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43화: 베를린의 손가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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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3화: 베를린의 손가락들

세아는 강리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후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계산대 위에서 손가락이 흰색으로 변한 그 손. 자신의 손과 똑같이 떨리는 그 손. 그것을 보는 순간, 뭔가가 깨졌다. 또 다른 깨짐이었다. 세아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깨뜨렸다. 자신감, 꿈, 목소리. 그리고 이제 강리우도 깨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깨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베를린에서 뭐가 있었어?”

세아가 물었다. 형광등의 윙윙거림이 배경이었다. 새벽 2시 15분. 편의점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상품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강리우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계산대에 누르고 있었다.

“난 너한테 얘기할 자격이 없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을 들으면서 세아는 깨달았다. 강리우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였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구원은 항상 상대방을 더 깊은 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이미 얘기했어. 포기했다고. 손가락이 떨렸다고.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손이 굳었다고.”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었다. 떨리는 손. 그 손을 세아 앞에 펼쳤다. 마치 증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근데 왜?”

세아가 물었다. 왜 손가락이 떨렸는지. 왜 손이 굳었는지. 왜 포기했는지. 왜 지금 이렇게 그것을 얘기하는지.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장면이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숨기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큰 상처를.

“20살 때였어. 베를린 음악원. 내가 치던 곡은 쇼팽이었어. 발라드 1번. 그 곡 알아?”

강리우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강리우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 곡은 절망이야. 누군가를 잃은 절망. 그것을 네 손가락으로 표현해야 해. 88개의 건반 위에서. 그리고 난 했어. 완벽하게. 심사위원들은 내 손가락을 봤어. ‘저 손가락은 신의 선물’이라고 했어. ‘이 정도 기술은 본 적이 없다’고 했어. 근데 그 다음날…”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그 멈춤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침묵 속에 가득한 그 무언가.

“그 다음날 뭐가 있었어?”

세아가 물었다.

“내 친구가 죽었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 말은 폭탄처럼 떨어졌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갑자기 밝아 보였다. 세아의 귀가 울렸다.

“죽었다고?”

“자살이었어. 콘서트 홀에서. 공연이 끝난 직후. 그 친구는 내 룸메이트였고, 같은 학년이었고, 같은 콩쿠르에 나갔었어. 그 친구는 떨어졌어. 3년을 준비했는데, 떨어졌어. 그리고 내가 3위를 했어. 그 친구의 꿈을 밟고.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친구는 콘서트 홀의 무대 위에서 수면제를 먹고 죽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목소리가 깨지는 소리.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깨진 것은 다시 붙지 않는다.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그의 얼굴은 형광등 아래에서 창백했다. 마치 유령인 것처럼. 또는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그 다음부터 내 손이 떨렸어. 그 친구의 피아노에 앉으면, 그 친구가 앉았던 곳에 앉으면, 손가락이 굳었어. 소리가 안 났어. 아무것도. 침묵만 있었어. 그리고 난 알았어. 내가 이 친구를 죽였다는 걸. 내 성공이 이 친구의 죽음이라는 걸. 그리고 난 포기했어. 피아노를 했어야 하는데, 그 친구가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난 손을 놓았어. 그리고…”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다시 들었다. 떨리는 손.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

“…그리고 내 아버지가 날 데려갔어. JYA로. 그리고 날 ‘뮤직 프로듀서’로 만들었어. 즉, 음악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음악을 조종하는 사람.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사람. 내가 망친 것을 다른 사람으로 고치려고 하는 사람. 그것이 내 인생이야. 그리고 넌… 넌 그 인생의 마지막 기회야.”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희망인가. 아니면 절망인가. 세아는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세아가 물었다.

“넌 내가 죽인 것을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이야. 넌 노래할 수 있어. 넌 곡을 쓸 수 있어. 넌 살아 있어. 내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어. 그래서 난 너를 보호하고 싶어. 너를 통해서, 내가 죽인 친구를 되살리고 싶어. 그리고 동시에…”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동시에 뭐?”

세아가 물었다.

“너도 죽이고 싶어. 너도 내가 죽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같은 수준이 되게. 그래서 내가 덜 혼자가 되게.”

강리우가 말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가장 끔찍한 진실. 세아는 그것을 들으면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강리우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했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도구로서. 자신의 절망을 공유할 누군가로서.

“그럼 난 뭐야?”

세아가 물었다.

“너는…”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다시 세아의 손 위에 놨다. 따뜻한 손. 하지만 이제 세아는 그것이 따뜻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소유였다. 그것은 지배였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었다.

“넌 내가 구해야 할 사람이야.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을 구해야 할 사람이야. 넌 내 피아노이고, 내 베를린이고, 내 두 번째 기회야.”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강리우의 손에 갇혀 있는 자신의 손. 떨리는 손. 그리고 갑자기, 세아는 깨달았다. 강리우가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손과 같으니까. 그래서 강리우는 자신을 놓지 않는 거였다. 자신이 더 떨리도록. 자신이 더 약해지도록. 그래서 둘이 같은 수준이 되도록.

“내 손을 놔.”

세아가 말했다. 이번에는 청원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강리우는 놓지 않았다.

“강리우. 내 손을 놔.”

세아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힘껏 빼냈다. 강리우의 손이 세아의 손을 놓쳤다. 그 순간, 뭔가가 깨졌다. 또 다른 깨짐.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로.

“너는 내가 뭔줄 알아?”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넌 나를 사람으로 본 게 아니야. 나를 본 게 아니라, 너의 죄책감을 대신할 누군가를 본 거야. 그리고 난 그걸 받아줬어. 왜냐하면 난 약했으니까. 넌 그걸 알았어. 그래서 날 선택한 거지.”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한 발 물러섰다.

“난 지금 가야 해.”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에이프런을 풀었다.

“어디 가?”

강리우가 물었다.

“모르겠어. 여기는 아닌 곳. 너와 함께 있지 않은 곳.”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편의점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강리우는 세아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피했다. 빠르게. 명확하게.

“세아. 나가지 마.”

강리우가 간청했다.

“넌 나한테 뭘 원해? 나를 구하는 척하면서, 실은 나를 죽이고 싶은 거지? 너처럼?”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답이었다.

세아는 편의점의 문을 나갔다. 새벽 공기가 찬 얼굴에 닿았다. 서울의 거리. 마포구의 골목. 그리고 세아는 혼자였다. 처음으로 정말로 혼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였다.

편의점 안에서, 강리우는 계산대 위에 놓인 라이터를 봤다. 세아가 두고 간 라이터. 그것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불을 켰다. 불꽃이 올라왔다. 작고 파란 불꽃. 그것을 보면서 강리우는 생각했다. 베를린에서의 그 날. 콘서트 홀에서. 그 친구의 손가락. 검은색 피아노 위의 손가락. 그리고 다음날, 그 손가락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강리우는 불꽃을 끔으로써 그 기억을 끄려고 했지만, 기억은 꺼지지 않았다. 기억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 타오른다. 마치 성냥 같이. 마치 불꽃 같이. 마치 세아의 목소리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의 휴대폰. 화면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있었다. 강민준. JYA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강리우의 아버지. 그의 지배자.

강리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세아를 놓친 게 아니라, 자신을 놓친 거였다는 걸.

편의점 밖에서, 세아는 거리를 걸었다. 새벽 2시 45분. 서울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깼다. 자신을 깼다. 그리고 그 각성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늘? 미안해. 새벽인데…”

세아가 말했다. 음성메일이었다.

“나 지금 혼자야. 그리고 난 이제 뭘 해야 할지 몰라. 근데 분명한 건… 난 더 이상 누군가한테 지배당할 수 없어. 그게 강리우든, JYA든, 누구든. 난 내 목소리를 찾아야 해. 정말로. 이번엔 진짜로.”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끝냈다.

그리고 새벽의 거리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진짜 울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 새벽의 결정

## 1부: 균열

편의점의 형광등이 세아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GS25의 계산대 뒤, 그녀는 여전히 손에 스캔 건을 들고 있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물론 강리우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결코 그런 작은 것들을 눈치채는 법이 없었다.

“난 지금 가야 해.”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은 거짓이었다. 그 차분함 아래에는 5년이 뭉쳐 있었다. 5년의 침묵, 5년의 순응, 5년의 자기 부정. 그녀는 천천히 에이프런의 끈을 풀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강리우와의 모든 관계가 이렇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세아는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떨렸다.

JYA 엔터테인먼트의 후원 콘서트. 강리우는 VIP 석에서 관중들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세아는 무대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 때,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것이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그것이 함정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녀가 알았다면.

“어디 가?”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없었다. 있었던 것은 통제력이었다. 마치 아버지 강민준이 그에게 대하는 방식 그대로, 강리우도 세아에게 그렇게 대했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 궁금함이 아니라 지배.

세아는 에이프런을 벗어던졌다. 그 동작 자체가 반발이었다. 조용하지만, 명확한 반발.

“모르겠어. 여기는 아닌 곳. 너와 함께 있지 않은 곳.”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목소리가 정말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강리우가 허락한 톤으로만 존재해온 가짜 목소리인가?

편의점의 자동문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아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강리우의 속도에 맞춰졌었다. 그의 음악, 그의 시간표, 그의 욕망.

강리우가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팔 위에 닿으려는 순간, 세아는 몸을 날렸다. 빠르게. 매우 빠르게. 마치 그 손가락이 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아. 나가지 마.”

강리우가 간청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을 보며 세아는 알았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는 것들—순종, 침묵, 통제 가능성—을 사랑했다는 것을.

“넌 나한테 뭘 원해?”

세아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5년 동안 누르고 있던 것이 올라왔다.

“나를 구하는 척하면서, 실은 나를 죽이고 싶은 거지? 너처럼?”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세아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렇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나? 아마도 처음부터. 처음 강리우가 자신을 “구해줄” 때부터.

강리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이 그녀를 찾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답이었다.

세아는 자동문을 통과했다. 새벽 2시 47분. 편의점 밖의 공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차갑고, 신선하고, 낯설었다. 얼마나 오래 밖에 나오지 않았나? 강리우와 함께 있지 않은 밖으로 말이다.

서울의 거리는 거의 비어 있었다. 마포구의 이 골목길은 낮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새벽에는 고스트 타운이었다. 신호등들만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그 신호등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세아는 처음으로 정말로 혼자였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자유였다.

## 2부: 불의 기억

편의점 안에서, 강리우는 계산대 위를 바라봤다. 세아가 벗어던진 에이프런 옆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이터.

작은 검은색 라이터. 세아의 라이터. 아니, 정확히는 세아와 강리우가 함께 사용하던 라이터. 강리우가 들었을 때, 그것은 따뜻했다. 세아의 손에서 막 내려온 것처럼.

강리우는 손가락으로 불을 켰다.

파란 불꽃이 올라왔다. 작고, 반짝이고, 위험한 불꽃.

강리우의 눈이 멀었다. 순간, 그는 여기 있지 않았다. 그는 베를린에 있었다. 5년 전. 콘서트 홀에서.

그 피아니스트의 손가락들이 검은색 피아노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두 번째 악장. 그 느린 악장이 강리우의 가슴을 천천히 짓눌렀다.

그 피아니스트는 강리우의 친구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음날 강민준이 전화를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배자의 목소리만 있었다.

“그 피아니스트가 자살했다. 자동차 사고. 고속도로에서.”

강민준의 목소리에 감정은 없었다. 단지 정보 전달만 있었다. 마치 날씨를 말하는 것처럼.

강리우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강리우는 불꽃을 끄려고 했다. 라이터의 불을 끌 수 있다면, 기억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은 라이터가 아니었다.

기억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기억은 성냥처럼 계속 타오른다. 한 번 불을 붙이면,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불을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그것이 다 타버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 타버린 후에도, 그 재는 영원히 남는다.

강리우의 손이 떨렸다. 그의 손가락이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라이터는 계산대 위에서 바닥으로 굴렀다. 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그것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는 그것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의 아버지. 강민준. JYA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강리우의 지배자.

화면에 “아버지”라는 글자가 떴다. 밤 2시 50분. 아버지가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하나? 아버지는 항상 일을 한다. 일이 곧 삶이었다. 그리고 강리우도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이 강리우의 삶이었다.

강리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손가락들이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그 손가락들이 바이올린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더 근본적으로, 그 손가락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터치할 수 있을까?

강리우는 깨달았다.

세아를 놓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을 놓친 것이라는 것을.

어디서, 어떻게, 언제 자신을 놓쳤나?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강민준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부터. 그 순간부터 강리우는 존재했지 않았다. 강민준의 그림자만 존재했다.

그리고 세아를 만났을 때, 강리우는 자신의 그림자를 세아에게 던졌다. 마치 자신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 3부: 새벽의 목소리

편의점 밖에서, 세아는 거리를 걸었다.

새벽 2시 52분.

서울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세아는 깼다. 5년의 잠에서. 그 깨어남은 폭력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녀의 발걸음은 목표 없이 이어졌다. 강남역? 서울역? 어디든 강리우가 아닌 곳. 그곳이면 충분했다.

그녀의 손이 휴대폰을 집었다.

연락처를 켰다.

“하늘”

세아의 친구. 아니, 세아의 과거. 강리우를 만나기 전의 세아를 아는 유일한 사람.

세아는 전화를 눌렀다.

링 한 번. 링 두 번. 링 세 번.

하늘은 새벽 2시 55분에 깨어 있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일반적인 시간에 자고, 깨고, 먹고, 일한다. 세아처럼 새벽 편의점에서 강리우의 노예처럼 일하지 않는다.

음성메일로 연결됐다.

세아는 깊게 숨을 쉬었다.

“하늘? 미안해. 새벽인데…”

그녀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이 목소리가 자신의 것인가?

“나 지금 혼자야.”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세아는 울음이 치밀었다. 그러나 아직 울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이제 뭘 해야 할지 몰라.”

이것이 진실이었다. 5년 동안 모든 것을 강리우에게 위임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그 지도를 잃었다.

“근데 분명한 건…”

세아는 멈췄다. 거리의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아무도 이 신호등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이 거리를 지나지 않았다.

“난 더 이상 누군가한테 지배당할 수 없어.”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세아의 목소리였다. 진짜 목소리. 처음으로 진짜 목소리.

“그게 강리우든, JYA든, 누구든.”

강리우의 이름을 말하자, 가슴이 아팠다. 그 이름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그 따뜻함 아래에는 얼음이 있었다. 영원한 얼음.

“난 내 목소리를 찾아야 해. 정말로. 이번엔 진짜로.”

세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였다. 그것은 새로 태어남이었다.

“미안해, 하늘. 내가 연락할게.”

전화가 끝났다.

## 4부: 눈물의 도시

새벽의 거리에서, 세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한 신호등 아래에 서 있었다. 빨간 불이 그녀를 물들였다.

그리고 울었다.

처음으로, 진짜로 울었다.

그것은 강리우를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강리우를 떠났다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5년의 눈물이었다. 그 5년 동안 흘려야 했는데 흘리지 못한 눈물. 그 5년 동안 말해야 했는데 말하지 못한 말들. 그 5년 동안 느껴야 했는데 느끼지 못한 감정들.

세아의 어깨가 흔들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새벽의 거리에는 증인이 없었다. 그것이 좋았다. 누군가 본다면, 세아는 다시 자신을 숨겼을 것이다. 누군가가 보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진짜였다.

새벽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태양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하늘이 검은색에서 짙은 파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곧 새가 울 것이다. 곧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곧 이 조용한 거리도 소음으로 가득 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여기는 세아만의 세상이었다.

그녀는 신호등 아래에서 울었다.

강리우는 계산대 뒤에서,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들었다가 놨다를 반복했다.

아버지의 전화는 계속 울렸다.

서울의 하늘은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벽의 도시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다시 찾고 있었다.

세아는 눈물로써.

강리우는 침묵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끝났는지, 아니면 단지 변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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