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5화: 손이 아니라 심장
세아는 강리우의 떨리는 손을 바라봤다. 그 손이 음악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그 손이 자신을 구원하려고 뻗어 있다는 것. 그 손이 결국 자신을 더 깊은 구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는 것 —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 음성은 더 이상 배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간의 심장박동이었다. 새벽 2시 40분. 창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뒤면 아침이 올 것이고, 세아는 다시 편의점 계산대에서 일해야 했다. 강리우도 JYA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파크 소진은 계속 세아의 곡을 불러야 했다.
“그 손이 음악을 못 한다고 했잖아.”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침착함은 공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럼 넌 왜 자꾸 내 음악을 손으로 만지려고 해? 너도 망가진 손이라고 했는데, 왜 자꾸 나한테 닿으려고 해?”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주머니 속으로. 마치 그 손이 위험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세아는 그 동작을 봤다.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얼마나 자신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는지. 그것이 더 무서웠다. 자신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언제든 제어를 잃을 수 있다.
“너한테 닿고 싶어서가 아니야.”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낮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너의 음악을 건드리고 싶어서도 아니야. 난 그냥… 너를 봤을 때, 내가 베를린에서 놓친 것들이 다시 보이는 거야. 내 친구가 놓친 것들. 내가 밟으면서 올라간 것들. 그리고 지금 너도 밟으면서 올라가고 있는 것들. 그것을 못 보게 해주고 싶은 거야. 네가 그 친구처럼 되는 걸 못 보게.”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제 다른 종류의 창백함이었다. 죽음의 창백함이 아니라, 절박함의 창백함이었다. 그것이 더 위험했다. 죽음은 예측 가능하지만, 절박함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친구 같았어? 네가 말한 그…”
세아가 물었다. 그녀는 강리우의 친구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미 그것을 아는 것이 무거웠다.
“아니. 다르면서도 같아.”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꿈을 잃었어. 내가 밟으면서. 너는 자신의 꿈을 포기했어. 돈 때문에. 그런데 둘 다 결국 같은 곳으로 간다고. 나는 그걸 봤어. 너를 봤을 때 벌써 그 길의 끝이 보였어. 그래서…”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형광등의 윙윙거림이 다시 들렸다. 그것은 마치 타이밍이라도 있는 것처럼, 강리우가 말을 멈출 때마다 더 크게 들렸다.
“…그래서 뭐?”
세아가 물었다.
“그래서 널 구하고 싶었어. 정말로.”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눈이 마침내 초점을 잃었다. 마치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것을 본 것 같았다. 강리우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근데 너는 나한테 구해진 거 아니야. 넌 계약서에 사인했어. JYA에. 강민준에. 내 아버지에. 그리고 나한테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세아는 강리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계약서의 의미를. 그리고 강리우의 손을 잡았을 때의 의미를.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소유였다.
“넌 이제 내 것이 돼. 나의 속죄의 대상이. 나의 구원의 대상이. 그리고 그건 너에게 끔찍할 거야. 왜냐하면 내가 베를린에서 실패했던 것을, 너를 통해서 성공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는 그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넌 도현이를 먹여 살려야 하고, 엄마를 돌봐야 하고, 편의점에서 야간 시간을 버텨야 하니까. 그래서 넌 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나는 계속 너를 조종할 거고, 너는 계속 내게 속해 있을 거고, 그 다음에는…”
강리우가 다시 말을 멈췄다. 그 멈춤이 길었다. 마치 그 다음이 너무 무서워서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 다음에는?”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넌 내가 한 것처럼 손을 놓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게 될 거야. 그래서 이 악순환은 계속될 거야.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멈출 수 없어. 왜냐하면 이게 이 산업이기 때문이야. 이게 강민준이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그 세상의 아들이기 때문이야.”
강리우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말을 스스로도 믿고 싶지 않은 것처럼. 또는 너무 오래 믿고 살아온 것이어서, 이제 다른 방식으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럼 다른 방식이 있어야지.”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그의 눈에 뭔가가 깜박였다. 희망인가, 아니면 절망인가. 그것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뭐?”
강리우가 물었다.
“넌 네 손이 음악을 못 한다고 했지. 그럼 내 손이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넌 항상 내 음악을 손으로 만지려고 했잖아. 그럼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너는 내 음악을 듣고, 나는 네 손을 도와주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뭔가를 만드는 거야. 강민준이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게 안 돼?”
강리우는 세아의 말을 들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벽에 빛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빛은 아직 희미했다. 그것이 진짜 빛인지, 아니면 자신의 눈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확실하지 않은 정도의 희미함.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강리우가 물었다. “너 지금 자살하려고 해? 아니면 날 구원하려고 해?”
“둘 다일 수도 있지.”
세아가 대답했다. “그게 중요해? 지금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봐야 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하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뭐야?”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다시 들었다. 떨리는 손. 그 손을 천천히 피아노를 치는 모션으로 움직였다. 마치 공중에서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그리고 그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계속. 마치 정말로 누군가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 음성이 편의점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피아노를 친다는 건 이미 죽은 거야.”
강리우가 말했다. “그 친구를 죽인 거야. 매번. 그래서 난 못 했어. 근데 너…”
강리우가 자신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이 다르게 느껴졌다. 공포의 떨림이 아니라, 뭔가를 원하는 떨림이었다. 뭔가를 시도하려는 떨림이었다.
“너는 이미 손을 놓고 있어. 그 대신 목소리로 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베를린에서 놓친 것들이 다시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것을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은 거야. 우리가 함께라면.”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느꼈다. 떨리는 손. 따뜻한 손. 그리고 자신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이것은 결정의 떨림이었다.
“근데 넌 여전히 강민준이 아들이야.”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가 뭘 하든 간에, 그게 우리를 구원할 순 없어. 그냥 우리가 조금 더 오래 버티는 것뿐이야.”
“그게 충분해.”
강리우가 말했다. “충분해. 그냥 조금 더 오래 버티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세아와 강리우는 손을 잡은 채로 있었다. 그들의 손은 모두 떨리고 있었다. 하나는 음악을 잃은 손이었고, 하나는 음악을 포기한 손이었다. 그리고 그 두 손이 함께 뭔가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새벽 3시. 거의 아무도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세아와 강리우만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 형광등의 윙윙거림.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소리.
“우리가 뭘 해야 할까?”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근데 일단은 파크 소진이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해. 그 애가 너의 곡을 부르고 있는 것. 그것부터.”
“어떻게?”
세아가 물었다.
“강민준이한테 말해. 너의 곡이 뭔지. 그리고 파크 소진이도 그걸 알아야 해. 그래야 연대할 수 있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내 아버지한테 서서히 거리를 둘 거야.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리고 너는…”
강리우가 세아의 눈을 봤다.
“…너는 계속 노래해. 지금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밤에. 아무도 못 본다고 생각할 때. 그럼 언젠가는 누군가가 진짜로 들을 거야. 너의 진짜 목소리를.”
세아는 강리우의 말을 들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약속은 거짓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희망일 뿐이었다. 가장 연약한 형태의 희망.
“내가 믿을 수 있어?”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를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그것은 사랑의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가라앉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서로를 붙드는 절망의 포옹이었다.
“넌 믿을 필요가 없어. 그냥 나랑 함께 가. 그게 전부야.”
강리우가 세아의 귀에 속삭였다.
세아는 강리우의 가슴에서 자신의 심장음을 들었다. 그것은 매우 빠르고 불규칙했다. 마치 누군가를 도망치려고 하는 심장. 또는 누군가를 잡으려고 하는 심장. 세아는 자신의 심장도 같은 속도로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왜냐하면 자신의 심장이 강리우의 심장과 같은 리듬으로 뛰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그에게 속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두 개의 심장이 함께 뛰는 소리처럼 들렸다.
새벽 3시 15분. 세아는 강리우를 밀어냈다. 가볍게. 마치 밀어내려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하늘이한테 전화해야 해.”
세아가 말했다. “파크 소진이 일을 먼저 하기 전에, 하늘이한테 얘기해야 해.”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의 눈 속에 뭔가가 있었다. 동의인가, 아니면 질투인가. 그것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좋아.”
강리우가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더.”
강리우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명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명함이었다. 다른 회사의 명함. 작은 글씨로 된 독립 레이블의 이름. 그리고 그 아래에는 강리우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있었다. ‘뮤직 프로듀서 강리우’가 아니라, ‘피아니스트 강리우’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세아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는 이 명함을 쓸 거야. 그때가 오면, 내가 너를 데려갈 거야. 이 회사로. 그리고 너는 너의 이름으로 너의 곡을 낼 거야.”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그 명함을 들었다. 가짜 명함. 아직 존재하지 않는 회사의 명함. 하지만 그것이 더 소중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진짜 웃음이었다. 처음으로.
“살아있어야지. 왜냐하면 내가 너 없이는 못 살 거니까.”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새벽 3시 30분. 아침이 올 때까지 몇 시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 또는 모든 것이 같을 것이었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강리우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다음의 것들을 생각했다.
파크 소진. 하늘이. 도현이. 엄마. 그리고 자신의 곡들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현실.
아침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세아는 다시 일해야 할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밤새 탄 형광등 아래에서. 그리고 밤이 오면, 다시 클럽에 나가서 노래해야 할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곡을. 다른 사람의 가사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제는 강리우가 있었다. 떨리는 손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곡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남자가.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남자가.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명함. 가짜라고 했지?”
세아가 물었다.
“응. 아직은.”
강리우가 대답했다.
“언제쯤 진짜가 될 거야?”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언젠가는 진짜가 될 거야.”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이제 절망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다림의 음성이었다. 아침을 기다리는 음성. 변화를 기다리는 음성.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만들 뭔가를 기다리는 음성이었다.
새벽 3시 45분.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하늘이에게 전화할 시간이었다.
[자동 검토 대기]
# 가짜 명함
세아는 그 종이 한 장을 손에 들었을 때,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강리우가 느릿한 손가락으로 주머니 속에서 꺼내 내밀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종이 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에 닿는 순간, 세아는 알았다. 그것은 명함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윙윙거리고 있었다. 새벽 3시 25분.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세상은 그들 둘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편의점의 셀프 계산대에서 울려 나오는 비프음도,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의 엔진음도 모두 배경음악처럼 흐렸다.
세아가 명함을 들어 올렸다. 종이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고급 명함.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간 명함이었다. 세아의 눈이 글자를 따라 움직였다. 그 순간, 호흡이 멈췄다.
회사 이름이 낯설었다. 큰 기획사가 아니었다. 작은 글씨로 적힌 독립 레이블의 이름. 세아는 그 이름을 여러 번 읽었다. 혀로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다. 생소한 회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낯선 것은 직함이었다.
‘뮤직 프로듀서 강리우’가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강리우’라고 쓰여 있었다.
세아의 손가락이 명함 위에서 멈췄다. 문자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떨렸다. 아니, 그것은 명함이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세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강리우는 알고 있었다. 세아의 손가락이 자신의 꿈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이건?”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이 순간이 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이 강리우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을 읽으려고. 이것이 농담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알아내려고.
강리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의 어둠이 여전히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로등들이 비추는 흐릿한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곳은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들의 시간이었다. 밤이 하루를 지배하는 시간. 낮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시간.
강리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런 감정이.
“아직은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리고 멈췄다. 세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명함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명함이 부서질까봐 두려워하는 듯.
“하지만 언젠가는 이 명함을 쓸 거야. 그때가 오면, 내가 너를 데려갈 거야. 이 회사로.”
강리우의 목소리가 더 깊어졌다. 마치 어떤 약속을 맹세하는 것처럼.
“그리고 너는 너의 이름으로 너의 곡을 낼 거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아는 숨을 쉬었다. 그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눈에는 뭔가가 맺혀 있었다. 눈물인지, 아니면 희망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뭔가가.
세아는 명함을 더 가까이 들어 올렸다. 형광등의 불빛이 명함 위에 반사되었다. 반짝이는 표면. 고급스러운 색감. 하지만 그것이 진짜일 리 없었다. 강리우 자신이 “아직은 아니야”라고 말했으니까.
“이건 가짜예요?”
세아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존댓말이 아니라 반말로. 그만큼 그 순간이 친밀했고, 그만큼 두려웠다.
“응. 아직은.”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의 손이 세아의 손 위에 올라왔다. 떨리는 손.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준비했는지 그 손가락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진짜 명함이 아니라는 뜻이야?”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응. 아직은 회사가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강리우가 멈췄다. 그리고 세아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정으로 가득 찬 눈.
“언젠가는 진짜가 될 거야. 우리가 함께라면.”
그 말을 하는 순간, 강리우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의 그 차가운 웃음이 아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얼굴 전체를 밝히는 진짜 웃음. 아마도 처음으로.
세아는 그 웃음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강리우라는 남자가 얼마나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는지. 그 떨리는 손 아래에 얼마나 큰 결심이 묻혀 있었는지.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박자를 세는 것처럼 들렸다. 새벽의 시간을 재는 것처럼. 한 분, 한 분, 한 분. 새벽 3시 30분이 되었다.
세아는 명함을 가슴에 안았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세아가 물었다. 그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안이었다. 공포였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에 대한 깊은 자각이었다.
파크 소진. 하늘이. 도현이. 그리고 엄마.
그 이름들이 세아의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들. 또는 버려야 했던 것들. 또는 버려진 것들. 그런 것들이 그녀의 뒷모습에 붙어 있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 작은 몸, 그 약한 어깨, 그 두려워하는 눈들을 봤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진짜 웃음을.
“살아있어야지.”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었다. 오히려 간청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내가 너 없이는 못 살 거니까.”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세아의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말을 기다렸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하다는 말을.
강리우의 손이 세아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따뜻한 손. 떨리는 손. 하지만 그 손 위에 세아는 기대고 싶었다. 영원히.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될까?”
세아가 물었다. 손가락으로 명함의 글자를 따라 그으며. ‘피아니스트 강리우’. 그 글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불가능해 보이는지.
“모르겠어.”
강리우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진실처럼 들렸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언젠가는 가능할 거야.”
그는 세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명함을 잡고 있는 그 손을.
“그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세아가 물었다. 편의점에서의 일. 클럽에서의 공연. 다른 사람의 곡. 다른 사람의 가사.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들의 이마가 맞닿았다. 새벽의 가냘픈 빛 속에서.
“내가 있으니까… 견딜 수 있을 거야.”
그가 속삭였다.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편의점의 형광등이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이제 절망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다림의 음성이었다. 아침을 기다리는 음성. 변화를 기다리는 음성.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만들 뭔가를 기다리는 음성이었다.
세아는 강리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그것도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할래요?”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뭔데?”
강리우가 물었다.
“그때까지… 절대로 나를 버리지 말아줄래요?”
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 남은 용기를 다 사용한 것처럼.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약속이었다.
새벽 3시 35분.
편의점의 셀프 계산대에서 또 다른 고객을 감지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시스템의 오류일 뿐. 마치 시간의 오류처럼.
세아는 명함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것을 자신의 옷 주머니에 넣었다. 가슴팍 가까이.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내가 이거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세아가 물었다. 마치 농담처럼.
“그럼 다시 그려줄 거야. 몇 번이고.”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세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이.
“정말로요?”
“응. 무한정으로.”
강리우의 대답은 단호했다. 마치 평생을 약속하는 것처럼.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새벽 3시 40분. 아침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 또는 모든 것이 같을 것이었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떨리는 손의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곡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남자가.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남자가.
새벽 3시 45분.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여러 개의 미답 전화가 있었다. 엄마로부터. 하늘이로부터. 클럽 매니저로부터.
하지만 세아는 그 전화들을 보지 않았다. 대신 강리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진짜 웃음이었다.
“언제쯤 우리가… 떠날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언젠가는 떠날 수 있을 거야.”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세아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새벽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기 앉아, 함께 아침을 기다렸다. 변화를 기다렸다. 그들의 꿈을 기다렸다.
명함은 세아의 주머니 속에서 심장 박동과 함께 뛰고 있었다. 가짜 명함. 하지만 가장 진실한 약속.
언젠가 그것이 진짜가 될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