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6화: 침묵의 언어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경고음이 울렸다. 세아는 계산대에서 고개를 올렸다. 오후 2시 47분. 평일 오후의 합정동 GS25는 거의 비어 있었다. 돈을 내러 온 학생 한 명과 편의점 음식을 데워 먹으러 온 할머니 한 명이 다였다.
들어온 사람은 하늘이었다.
“야.”
하늘이는 카운터 앞에 섰다. 손에 카페 컵을 들고 있었다. 타투이스트의 손. 검은색 잉크가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었다. 하늘이는 세아의 얼굴을 3초간 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넌 지금 죽은 거 같은데 왜 눈이 떠 있어?”
“안녕, 하늘이.”
“안녕 같은 거 하지 말고. 너 며칠 전에 뭐라고 했어? ‘괜찮아. 근데 좀 바빠.’ 이러더니, 지금 봤더니 눈이 들어간 게 반달 모양이야. 반달. 문제 없나?”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이에게 물었다.
“타투샵 왜 나왔어? 업무 시간 아닌가?”
“오픈이 늦어졌어. 어제 밤에 손님이 계속 들어와가지고. 밤 11시까지 했거든. 그래서 오늘은 좀 늦게 가기로 했어. 대신 너한테 밥을 먹이러 왔다.”
하늘이는 카운터 위에 종이봉지를 놓았다. 라면집 봉지. 따뜻함이 나올 정도로 따뜻했다.
“언제 먹었어, 마지막으로?”
“아침에.”
“뭘?”
“편의점 커피.”
하늘이는 한숨을 쉬었다. 깊은 한숨.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한숨. 세아는 그 한숨이 얼마나 오래 저장돼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몇 주. 아니, 몇 달.
“세아야. 진심으로 물을게. 넌 자살할 생각 없지?”
“뭐라고…”
“진심이야. 내가 지금 농담 아니라고. 진심이니까. 넌 지금 천천히 죽고 있는 것 같거든. 몸으로 죽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세아는 라면 봉지를 들었다.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손가락을 거쳐 손목으로, 팔로 올라왔다. 자신의 온도와 음식의 온도가 섞이는 지점. 그 지점에서 세아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누가 이러는 거야? 그 강리우?”
“아니야.”
“그럼 누가? JYA? 그 회사?”
세아는 여전히 라면 봉지를 들고 있었다.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눅눅해지고 있었다.
“난 나 때문이야.”
하늘이가 계산대에 몸을 기댔다. 그것은 금지된 행동이었다. 세아도 매니저 김영희도 계산대에 기대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하늘이는 기댔다.
“이미 이 얘기 했는데, 너 그 계약서 봤지? 45페이지짜리.”
“봤어.”
“그리고 사인했지.”
“응.”
“그럼 넌 지금 뭐를 하고 있어? 계약서를 충실히 따르려고? 아니면 그냥… 혼자 자학하려고?”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면 봉지를 들고 직원용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은 계산대 뒤쪽에 있었다. 1평도 안 되는 공간. 전자레인지와 냉장고, 그리고 플라스틱 의자 하나. 그곳이 세아의 피난처였다.
하늘이는 따라왔다.
“너 아까 강리우한테 뭐라고 했어?”
“뭐 어떻게 알았어?”
“도현이가 나한테 카톡했어. ‘누나 요즘 표정이 없다고 해서 걱정이 된다’고. 그리고 ‘그 사람이 누나 전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아, 세아야. 이건 정상이 아니야.”
세아는 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3분. 조금 있으면 데워질 것이다. 물론 라면은 끓여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 하지만 전자레인지도 나쁘지 않았다. 빠르고, 간단하고, 확실했다.
“강리우는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거야.”
“보호? 감시를 보호라고 부르네. 넌 그 사람 손가락 본 적 있어?”
“응.”
“피아노 손이지? 클래식 피아니스트 손.”
하늘이는 자신의 손을 펼쳤다. 타투이스트의 손. 가늘고, 정확하고, 조금은 까만 손.
“내가 너한테 타투 해줬을 때. 기억해? 쇄골 아래. 그때 넌 뭐라고 했어? ‘아파요. 그런데 좋아요’라고. 그리고 나한테 묻더라고. ‘왜 타투를 해요? 자해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전자레인지가 울렸다. 세아는 라면을 꺼냈다. 김이 나왔다. 뜨거웠다.
“내가 뭐라고 답했어?”
“음… 기억 안 나.”
“’좋은 자해라고 생각해. 내가 선택한 상처. 그리고 그 상처 위에 새로운 의미를 올리는 거야’라고 했어. 기억나?”
세아는 라면을 들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하늘이도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라면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먹지 않았다.
“그 말은 네가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야. 너는 지금 강리우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이건 선택이 아니야. 이건 항복이야.”
세아는 라면을 집었다. 젓가락도 없었다. 손으로 들었다. 국물이 손가락에 떨어졌다. 뜨거웠지만, 아팠지만, 계속 들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 이미 사인했는데.”
“계약서는 깰 수 있어. 변호사 만나면 돼.”
“돈이 없어.”
“내가 돈 낼게.”
세아는 하늘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 검은 머리. 큰 눈. 그리고 그 눈 안의 진심. 세아는 그 진심을 보면서 깨달았다. 하늘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따뜻한지를.
“나는 지쳐. 하늘이. 정말로.”
“알아. 봤어. 근데 지친다고 해서 포기하는 건 아니야.”
“그럼 내가 뭘 해야 돼?”
“먼저 먹어. 라면이 불어.”
세아는 라면을 먹었다. 국물을 마셨다. 면을 삼켰다. 맛이 없었다. 혀가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먹었다. 몸이 기억하는 방식으로.
“강리우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구체적으로.”
“베를린 얘기. 피아노 콩쿠르. 3위.”
“아. 그 남자 진짜 3위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가는 거네. 쌍년이네. 자기 트라우마를 남한테 전가하지 말지.”
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도 예상치 못한 웃음. 라면을 먹으면서 웃으니 국물이 튀었다.
“넌 좀 심하긴 하다.”
“심해야지. 너한테 심하지 않으면 누가 해?”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라면을 계속 먹었다. 라면이 점점 불어갔다. 식어갔다. 하지만 계속 먹었다. 음식을 버리는 것도, 남기는 것도 세아는 할 수 없었다.
휴게실의 형광등이 울렸다. 전자음. 낡은 전자음. 언제부터 이 음이 이렇게 시끄럽게 들렸을까. 아니, 항상 이렇게 시끄러웠을 수도 있다. 세아가 듣지 않았을 뿐.
“너 강리우한테 뭐라고 말할 거야?”
“모르겠어.”
“계약서 깨기 싫어?”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날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음악 때문에? 아니면 그냥…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
하늘이가 라면을 내려놨다.
“그건 그 사람이 정답을 알고 있는 거야. 너가 하는 일은 그냥 그 정답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넌 너무 약해서 결정할 수가 없는 거고.”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먼저 몸을 챙겨. 밥 먹고, 자고, 감기 약 먹고. 너의 몸이 정상이 되면 넌 생각할 힘이 생겨. 생각할 힘이 생기면 선택할 수 있어.”
세아는 라면 국물을 마셨다. 남은 국물. 국물의 온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신체에 전해졌다. 따뜻함이. 아니, 따뜻함이 아니라 생존이 전해졌다.
휴게실 밖에서 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 경고음. 세아는 라면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하늘이도 일어섰다.
“너 몇 시까지 일해?”
“10시.”
“내일은?”
“또 10시까지.”
“매일 10시까지야? 언제 자?”
“자는 사이에 곡을 쓰면 되지.”
하늘이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 한숨은 다른 한숨이었다. 포기의 한숨이 아니라, 결심의 한숨. 세아는 그 한숨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넌 오늘 밤 내가 올 때까지 그 강리우한테 전화 받지 마. 내가 변호사 찾아볼 테니까.”
“하늘이…”
“뭐. 내가 돈이 없다고 했어? 나 타투 많이 한다. 돈 괜찮아. 그리고 넌 내 친구니까.”
하늘이는 계산대로 나갔다. 세아는 그녀를 따라갔다. 손님은 컵라면을 사고 있었다. 20대 남자. 회사원처럼 보였다. 넥타이는 느슨해져 있었고, 셔츠의 소매는 걷혀 있었다. 피곤해 보였다.
하늘이는 컵라면을 바라봤다.
“너도 이런 거 먹고 있네. 우리 다 죽게 생겼어.”
손님은 웃음을 지었다. 쓸쓸한 웃음.
“뭐, 이렇게 사는 거죠.”
“이렇게 살면 안 돼. 너도, 너(하늘이가 세아를 보며)도.”
하늘이는 계산을 끝내고 나갔다. 자동문이 열렸다. 오후 3시 15분의 햇빛이 들어왔다. 강한 햇빛.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름의 습한 열기는 사라지고, 건조한 차가움이 오고 있었다.
세아는 계산대로 돌아갔다. 손님의 컵라면이 계산되어 있었다. 4,500원. 아주 싼 음식. 이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 세아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카톡 알림. 화면을 봤다.
강리우였다.
> “저녁 7시에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얘기가 있어.”
세아는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다시 읽었다. 중요한 얘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또 다른 감시의 방식? 아니면 진짜로 중요한 얘기?
세아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움직였다. “네” 라고 쓸 수도 있었다. “아니오” 라고 쓸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시간을 끄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메시지를 읽음 표시로 남겨두었다. 그것도 하나의 대답이었다. 침묵의 대답. 거절도 수용도 아닌, 단지 그 순간을 미루는 대답.
편의점의 형광등이 계속 울렸다. 그 울음은 마치 누군가의 신음처럼 들렸다. 울고 있는 건 형광등이 아니라 세아였을 수도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도 없이. 단지 내부에서 무너져내리는 울음.
오후 3시 26분. 아직 6시간 34분이 남아 있었다. 6시간 34분 동안 세아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계속 서 있을 것인가. 손님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강리우의 메시지에 답장할 것인가.
세아는 계산대에 팔을 올려놓았다. 팔이 차갑게 느껴졌다. 형광등의 빛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온도가 떨어진 것일까.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았다.
휴게실에서는 여전히 라면 냄새가 났다. 국물 냄새. 국물에 녹아 있는 누군가의 정성. 하늘이의 정성. 세아는 그 냄새를 마셨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어떻게 살아가는 거야.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면서.
그것은 세아 자신의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목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질문은 계속 울려 퍼졌다. 편의점의 형광등처럼. 멈추지 않고, 끝나지 않고, 단지 울기만 하는 울음처럼.
손님이 또 들어왔다. 이번엔 여자였다. 30대로 보였다. 편의점 도시락을 사러 왔다. 세아는 손님을 맞이했다. 웃음을 지었다. 아니, 웃음을 지으려고 했다. 얼굴의 근육을 움직였다. 그것이 웃음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리우의 메시지는 여전히 읽음 표시로만 남아 있었다.
저녁 5시 30분. 세아의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30분 뒤면 다음 알바생이 들어올 것이고, 세아는 계산대를 떠날 것이고, 강리우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세아는 계산대를 닦고 있었다. 하나하나 닦으면서 생각했다. 7시. 그곳은 어디일까. 강남역 주차장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딘가일까. 강리우는 항상 자동차 안에서 세아와 만났다. 폐쇄된 공간. 도피할 수 없는 공간. 하지만 또한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공간.
“세아 언니.”
계산대 옆에 누군가가 섰다. 새벽 아르바이트생 김도희였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 때문에 밤에만 일했다.
“응?”
“혹시 어제 삼각김밥 세 개 팔았어요? 아이유 같은 언니한테?”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유 같은 언니? 그런 손님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본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이 흐릿했다.
“모르겠는데?”
“아, 그냥… 어제 그 언니가 물어봐서요. 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언니 있냐고. 조용한 사람. 손가락이 예쁜 사람이라고.”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예쁜 사람. 그것은 세아를 설명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누가 세아를 찾고 있었을까.
“그 언니 뭐라고 했어?”
“이름은 안 말했는데… 뭔가 슬픈 표정이었어요. 막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나가던데. 이상한 멜로디였어요. 마치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세아는 도희를 바라봤다. 도희는 순진한 얼굴로 세아를 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순진함. 아직 세상을 모르는 순진함.
“그런 사람 또 오면, 나한테 말해줄래?”
“네? 왜요?”
“그냥… 내가 알아야 할 사람일 수도 있어서.”
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는 계산대를 떠났다. 휴게실로 가서 짐을 챙겼다. 작은 가방. 그 안에는 감기약과 몇 개의 곡 스케치가 들어 있었다. 곡 스케치. 세아의 유일한 재산. 그것도 이제는 JYA의 재산이었다.
세아는 편의점을 나갔다. 오후 5시 45분. 강한 햇빛이 남아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었지만, 여름의 열기도 남아 있었다. 두 계절이 섞인 오후.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강리우의 메시지는 여전히 읽음 표시로만 있었다. 아직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리우는 알림을 계속 보낼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전화를 할 때까지.
세아는 메시지를 썼다.
> “좋아요. 7시에 만날게요.”
엔터를 눌렀다.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그 순간, 세아는 또 다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항복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항복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비록 가장 약한 선택일지라도.
핸드폰이 울렸다. 즉시.
강리우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도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 “언니가 밤 늦을 거야. 밥 먹고 자.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전화 오면 받지 마.”
도현이는 즉시 답장했다.
> “누나… 뭐 해?”
세아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강리우와의 약속 시간으로 가기 위해 걸었다. 합정역 방향. 강남으로 가는 방향. 빛이 사라지는 방향.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세아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침묵은 거절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다음 말에 있다.
강리우가 세아에게 할 다음 말이 무엇일지, 세아가 그에게 할 다음 말이 무엇일지.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었다.
강남역 주차장. 같은 장소. 같은 자동차. 하지만 다른 시간. 저녁 6시 58분. 2분 남았다.
세아는 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리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이미 있었을 수도 있었다. 차 안에서 세아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세아는 차 문을 열었다.
강리우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옆 좌석은 비어 있었다. 세아는 탔다. 문을 닫았다. 에어컨의 소리. 강남역의 소음. 그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안녕.”
강리우가 말했다. 그 한 마디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질문도, 확인도, 사과도.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불꽃이 아니라, 번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태우는 번개.
12,847자 (공백 포함)
# 침묵의 언어
## 1부: 계산대에서의 결정
“사람일 수도 있어서.”
도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편의점 형광등 아래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많은 무게를 담고 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세아는 계산대를 떠났다. 발걸음이 묵직했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공기가 점성 있게 느껴졌다.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는 좁았고, 벽은 너무 가까워 보였다. 휴게실의 문을 밀어열었을 때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에어컨이 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휴게실은 아무도 없었다. 오후 5시 30분경, 교대 시간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로커 앞에 섰다. 작은 금속 상자. 그 안은 비어 있다시피 했다. 물병 하나, 그리고 작은 가방. 그 작은 가방 안에는 감기약 몇 개와 수첩이 있었다. 아니, 수첩이 아니었다. 곡 스케치였다.
세아는 가방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으로 가방의 끝을 만졌다. 천 재질, 낡았지만 견고했다. 이 가방을 샀을 때를 기억했다. 서툰 손으로 직접 수를 놓았던 날. 그때는 꿈이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꿈. 세상을 흔드는 곡을 만들 거라는 어리석은 꿈.
가방을 열었다. 감기약 상자들. 약국에서 받은 것들. 그리고 그 아래, 구겨진 악보 몇 장. 스케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 음표들이 줄 위를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떤 곡들은 반도 못 채웠다. 어떤 곡들은 제목도 없었다.
*곡 스케치. 내 유일한 재산.*
세아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아니, 이제는 재산도 아니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은 JYA의 소유가 되었다. JYA라는 회사의 자산. 그곳의 ‘잠재성’이라는 카테고리 아래 분류된 어떤 것. 세아는 이제 자신의 것을 가지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음악도.
세아는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로커도 닫았다. 금속 문이 ‘딱’ 소리를 냈다. 목젖이 아프게 불렸다.
## 2부: 저무는 오후
편의점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오후 5시 45분. 강한 햇빛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의 성질이 변했다. 더 이상 뜨거운 빛이 아니라, 황금색으로 물든 빛이었다. 가을이 천천히 오고 있었지만, 여름의 열기도 아직 남아 있었다. 두 계절이 대기 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아는 편의점 앞 가로수 아래 서 있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아직 초록색이지만, 끝자락에는 갈색이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의 죽음도 천천히 온다, 세아는 생각했다. 급작스럽지 않다. 서서히, 조용히, 피할 수 없게.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이 밝아졌다. 강리우의 메시지는 여전히 읽음 표시가 되어 있었다. 파란 체크 표시. 읽었다는 증거.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세아는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세아야, 우리 얘기 좀 하자. 저녁 7시. 강남역 주차장. 제발.’*
그 메시지가 왔을 때부터 세아의 손가락은 떨렸다. 답장을 시작했다가 지웠다. 몇 번을 반복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싫어’? ‘안 돼’? 아니면 대화 자체를 거부해야 할까?
*강리우는 계속 알림을 보낼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전화를 할 때까지.*
세아는 키보드를 눌렀다. 한 글자씩, 천천히.
>> “좋아요. 7시에 만날게요.”
손가락이 엔터 위에서 맴돌았다. 엔터를 누르는 것이 마치 어떤 거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아니, 항복이었다.
*항복도 하나의 선택이다. 비록 가장 약한 선택일지라도.*
엔터를 눌렀다.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화면에 ‘전송됨’ 표시가 떴다.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강리우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 그것이 진짜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을 설득하는 것. 자신을 항복시키는 것. 그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즉시였다.
*부르릉, 부르릉.*
강리우였다. 이름이 화면에 떴다. 세아는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렸다가 치웠다. 다시 올렸다가 다시 치웠다. 진동이 손의 온기를 흡수했다.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도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막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 자신이 지켜내야 할 사람.
>> “언니가 밤 늦을 거야. 밥 먹고 자.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전화 오면 받지 마.”
‘그 사람’. 강리우를 지칭하는 세아의 방식. 이름도 부르기 싫은 그런 사람. 하지만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 자신의 음악을 빼앗은 사람.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잡은 사람.
도현이의 답장이 바로 왔다.
>> “누나… 뭐 해?”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가 멈췄다.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자신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아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걸었다.
## 3부: 길의 의미
합정역 방향. 강남으로 가는 방향. 빛이 사라지는 방향.
세아의 발걸음은 자동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길을 몇 번이나 걸었는가. 강리우를 만나기 위해.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거리의 소음이 귀를 채웠다.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버스의 엔진음. 건설 소음. 누군가의 목소리. 누군가의 웃음. 이 도시는 항상 시끄러웠다. 침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아의 머릿속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리듬이 없었다. 심장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아는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빨간불. 건너편은 백화점이었다. 그 건너편은 강남역이었다. 그 아래는 주차장이었다. 강리우의 자동차가 있는 주차장.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택한 이 길이 정말로 자신의 선택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강요인지. 자신의 발이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인지, 아니면 끌려가는 것인지.
*침묵은 거절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될 수도 있다.*
이 깨달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영혼에서? 자신의 직관에서? 아니면 자신이 읽은 어떤 책에서?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차이는 다음 말에 있다.*
강리우가 자신에게 할 다음 말. 자신이 그에게 할 다음 말.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었다. 이 관계가 끝나는지, 아니면 계속되는지. 자신이 항복하는지, 아니면 일어나는지. 자신의 음악이 되돌아오는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지는지.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세아는 건넜다.
## 4부: 강남역 주차장
강남역 주차장은 지하였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 콘크리트의 냄새와 자동차의 냄새가 섞인 곳. 세아는 입구에서 핸드폰의 손전등을 켰다. 불빛이 어둠을 헤쳤다.
같은 장소. 같은 자동차. 하지만 다른 시간.
저녁 6시 58분. 정확히 2분이 남았다.
세아는 자동차의 옆에 섰다. 검은 색 세단. 강리우의 자동차. 그 안에 강리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유리창이 어두웠다. 햇빛 차단 필름이 붙어 있었다.
세아는 차 문에 손을 올렸다. 손잡이는 따뜻했다. 햇빛을 받아서일 것이다. 아니, 햇빛은 이미 사라졌다. 그럼 무엇 때문에 따뜻할까? 누군가가 최근에 만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리우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세아는 문을 열었다.
강리우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어둡지만, 그의 실루엣은 분명했다. 옆 좌석은 비어 있었다. 세아는 탔다.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울렸다. 마치 새장의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찬 공기가 얼굴을 쓸었다. 강남역의 소음이 담장 너머로 들렸다. 사람들의 목소리. 자동차의 경적. 이 지하 공간도 외로운 것 같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동차 안은 고요했다.
강리우가 입을 열었다.
“안녕.”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질문. ‘넌 괜찮아?’, ‘우리 괜찮아?’. 확인. ‘넌 나를 아직도 믿어?’, ‘우리는 아직도 우리야?’. 그리고 사과.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저질렀을 모든 것에 대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주차장의 벽. 회색 콘크리트. 그 벽에 붙은 포스터들. 영화 광고. 새로운 카페 광고. 사라질 것들의 광고들. 그 포스터들 사이로 누군가 쓴 낙서가 있었다. 이름. 전화번호. 사랑한다는 말.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누군가의 절망.
*세아는 깨달았다.*
이것은 불꽃이 아니었다. 불꽃은 두 사람이 만날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서로를 소비하면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것. 하지만 이것은 불꽃이 아니었다.
이것은 번개였다.
번개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태운다. 아름답지 않다. 파괴적이다. 그 빛은 아름답지만, 그 효과는 치명적이다. 번개를 본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도망친다. 숨는다.
세아는 자신이 번개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번개가 언제 치는지, 어디를 태우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리우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세아는 귀를 닫았다. 그의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침묵이 자신의 대답이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주차장의 조명이 깜빡였다. 잠깐. 그 순간, 강리우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피곤한 표정. 기대하는 표정. 그리고 무언가 다른 감정. 세아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강리우의 입가가 움직였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세아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주차장의 조명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려왔다.
완전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침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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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3자 (공백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