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48화: 정오의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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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8화: 정오의 갈림길

세아는 정오 정각에 강리우를 봤다. 그것이 정오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 순간에는 시간이 멈춰 있는 줄 알았으니까.

편의점 앞 주차장. 합정역 근처 한강변의 회색 포장도로. 시간대 때문에 햇빛이 거의 수직으로 내리고 있었다. 세아의 그림자는 자신의 발 밑에만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한 시간대. 그런 시간에 강리우는 나타났다.

검은색 제네시스. 차 문이 열렸고, 강리우가 나왔다. 오전 9시부터 계속 일해온 세아와는 다르게, 강리우는 깔끔했다.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 그 아래 화이트 셔츠. 그러나 그의 얼굴은 깔끔하지 않았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 짙어져 있었다. 새벽 내내 자지 않은 흔적. 세아는 그것을 봤을 때, 자신이 얼마나 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안녕.”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의 그것과 다르게 들렸다. 더 가깝고, 더 현실적이고, 더 위험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봤다. 편의점 9시간 근무 후의 손. 손가락이 조금 부어 있었다. 계산대에서 계속 움직인 탓이었다.

“타올 갖고 왔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는 세아의 손을 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그의 코트 포켓에서 타올을 꺼냈다. 흰색 타올. 고급스러운 종류. 그는 세아의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손을 타올로 닦기 시작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이 강리우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손. 그 손이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아내고 있었다. 마치 아이를 씻기듯이. 마치 그 손가락들이 소중한 무언가인 것처럼. 세아는 그 감각에 압도당했다. 누가 자신을 이렇게 대해본 적이 있었나. 자신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처럼 대해본 적이 있었나.

“비행기 표 끊었어.”

강리우가 말했다. 타올로 닦는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면서. “서울에서 제주로. 내일 아침 8시 40분 출발. 너랑 나랑.”

세아는 강리우의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주. 그곳은 세아의 과거였다. 해녀였던 어머니. 아버지가 죽기 전의 시간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이 노래하던 바다.

“왜?”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했다.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너한테 말해야 할 것들도 있어. 어제 다 못 한 말들.”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내려놨다. 타올도 내려놨다. 그리고 세아의 얼굴을 봤다. 정오의 햇빛 속에서, 그의 눈은 너무 진지했다. 마치 이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 것처럼.

“너 지금 뭐라고 생각 중이야?”

강리우가 물었다.

“…강민준.”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강리우의 아버지. JYA의 회장. 세아의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 “너 아버지한테 내가 어딜 간다고 말했어?”

“아직 안 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몰라. 그런데 알게 될 거야. 아마 오늘 저녁쯤. 그 때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거야.”

“뭐가?”

세아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로 들어야 했다.

“내가 회사를 나가.”

강리우가 말했다. 마치 날씨 예보를 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인생을 버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JYA를 나가. 아버지한테 그걸 오늘 말할 거야. 그리고 너도 함께 나가야 한다고. 계약을 위반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면 법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합의금도 내야 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게 너를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너를 진짜로 구하는 유일한 방법.”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그의 얼굴. 그의 진지함. 그리고 그 진지함 아래에 있는 것들을 봤다. 두려움. 절박함. 그리고 어떤 종류의 죄책감.

“넌 왜 그래?”

세아가 물었다. “왜 자꾸 나한테 다 줘? 너는 뭐야? 내가 뭘 한 사람이길래?”

“넌…”

강리우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췄다. 그의 입이 움직이려다 멈췄다. 마치 말 자체가 위험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넌 내가 베를린에서 구하지 못한 친구 같아. 넌 내가 서울에서 밟고 올라간 모든 사람들 같아. 그리고 넌 내가 마지막으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그래서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게 맞아도. 난 너를 포기할 수 없어.”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를 알았다. 자신을 구원의 대상으로 만드는 말. 자신을 강리우의 속죄 대상으로 만드는 말. 그런데도 세아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 말을 믿고 싶었으니까. 누군가 자신을 정말로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으니까.

“도현이는?”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남동생. 지금도 고등학교 2학년. 엄마는 제주에서 아직도 아픈 상태로 누워있었다.

“데려가.”

강리우가 대답했다. “제주에 내려가면서 도현이도 데려갈 거야. 학교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어. 잠깐만이면 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세아가 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난처럼 들렸나 싶어서 다시 말했다. “왜 자꾸 내 인생에 들어와? 내가 이 정도까지 뭘 한 사람이길래?”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세아에게 보였다. 화면에는 사진이 있었다. 한 남자의 사진. 세아는 그 남자의 얼굴을 봤을 때 강리우와의 닮음을 발견했다. 같은 눈. 같은 입가의 선. 그러나 이 남자의 얼굴에는 강리우의 절박함이 없었다.

“이 사람이 누구야?”

세아가 물었다.

“베를린에서 만난 내 친구. 이름은 Marcus. 피아니스트였어.”

강리우가 말했다. 과거형이었다. ‘였어’. “그 친구는 음악 천재였어. 정말로. 나보다 훨씬 나았어. 근데 나는 그 친구를 밟고 올라왔어.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서 더 나은 교수를 찾아다녔어. 더 나은 곡들을 사서 연주했어. 그리고 Marcus는 점점 뒤로 물러났어. 그리고 어느 날 그 친구는 베를린의 엘베 강에서 뛰어내렸어.”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침묵했다. 말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강리우가 계속했다. “너를 봤을 때 처음으로 생각했어. 내가 또 다른 Marcus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또 다른 천재를 밟으면서 올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멈추기로 했어. 아버지에게 거역하기로 했어. 나 자신을 포기하기로 했어. 너를 정말로 구하기로 했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 방식이니까.”

강리우의 손이 다시 세아의 손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타올 없이 그냥 만졌다. 따뜻한 손. 진짜 손. 세아는 그 손의 무게를 느꼈다.

“그래서 제주로 가야 해?”

세아가 물었다.

“그래. 제주로 가야 해. 거기서 너한테 모든 걸 설명할 거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리고 너는 그걸 들은 후에 나를 떠날 수 있어. 아무도 널 막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정오의 햇빛 속에서. 그의 진지한 얼굴. 그의 따뜻한 손.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수십 년의 죄책감과 절박함.

“내일 아침 몇 시에?”

세아가 물었다.

“8시 40분 출발. 그 전에 도현이 집으로 가서 데려올 거야. 넌 짐 챙겨. 한 주일 정도면 될 것 같아. 너 엄마 봐야 하고.”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민준과의 계약 위반. 법적 문제. 합의금. 모든 것. 그런데도 자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근데 한 가지만.”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를 봤다. “제주에 가면 진짜 다 말해줄 거지? 아무것도 안 숨기고?”

“다 말해줄게.”

강리우가 대답했다.

“약속이야?”

세아가 물었다.

“약속이야.”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세아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갔다. 약속의 제스처. 아이들이 하는 그것.

오후 3시쯤, 편의점 매니저는 세아에게 물었다.

“오늘 못 할 거야?”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요. 모레도요. 한 주일 정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매니저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세아는 지난 2년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해온 사람이었다. 심지어 감기 걸렸을 때도. 열이 났을 때도. 손가락이 상했을 때도.

“집에 문제 있어?”

매니저가 물었다.

“…네. 좀 있어서 처리해야 할 게 있어요.”

세아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반은 참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처리해야 했으니까. 자신이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으니까.

저녁 7시, 강리우는 강민준을 만났다.

JYA 회장실. 88층. 서울의 모든 불빛이 발아래에 보이는 높이. 강민준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 세아의 계약서에 사인한 손이 이완되어 있었다.

“들었어.”

강민준이 말했다. 강리우가 말하기 전에. “넌 JYA를 나가려고 한다고.”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계약자도 함께 가려고 한다고. 나세아라는 그 여자.”

강리우의 얼굴이 변했다. 아버지가 세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아버지, 그 여자는…”

강리우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여자를 찾은 거야. 너한테 주기 위해.”

강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차가운 미소. “너는 항상 불가능한 것들을 원했어.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가져다줬어. 그리고 넌 항상 그것들을 버렸어. 베를린에서도. 그리고 이제 여기서도. 그래서 난 다시 시도해봤어. 너를 정말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뭐가 뭐라는 거야?”

강리우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크고 끔찍한 것이.

“그 여자가 니 친구를 닮았다고 생각해? 아니야. 그 여자는 니 친구가 아니야. 그 여자는 니 친구의 여동생이야. Marcus의 여동생. 그 친구가 강에 뛰어내리기 전에, 한국으로 돈을 보냈어. 그리고 그 돈으로 그 여자의 아버지가 한국에 와서 만난 여자가 있었어. 그리고 거기서 났어. 그 여자가.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야, 리우. 내가 만든 거야. 너를 다시 살리기 위해. 너를 정말로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강리우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아버지 쪽으로. 그의 손이 주먹을 쥤다.

“그렇지. 때려. 그게 니 진심 같으니까.”

강민준이 말했다.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근데 그 여자를 데려가면 그 여자도 알게 될 거야. 자신이 뭔지. 자신의 아버지가 뭔지. 자신의 오빠가 뭐였는지. 그리고 그건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위한 거야. 너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거야.”

강리우의 주먹이 떨렸다. 그리고 내려왔다. 때리지 않았다. 대신 회장실을 나갔다.

오후 11시,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였다. 강리우였다. 세아는 받았다.

“…”

강리우의 목소리가 없었다. 오직 숨소리만 있었다.

“뭐야? 뭐가 있어?”

세아가 물었다.

“제주로 못 가.”

강리우가 말했다.

“왜?”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크고 끔찍한 것이 있다는 걸.

“내가 너한테 말해줄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거야. 그래서 난 물어보고 싶어. 넌 날 믿을 수 있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날 믿어?”

강리우가 다시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 선택의 순간

회장실의 창문을 통해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강민준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리듬을 타고 있었다. 탁탁탁. 그 소리는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규칙적이었다. 밤 10시 45분. 강리우가 도착하기까지 15분이 남았다.

문이 열렸다.

강리우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의 그림자가 깊었다. 며칠 밤을 새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강민준은 아들의 상태를 한 눈에 파악했다. 피곤함. 혼란함. 그리고 절박함. 완벽했다.

“앉아.”

강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하지만 강리우는 알고 있었다. 그 부드러움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아버지의 부드러움은 항상 칼날 위에 있었다.

강리우는 앉지 않았다. 창문을 바라봤다. 서울의 불빛들이 수천 개의 별처럼 보였다. 그 중 하나가 세아의 집일까? 지금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자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을 생각하며 깨어있을까?

“세아를 봤어?”

강민준의 질문이 침묵을 깼다.

“…응.”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자신의 말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이.

“좋은 시간이었어?”

“아버지, 뭐가 하고 싶어?”

강리우가 돌아섰다. 아버지의 눈을 바라봤다. 강민준의 검은 눈동자가 반사광을 받아 깜빡였다.

강민준이 천천히 일어섰다. 책상에서 손을 떼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을 내려다봤다. 이 높이에서 보면 사람들은 개미처럼 보인다. 모두가 자신의 작은 인생에만 집중하고 있다. 누가 자신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뭘 하고 싶은 거냐고?”

강민준이 반복했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낮고, 깊은 웃음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찾은 거야. 너한테 주기 위해.”

강민준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동화는 끔찍한 것이었다.

강리우의 심장이 점프했다. 뭔가 잘못됐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침묵 속에서, 이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뭔가 끔찍하게 잘못됐다는 것을.

“너는 항상 불가능한 것들을 원했어.”

강민준이 계속했다.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차가운 미소. 빙하처럼 차가운 미소.

“내가 그 여자를 찾은 거야. 너한테 주기 위해.”

아니다. 강리우는 생각했다. 이건 뭔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뭔가 했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뭔가를 **계획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검은지 강리우는 이제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가져다줬어. 그리고 넌 항상 그것들을 버렸어.”

강민준의 목소리가 더 크거나 작아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일기예보를 읽어주는 것처럼 그것은 평탄했다. 하지만 그 평탄함 속에는 수십 년의 분노가 숨어있었다.

“베를린에서도. 그리고 이제 여기서도.”

베를린.

강리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아버지가 베를린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버지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그래서 난 다시 시도해봤어. 너를 정말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강민준이 미소를 더 크게 지었다.

강리우의 입이 떨렸다. 그는 뭔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말이 목에 걸렸다. 마치 잘못된 약을 마신 것처럼.

“뭐가 뭐라는 거야?”

강리우가 드디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떨렸다.

“뭐가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크고, 끔찍한 것이 있다는 걸.

강민준이 책상에 다시 앉았다. 손가락을 모아 턱 아래에 놨다. 마치 문제를 풀고 있는 수학자처럼.

“그 여자가 니 친구를 닮았다고 생각해?”

“뭐…?”

“아니야. 그 여자는 니 친구가 아니야. 그 여자는 니 친구의 여동생이야.”

시간이 멈췄다.

강리우는 그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외국 언어를 들었던 것처럼. 음절은 들렸지만, 그것들이 만드는 의미는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Marcus의 여동생. 그 친구가 강에 뛰어내리기 전에, 한국으로 돈을 보냈어.”

강리우의 손가락이 옷깃을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흰색으로 변할 정도로.

Marcus. 그 이름은 강리우의 가슴을 찢었다. 베를린의 그 거리에서, 그 밤에, 그 순간에.

“그리고 그 돈으로 그 여자의 아버지가 한국으로 와서 만난 여자가 있었어. 그리고 거기서 났어. 그 여자가.”

강민준이 일어섰다. 이제 그는 아들에게 가까워졌다. 마치 먹이가 된 사자 주위를 도는 사냥꾼처럼.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야, 리우. 내가 만든 거야.”

강리우의 호흡이 멈췄다.

“너를 다시 살리기 위해. 너를 정말로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강민준의 손이 아들의 어깨에 닿았다. 그 손은 따뜻했지만, 강리우는 그것을 불의 손처럼 느꼈다.

강리우는 움직였다. 아버지 쪽으로. 아니, 그것은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었다.

그의 손이 주먹을 쥬었다. 손가락의 뼈가 소리를 냈다. 마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그렇지. 때려. 그게 니 진심 같으니까.”

강민준이 말했다.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얼굴은 마치 아들의 분노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그 여자를 데려가면 그 여자도 알게 될 거야. 자신이 뭔지. 자신의 아버지가 뭔지. 자신의 오빠가 뭐였는지.”

강리우의 주먹이 떨렸다. 세아.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녀의 오빠가 왜 죽었는지. 그리고 강리우가 그 죽음의 일부라는 걸.

“그리고 그건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위한 거야. 너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거야.”

강민준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강리우의 주먹이 떨렸다. 그것은 마치 지진 직전의 땅처럼 떨렸다.

그리고 내려왔다.

하지만 때리지 않았다.

강리우는 회장실을 나갔다. 문을 세게 닫지도 않았다. 조용히, 마치 유령처럼 나갔다.

뒤에 남겨진 강민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오후 11시.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 화면에 뜨는 빛. 그리고 그 위의 이름.

강리우.

세아는 어두운 방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 시계를 봤다. 11:07 PM.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걸까? 그리고 왜 하필 강리우일까?

그녀는 받았다.

“……”

강리우의 목소리가 없었다.

오직 숨소리만 있었다. 가쁜 숨소리. 마치 누군가 달려온 후의 숨소리처럼.

세아는 기다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때론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는 걸.

“뭐야? 뭐가 있어?”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린 아이를 진정시키는 엄마의 목소리처럼.

“제주로 못 가.”

강리우가 드디어 말했다.

세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주로 못 간다? 그들이 계획했던 그 여행? 그 도망? 그 새로운 시작?

“왜?”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크고, 끔찍한 것이 있다는 걸. 마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를 본 것처럼.

“내가 너한테 말해줄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거야. 그래서 난 물어보고 싶어.”

세아는 그의 다음 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으면 뭔가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넌 날 믿을 수 있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침묵.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그것들이 가벼워 보였다. 마치 그 손들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날 믿어?”

강리우가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약해져 있었다.

세아는 깊은 숨을 쉬었다. 그것은 마치 물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화면의 빛이 희미해졌다. 다시 어둠만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전과 다른 어둠이었다. 이 어둠 속에는 선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녀를 어디론가 끌어가고 있었다.

세아는 창문을 봤다. 밤의 서울이 보였다. 그 도시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은 더 이상 희망 같지 않았다. 그것은 함정 같았다. 아름다운 함정.

그리고 그녀는 이미 그 안에 있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어둠만.

시간이 흘렀다. 분 단위로. 시간 단위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리우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공항에서 봐.”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삭제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그녀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공항.

그곳은 떠나는 곳이었다. 그곳은 새로운 시작의 장소였다. 그렇지만 그곳은 또한 끝나는 곳이기도 했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장을 열었다.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 한 벌, 또 한 벌. 양말. 속옷. 세제. 치약.

그녀의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것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강리우의 선택. 세아의 신뢰. 그리고 그 신뢰가 만들어낼 모든 일들.

강민준이 계획한 것의 진정한 시작.

밤은 깊어갔다. 그리고 서울의 불빛은 여전히 반짝였다. 하지만 그 불빛 아래에서, 어두운 곳에서, 사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세아의 손이 가방을 닫았다. 지퍼 소리가 났다. 마치 운명의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그리고 아침이 왔다.

새로운 날. 그리고 새로운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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