼굴을 쓸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따뜻하고, 강했다.
“이제 넌 내 거야. 알았어?”
세아는 대답했다. “응.”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이미 아무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누군가의 것이었다.
바다의 것.
시간의 것.
기다림의 것.
그리고 아마도, 강리우의 것.
## 제5부: 제주의 밤바다
제주의 밤바다는 계속 소리를 냈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이 빠져나가고, 그 반복 속에서 모든 것이 씻겨 나갔다. 또는 더 깊게 묻혔다.
호텔 방에서, 강리우가 자고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