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3화: 활주로 위의 침묵
인천공항 제2터미널의 자동 출입문이 열렸을 때, 세아는 자신이 실제로 여기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온 것처럼,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짐은 왼손에 들려 있었다. 낡은 캐리어. 반쯤 채워진 캐리어. 그 속에는 옷과 세면도구, 그리고 휴대폰 충전기만 있었다. 정말로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 손이 닿는 대로 집어넣은 것들.
시계는 오후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까지 75분.
세아는 출발 화면을 봤다. 거대한 스크린에는 수백 개의 항공편이 표시되어 있었다. 런던, 도쿄, 방콕, 상하이. 모두가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세아도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강리우가 말한 것은 제주였다. 하지만 제주는 장소일 뿐이었다. 문제는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강리우가 말한 ‘위험한 방식’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였다.
“티켓을 확인해 주실래요?”
공항 직원의 목소리가 세아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여직원은 웃고 있었다. 친절한 웃음.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수백 명의 승객을 처리해야 하는 피로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 네.”
세아가 휴대폰을 꺼냈다. 강리우가 보낸 문자를 찾았다. 비행기표 번호, 탑승 시간, 좌석.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마치 세아의 인생이 티켓팅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문자는 총 두 개였다. 첫 번째는 정보였고, 두 번째는 덧붙이는 말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미리 감사해.”
미리 감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감사하는 것이 옳은가? 자신이 일으킨 일에 대해서? 아니면 자신을 이 상황에 밀어 넣은 것에 대해서?
체크인 카운터를 지났을 때,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현이였다. 화면에 “동생”이라는 글자가 뜨고, 그 아래에는 도현이가 자신이 설정한 프로필 사진이 있었다. 학원 가기 전에 찍은 사진. 세아의 얼굴을 닮은, 하지만 훨씬 더 생기 있는 얼굴.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가방 속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보안 검사대로 향했다. 신발을 벗고, 벨트를 풀고, 휴대폰과 시계를 트레이에 올렸다. 모든 것을 벗겨냈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까지 벗겨내는 것처럼.
보안 검사를 통과했을 때, 휴대폰은 4개의 부재중 전화와 7개의 카톡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도현이에게서 3개, 어머니에게서 2개, 하늘에게서 2개.
도현이: “누나 뭐해? 너 집에 있어? 가는 길인데.”
도현이: “아 진짜 뭐 해?”
도현이: “누나!!!”
어머니: “도현이 말로는 너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하던데? 뭐하는 거야?”
어머니: “세아야. 전화 받아라. 엄마가 걱정돼.”
하늘: “세아 이년아 뭐하는 거야?”
하늘: “강리우 그 새끼 너한테 뭐했어?”
세아는 메시지를 읽었지만, 아무것도 회신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손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인 것처럼.
대신, 세아는 강리우에게 문자를 했다. “도현이에게 뭐라고 말했어?”
답장은 즉시 왔다. “너는 학교 수학여행을 간다고 했어. 그리고 내일 아침에 너한테서 전화 올 거라고 했어. 지금은 자게 둬. 내일 아침에 봐.”
‘내일 아침에 봐’라는 표현이 이상했다. 강리우는 제주에 온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올 것인지는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냥 “내일 아침”이라고. 마치 그것이 약속처럼.
세아는 탑승 게이트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주변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사람들,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들, 혼자 앉아 명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도.
하지만 세아의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여행과는 달랐다. 그들은 짐을 꾸렸다. 계획을 세웠다. 누구와 만날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정했을 것이다. 반면 세아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오직 강리우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하늘이 보낸 두 번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강리우 그 새끼 너한테 뭐했어?”
그 질문이 정확했다. 강리우가 세아에게 뭐 한 건가. 사랑한 건가. 구한 건가. 아니면 파괴한 건가.
세아는 하늘에게 문자를 했다. “미안해. 나중에 전화할게. 지금은 안 돼.”
하늘의 답장은 5초 후에 왔다. “뭔 일 있어? 진짜로. 너 지금 이상한데.”
“다 괜찮아. 진짜로. 내일 얘기할게.”
이번엔 답장이 없었다. 하늘은 세아를 알고 있었다. 그 침묵은 노여움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 걱정을 받아낼 힘이 없었다. 지금은.
오후 9시 35분. 탑승 안내가 시작됐다.
“Korean Air 152편 제주행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 비즈니스석 승객부터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아는 자신의 탑승권을 들었다. 경제석. 맨 뒤. 가장 저렴한 좌석. 강리우가 산 표는 그런 것이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마 이 모든 일이 은폐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면서.
탑승교를 지나갔다. 기체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 양쪽으로는 짐칸이 있었고, 승무원들은 환한 미소로 승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도 마지막 비행기였는지, 피로가 묻어났다.
좌석 22F. 창문 자리였다. 세아는 짐을 짐칸에 올렸다. 그리고 창 옆의 좌석에 앉았다. 옆 좌석은 비어 있었다. 아마 마지막 탑승이라 그럴 것이다.
활주로가 보였다. 멀리서. 밤의 활주로. 불빛으로 표시된 활주로. 그리고 그곳에는 비행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강리우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강민준. JYA 엔터테인먼트의 회장. 세아는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계약서를 사인할 때. 그의 손은 따뜻하지 않았다. 차갑고, 건조하고, 가죽처럼 느껴졌다. 강리우의 손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강리우가 회사를 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깨닫기 시작했다. 아버지와의 결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하는 이유가 세아였다.
‘미안해. 그리고 미리 감사해.’
그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강리우는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었을까. 자신이 만든 상황에 대해? 아니면 세아에게 끼친 부담에 대해? 그리고 ‘미리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아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는 뜻인가.
활주로가 점점 밝아졌다. 비행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벨트를 맸다. 딸깍. 금속음이 났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로 묶여 있다는 신호인 것처럼.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활주로를 향해. 이륙을 준비하면서.
세아는 창밖을 봤다. 인천의 밤. 불빛들. 거대한 도시. 그리고 그 도시 어딘가에는 도현이가 자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도. 하늘도. 그리고 강리우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변호사와 계약서를 정리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침실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까.
비행기가 더 빨라졌다. 활주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주의하세요. 지금부터 이륙합니다.”
승무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지. 강리우의 손이 떨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손도 왜 떨리고 있는지.
비행기가 하늘로 떠올랐다.
인천공항은 점점 작아졌다. 불빛들도 점점 희미해졌다. 마치 세아의 인생이 뒤에 남겨지고 있는 것처럼.
제주로 가는 비행기 위에서, 세아는 자신의 이전 인생을 생각했다. 편의점. 고시원. 라이브 클럽. 모든 것이 이제는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인생이었던 것처럼.
휴대폰을 다시 켰다. 비행기 모드였지만, 이미 도착해 있는 메시지들을 읽을 수 있었다.
도현이의 마지막 메시지: “누나 미안해. 내가 뭔가 못 도와줘서. 학원에서 봤는데 선생님이 너 얘기했어. 누나 요즘 힘들어 보인다고.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을까?”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세아는 처음으로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면 주변 승객들이 볼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울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대신 세아는 강리우에게 문자를 했다. 비행기 착륙 후에 보낼 메시지를 미리 작성했다. “제주 도착했어. 이제 뭐 해?”
그 메시지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대표했다. 방향 없음. 목표 없음. 오직 명령을 따르는 것만.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세아도 추위 속에서 불꽃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꽃이 따뜻함을 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태워버릴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비행기는 계속 날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제주를 향해. 세아의 미래를 향해.
그리고 활주로 아래에서는 강리우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있었을 것이다. 서명. 도장. 그리고 모든 것의 끝. 아니면 시작.
제주 국제공항에 착륙한 것은 오후 11시 45분이었다.
세아는 비행기에서 내렸다. 다른 승객들이 짐칸에서 짐을 꺼낼 때, 세아는 이미 자신의 캐리어를 손에 들고 있었다. 반쯤 채워진 캐리어. 어제 오후에 정신없이 챙긴 옷과 물건들.
공항 로비로 나왔을 때, 세아는 제주의 공기를 마셨다. 그것은 서울의 공기와 달랐다. 더 따뜻했다. 바다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했다. 6년 전에 떠났던 그곳의 냄새. 어머니의 냄새.
휴대폰을 켰다. 메시지가 20개 이상 와 있었다. 도현이, 어머니, 하늘. 모두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강리우에게서도 메시지가 왔다. “제주 도착했어? 공항 로비 왼쪽에 있는 편의점이 보이지?”
세아는 주변을 봤다. 왼쪽에 편의점이 있었다. CU. 서울과 같은 편의점. 하지만 이곳은 제주였다.
“보여. 뭐 하는 거야?”
“거기서 택시를 타. 주소는 내가 문자로 보낼 거야. 거기 가.”
“뭐가 있는 데?”
“나. 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주소였다. 제주시 용담동. 바다 근처. 세아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걸어다니던 곳. 그곳에 강리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가.
세아는 CU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서울과 같은 냄새. 라면, 김밥, 편의점 음식의 냄새.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할머니가 서 있었다. 셀프 카운터 옆에서. 세아가 일하던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그런 손님들처럼.
세아는 택시 번호를 물었다. 할머니가 친절하게 가르쳐 줬다. 제주 사투리로. “여기 나가서 앞에 보이는 택시 서는 곳에 가면 돼, 아가.”
“감사합니다.”
세아가 대답했다.
“어딜 가려고?”
할머니가 물었다.
“용담동.”
“아, 거기 좋은 데지. 바다가 보이는 곳. 넌 제주 사람인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주 사람인가. 그 질문이 이상했다. 자신이 어디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도 아닌 비행기 위에 있었다.
“응. 제주 사람이에요.”
거짓말이었지만, 할머니는 웃었다. 그리고 세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야. 괜찮아?”
그 질문에 세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자신의 음악도, 자신의 삶도, 자신의 선택도.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 있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또 거짓말이었다.
세아는 편의점을 나갔다. 택시를 탔다. 주소를 말했다. 용담동. 바다 근처.
택시가 움직였다. 야간의 제주. 불빛이 적었다. 서울과는 달랐다. 조용했다. 마치 세아의 마음처럼.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밤의 바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처럼.
“처음 오는 거예요?”
택시 기사가 물었다.
“아뇨. 여기 살다가 나갔어요. 6년 전에.”
“아, 그래요? 그럼 많이 변했을 거야. 제주도 요즘 많이 변했거든요.”
변했다. 6년이면 충분히 변한다. 사람도, 도시도, 모든 것이. 그리고 지금 세아도 변하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리우에 의해. 아니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여기 맞나요?”
택시가 멈췄다. 건물이 보였다. 아파트는 아니고, 펜션처럼 보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펜션. 밤이었지만, 바다의 형태가 어렴풋이 보였다.
세아는 택시비를 냈다. 카드로. 그리고 내렸다.
바다 냄새. 짠 냄새.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냄새. 어머니의 냄새. 어린 시절의 냄새.
펜션 문 앞에서 세아는 멈췄다. 그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그리고 문을 열었다.
강리우는 거기 있었다.
장면: 펜션 내부, 밤 11시 55분
강리우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바다가 보였다. 밤의 바다. 그의 얼굴은 창밖의 불빛으로만 비쳐졌다. 파란 불빛. 차갑고 외로운 불빛.
그가 세아를 봤을 때, 그의 눈은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세아를 만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 왔어?”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첫 말이었다.
세아는 캐리어를 놨다. 그리고 강리우를 봤다. 그의 얼굴. 그의 손. 그리고 그의 눈 아래의 다크서클. 그것은 평소보다 진했다. 마치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응. 왔어.”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밤의 바다는 계속해서 파도를 쳤다. 마치 무언가가 끝나고 무언가가 시작되는 그 경계에서, 누군가의 심장이 멈추고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처럼.
# 제주의 밤, 그리고 운명의 만남
할머니는 웃었다. 그 웃음은 주름진 얼굴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진심 어린 것이었다. 세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안경 너머의 할머니의 눈빛은 예리했다. 마치 세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야. 괜찮아?”
그 질문이 세아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편의점 점원일 뿐인데,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세아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을까.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다. 혹시 자신의 절망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건 아닐까.
괜찮은가. 괜찮지 않다.
세아는 그 단순한 이분법 사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자신의 음악도, 자신의 삶도, 자신의 선택도.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 있다. 서울의 콘크리트 숲에서 벗어나 이 작은 제주의 펜션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강리우를 만나기 위해. 아니, 강리우에게 끌려온 것이다.
세아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온 말은 거짓이었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또 거짓말이었다. 세아는 거짓말에 익숙해졌다. 음악으로도 거짓말을 했고, 사람들 앞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그 거짓을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세아는 감사했다.
편의점을 나왔을 때, 제주의 밤공기가 세아의 피부에 닿았다. 차갑고 촉촉한 바다 공기였다. 서울의 건조하고 탁한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세아는 깊게 숨을 쉬었다. 마치 처음 숨을 쉬는 것처럼.
택시를 탔다. 기사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얼굴은 햇빛에 탄 것처럼 검었고, 손은 크고 거칠었다. 세아는 주소를 말했다.
“용담동. 바다 근처요.”
기사는 고개를 끄덕했다. 아무런 의문 없이.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간의 제주는 예상과 달랐다. 불빛이 적었다. 서울의 밤처럼 환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어둠이 이곳을 감싸고 있었다. 서울은 밤이어도 낮처럼 밝았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조용했다. 마치 세아의 마음처럼. 마치 누군가의 죽음 직후의 침묵처럼.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밤의 바다. 검은 색의 캔버스 위에 흰색으로만 표현된 파도.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처럼. lub-dub, lub-dub. 살아있다는 증거. 하지만 세아는 이 심장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오는 거예요?”
택시 기사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악의 없는 평범한 호기심이었다.
“아뇨. 여기 살다가 나갔어요. 6년 전에.”
6년. 세아는 그 시간의 무게를 느꼈다. 6년 전의 자신은 누였을까. 18살. 고등학교 3학년. 음악의 꿈을 가지고 있던 그 시절.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가던 날. 바다를 떠나던 날.
“아, 그래요? 그럼 많이 변했을 거야. 제주도 요즘 많이 변했거든요.”
기사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도시는 항상 변한다. 건설 크레인이 들어오고,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오고, 낡은 것들은 헐려나간다. 하지만 바다는 변하지 않는다. 파도는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친다.
변했다. 6년이면 충분히 변한다. 사람도, 도시도, 모든 것이. 그리고 지금 세아도 변하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리우에 의해. 아니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신이 강리우를 선택했는가, 아니면 강리우가 자신을 선택했는가. 그 경계가 얼마나 희미한지를 깨닫고 있었다.
택시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오른쪽으로는 바다, 왼쪽으로는 어둠 속의 건물들. 창문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의 삶의 흔적들. 누군가의 저녁식사, 누군가의 TV 시청, 누군가의 가족과의 시간. 세아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 맞나요?”
택시가 멈췄다. 건물이 보였다. 아파트는 아니고, 펜션처럼 보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펜션. 2층짜리 하얀색 건물. 1층에는 카페가 있는 것 같았다. 밤이었지만, 바다의 형태가 어렴풋이 보였다. 검은 색의 무엇. 때때로 흰색의 파도가 반짝였다.
세아는 택시비를 냈다. 카드로. 기사는 감사인사를 했고,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렸다.
차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택시가 떠나는 소리. 세아는 혼자였다.
바다 냄새. 짠 냄새.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냄새. 어머니의 냄새. 어린 시절의 냄새. 세아의 어린 시절은 이 냄새와 함께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바다에 가던 날들. 엄마가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던 날들. 모두 이 냄새가 함께 있었다.
세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울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캐리어를 끌고 펜션 입구로 갔다. 펜션 문 앞에서 세아는 멈췄다. 손이 떨렸다. 문고리를 잡는 것도 어려웠다. 이 문을 열면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세아는 깊게 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아니, 마지막으로 그 이전의 자신을 마시는 것처럼. 음악하는 세아. 꿈을 꾸던 세아. 순수했던 세아. 그 모든 것들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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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션 내부, 밤 11시 55분
강리우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바다가 보였다. 밤의 바다. 그의 얼굴은 창밖의 불빛으로만 비쳐졌다. 파란 불빛. 차갑고 외로운 불빛. 그것은 마치 그의 영혼 자체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강리우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세아가 올 때까지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 있었을까. 시간은 흘렀다. 분이 시간으로, 시간이 날짜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움직이면 세아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미신을 믿는 것처럼.
강리우의 얼굴은 창밖의 불빛으로만 비쳐졌다. 파란색의 네온사인이었다. 펜션 아래의 카페 간판. “Ocean’s Night”. 그 불빛이 그의 얼굴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었다.
세아가 문을 열었을 때, 강리우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세아를 만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처럼.
“너… 왔어?”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첫 말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이 잠시 멈춘 것처럼.
세아는 캐리어를 놨다. 휠이 나무바닥에 닿으면서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마치 총성처럼 들렸다. 그리고 강리우를 봤다.
그의 얼굴. 그의 손. 그리고 그의 눈 아래의 다크서클. 그것은 평소보다 진했다. 마치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아니, 여러 밤을 자지 않은 것처럼. 세아는 강리우가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눈 아래의 검은 색으로 읽을 수 있었다.
강리우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응. 왔어.”
세아가 대답했다. 세아의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펜션 내부는 따뜻했다. 난방이 켜져 있었고, 벽난로도 불이 켜져 있었다. 따뜻한 불빛이 거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추웠다.
강리우가 일어났다. 천천히. 마치 자신이 갑자기 움직이면 세아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으로. 그의 키는 세아보다 컸다. 세아는 고개를 들어야 했다.
“정말… 왔네.”
강리우의 목소리는 믿음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상상하는 것 같은 톤이었다. 세아는 강리우의 눈을 봤다. 그 눈은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이지만, 그 안에는 불이 타고 있었다. 욕망의 불. 절망의 불. 그리고 무언가의 불.
그리고 그 순간, 밤의 바다는 계속해서 파도를 쳤다. 창밖의 검은 바다. 하얀 파도. Lub-dub, lub-dub. 세아의 심장도 강리우의 심장도 같은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끝나고 무언가가 시작되는 그 경계에서, 누군가의 심장이 멈추고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처럼.
펜션의 시계는 밤 11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5분만 지나면 자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날짜가 바뀔 것이다. 이 하루는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이미 새로운 날이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 사이의 거리는 2미터도 채 안 되었지만, 그것은 마치 백년 같았다. 마치 우주 같았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 같았다.
“안녕.”
세아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로.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안녕.”
강리우가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펜션의 거실에서. 바다의 소리를 들으면서. 밤 11시 55분에.
이것이 시작인가, 아니면 끝인가.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파멸인가. 이 밤이 지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 모든 질문들이 두 사람의 사이에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바다의 포말처럼. 마치 달빛처럼. 마치 운명처럼.
펜션 벽난로의 불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따뜻한 불빛. 오렌지색의 불빛. 하지만 그 불빛도 바다의 냉기를 이기지 못했다. 한쪽은 따뜻하고, 한쪽은 차갑다. 마치 이 두 사람의 관계처럼.
창밖으로는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었다. 끝없는 파도. 밤의 바다. 제주의 밤 11시 55분.
그 시간에, 그곳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얽혀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게.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