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4화: 그 손이 만드는 침묵
세아는 강리우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 있던 것들 — 베를린의 피아노, 죽은 친구의 무대, 손가락의 떨림,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절박함 —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강리우는 자신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속죄였다. 자신의 손이 더는 음악을 만들 수 없게 된 후, 다른 손을 움직이게 하려는 절망적인 욕망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울음처럼 들렸다. 새벽 2시 30분. 거의 아무도 올 시간이 아니었다. 편의점은 밤새 깨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 — 일하는 사람들, 도망치는 사람들, 혼자 있고 싶은 사람들 — 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세아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이 가게에서 강리우와 나눈 대화들을 다시 떠올렸다. 파크 소진의 영상. 자신의 곡.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 현실.
그리고 강리우의 손. 여전히 떨리고 있는 그 손.
“내가 물어볼 게 있어.”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강리우의 이야기를 들은 후,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뭐?”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은 조금씩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파크 소진. 넌 그 애 보호할 거라고 했어. 그럼… 그 애도 너처럼?”
세아의 질문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리우는 이해했다.
“소진이는 내가 조금 더 빨리 만났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무표정이었다. 감정이 빠져나간 육체의 목소리. “소진이 아버지는 건설업이었어. 돈이 많았지. 그래서 소진이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어. 클래식 피아노. 성악. 댄스. 모든 걸. 근데 소진이는 원래 그걸 원했던 게 아니었어. 그냥 아버지가 원했던 거였어. 그리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어. 돈이 다 떨어졌어. 그러니까 소진이를 팔기 시작했어. ‘이렇게 좋은 재능을 가진 딸을 왜 숨기냐’고. JYA에 소개했어. 그리고 JYA는 소진이를 데려갔어. 계약금 500만 원에.”
강리우가 계산대에 기대어 섰다. 마치 자신의 체중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세아는 그 모습을 봤다. 강남의 부자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가, 실제로는 얼마나 무거운 것들을 지탱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소진이는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게 됐어. JYA가 어떤 곳인지. 강민준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의 곡이 누구에 의해 써지는지. 너처럼. 너의 곡들이 소진이 이름으로 나가고 있다는 걸.”
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강리우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달랐다. 현실이 더 무거워졌다. 더 단단해졌다. 꿈처럼 느껴지던 악몽이 이제 벽이 되었다.
“그래서… 소진이가 뭔가 했어?”
세아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못 했어. 계약서에 다 사인했거든. 너처럼. 그리고 아버지는 소진이한테 ‘앞으로 넌 이 회사의 소유다. 그 대신 돈과 명예를 줄 테니까 잘해’라고 했어. 그리고 소진이는 그렇게 했어. 지금까지. 웃으면서. 완벽하게.”
강리우의 목소리에 뭔가가 있었다. 분노인가, 슬픔인가, 아니면 자책인가. 모두가 섞여 있었다.
“그럼 넌 뭘 한 거야?”
세아가 물었다.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이 아니라, 일종의 고소였다. 왜 넌 나한테는 손을 뻗었는데 그 애한테는 못 했냐고.
강리우는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웃음의 형태를 한 절망의 음성이었다.
“내가 소진이를 만났을 때, 그 애는 이미 죽어 있었어. 아니, 죽는 중이었어. 천천히. 매일. 그리고 난 그걸 보면서 아무것도 못 했어. 왜냐하면 내 아버지가 그걸 원했거든. 내 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을 좋아해. 벽에 부딪혔을 때 쓰러지지 않는 아이들. 부러지지 않는 아이들. 내 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을 모아서 돈을 만들어. 그리고 난 그 아버지의 아들이야. 그 일을 거부할 수 없는 아들이야. 왜냐하면…”
강리우가 자신의 손을 다시 들었다. 떨리는 손. 그것을 세아에게 보였다.
“…왜냐하면 이 손이 음악을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자신 있게 ‘이건 잘못됐다. 넌 도움이 필요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난 먼저 자신을 구해야 하는데, 자신을 구할 수 없으니까.”
세아는 그 손을 봤다. 그 손이 자신의 손과 겹쳤다. 자신의 손도 떨렸다. 자신의 손도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그 음악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강리우는 음악을 포기한 후에 이 상황에 빠졌고, 자신은 음악을 포기하기 전에 이미 이 상황 속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 넌 왜 나한테?”
세아가 물었다. 그 질문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왜 나한테 손을 뻗었어. 왜 나를 보호하려고 했어. 왜 나를 구원하려고 했어. 그게 정말 나를 위한 거야, 아니면 너 자신을 위한 거야.
강리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세아를 마주봤다.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고. 그 눈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두려움. 절박함. 그리고 무언가 더. 세아는 그것을 이름 붙일 수 없었다.
“너를 봤을 때…”
강리우가 말했다. 천천히. 마치 각 단어가 자신을 상처 내는 것처럼.
“…너를 봤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이 너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아직도 불타고 있잖아. 내가 잃어버린 그 불꽃. 그것을 보면서, 난 생각했어. 만약에 내가 너를 지킬 수 있다면. 만약에 내가 너의 불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럼 내 친구가 죽은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내가 포기한 피아노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내 손가락의 떨림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목소리가 깨지는 소리. 남자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드러낼 때의 그 음성.
“그런데 넌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어. 라이터를 켜고. 손가락을 불꽃에 가까이하고. 자신의 곡을 남한테 주고. 자신의 목소리를 버리고. 그렇게 하면서, 넌 내가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어. 왜냐하면 넌 자신을 구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가 너를 구할 수는 없어. 난 자신도 못 구했는데.”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자신의 절망을 치유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생이었다. 아름다운 기생. 따뜻한 기생. 하지만 여전히 기생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갑자기 깜빡였다. 그 순간 세아는 강리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둠. 그리고 다시 밝아진 형광등. 강리우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 있었지만,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그의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넌 뭘 한 거야?”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의 손을 봤을 때, 그 손은 이제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떨림이 없었다. 그것은 더 무서웠다. 떨림이 있을 때는 그래도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손은 돌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끝났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것도 아무 감정 없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뭐?”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너와 나. 너를 지킨다는 내 약속. 너를 구한다는 내 계획. 모두 끝. 이제부터는 넌 그냥 JYA의 계약자야. 다른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난… 난 너를 잊기로 했어. 너의 손가락처럼. 너의 노래처럼. 모두 잊기로 했어. 왜냐하면 나를 구할 수 없는 것을 또 구하려고 하는 건 좀비짓이니까.”
강리우는 편의점 문으로 향했다. 세아는 그를 멈추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편의점의 자동문이 열렸다. 밖의 찬바람이 들어왔다. 새벽의 서울. 4월이지만 여전히 추운 밤. 강리우는 그 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멈췄다.
“파크 소진.”
그가 돌아서서 말했다.
“그 아이도 넌 이용할 거야. 너처럼 너를 이용한 것처럼. 그게 이 세상이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소비품이고, 누군가의 기생충이고, 누군가의 라이터 불꽃이야. 그 불꽃이 꺼질 때까지. 그리고 넌 이미 반쯤 꺼져가고 있어.”
강리우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돌아오지 않았다.
자동문이 닫혔다.
형광등의 윙윙거림만 남았다.
세아는 계산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은 강리우의 손과 달랐다. 강리우의 손은 포기했기 때문에 떨렸었다. 자신의 손은 아직도 뭔가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떨렸다. 그것이 더 나쁜 것인지, 더 좋은 것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이었다. 하늘이었다.
“야 세아, 아직도 편의점 있어? 이 시간에 못 자고 있고?”
세아는 화면을 봤다. 새벽 2시 45분. 하늘은 항상 이상한 시간에 연락을 했다. 마치 세아가 힘들어할 때를 감지하는 것처럼. 세아는 지금 강리우와 나눈 대화를 전부 하늘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응. 아직.”
세아가 타이핑했다.
“지금 가. 집에 가. 라면 끓여줄게. 너 라면 해먹은 지 언제야.”
세아는 화면을 봤다. 하늘의 말은 언제나 단순했다. 가. 자. 자. 먹어. 마. 자. 자. 그 단순함이, 그 반복이, 세아를 살리고 있었다. 강리우의 따뜻한 손보다, 약속보다, 구원보다 더 강력하게.
“알아. 가.”
세아는 계산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떨림을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떨리는 손으로도 라면을 끓일 수 있다. 떨리는 손으로도 노래를 할 수 있다. 떨리는 손으로도 누군가를 안을 수 있다. 떨림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떨림 속에서 살아가면 된다.
편의점의 불을 껐다.
자동문이 열렸다.
밖의 찬바람이 들어왔다.
세아는 그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갔다. 강리우가 갔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골목으로. 자신의 반지하로. 자신의 방으로. 자신의 고양이 장판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새벽 거리는 여전히 비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뒤에서 밝혀져 있었다.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세아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 8시. 하늘의 반지하 문신숍.
“너 진짜 미쳤어. 편의점에서 그 남자 말을 다 들었어? 그리고 그냥 나왔어?”
하늘이 말했다. 그녀는 세아의 앞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냄비의 물이 끓고 있었다. 김이 일어났다. 그 김 속에서 하늘의 얼굴이 흐릿해 보였다.
“응.”
세아가 말했다. 그녀는 하늘의 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팔을 집어넣고. 마치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남자가 ‘우리 끝’이라고 했어? 정말로?”
하늘이 다시 물었다.
“응.”
“씨, 진짜. 남자들은 다 이래. 자기들이 너한테 뭔가를 줄 때는 ‘날 사랑해’라고 하다가, 자기들이 받을 수 없으면 ‘우리 끝’이야. 개 같은 놈들. 근데 넌?”
“뭐?”
세아가 물었다.
“넌 어때? 괜찮아?”
세아는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해야 했다. 슬픈가? 아니다. 분노했는가? 아니다. 후회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남겨진 것은 이상하게도 가벼움이었다. 마치 어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후의 그 가벼움.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응. 괜찮아.”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늘이 라면을 그릇에 담았다. 면, 국물, 계란, 김. 아주 단순한 라면. 하지만 새벽에 먹는 라면은 별처럼 빛났다. 세아는 그 그릇을 받았다. 따뜻함이 손에 전해졌다. 강리우의 손보다 훨씬 더 따뜻한 그 온기.
“먹어.”
하늘이 말했다.
“그리고 넌 뭘 할 거야? JYA 계약은?”
세아는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JYA 계약. 파크 소진. 자신의 곡이 돌아다니는 현실. 강민준이라는 남자. 그 모든 것이 이제 자신의 현실였다. 강리우는 떠났지만, 그 계약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그 계약 안에 있었다.
“모르겠어. 일단은 살아가는 거 같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거지. 넌 지금 살아남고 있어. 그리고 그게 지금은 충분해. 알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면을 더 먹었다.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그 단순함이 지금 세아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넌 어때? 그 강리우라는 남자 본 적 있어?”
세아가 물었다. 갑자기.
“어? 아니지. 근데 왜?”
하늘이 물었다.
“그냥. 뭔가 묻고 싶었어.”
“뭘?”
세아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 남자가 나한테 따뜻했어. 근데 그 따뜻함이… 너의 따뜻함과 달랐어. 너는 내가 힘들 때 라면을 끓여주는데, 저 남자는 내가 힘들 때 나를 바꾸려고 했어. 어느 게 진짜 사랑일까?”
하늘은 세아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둘 다 사랑이 아니야. 라면은 그냥 라면이고, 따뜻함은 그냥 따뜻함이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사랑은 너를 그대로 두는 거야. 그리고 그대로 둔 다음에도 옆에 있는 거야. 그 남자는 넌 그대로 안 둔 거고, 난 그대로 둔 거야. 그래서 넌 내 옆에 있는 거고.”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라면을 더 먹었다. 국물이 따뜻했다. 따뜻함이 위장을 채웠다. 마음은 아직도 춥지만, 적어도 위장은 따뜻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라면 냄새가 반지하 숍 전체를 채웠다. 그리고 그 냄새 속에서, 세아는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강리우의 손이 더 이상 자신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아도 되는 그런 숨.
새벽은 천천히 아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새벽의 무게
## 1부: 남겨진 것들
후회했는가?
세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새벽 3시 47분. 반지하 숍의 천장에서 스며내리는 습기가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천장을 이렇게 오래 본 것이. 강리우와 함께 있을 때는 하늘만 봤다. 그의 눈을 따라, 그의 마음을 따라. 항상 위를 향했다.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그것도 후회가 아니었다.
남겨진 것은 이상하게도 가벼움이었다. 마치 어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후의 그 가벼움. 몸이 떠오를 것 같은, 중력을 거역하는 그런 느낌. 그런데 그 가벼움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었다. 마치 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비행인지 추락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태.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얇은 매트리스 위에 널려 있던 자신의 몸. 반지하 숍에서 제공하는 직원 숙소였다. 창문 위로 보이는 것은 행인들의 다리뿐이었다. 누군가의 검은 구두, 누군가의 운동화, 누군가의 샌들. 수많은 발들이 자신의 세상 위를 걸어다녔다.
강리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세아는 자신을 옭아매던 뭔가가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래 묶여 있던 끈이 끊어지는 소리.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상큼했다.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응. 괜찮아.”
세아가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것이 가장 불가사의한 부분이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이 충분해 보였다.
## 2부: 새벽의 온기
반지하 숍의 주방은 좁았다. 가스레인지 하나, 냄비 몇 개, 그리고 작은 싱크대. 그곳이 전부였다. 하지만 하늘이는 그곳에서 마술을 부렸다.
“라면 먹을래?”
하늘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쌉싸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뭔가 다른 온기가 있었다. 강리우의 목소리에는 없던 그런 온기.
세아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냄비에 물이 끓었다. 보글보글. 작은 거품들이 물 위에서 춤을 추듯 올라왔다가 터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세아는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이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강리우와 함께 있을 때는 배달 음식이 주였다. 깔끔하게 포장된 음식들. 칼로리 계산이 되어 있고, 영양가가 표기되어 있는 음식들.
하늘이가 라면을 냄비에 집어넣었다. 면이 물에 잠겼다가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얽혀 있던 무엇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너 정말 괜찮아? 진짜로.”
하늘이가 물었다. 이번에는 돌아보면서.
세아는 하늘이의 얼굴을 봤다. 친숙한 얼굴. 자신이 얼마나 자주 봐왔던 얼굴인지도 모를 정도로 익숙한. 하지만 그 얼굴에는 이제 뭔가 달라진 게 있었다. 연민?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이해였다.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는 그런 눈빛.
“응. 진짜야.”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가 정말 떠났어? 안 돌아올 거야?”
“모르겠어. 하지만… 난 그걸 바라고 있지 않아.”
하늘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계란 하나를 깨서 냄비에 떨어뜨렸다. 계란이 하얀 거품으로 변했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누가 돌아올지 안 할지가 아니라, 넌 뭘 바라고 있는지가.”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뭘 바라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었다.
흰색 도자기 그릇이 준비되었다. 하늘이가 라면을 담았다. 면, 국물, 계란,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 아주 단순한 라면. 그런데 새벽에 먹는 라면은 다르게 보였다. 마치 별처럼 빛났다.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하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세아는 그 그릇을 받았다.
따뜻함이 손에 전해졌다. 손가락에서부터 시작된 따뜻함이 천천히 손바닥 전체로 퍼져나갔다. 강리우의 손보다 훨씬 더 따뜻한 그 온기. 아니,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강리우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이것은 실질적이었다.
“먹어.”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젓가락을 집었다. 라면을 집어 올렸다. 면이 젓가락에 감겼다. 입에 넣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단순하고 명확한, 거짓 없는 맛.
“그리고 넌 뭘 할 거야? JYA 계약은?”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가 라면을 먹고 있는 동안.
## 3부: 남은 것들
JYA 계약.
그 말을 들으면서 세아의 입 속 라면이 갑자기 맛이 없어졌다. 마치 누군가 음식에 재를 뿌린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맛의 변화가 아니었다. 심리적인 것이었다.
JYA 계약. 파크 소진. 자신의 곡이 돌아다니는 현실. 강민준이라는 남자. 그 모든 것이 이제 자신의 현실였다.
강리우는 떠났지만, 그 계약은 남아 있었다. 마치 그가 자신에게 남긴 최후의 선물처럼. 또는 최후의 저주처럼.
세아는 라면을 계속 먹었다. 국물을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갔다.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도 이제 그것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일단은 살아가는 것 같아. 하루하루.”
하늘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앉았다. 세아 맞은편에. 자신의 라면 그릇을 들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거지. 넌 지금 살아남고 있어.”
하늘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은 충분해. 알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면을 더 먹었다.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그 단순함이 지금 세아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미래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일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만이 전부였다.
반지하 숍의 조명은 희미했다. 누군가 일부러 끈 것처럼. 또는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처럼. 그 희미한 조명 속에서 두 개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 두 개의 미니 우주. 그 안에는 국물이 있고, 면이 있고, 온기가 있었다.
“넌 어때?”
세아가 갑자기 물었다.
“어?”
하늘이가 라면을 먹고 있던 입을 멈췄다.
“그 강리우라는 남자 본 적 있어?”
“아니지. 근데 왜?”
하늘이가 물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냥. 뭔가 묻고 싶었어.”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도 왜 이 질문을 했는지 잘 모르면서.
## 4부: 따뜻함의 종류
“뭘?”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세아는 한참을 생각했다. 라면을 더 먹으면서. 국물을 마시면서. 그 과정 속에서 단어들을 찾아야 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저 남자가 나한테 따뜻했어.”
세아가 천천히 말했다.
“근데 그 따뜻함이… 너의 따뜻함과 달랐어. 너는 내가 힘들 때 라면을 끓여주는데, 저 남자는 내가 힘들 때 나를 바꾸려고 했어.”
세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어느 게 진짜 사랑일까?”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반지하 숍의 작은 주방에서만 소리가 났다.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국물을 마시는 소리. 그 소리들이 새벽의 고요함을 채웠다.
하늘이는 세아의 얼굴을 봤다. 오래 봤다. 마치 그 얼굴에 쓰인 모든 것을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둘 다 사랑이 아니야.”
하늘이가 말했다.
“라면은 그냥 라면이고, 따뜻함은 그냥 따뜻함이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세아는 하늘이를 봤다. 그 말이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명확했다.
“사랑은 너를 그대로 두는 거야.”
하늘이가 계속했다.
“그리고 그대로 둔 다음에도 옆에 있는 거야. 그 남자는 넌 그대로 안 둔 거고, 난 그대로 둔 거야. 그래서 넌 내 옆에 있는 거고.”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정말로 들었다. 귀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배로도. 라면을 더 먹었다. 국물이 따뜻했다. 따뜻함이 위장을 채웠다. 마음은 아직도 춥지만, 적어도 위장은 따뜻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 5부: 새벽의 공기
라면 냄새가 반지하 숍 전체를 채웠다. 그 냄새는 어디서 들어오는 통풍구를 통해 밖으로도 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누군가는 그 냄새를 맡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 위의 세상에서. 행인들의 발이 지나가는 그곳에서.
세아는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깊게. 마치 그것이 자신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무언가인 것처럼.
“넌 정말로 괜찮아?”
하늘이가 한 번 더 물었다.
이번에는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세아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로 괜찮은지. 강리우가 떠났는데. 자신의 곡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는데. JYA라는 계약이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있는데.
“응. 지금은.”
세아가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아. 이 라면이 있으니까.”
하늘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라면을 더 먹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라면을 먹었다. 새벽 3시 47분에서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시계 바늘이 움직였다.
3시 58분이 되었다.
새벽은 천천히 아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반지하 창문 위로 보이는 행인들의 발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출근 중이었고, 누군가는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많은 발들, 그 많은 삶들. 그 중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을까?
세아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하늘이.”
세아가 말했다.
“응?”
“고마워. 정말로.”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면을 더 먹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올렸다. 입에 넣었다. 씹었다. 그 단순한 행동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했다.
강리우의 손이 더 이상 자신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아도 되는 그런 숨. 그것을 세아는 이제 쉬기 시작했다.
새벽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아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에필로그: 새벽에서 아침으로**
라면 그릇이 비워졌다. 국물은 모두 마셔졌다. 면도 모두 먹어졌다. 남은 것은 냄새뿐이었다. 그 따뜻한 냄새. 그 기억의 냄새.
세아는 싱크대에서 그릇을 씻었다. 물이 따뜻했다. 비누가 거품을 냈다. 모든 것이 깨끗해졌다. 마치 새로워지는 것처럼.
하늘이는 침대로 돌아갔다. 자신의 침대로.
세아도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 얇은 매트리스가. 그 좁은 공간이.
창문 위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행인들의 다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감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세상의 경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경계 너머에는, 자신도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라면의 따뜻함으로 충분했다.
새벽의 무게가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