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2화: 노래가 되기 전에
밤 11시 47분. 세아의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아무것도 아닌 문장들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공정한 교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 문장은 4번이나 지워졌다.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또 지웠다. 마치 자신의 생각 자체가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장판이가 세아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고양이는 따뜻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세아는 고양이의 등을 만졌다. 털 위로 먼지가 묻어 있었다. 고시원의 공기는 항상 먼지로 가득했다. 어디서 오는 먼지인지 모를 그것들이 떠다니고, 침전되고, 다시 떠올랐다.
“너는 왜 자야 해야 해?”
세아가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 먹고, 자고, 따뜻한 곳을 찾고. 그게 전부인가.
핸드폰이 울렸다. 밤 11시 50분. 알림은 카카오톡이 아니었다. 전화였다. 화면에는 “도현”이라고 떴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동생이 전화를 할 리가 없었다. 세아는 즉시 받았다.
“왜?”
“누나… 미안해.”
도현의 목소리는 작았다. 안에서 무언가를 짓누르고 있는 목소리. 세아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뭐가? 뭐 있어? 엄마는?”
“엄마는 주무셨어. 난 잠깐 화장실 다녀왔는데… 누나 핸드폰에 강남에서 온 문자가 있었어. 화면이 켜져 있었거든.”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는 도현이에게 핸드폰을 맡기지 않았는데, 아이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같은 집에 살았고, 같은 화면을 공유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
“’내일 저녁 같은 시간에 만나자. 아무도 만나지 말고, 특히 하늘이 같은 친구는.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이 정도였어. 누나, 그 사람 누구야? 그리고 하늘이를 왜 만나면 안 돼? 하늘이는 누나 친구 아니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이 메어 있었다. 도현이는 계속 말했다.
“누나, 미안해. 진짜 미안한데… 그 사람 좋은 사람 아닌 것 같아. 나 느낌 있잖아. 그 문자 읽으니까 뭔가… 조금 섬뜩했어. 그리고 누나 목소리 요즘 이상해. 자는 것처럼 말해.”
“괜찮아. 괜찮으니까 자.”
“약속 깼어. 밥을 제대로 먹으라고 했잖아.”
도현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끝내려는 힘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이 대화를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자신의 거짓이 아이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것을.
“미안해. 진짜로. 내일 전화할게. 자자.”
“누나…”
“응?”
침묵이 흘렀다. 전화 안의 침묵은 다른 종류의 음악이었다. 주파수, 미세한 노이즈, 그 사이의 무한한 거리.
“사랑해.”
도현이가 말했다.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게로.
세아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전화를 끊은 후, 세아는 화장실로 갔다. 욕실 거울은 오래되었다. 가장자리가 곰팡이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낯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얇았을까. 언제부터 눈이 이렇게 컸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랬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걸까.
세아는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손가락으로 검은 자국을 문질렀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때가 아니라 손가락 자체에 스며든 색깔인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처럼.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밤은 12시 8분이 되어 있었다. 편의점에 나가야 할 시간이 2시간 남았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장판이는 여전히 따뜻했다. 고양이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의심 없고, 완벽했다.
내가 이 고양이처럼 살 수 있을까. 그냥 따뜻하면 되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그런 삶.
세아는 눈을 감았다.
편의점은 밤 2시가 되면 조용해졌다.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 시간대의 손님들은 대부분 밤을 새는 사람들이었다. 밤샘 공부를 하는 학생, 밤샘 작업을 하는 직장인, 밤을 피해서가 아니라 밤을 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조용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단지 물건을 사고 가는 것뿐.
세아는 편의점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손에는 바코드 스캐너가 들려 있었다. 무게는 거의 없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거워졌다. 8시간. 매일 8시간. 일주일에 56시간. 한 달에 240시간. 손가락이 이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새벽 2시 37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대략 서른 즈음으로 보였다.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풀려 있었다. 술 냄새가 났다. 그 남자는 진열대를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그냥 돌아다녔다. 5분, 10분. 15분이 지났을 때 남자는 계산대로 왔다.
“담배 줄게.”
세아는 담배를 꺼냈다. 어떤 종류인지 묻지 않았다. 보통 손님들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세아는 자신이 사로 가진 모든 담배를 하나씩 제시했다. 남자는 세 번째 담배를 가리켰다.
“여기.”
세아는 담배를 스캔했다. 빛이 반짝였다. 피이이이익. 그 소리가 밤의 침묵을 깼다.
“넌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
남자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객과의 불필요한 대화는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했다.
“계산해 봐. 시급이 몇 이야? 아, 그것도 물어보기가 그려? 그럼 다른 걸 물어볼게. 넌 지금 행복해?”
세아의 손이 멈췄다. 계산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의 눈이 그녀를 바라봤다. 술 취한 눈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진지함이 있었다.
“5900원입니다.”
세아가 말했다. 남자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세아는 카드 리더기를 건넸다. 남자는 카드를 넣었다 빼냈다. 빛이 깜빡였다. 거래 완료.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넌 노래를 하는 것 같은데.”
남자가 다시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이상했다. 처음 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아는가.
“아니에요.”
“아니야? 그럼 내가 실수했네. 미안해. 그냥 너를 봤을 때 뭔가 노래를 하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니가 아니라니. 그럼 다른 애일 수도 있겠네. 아, 미안해. 술 먹은 사람 말은 무시해. 안녕.”
남자는 담배 팩을 들고 나갔다. 그의 정장 뒷모습은 밤의 거리에 빨려 들어갔다.
세아는 카운터에 기대앉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낯선 사람이 자신을 알아본 것처럼.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단지 술 취한 사람의 헛소리였다.
새벽 3시 15분, 세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카톡 알림이었다. 화면을 확인했을 때 발신자는 하늘이였다.
하늘이 (새벽 3시 15분)
야 아직도 안 와? 뭐하는 거야? 진짜 답답한데 내가 먼저 얘기할게. 그 강남 남자 말이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좋은 놈도 아니야. 뭔가 너를 소유하려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너는 그걸 모르고 있어. 아니, 알지만 받아들이는 건가? 진짜 모르겠어.
세아는 이 메시지를 읽으면서 숨을 참았다. 강리우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만나지 말고, 특히 하늘이 같은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엇으로부터의 보호인가.
답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하늘이 (새벽 3시 22분)
답장 안 해? 진짜야. 나한테 뭐라도 해. “하늘아 괜찮아” 이것도 좋고, “나 잘 지내” 이것도 좋고. 뭐라도 해 진짜.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 형광등의 빛.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
새벽 4시 47분, 강리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강리우 (새벽 4시 47분)
내일 저녁 만나자. 같은 시간에. 중요한 게 있어.
세아는 읽음 표시를 눌렀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을 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말해진 것 같았다. 단지 자신이 그걸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
새벽 5시 정각. 새로운 직원이 들어왔다. 아침 번을 담당하는 서른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항상 웃으며 들어왔고, 항상 “수고했어”라고 말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밤은 어땠어?”
“평상.”
“손가락은 괜찮아? 자꾸 까매지더니.”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까만 자국은 여전했다. 지워지지 않는 것. 자신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네. 괜찮습니다.”
편의점을 나온 시간은 새벽 5시 12분이었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11월 말의 추위는 이미 겨울의 추위였다. 세아는 얇은 옷을 걸쳤다. 겨울에도 두꺼운 옷을 입지 않는 이유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추위를 느끼고 싶어서? 아니면 자신이 얼어붙어야 한다는 어떤 필연성을 믿고 있어서?
합정역으로 가는 길에 세아는 한강변에 들어갔다. 새벽이 되면서 조깅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빨간 불빛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다. 마치 움직이는 신호등처럼. 세아는 한강의 난간에 기대앉았다.
물은 여전히 흘렀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계절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물의 운명인 것처럼.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 개의 손가락. 각각이 다른 크기였다. 엄마의 손가락도 이렇게 생겼을까. 해녀로서 물속에 자주 들어갔던 엄마의 손가락도. 아니면 더 작았을까.
엄마, 미안해. 난 당신이 해주신 것들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어.
세아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아무도 듣지 않는 새벽에. 한강이 들었을 뿐이다.
조깅하는 여자가 지나갔다. 그녀는 세아를 보고 잠깐 속도를 늦췄다. 마치 낯선 사람이 위험해 보였던 것처럼. 하지만 곧 다시 속도를 올렸다. 자신의 리듬을 되찾으려고.
세아는 다시 일어섰다. 고시원으로 가야 했다. 짧은 수면. 그리고 오후의 일. 그리고 저녁의 강리우. 그리고 밤의 편의점. 그리고 새벽의 자신. 모든 것이 반복될 것이었다.
새벽 6시 12분, 세아는 고시원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장판이는 여전히 따뜻했다. 세아는 고양이를 안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를 누가 가져갔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단지 고양이의 심장박동이 그녀의 귀에 전달될 뿐이었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목표는 정확히 한 시간의 수면이었다. 6시 12분부터 7시 12분까지. 그 사이에 꿈을 꿀 시간이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눈을 감으면서 세아는 생각했다. 강리우가 말한 “보호”라는 것의 정의를.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것과 어디가 다를까. 사랑한다는 것과 지배한다는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 생각을 끝내지 못한 채, 세아는 잠들었다. 6시 47분. 꿈을 꾸지 않은 짧은 수면. 마치 자신이 꿈을 꿀 자격이 없는 것처럼.
오후 2시, 세아는 눈을 떴다. 일어나지는 않았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물때 자국이 있었다.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이 방은 계속해서 낡아갈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핸드폰을 켰다. 메시지는 7개가 있었다. 도현이 3개, 하늘이 2개, 강리우 1개. 그리고 하나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알 수 없는 번호 (오전 9시 33분)
안녕하세요. 저는 박인철 프로듀서입니다. JYA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계약건에 대해 진행 사항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오늘 오후 4시에 사무실로 나올 수 있으신가요? 확인 부탁합니다.
세아의 심장이 빨라졌다. 박인철. JYA의 프로듀서. 그는 자신에게 처음 계약을 제시했던 사람이었다. 왜 이제 연락하는 걸까. 계약서는 아직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세아는 강리우에게 메시지를 했다.
세아 (오후 2시 3분)
박인철 프로듀서가 연락했어요. 오후 4시에 JYA에 오라고. 뭘 하는 거예요?
강리우의 답변은 즉시 왔다.
강리우 (오후 2시 3분)
너는 가면 돼. 내가 할 일이 있어.
세아는 이 답변을 읽으면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명. 안내. 혹은 보호.
세아 (오후 2시 4분)
무서워요.
강리우 (오후 2시 4분)
내가 옆에 있어. 항상.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강리우는 항상 옆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필요한 순간에만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스스로 정의했다. 세아는 그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오후 3시 15분, 세아는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몸을 데웠다. 한 번도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의 뜨거움은 다시 느껴지는 것처럼 처음이었다. 그녀는 물 위에 손을 펼쳤다. 물이 손가락을 통과했다. 검은 자국은 여전했다.
옷을 입고 나올 때, 세아는 거울을 봤다. 거울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눈, 가는 목, 손에 남은 검은 자국. 그녀는 누구인가.
오후 3시 45분, 세아는 집을 나섰다. 강남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같은 길. 같은 깊이. 하지만 오늘따라 지하철이 더 깊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지표면 아래로 계속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올라올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할 때까지.
[12,847자]
#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 첫 번째 장: 깨어남의 순간
눈을 감으면서 세아는 생각했다. 강리우가 말한 “보호”라는 것의 정의를.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것과 어디가 다를까. 사랑한다는 것과 지배한다는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 질문들은 마치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처럼 잡힐 듯하면서도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세아의 머릿속에서는 강리우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내가 너를 보호해줄게.” 그 말이 처음 들렸을 때는 얼마나 따뜻하게 들렸던가. 하지만 지금, 그 말은 다르게 들렸다. 마치 쇠사슬을 선물처럼 포장하고 있는 목소리처럼.
아니면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것이—강리우와의 만남, 계약, 손에 남은 검은 자국들—정말로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뭔가 거대한 악몽의 일부일까.
그 생각을 끝내지 못한 채, 세아는 잠들었다.
밤은 깊었고, 그녀의 의식은 천천히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침대의 찬 시트와 가슴 위의 무거운 압박감이었다.
**6시 47분.**
꿈을 꾸지 않은 짧은 수면. 마치 자신이 꿈을 꿀 자격이 없는 것처럼.
—
## 두 번째 장: 오후의 소환
**오후 2시.**
세아의 눈이 떠졌다. 천장을 바라봤다. 일어나지는 않았다. 움직이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웠다. 마치 수심 깊은 바다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것처럼, 그 어떤 힘도 자신을 위로 끌어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천장에는 물때 자국이 있었다. 갈색으로 변색된 것들.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이 방은 계속해서 낡아갈 것이었다. 벽의 페인트가 벗겨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추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세아는 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봤다. 검은 자국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무리 비누로 문질러도, 아무리 뜨거운 물로 씻어도, 그것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그것들이 피부에 스며들어 그녀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핸드폰을 켰다.**
화면이 밝아졌다. 알림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메시지 7개.
도현이 3개, 하늘이 2개, 강리우 1개. 그리고 하나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세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번호. 그것이 뭘까. 혹시 경찰일까. 혹은…
**알 수 없는 번호 (오전 9시 33분)**
> 안녕하세요. 저는 박인철 프로듀서입니다. JYA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계약건에 대해 진행 사항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오늘 오후 4시에 사무실로 나올 수 있으신가요? 확인 부탁합니다.
박인철.
그 이름만으로도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JYA의 프로듀서. 그는 자신에게 처음 계약을 제시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전의 일이었나. 며칠 전인가. 아니, 그것도 기억이 애매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혹은 너무 느리게 흘렀다.
왜 이제 연락하는 걸까. 계약서는 아직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강리우가 뭔가 말했었나. 그는 “생각해봐”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절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계속 기다리라는 뜻인지는 불분명했다. 강리우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명확하지 않게.
세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강리우에게 메시지를 했다. 화면을 눌 때마다 그녀의 손가락에 검은 자국이 핸드폰 화면에 닿았다.
**세아 (오후 2시 3분)**
> 박인철 프로듀서가 연락했어요. 오후 4시에 JYA에 오라고. 뭘 하는 거예요?
그녀는 메시지를 보낸 후 숨을 참았다. 강리우의 답장을 기다렸다. 보통 그는 빨리 답장을 했다. 마치 항상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강리우 (오후 2시 3분)**
> 너는 가면 돼. 내가 할 일이 있어.
세아는 이 답변을 읽으면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명. 안내. 혹은 보호.
강리우는 보통 더 자세히 설명했다. 혹은 최소한 그녀가 할 일을 명확히 지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할 일이 있어”라는 말 속에는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아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녀는 다시 메시지를 했다.
**세아 (오후 2시 4분)**
> 무서워요.
이것이 가장 솔직한 메시지였다. 박인철을 만나러 가는 것이 무섭다. 강리우가 자신을 배신할 것 같다. 혹은 강리우가 자신을 더 깊은 어둠으로 끌어당길 것 같다.
**강리우 (오후 2시 4분)**
> 내가 옆에 있어. 항상.
세아는 이 메시지를 읽으면서 뭔가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강리우는 항상 옆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필요한 순간에만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스스로 정의했다. 지난 며칠 동안, 세아는 그것을 깨달았다.
강리우가 “옆에 있다”는 것은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때가 아니라,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할 때였다. 그는 마치 사냥꾼처럼, 먹이가 스스로 덫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세아는 그 덫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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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장: 준비
**오후 3시 15분.**
세아는 샤워를 했다.
욕실의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한 번 숨을 쉬었다. 물을 틀었다. 처음에는 차가웠다. 그 차가운 물이 등을 타고 흐르면서 그녀는 깨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얼음장 위에 누워 있다가 누군가가 그녀를 깨우는 것처럼.
그 후 물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물이 몸을 데웠다. 스팀이 욕실을 가득 채웠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한 번도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의 뜨거움은 다시 느껴지는 것처럼 처음이었다.
아니다. 이것은 통증이었다.
뜨거운 물의 통증.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으면서, 세아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들을 물 위로 펼쳤다. 물이 손가락을 통과했다. 시냇물처럼, 흐르는 물처럼.
검은 자국은 여전했다.
세아는 손가락을 부비고 또 부비었다. 손톱 사이의 검은 것들을 빼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것들이 자신의 피부의 일부인 것처럼.
아, 그렇구나. 세아는 생각했다. 이것들은 자신의 것이다. 이 검은 자국들은 더 이상 외부의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나 자신이다.
그녀는 물을 끄고 몸을 닦았다. 욕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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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고 나올 때, 세아는 거울을 봤다.**
거울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눈. 가는 목. 손에 남은 검은 자국.
그녀는 누구인가.
세아는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봤다. 거울 속의 여자도 세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유리 뒤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아니, 그 여자는 이미 유리 뒤에 갇혀 있었다.
세아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옷을 입었다. 검은 셔츠. 회색 바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 옷.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을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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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장: 내려감
**오후 3시 45분.**
세아는 집을 나섰다.
거리는 여름의 햇빛으로 가득했다. 햇빛이 콘크리트에 반사되었다. 세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이 너무 밝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눈을 태우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아래로, 아래로.
지하철역의 냄새가 났다. 기름때, 먼지, 사람들의 땀. 그 냄새들이 섞여 있었다. 세아는 호흡을 천천히 했다. 마치 그 냄새들을 들이마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강남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같은 길. 같은 깊이. 하지만 오늘따라 지하철이 더 깊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지표면 아래로 계속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올라올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할 때까지.
세아는 창밖을 봤다. 터널 속의 어둠이 흘러갔다. 그 어둠 속에서 가끔 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 불빛들은 곧 사라졌다. 마치 그것들도 깊은 어둠에 삼켜지는 것처럼.
지하철이 움직였다. 승객들이 탔다. 내렸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옆에 앉은 여자가 그것을 봤을까. 아니, 아무도 보지 않았다. 아무도 세아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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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장: 강남으로의 여행
지하철이 강남역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일어섰다.
사람들의 흐름이 그녀를 밀어냈다. 모두가 위로, 위로 향하고 있었다. 세아도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다시 햇빛이 있었다. 강남의 거리. 높은 건물들. 비싼 가게들. 모두가 성공해 보였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세아는 지도를 확인했다. JYA 엔터테인먼트는 여기서 5분 거리였다.
그녀는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가 세아와 부딪혔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단지 무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열면 무엇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오후 3시 58분.**
JYA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보였다. 유리와 강철로 만든 건물. 그 안에 들어가면 뭐가 될까.
세아는 건물 앞에 섰다. 자동문이 열렸다. 마치 그것도 이미 정해진 일인 것처럼.
로비는 밝고 차가웠다. 대리석 바닥. 스테인리스 스틸 엘리베이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완전히 미완성된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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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번째 장: 기억과 의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세아는 자신의 결정들을 되돌아봤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강리우를 만나기 전, 자신은 뭐 했을까. 그것도 기억이 안 난다. 마치 그 시간들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진 것처럼.
강리우.
그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왜 그럴까. 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세아는 들어갔다. 버튼을 눌렀다. 15층.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각 층을 지나갔다. 5층, 10층, 15층.
세아는 창문을 통해 서울의 전경을 봤다. 도시가 점점 작아졌다. 마치 자신도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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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번째 장: JYA 사무실
**오후 4시 정각.**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JYA 엔터테인먼트의 15층. 복도는 조용했다. 벽에는 연예인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모두 웃고 있었다. 완벽한 미소들.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자신이 그 사진들 위에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도 그렇게 웃어야 할까.
수신처를 찾았다. 젊은 직원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인철 프로듀서와 약속이 있어서요.”
직원은 자신의 컴퓨터를 봤다. 그 후 세아를 봤다.
그 눈빛이 뭘까. 연민일까, 아니면 경멸일까.
“아, 네. 프로듀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쪽이에요.”
세아는 그 방향으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각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느껴야 했다.
문 앞에 도착했다. “박인철 프로듀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아는 노크했다.
“들어와.”
그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세아는 문을 열었다.
—
## 여덟 번째 장: 박인철
박인철의 사무실은 넓었다. 창문을 통해 서울 전체가 보였다. 그는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역광이 그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었다.
“앉아.”
세아는 앉았다. 그의 책상 맞은편.
박인철은 세아를 잠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처럼.
“계약서를 받았을 거야.”
“네. 하지만 아직…”
“아직 제출하지 않았다. 왜?”
세아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제출하지 않았을까. 강리우가 말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뭔가 느낀 걸까.
“강리우 때문이야?”
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박인철이 강리우를 알고 있었다.
“그를 알고 계세요?”
박인철은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