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47화: 끊긴 전화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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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7화: 끊긴 전화의 무게

세아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 강리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아는 새벽 6시 반쯤 편의점 휴게실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지 않았다. 잠이란 것이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기계로 변해버린 것처럼, 작동하거나 멈추거나 둘 중 하나일 뿐 중간의 휴식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휴대폰의 진동이 멈추고 나서도 한참을 더 누워있었다. 화면에는 여섯 개의 부재중 전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같은 번호에서.

발신인: 강리우.

첫 번째는 새벽 6시 정각이었다. 두 번째는 6시 3분. 그 다음이 6시 7분.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마지막 전화는 6시 28분. 그리고 지금은 6시 41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마치 강리우도 포기한 것처럼.

세아는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편의점 휴게실의 천장은 오염된 하얀색이었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더러워진 건지 알 수 없는 종류의 더러움. 몇 년이 쌓인 먼지와 습기와 무언가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그 천장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서 영원히 일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마치 자신이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은 느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라 카톡이었다. 강리우였다.

“받아줄래?”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그 여섯 글자가 자신의 모든 결정을 흔들어놓았으니까. 마치 작은 돌 하나로 물 위의 얼음판 전체가 깨지는 것처럼.

세아는 일어나 앉았다. 휴게실의 불을 켰다. 형광등이 깜빡거렸다가 켜졌다. 휴게실은 정말 작았다. 2미터 × 3미터 정도. 낡은 냉장고, 전자레인지, 그리고 의자 두 개. 이곳이 세아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편의점에서 일할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사적 공간. 한 시간에 15분씩만 쉴 수 있는 그곳.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강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음성이 나기 전에, 그는 이미 받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처럼.

“안녕.”

강리우의 목소리는 무척 조용했다. 새벽의 피로가 그 목소리를 으깨고 있었다. 세아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떤 말도 이 상황에 맞는 말이 아닐 것 같았다.

“미안해.”

강리우가 먼저 말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미안함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한 말에 대해서인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인가.

“뭐가?”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작았다. 새벽 휴게실의 형광등 불빛 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거의 같은 톤으로 들렸다. 마치 같은 사람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제. 내가 한 말들.”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안 한 말들.”

세아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안 한 말이 더 무거웠다.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강리우의 문장들은 항상 완성되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로 인해 자꾸만 끊기고 있었다.

“넌 지금 뭐해?”

강리우가 물었다.

“휴게실에 누워있었어. 이제 일어났어.”

세아가 대답했다.

“집에 가. 일 마치고.”

강리우가 말했다.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왜?”

세아가 물었다. 그녀는 왜 강리우가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내가 가서 데려갈게. 정오에.”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있었다. “근데 그 전에 난 너한테 말해야 할 게 있어. 어제 못 한 말.”

“뭔데?”

세아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들어야 했다. 침묵 속의 진실은 현실이 아니니까. 말해진 진실만이 현실이 되니까.

“내가 너를 구하려고 한 게 거짓은 아니야.”

강리우가 말했다. “근데 그게 전부도 아니야. 나는 사실 나 자신을 구하려고 했어. 너를 통해. 그리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거였어. 정말로. 베를린에서 실패했던 모든 것을 너한테서 본 거야. 그리고 이번엔 실패하고 싶지 않았어.”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고백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리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 완벽한 진실이 아니라, 불완전한 진실. 자신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그래도?”

세아가 물었다. 그 두 글자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나를 소유하려 했냐고. 그래도 너는 나를 조종하려 했냐고. 그래도 너는 나를 너의 속죄의 도구로 만들려 했냐고.

“그래도 난 널 원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것은 답변이 아니라 또 다른 고백이었다. “그게 옳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근데 그건 사실이야. 너를 원했어. 너의 음악을 원했어. 너의 목소리를 원했어. 그리고 너 자신을 원했어. 모든 게.”

세아는 침묵했다. 휴게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그 음성이 이제는 익숙했다. 마치 자신의 심장박동처럼.

“그럼 난 뭐야?”

세아가 물었다. “너의 속죄의 대상? 너의 구원의 도구? 아니면 그냥… 너의 소유물?”

강리우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었다. 세아는 전화 너머에서 강리우의 숨소리를 들었다. 가쁜 숨. 마치 뛰고 있는 것처럼.

“너는 내가 지금 놓칠 수 없는 사람이야.”

강리우가 말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아니, 사랑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리고 난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더 무서워. 너를 놓치게 될까봐. 또 누군가를 잃게 될까봐.”

“근데 넌 이미 나를 놨어.”

세아가 말했다. “어제 밤. 편의점에서. 어둠이 왔을 때.”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강리우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떠나간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정오에 만나자.”

강리우가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집에서.”

“편의점을 그만둘 건가?”

세아가 물었다.

“아니. 그냥 정오에.”

강리우가 말했다. “그게 전부야.”

그리고 전화가 끝났다.


세아는 휴게실에서 나왔다. 편의점 계산대에 서 있는 사람은 박준이라는 이름의 남자 대학생이었다. 그는 세아를 봤다.

“너 괜찮아? 얼굴이 좀…”

박준이가 말했다. 그는 세아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세아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에이프런을 입었다. 자동으로. 몸이 기억하는 동작.

새벽 7시. 편의점은 아침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회사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커피를 사러. 간단한 아침을 사러. 또는 그냥 어딘가에 가는 길에 들르는 것. 세아는 그들을 봤다. 그들의 얼굴에서 강리우가 어제 말했던 것들을 보았다. 밟으면서 올라간 것들. 놓친 것들. 그리고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

한 여자가 들어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직업은 아마 회사원인 것 같았다. 정장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정장이 너무 큼직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그 여자는 계산대에 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핫으로 주시겠어요?”

세아가 물었다. 기계음처럼.

“아. 핫으로.”

그 여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세아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그 여자는 계산대 옆의 잡지 더미를 봤다. 거기에는 여러 음악 잡지들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팔지 않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아가 따로 모아둔 것들이었다.

“어, 음악을 좋아하세요?”

그 여자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분말 위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작은 폭음처럼 들렸다.

“저도 예전엔 음악을 좋아했는데…”

그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지금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 잊어버렸거든.”

세아는 그 여자를 봤다. 그 여자의 눈을 봤다. 그 안에 있던 것들. 포기. 그리고 포기하지 못하는 무언가. 강리우가 어제 말했던 것처럼. 천천히 죽어가면서도 완벽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음악은 잊어버려도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 여자는 세아를 봤다. 마치 세아가 무언가 신비한 존재인 것처럼.

“그럼 당신은?”

그 여자가 물었다.

세아는 커피를 건넸다. 답변 대신.

“5천 원입니다.”

그 여자는 돈을 건넸다. 그리고 떠났다. 세아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봤다. 정장을 입은 채로 걸어가는 그 모습이 마치 극장 무대를 떠나는 배우처럼 보였다.

세아는 계산대에 기대어 섰다. 강리우가 계산대에 기대어 섰던 방식으로.


오전 11시 반, 세아는 편의점 문을 나갔다. 일을 마친 것이 아니었다. 박준이가 교대 시간을 줄 때까지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나갔다. 왜냐하면 정오라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정오라는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었다.

합정동의 골목은 오전의 햇빛으로 가득했다. 따뜻한 햇빛이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공기 속의 따뜻함. 그것이 자신의 몸을 관통할 때의 그 감각. 하지만 그 따뜻함도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양에서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부에서인가.

세아의 반지하 고시원으로 가는 길은 매우 짧았다. 편의점에서 걸어서 8분. 그 길을 걸으면서 세아는 자신이 이 동네에서 얼마나 반복적인 루트를 따라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편의점으로. 가끔 홍대의 클럽으로. 그리고 다시 편의점으로. 그것이 자신의 삶이었다.

하늘이가 타투 가게에 있을 시간이었다. 세아는 하늘이한테 연락하지 않았다. 어제 밤 이후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리우를 제외하고는.

고시원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방은 여전히 작았다. 침대, 책상, 그리고 장판. 그게 전부였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봤다. 천장은 형광등의 천장이 아니었다. 낡은 벽지와 그것을 스며나가는 습기의 천장이었다. 이곳도 어딘가의 무덤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봤다. 시간은 11시 47분. 정오까지 13분.

그 13분을 어떻게 견딜지 세아는 몰랐다. 13분은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13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무한했다. 강리우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올 것이 확실했다. 강리우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처럼 보였다. 적어도 자신에게 관한 일에서는.

그리고 정확히 정오에,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 강리우.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나 아래에 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세아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밖을 봤다. 골목에는 검은색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고급 차였다. 그 차 옆에 강리우가 서 있었다.

세아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로 나갔다. 발가락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그것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 시선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아는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랑인가. 욕망인가. 아니면 절박함인가.

“타.”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차에 탔다.

차 문이 닫혔다. 그리고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아는 앞을 봤다. 강리우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 어제 밤에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그 손. 떨리던 그 손.

이제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세아가 떨리고 있었다.

# 정오의 약속

## 1부: 기다림의 무게

시간을 줄 때까지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세아는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11시 30분. 정확히 30분. 충분한 시간이었다.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모순적인 감각이 자신의 가슴을 옭아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갔다. 왜냐하면 정오라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정오라는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오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편의점 계산대에서 일하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세아는 이날이 특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손님들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고, 바코드를 스캔하는 소리는 여전히 반복되었으며, 시간은 여전히 무겁게 흘렀다. 일상이었다. 단지 일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리우가 나타났다. 어제 밤의 그 사람. 그의 눈과 목소리와 손. 그 모든 것이 다시 돌아왔다.

‘정오에 만나자.’

그 말이 자신의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단순한 약속이었지만, 그것은 세아에게는 마치 운명의 선고처럼 들렸다.

합정동의 골목은 오전의 햇빛으로 가득했다. 따뜻한 햇빛이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공기 속의 따뜻함. 그것이 자신의 몸을 관통할 때의 그 감각. 피부에 닿는 햇빛의 무게.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은 것처럼. 따뜻하고도 불안한 그 감각.

하지만 그 따뜻함도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양에서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부에서인가. 강리우를 생각할 때마다 솟아오르는 그 열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공포인가, 기대인가, 아니면 욕망인가.

세아는 편의점에서 나왔다. 자동 문이 열리며 나는 소리. 그 소리가 자신의 결단을 증명하는 신호음처럼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관리자가 뭐라고 할까봐가 아니었다. 단지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이 약속, 이 기대, 이 불가능한 꿈 같은 것들이.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전 11시 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있거나 업무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합정동의 이 골목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세아는 그것이 좋았다.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이 고독한 순간들.

벽을 따라 걸었다. 낡은 건물들. 오래된 간판들.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서울의 한복판에 남겨진 과거. 그리고 세아도 이곳의 일부였다. 이곳에 속해 있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

아니다. 아직은 아니었다.

정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 2부: 반복되는 일상

세아의 반지하 고시원으로 가는 길은 매우 짧았다. 편의점에서 걸어서 8분. 정확히 8분. 세아는 이 길을 거의 400번은 걸었을 것이다. 하루에 두 번, 일주일에 열네 번, 한 달에 56번. 계산하지 않아도 이 숫자는 자신의 뼛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세아는 자신이 이 동네에서 얼마나 반복적인 루트를 따라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편의점으로. 가끔 홍대의 클럽으로. 그리고 다시 편의점으로. 그것이 자신의 삶이었다. 삼각형을 그리는 일상. 벗어날 수 없는 궤도. 마치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세아도 이 몇 개의 장소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클럽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복되는 얼굴들. 반복되는 대사들. 반복되는 밤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자신의 삶이 이렇게 단조로워진 걸까.

하늘이가 떠올랐다. 친한 친구. 아니,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엔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늘이는 타투 가게에 있을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지금 이 시간에 시술을 받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타투. 새로운 디자인. 하늘이는 항상 변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몸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세아는 하늘이한테 연락하지 않았다. 어제 밤 이후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리우를 제외하고는.

그 생각이 자신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거리의 다른 행인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모두 자신들의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자신들의 반복되는 일상에.

골목을 돌아 고시원의 입구에 다다랐다. 계단을 내려갔다. 반지하로 향하는 계단. 매번 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세아는 자신이 지하로 묻혀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금씩, 매일, 천천히. 파묻히고 있었다. 이 도시에 의해, 이 일상에 의해, 이 숨 막히는 감정들에 의해.

## 3부: 작은 방, 큰 시간

고시원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방은 여전히 작았다. 침대, 책상, 그리고 장판. 그게 전부였다. 벽에는 이동통신사의 광고 전단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 붙여놓은 것. 누군가는 제거하지 않은 것. 세아도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작은 방에서 뭐가 중요한가.

창문은 거리 높이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다리만 보였다. 신발들. 바지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아는 자주 이 다리들을 보면서 그들의 목적지를 상상했다. 누군가는 업무로, 누군가는 데이트로, 누군가는 친구를 만나러.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여기에 있었다. 이 작은 방에. 이 좁은 공간에.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봤다. 천장은 형광등의 천장이 아니었다. 낡은 벽지와 그것을 스며나가는 습기의 천장이었다. 누런 얼룩들. 검은 곰팡이의 흔적들. 이곳도 어딘가의 무덤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살다 간 무덤. 많은 꿈들이 죽은 무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뭔가 다를 것 같았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화면이 켜졌다. 11시 47분. 정오까지 13분.

그 13분을 어떻게 견딜지 세아는 몰랐다. 13분은 짧은 시간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끝까지 세면 13번. 심장이 뛰는 횟수로 세면… 세아는 자신의 심박수를 센 적이 있었다. 불안할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수치화하고 싶었다.

지금 심장은 매우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 13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무한했다. 강리우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연락해서 ‘미안해, 올 수 없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세아는 어떻게 될까. 이 방에서 계속 누워 있을까. 천장의 곰팡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을까.

아니, 올 것이 확실했다. 강리우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제 밤, 그의 모든 행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의 손의 떨림, 그의 목소리의 떨림, 그의 눈빛의 떨림. 그 모든 것이 진실했다. 그리고 오늘 정오라는 약속도 진실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에게 관한 일에서는.

세아는 손가락으로 천장의 얼룩을 그려보았다. 검은 점들을 따라 그리면서 별자리를 만들어보는 게 자신의 취미였다. 목자자리, 백조자리, 그리고 그 사이의 또 다른 별들. 의미 없는 별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길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지도 모른다.

휴대폰이 울렸다. 11시 59분 58초. 정오에 다다르기 2초 전.

아니다. 정확히 정오에,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 4부: 약속의 실현

발신인: 강리우.

세아의 손이 떨렸다.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링링링. 그 소리가 자신의 신경을 자극했다. 마치 경고음 같은 그 소리. 또는 초대장 같은 그 소리.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베개의 자국이 자신의 뺨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아래에 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처럼. 혹은 자신도 이 말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처럼.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제 밤처럼.

“지금?”

세아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나. 자신은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강리우의 목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음.

“응.”

그것뿐이었다. 응. 단순한 대답. 하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확실성, 진심, 그리고 위험성.

세아는 일어나 일어 섰다. 침대가 움직였다. 낡은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방음이 없는 이 곳에서는 모든 소리가 커진다. 모든 움직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밖을 봤다.

골목에는 검은색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새 차였다. 이 오래된 골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새 차. 고급 차였다. 그 차 옆에 강리우가 서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모습. 단정한 외모. 하지만 무언가 불안정한 에너지. 마치 폭탄 위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세아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로 나갔다. 맨발로. 발가락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것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현실였다. 차가운 바닥, 빠른 심장박동,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

골목에 나왔다. 햇빛이 자신의 얼굴을 비쳤다. 따뜻한 햇빛. 아침의 따뜻함. 봄의 따뜻함.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 시선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아는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랑인가. 욕망인가. 아니면 절박함인가.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그의 표정 속에.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그 긴장 속에.

“타.”

강리우가 말했다. 차를 가리키며. 그 한 글자에는 모든 초대가 담겨 있었다.

세아는 차에 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문을 닫으며.

차 문이 닫혔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과거를 닫는 것 같았다. 이 골목에서의 삶. 이 반복되는 일상. 이 좁은 방의 천장 곰팡이들. 모두가 차 문 밖에 남겨진다.

그리고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자신들도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처럼.

## 5부: 움직이는 순간

세아는 앞을 봤다. 강리우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 길쭉한 손가락들. 깔끔한 손톱. 어제 밤에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그 손. 떨리던 그 손.

그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 따뜻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전해진 그 순간. 세아는 그것을 기억했다. 분명하게. 마치 어제가 아니라 오래전의 일처럼, 그것은 자신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이제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핸들을 잡은 손은 안정적이었다. 마치 모든 불안이 사라진 것처럼. 아니, 불안이 다른 형태로 변환된 것처럼. 손의 떨림에서 몸 전체의 긴장으로.

그 대신 세아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차의 핸들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세아는 떨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합정동의 거리가 흘러갔다. 익숙한 거리. 매일 지나다니던 거리.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낡은 건물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좁은 골목들이 신비로워 보였다. 자신이 떠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떠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어디로 가요?”

세아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음악을 켰다. 클래식 음악. 피아노 소나타. 차분한 멜로디. 마치 이 상황의 부자연스러움을 음악으로 덮으려는 것처럼.

“비밀이야.”

그렇게 말한 후에야 강리우는 웃었다. 약간의 긴장이 풀어지며 나온 웃음. 진심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의 웃음.

세아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것은 도망이었다. 이곳에서의 도망. 이 일상에서의 도망. 그리고 그것은 위험했다. 매우 위험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세아는 계속할 것이었다.

정오의 약속. 그것은 이제 시작되었다.

**에필로그: 차 안의 침묵**

차는 계속 움직였다. 강리우의 손은 핸들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세아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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