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35화: 3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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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5화: 3위의 무게

강리우의 손가락이 핸들을 누르고 있었다. 하얀 손가락. 피아노 손. 3위를 받은 손가락.

세아는 침묵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강리우는 눈을 감았다. 차 안의 에어컨이 계속 윙윙거렸다. 강남역 일대의 소음이 창밖에서 들렸다. 사람들의 발걸음, 택시의 경적, 건설 소음. 그 모든 것이 2시간 전의 대화를 덮고 있었다.

“3위면 대단한 거 아니야?”

세아가 물었다. 그것은 진정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리우를 구해주려는 시도였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강리우는 눈을 떴다.

“1위와 2위는 기억돼.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는 세계가 기억해. 하지만 3위는? 3위는 거의 4위처럼 취급받아. 상금도 적고, 투어 제안도 없었어. 아버지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강리우는 키를 돌렸다. 엔진음이 울렸다. 하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넌 실패했다. 이제 다른 길을 찾아라.’ 베를린 콩쿠르 3주일 뒤였어. 내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벌써 내 다음 계획을 짜고 있었어. JYA의 A&R로 만들겠다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게 하겠다고.”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강리우와 자신이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계획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인형들.

“그래서 넌 피아노를 그만뒀어?”

“그만둔 게 아니라… 할 수 없게 됐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처음으로 그렇게 갈라진 목소리를 세아는 들었다.

“3위를 받은 후로 손이 굳어. 피아노 앞에 앉으면 손가락이 떨려. 마치 다시 실패할 것 같아서. 의사는 심리적 문제라고 했어. 트라우마, 불안장애, 뭐 이런 식으로. 하지만 그건 다 거짓이야. 진짜 이유는… 내가 자신이 없어진 거야. 음악에 대한 자신이.”

그 말이 끝난 후, 차 안의 침묵은 다른 질감이 되었다. 슬픔의 침묵. 좌절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세아는 강리우를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희생자였다.

“그래서 넌 내게…”

세아가 천천히 말했다.

“날 지키려고 하는 거야. 내가 너처럼 무너지지 않도록.”

“그래. 그리고…”

강리우가 운전석에서 몸을 돌려 세아를 마주봤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남자가 우는 것. 세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세아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도현이는 아직 눈물을 참을 줄 아는 나이였다. 하지만 강리우는 눈물을 참지 않고 있었다.

“너를 내가 만들고 싶어. 아버지가 원하는 그런 음악가가 아니라. 그냥… 너 자신이 되는 음악가. 그걸 보고 싶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세아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 강리우의 손을 잡거나 놓거나 하는 선택. 두 가지 길 모두 불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강리우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도현이한테 뭐라고 했어? 너 문자에서.”

“’내일 저녁 같은 시간에 만나자. 아무도 만나지 말고.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

“도현이가 뭐라고 봤어?”

“그건 내가 몰라. 근데 아마 무섰을 거야. 17살이 느끼는 그런 직감. 그게 정확할 때가 많지.”

강리우가 손을 거두었다. 거절을 받아들이는 손의 움직임. 세아는 그것이 얼마나 큰 자존심의 손상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필요한 거절임을 알고 있었다.

“난 너를 보호할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걸 시도하는 사람은 사실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고.”

세아가 차창에 손을 대었다. 유리가 따뜻했다.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난 지쳐. 이 모든 게.”

그 말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다른 종류였다. 이것은 이해의 침묵이었다. 절망의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했다.

강리우는 차를 출발시켰다. 강남역에서 나왔다. 압구정로로 접어들었다. 명품 가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세아는 창밖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리들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아는 강리우에게 말했다.

“박소진 봤어?”

강리우의 손이 핸들 위에서 경직되었다.

“왜?”

“JYA 신인. 데뷔한 지 3주일 됐어. 내가 쓴 곡 두 개 부르고 있어.”

“알아.”

“사진으로만 봤는데 눈이 이상했어. 마치 자신이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는 그런 눈. 그런 표정.”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대답이었다.

“넌 그 여자를 알지?”

“모르지.”

“거짓말 하지 마. 넌 거짓말을 잘 못 해. 목소리가 바뀌어.”

강리우는 한숨을 쉬었다. 항복의 한숨이었다.

“알아. 박소진은 내가 2년 전에 만났던 여자야. 음악을 진짜 사랑하는 그런 여자. 그런데 음악이 돈이 되는 순간, 그 돈이 누군가의 것이 되는 순간 모든 게 망가져.”

“그래서?”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JYA는 아버지의 회사고, 박소진은 이미 계약을 했고, 그 계약은 변경 불가능한 거고…”

강리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서 날 보호하려고 했구나. 내가 박소진처럼 되지 않도록.”

세아가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깨달음이었다.

강리우는 운전을 계속했다. 신호등에 걸렸다. 빨간 불. 그들은 멈춰 있었다.

“넌 강민준의 아들이야. 그리고 난 강민준의 음악가야. 그럼 넌 날 보호할 수 없어. 아버지 앞에선.”

세아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차갑지만 정직했다.

“그래.”

강리우의 대답은 한 음절이었다. 하지만 그 한 음절에는 세상의 모든 절망이 담겨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차가 움직였다.


세아가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15분이었다. 편의점은 오후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알바생인 이소윤이 담당하는 시간이었다. 이소윤은 대학생이었다. 경영학과. 세아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아, 세아 언니! 어디 다녀왔어?”

이소윤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있었어?”

“아니 그냥… 언니 요즘 계속 외출했다가 들어오잖아. 괜찮아?”

세아는 물을 마셨다. 편의점의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 미지근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좋았다. 뜨거운 것, 차가운 것, 모두 견딜 수 없었다.

“괜찮아.”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이 진짜 기술이었다.

이소윤은 만족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이 예의였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예의. 아무도 아무도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

세아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편의점의 뒤쪽에 있었다. 작은 공간. 냉장고, 책상, 의자, 그리고 몇 개의 서류 보관함. 세아는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이메일이 와 있었다. JYA 엔터테인먼트에서.

발신자: Park In-cheol (박인철)

제목: 음악 프로젝트 – 긴급 회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JYA 사무실에 나올 것.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 박인철의 사인과 함께 강민준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세아는 이메일을 읽고 다시 읽었다. 세 번. 네 번. 하지만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강민준이 원하는 것. 그것이 이 이메일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카카오톡. 하늘이로부터.

“야 나세아. 넌 뭐해?”

세아는 답장을 했다.

“편의점.”

“또? 요즘 진짜 편의점만 산다. 근데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언제 시간 돼?”

세아는 생각했다. 오늘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해야 했다. 그 사이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새벽 1시? 홍대?”

“알겠어. 그 시간에 클럽 앞에서 봐.”

카톡이 끝났다. 세아는 노트북을 다시 켰다. 이메일에 답장을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가겠습니다. – 나세아”

버튼을 눌렀다. 이메일이 발송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뭔가를 넘겨줬다는 것을. 자신의 내일을. 자신의 선택지를.

사무실의 형광등이 세아의 얼굴을 하얀색으로 칠했다. 거울처럼 작용하는 노트북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것은 누구의 얼굴이었을까.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8시간의 편의점 시간이 흘렀다.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밤을 새는 사람들. 밤을 피하는 사람들. 밤을 원하는 사람들. 세아는 그들을 모두 봤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새벽 1시 15분. 세아는 이소윤에게 30분 휴식을 신청했다. 편의점 알바의 특권. 한 번에 30분까지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30분은 자신의 시간이었다.

홍대 클럽 거리. 밤이 깊어질수록 더 활발해지는 거리. 클럽 입구 앞에서 하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늘이는 담배를 피웠다. 세아는 모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세아가 물었다.

“이건 넌 모르고 있는 부분인데… 나 요즘 누구랑 사귀고 있어.”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의 눈이 커졌다.

“그 타투이스트?”

“아니. 그건 3년 전이고. 지금은… 음. 복잡해.”

하늘이는 담배를 피우면서 하늘을 봤다. 홍대의 하늘은 도시 불빛으로 주황색이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뭔데?”

“배우. 인디 영화 배우. 이름 뭐였더라… 암튼 그 사람이랑 한 3개월 됐어. 근데 요즘 이상해. 내가 그 사람을 진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이 날 좋아해 주니까 좋아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

“너도 그래? 강리우 때문에?”

“응?”

“아니 그냥… 넌 표정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눈은 이상해. 마치 너 자신이 아닌 것처럼.”

하늘이가 담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밟았다.

“내일 뭐 할 거야?”

“회의. JYA에서 불렀어.”

“뭔 회의?”

“모르겠어.”

하늘이는 세아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바라봤다.

“너 그 계약서 후회해?”

세아는 생각했다. 후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새벽 1시 45분. 세아는 편의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은 시간 5시간 15분. 그것을 견뎌내야 했다. 아침 7시까지. 그 다음 오전 10시까지 기다렸다가 JYA로 가야 했다.

홍대에서 합정동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검었다. 언제 지워질까. 아니면 영원히 남을까.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처럼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이소윤은 혼자 계산대에 서 있었다. 한 고객이 있었다. 노숙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우유 한 팩을 사고 있었다. 4,500원. 돈을 세고 있었다. 동전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세아는 이소윤의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 노숙인을 봤다. 그의 손가락도 검었다. 세아는 알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타버리고 있다는 것을.

아침 7시가 되었을 때, 세아는 편의점을 나왔다. 햇빛이 강했다. 오후 1시쯤의 햇빛 같은 강렬함. 하지만 아침 7시였다. 시간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단지 세아의 감각이 미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갔다. 고시원의 반지하 방. 장판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 먹이를 받을 시간을. 세아는 고양이에게 밥을 줬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누웠다.

시간은 8시 30분이었다. 1시간 30분 안에 준비해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반지하의 창문 위로 사람들의 다리가 지나갔다. 누군가의 운동화, 누군가의 하이힐, 누군가의 슬리퍼.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만 여기에 남아 있었다.

오전 9시 45분. 세아는 일어났다. 씻지 않은 채로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청바지. 회색 후드.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철. 2호선. 6호선. 교대역 환승. 신논현역 하차. JYA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보였다. 30층짜리 빌딩. 유리로 지어진 건물. 세아는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25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아는 알았다.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계약서에. 저작권 이전 동의서에. 강민준의 눈빛 속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민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철도. 그리고 한 명이 더. 여자. 세아는 그 여자를 봤다.

박소진이었다.

박소진이 세아를 봤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세아는 알았다. 박소진도 자신처럼 불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꽃은 누구를 위한 불꽃인지.

강민준이 입을 열었다.

“나세아씨. 드디어 만났네요.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분이 박소진입니다. 우리의 신인 아티스트. 그리고 당신의… 음악 파트너가 될 분입니다.”

박소진과 세아는 계속 서로를 봤다. 그들의 눈 속에는 같은 것이 있었다. 깨달음. 배신감.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그 희망이 불꽃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강민준은 웃었다.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 많습니다. 정말 많아요.”

그 말이 끝난 후, 세아는 결정했다.

자신은 이제 강민준의 불꽃이 아니라, 자신의 불꽃이 될 것이라고.

비용이 얼마든 상관없이.


화의 종료. 다음화를 기대하세요.

# 불타는 손가락들

## 제1부: 회색빛이 물드는 아침

세아는 편의점의 냉동실 앞에 서 있었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어제 밤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몸 전체가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편의점 바닥은 축축했다. 누군가 흘린 액체가 말라가는 중이었고, 그 위에서 먼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마치 그 작은 먼지 입자 하나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계산대 근처에서 일하는 알바생이 세아를 흘깃 봤다. 그 시선이 불편했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고 세아는 생각했다. 아마도 절망의 표정. 혹은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는 표정.

그때였다.

노숙인이 들어왔다.

남자였다. 오십 대쯤 될 것 같았는데,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얼굴이 해에 그을렸고, 피부는 거칠고 주름이 많았다. 그의 손은 더욱 끔찍했다. 손가락들이 검게 타 있었다. 마치 불에 그을린 것처럼.

세아는 그 손을 봤다. 그리고 순간 깨달음이 밀려왔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타버리고 있구나.’

그 생각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노숙인의 손가락, 자신의 손가락,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 모두가 어떤 불에 그을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불.

세아는 그 노숙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눈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같은 절망. 같은 권태. 같은 타오름.

아침 7시 정각.

세아는 편의점을 나왔다.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햇빛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세상 위에 쏟아부은 액체 같았고,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세아는 눈을 찌푸렸다. 햇빛의 강렬함은 오후 1시 정도의 햇빛 같았다. 아니, 더 강했을 수도 있었다. 마치 정오의 햇빛이 모든 에너지를 한 점으로 모아 내려쏟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은 아침 7시였다.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화면에 명확히 07:00이라고 떴다. 시간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세아는 시간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아니, 이미 자신의 감각이 미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세아는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침 7시. 직장으로 가는 사람들. 학교로 가는 사람들. 운동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정상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상해 보였다. 마치 시뮬레이션 속의 인물들처럼. 미리 정해진 궤도 위에서만 움직이는 로봇들처럼.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각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에 쇠사슬을 감아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손잡이를 잡았다. 금속의 차가움이 손가락을 통해 몸으로 전달되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실제 같은 감각이었다.

## 제2부: 반지하의 침묵

고시원으로 돌아간 것은 약 7시 15분경이었다.

3평도 안 되는 반지하 방. 세아는 이 공간을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무덤이라고 하기도 실례가 될 정도로 좁고 어두웠다. 창문은 지면 바로 위에 있었고, 그 창문으로는 사람들의 다리만 보였다. 누군가의 운동화. 누군가의 구두. 누군가의 슬리퍼. 그 다리들은 끊임없이 지나가갔다.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목적지가 있었다.

하지만 세아만 여기에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장판이가 울음을 냈다. 검은색 고양이. 이 방의 유일한 생명. 장판이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매일 아침 7시 30분이 되면, 먹이를 받을 시간이라는 것을. 세아는 잠깐 장판이를 바라봤다. 그 작은 동물의 눈에는 절대적인 확실성이 있었다. 내일도 밥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부러웠다.

“알았어, 장판아.”

세아는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낮고 허약한지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고양이 사료를 그릇에 부었다. 하얀 자기 그릇. 거의 깨어질 것 같았다. 그것도 곧 버려질 것이겠지. 모든 것처럼. 세아는 생각했다.

침대에 누웠다. 시멘트 천장이 바로 위에 있었다. 천장에는 금이 가 있었다. 그 금이 지도처럼 보였다.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 하지만 그것도 허상일 뿐이었다. 천장은 천장일 뿐. 그 위에는 또 다른 방이 있고, 그 위에는 또 다른 방이 있을 뿐.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에 시간이 떴다. 08:30.

‘1시간 30분.’

오디션이 9시 30분이었다. 아니, 오디션이 아니었다. 강민준이 보낸 메시지에는 ‘프로젝트 미팅’이라고 쓰여 있었다. 미팅. 그 단어가 주는 부담감은 오디션이라는 단어보다 더 컸다. 오디션은 탈락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하지만 미팅은 이미 결정된 무언가를 알려주는 자리 같았다.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1시간 30분이 있었지만,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미 어딘가에 묶여있는 것 같았다. 팔목에. 발목에. 목에.

반지하의 창문으로 사람들의 다리가 계속 지나갔다. 빠르게. 목표를 향해. 세아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만 여기에 남겨져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오전 9시 45분.

세아는 일어났다.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움직임은 느렸다. 마치 물 속에서 걷는 것처럼.

씻지 않았다. 물이 필요했지만, 물을 쓸 에너지가 없었다.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거울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그 거울 속의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청바지. 회색 후드. 무겁고 어두운 색깔들. 마치 자신을 더 작게, 더 눈에 띄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강민준으로부터. 심지어 자신으로부터도.

머리를 만졌다. 아침에 씻지 않아서 엉망이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도 이미 결정된 것의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제3부: 강남역 라인

2호선. 어둡고 답답한 지하철. 창문 너머의 검은 터널. 마치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 9시 50분. 여전히 러시아워였다. 직장인들. 학생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세아는 그 흐름에 휩쓸려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창백했다. 마치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혹은 이미 죽어있는 것처럼.

6호선으로 환승했다. 교대역. 군중 속에서 밀렸다. 어깨가 다른 사람의 어깨와 부딪혔다. 따뜻한 체온. 하지만 그것도 세아에게는 차가웠다.

신논현역. 하차.

지상으로 올라왔다. 햇빛이 또 다시 내려쏟아졌다. 이제 낮의 시간이었다. 햇빛이 강하다고 해서 놀라지 않았다. 이미 낮이었으니까.

거리를 걸었다. 강남의 거리. 비싼 건물들. 비싼 옷을 입은 사람들. 세아는 자신이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곳은 자신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강민준 같은 사람들의 땅이었다.

JYA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보였다.

30층짜리 빌딩. 반짝반짝한 유리로 지어진 건물.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모아놓은 것처럼. 세아는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 목이 아플 정도로 위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내가 저 위에 올라가야 한다.’

그 생각은 마치 판결문 같았다.

## 제4부: 엘리베이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거대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바닥. 천장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창. 그리고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있는 여자들. 모두가 세아를 보며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듯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거울로 된 엘리베이터. 세아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정말로 초라해 보였다. 회색 후드. 정해진 길 위의 작은 그림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25층.

문이 닫혔다.

상승했다. 1층. 5층. 10층. 15층.

상승할수록 세아의 심장이 빨라졌다. 마치 폭탄이 내 가슴 속에서 틱틱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폭탄이 25층에서 터질 것 같았다.

20층. 22층. 24층.

마지막 초. 마지막 숨.

엘리베이터가 감속했다.

‘이제 끝이다.’

세아는 생각했다. 그 순간 깨달음이 밀려왔다.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계약서에. 저작권 이전 동의서에. 강민준의 눈빛 속에. 그리고 이 엘리베이터 위에. 바로 몇 층 위에.

자신은 단지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제5부: 만남

25층.

강민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두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미소. 하지만 그 눈은 냉정했다. 마치 얼음 같은 눈. 세아는 그 눈을 본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눈 속에는 감정이 없었다. 있는 것은 계산뿐이었다.

박인철도 있었다. 강민준의 옆에. 조용하고 위험한 남자. 세아는 그를 본 순간 뭔가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의 손. 그 손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여자.

세아는 그 여자를 봤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검은색 롱 드레스를 입은 여자. 긴 검은 머리. 창백한 피부. 그리고 그 얼굴. 그 얼굴은 세아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박소진.”

세아는 중얼거렸다.

박소진이 세아를 봤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박소진의 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깨달음. 배신감. 그리고… 희망? 아니. 아주 작은 희망. 혹은 희망이 될 수도 있는 불꽃. 마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켜놓은 작은 촛불처럼.

세아는 그 불꽃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박소진도 자신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누구를 위한 불꽃이 아니었다. 어떤 남자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박소진 자신을 위한 불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박소진은 알고 있었다.

강민준이 입을 열었다.

“나세아씨. 드디어 만났네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꿀처럼. 하지만 그 아래에는 철강 같은 경직된 것이 숨어있었다.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프로젝트. 그 단어가 반복되었다. 마치 주문처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모든 말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강민준은 계속했다.

“이 분이 박소진입니다. 우리의 신인 아티스트. 그리고 당신의… 음악 파트너가 될 분입니다.”

음악 파트너.

그 말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숨어있을까.

박소진과 세아는 계속 서로를 봤다. 그들의 눈 사이에는 대화가 오갔다. 말이 아닌 대화. 더 깊은 대화.

‘넌 왜 여기 있어?’

‘넌 왜 여기 있는데?’

‘우리 둘 다 갇혔다.’

‘그럼 우리 둘 다 탈출할 수 있을까?’

그들의 눈 속에는 같은 것이 있었다. 깨달음. 배신감. 절망.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강민준은 웃었다.

그의 웃음은 마치 얼음이 깨지는 소리 같았다. 차갑고 위험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 많습니다. 정말 많아요.”

그 말이 끝난 후.

세아는 결정했다.

‘자신은 이제 강민준의 불꽃이 아니라, 자신의 불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비용이 얼마든 상관없이.’

박소진의 눈과 다시 마주쳤다. 그 눈에도 같은 결정이 있었다.

두 여자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결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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