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1화: 침묵의 무게
핸드폰 화면이 밝혀졌을 때 세아는 이미 합정역에 도착해 있었다. 지하철의 흔들림 속에서 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람들이 내렸다 탔다. 강남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모두 내렸다. 혹은 다른 선으로 갈아탔다. 세아만 남겨졌다. 아니, 세아는 남겨지지 않았다. 세아는 처음부터 여기 사람이었다.
핸드폰 알림 창에는 하늘이의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읽지 않은 것들만 4개.
하늘이 (오후 8시 47분)
야 뭐해
하늘이 (오후 9시 12분)
진짜 강남에 있어?
하늘이 (오후 9시 33분)
시발… 아무것도 말 없고 계속 저 남자만 만나네
하늘이 (오후 9시 44분)
내일 타투숍 와. 진짜.
세아는 메시지들을 읽으면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한 글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강리우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만나지 말고, 특히 하늘이 같은 친구는. 그 말이 지금 와서야 제대로 깨달아지고 있었다. 보호라는 이름의 감금. 안전이라는 이름의 고립.
강리우의 말을 따르면,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세아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민준의 사람일 수도 있고, 강리우 자신일 수도 있었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답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늘이에게 답장하는 것 자체가 하늘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정역 5번 출구. 세아는 거기서 내렸다. 역을 나온 건 밤 10시 25분이었다. 늦은 밤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 귀가하는 직장인들, 야식을 먹으러 가는 젊은이들. 이 모두가 어떤 선택을 해서 이 시간에 이 거리에 있는 것일까. 세아는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리듬을 유지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고시원 골목은 더 어두웠다. 한 대의 택시가 지나갔고,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아는 자신의 방 열쇠를 찾았다. 녹슨 열쇠. 이 열쇠가 세아의 세상의 전부였다. 이 문 안에는 세아의 모든 것이 있었다. 침대, 책상, 노트북, 그리고 장판.
방에 들어섰을 때 장판이가 울었다. 길고 외로운 울음. 고양이는 자신의 주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세아는 고양이를 안았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것의 온기는 이렇게 간단했다. 강리우의 손처럼 따뜻하지도 않고, 조건부도 아니었다. 단순히 따뜻했다.
“내가 망가진 거야?”
세아가 중얼거렸다. 장판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항상 대답을 거부했다. 세아는 고양이를 내려놓았고,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을 켰다. 밤 10시 37분.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도현이의 카톡이 왔다.
도현 (오후 11시 2분)
누나 뭐해? 엄마가 누나 밥 먹었냐고 계속 물어봐
세아는 이 메시지를 읽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 제주에 있는 엄마. 세아는 엄마와 통화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아니, 통화를 피했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약했다고? 강남의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자신의 음악을 포기했다고?
세아 (밤 11시 3분)
밥 먹었어. 엄마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해
도현 (밤 11시 3분)
또 거짓. 누나 손가락 봤어? 자꾸 까매진다고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도현이가 맞았다. 손가락 끝이 자꾸만 검어졌다. 편의점 바코드 스캐너, 강리우의 손, 카페의 차가운 테이블. 모든 것이 자국을 남겼다.
세아 (밤 11시 4분)
알겠어. 내일 밥 제대로 해 먹을게
도현 (밤 11시 5분)
약속?
그 한 글자의 질문이 세아를 멈추게 했다. 약속.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얼마나 많이 떨어져 나갔는가. 강리우와의 약속, 강민준 앞에서의 약속, 도현이와의 약속, 하늘이에게 했던 모든 약속들. 세아는 약속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약속을 깨고 있었다.
세아 (밤 11시 5분)
약속할게
화면을 끈 후, 세아는 노트북의 메모장을 열었다. 새 문서를 만들었다. 제목은 비워뒀다. 그리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공정한 교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 선택, 자유. 그런 것들은 한 번 잃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아는 이 문장을 다 쓰고 난 후 화면을 바라봤다. 이건 뭔가. 노래의 가사일까, 아니면 자신의 일기일까.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요즘 세아의 모든 것이 그랬다. 음악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밤 11시 15분.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세아는 한 번 놀랐다가 받았다.
“여보세요?”
음성은 여성이었다. 낮고 딱딱한 목소리. 마치 금속을 긁는 듯한 느낌.
“나세아 씨?”
“네, 맞습니다.”
“저는 JYA 엔터테인먼트의 A&R 팀 매니저입니다. 박인철 PD가 너에 대해 언급했으니까 전화를 드렸어요. 내일 오후 2시에 회사에 와. 강남역 9번 출구에서 나가면 JYA 빌딩이 보일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서는 가져오지 말고. 우리가 새로운 계약서를 준비했어.”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다이얼 톤.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새로운 계약서. 강리우가 말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강민준이 자신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통제의 방식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밤 11시 20분. 세아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하늘이에게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이 가장 안전한 답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묵은 거짓이 아니었다.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일 뿐이었다.
대신 세아는 노트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계속 타이핑했다.
이 도시에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 많다. 돈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혹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너무 위험해서. 그들은 밤마다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세상이 자신을 잊어버리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잊지 않는다. 세상은 그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노동을, 그들의 침묵을, 그들의 사라짐을.
문장이 끝나자 세아는 화면을 마주 봤다. 이건 무엇인가. 자신이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를 쓰고 있었다. 강리우와의 약속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누구의 것일까.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이미 강민준의 것일까.
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밤 12시. 새로운 날이 시작됐다. 내일은 JYA 엔터테인먼트에 가야 한다. 새로운 계약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서명할 것이다. 강리우가 원하니까. 강민준이 원하니까. 도현이의 학원비 때문에.
세아는 노트북을 닫았다. 저장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노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장판이가 다시 울었다. 이번에는 짧은 울음이었다. 마치 포기하는 울음처럼. 세아는 고양이를 안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누구에게 미안한 것일까. 자신에게? 도현이에게? 하늘이에게? 아니면 장판이에게?
밤 12시 30분. 세아는 잠이 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물 속으로. 엄마가 물 속에 있을 때처럼, 자신도 지금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면 위의 누군가가 자신이 올라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올라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때, 세아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새벽 5시. 편의점으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휴가였다. 아니, 해고는 아니었을 것이다. 강리우가 그것도 해결했을 것이다. 강리우는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세아의 일, 도현이의 학원비, 그리고 세아의 미래.
그 대신 세아는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을 준비해야 했다. JYA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새로운 계약서를 위해. 새로운 삶을 위해.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했다.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누구였을까. 어제의 세아였을까, 아니면 이미 다른 누군가였을까.
화장대를 열었다. 강리우가 주지 않았지만, 하늘이가 주었던 립스틱이 있었다. 빨간색. 세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아침 8시. 도현이가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했다.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자신의 얼굴을 닮은 얼굴. 같은 눈, 같은 턱선. 하지만 도현이의 눈은 아직 밝았다. 세아의 눈은 이미 어두웠다.
“누나, 오늘 회사 가?”
도현이가 물었다.
“응. 오후에.”
“뭐 하는 회사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음악 회사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그건 음악을 파는 회사였다. 음악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좋은 회사야. 너한테 좋은 일이 될 거야.”
거짓말을 했다. 그것도 형식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을 했다. 도현이는 그 거짓말을 믿었다. 혹은 믿기로 했다.
“그래. 화이팅 누나.”
도현이가 학교에 갔다. 세아는 혼자 남겨졌다. 고시원의 방.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 햇빛 속에서 세아는 먼지를 볼 수 있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아무도 본 적 없는 먼지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다.
정오가 되자 세아는 준비를 끝냈다. 옷을 입었다. 강남에 갈 수 있는 옷.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검은 패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아는 헌옷 가게에서 사온 회색 카디건을 입었다. 아직도 낡아 보였지만, 어제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오후 1시 30분. 세아는 지하철을 탔다.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철. 어제와 같은 노선이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어제는 강리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오늘은 자신의 음악을 포기하러 가는 길이었다.
강남역 9번 출구. 세아는 거기서 내렸다. 그리고 건물을 찾았다. 회색의 건물. 거울처럼 반사되는 유리.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사무실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무실들 안에는 음악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흉내 낸 무언가였을 것이었다.
세아는 건물 앞에 섰다. 입구에는 초인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세아는 자신이 지금 감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민준이 그녀를 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강리우도. 그들 모두.
세아는 초인종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나세아입니다.”
음성이 나왔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제 전화를 건 사람일 것이었다.
“올라와.”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세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위로 올라갔다. 층이 올라갈수록 세아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 하나를 켤 때마다 따뜻해지지만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올라갔다. 5층. 10층. 15층. 그리고 마침내 20층.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강민준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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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닮은 얼굴, 다른 눈빛
## 1부: 아침, 거짓말의 시작
거울 속의 두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같은 높이의 광대뼈. 같은 각도의 턱선. 엄마 쪽에서 물려받은 그 특유의 인상—마치 누군가를 계속 관찰하고 있는 듯한, 예리하면서도 외로운 눈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닮음은 거기서 멈췄다.
도현이의 눈은 아직도 밝았다.
17살 고등학생의 눈이 가져야 할 그런 밝음. 아침 햇빛에 반사되는 눈동자처럼,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눈. 아직 세상이 주는 상처가 많지 않아서, 혹은 상처를 받아도 그것을 낙관으로 덮어버릴 수 있는 나이의 눈. 도현이는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있었다. 누나를 믿고, 미래를 믿고, 자신의 꿈을 믿고 있었다.
세아의 눈은 이미 어두웠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세아는 자신의 눈을 인식했다. 어제는 아직도 희망이라는 게 남아있던 눈이었다면, 오늘은… 오늘 아침의 눈은 뭔가 결정된 사람의 눈이었다. 항복한 사람의 눈. 24살이라는 나이가 이렇게 오래 된 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누나, 오늘 회사 가?”
도현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세아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동생이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학교 가기 전의 그 한순간, 다섯 분 정도의 남은 시간을 핸드폰으로 채우는 고등학생. 세아는 그런 동생이 부러웠다. 아니, 부러운 게 아니라… 그냥 괜히 더 잘해주고 싶었다.
“응. 오후에.”
세아의 대답은 짤막했다. 씻은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고 있었다. 고시원의 작은 화장대에 놓인 화장품들은 모두 백화점 명품이 아니라 편의점 상품들이었다. 하지만 저렴한 것도 어느 정도 오래 두면 피부에 밀착되어서, 마치 고급 제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걸 세아는 알고 있었다. 그건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거짓을 자주 반복하면, 어느 순간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진다.
“뭐 하는 회사야?”
도현이가 다시 물었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건 호기심이 아니라 그냥… 아침의 일상적인 대화. 형과 누나가 나누는 평범한 대화. 하지만 세아에게는 그 평범함이 얼마나 무거운지, 도현이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음악 회사야.”
세아는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입으로 내보내는 순간, 세아는 알았다. 그건 거짓이었다. 진짜 거짓은 단어가 아니라 의도였다.
그 회사는 음악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음악을 파는 회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음악을 사는 사람들의 돈을 파는 회사였다. 강민준의 회사는 처음부터 음악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돈을 위한 공간이었다. 음악은 단지 돈을 끌어당기는 미끼일 뿐이었다.
“좋은 회사야. 너한테 좋은 일이 될 거야.”
세아는 다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번 거짓말은 도현이를 위한 거였다.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동생을 위한 거짓말. 그런 거짓말도 존재하는 걸까?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다시 봤다. 파운데이션이 잘 펴져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더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다. 마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아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게 맞다. 강민준을. 강리우를.
“그래. 화이팅 누나.”
도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순수했다. 자신의 누나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그런 웃음. 세아는 자신의 거짓말이 도현이의 웃음 속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느꼈다.
거짓말은 확산된다. 한 번의 거짓말은 두 번째 거짓말을 낳고, 두 번째는 세 번째를 낳는다. 마치 물감이 물에 퍼지듯이, 거짓말도 점점 더 많은 것을 물들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당신은 어떤 부분이 진실이고 어떤 부분이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도현이가 가방을 챙겼다.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세아는 동생의 뒷모습을 봤다. 여전히 그 뒷모습은 희망차 보였다.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는, 아직도 길을 잃지 않은 사람의 뒷모습.
“누나, 저 먼저 나갈게. 저녁에 봐.”
“응. 학교 열심히 해.”
문이 닫혔다. 도현이가 나갔다. 세아는 혼자 남겨졌다.
## 2부: 혼자, 먼지 속에서
고시원의 방.
세아는 그 공간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2평 남짓한 그 공간이, 오늘따라 유독 크게 느껴졌다. 아니, 크다기보다는…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있었다. 그 빛이 만드는 직선이 있었다. 그 직선 안에서 세아는 뭔가를 발견했다.
먼지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햇빛 속에서 보였다. 마치 작은 별들처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죽은 것들처럼.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죽은 것들이 이렇게 많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세아는 손을 들어 그 먼지를 잡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는 순간, 먼지들은 흩어졌다.
그게 맞다, 세아는 생각했다. 먼지는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만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진다. 마치 자신의 꿈처럼.
세아는 침대에 앉았다. 침대에서 일어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렀다. 시간은 누군가가 멈춰달라고 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시간의 잔인함이었다.
9시 30분.
10시.
10시 30분.
시간이 흐르면서 햇빛도 변했다. 아침 햇빛의 노란색이 점점 하얀색으로 변해갔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오가 되면 세아는 준비를 해야 했다. 강남역으로 가야 했다. 그 회사로 가야 했다.
세아는 옷장을 열었다.
옷이 많지 않았다. 검은 패딩 두 벌. 청바지. 흰색 셔츠. 그리고… 헌옷 가게에서 사온 회색 카디건.
강남에 간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남역 근처의 그 회색 건물 안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깔끔한 옷을 입어야 한다. 강민준이 그녀를 바라볼 때, 실망하는 얼굴을 하지 않도록.
검은 패딩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 낡아 보였다. 마치 자신의 꿈처럼 낡아 보였다.
세아는 회색 카디건을 입었다.
카디건을 살펴봤다. 버튼이 약간 헐거웠다. 소매가 조금 길었다. 하지만 어제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였나.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들어간 그 건물에서, 자신은 얼마나 부족해 보였을까. 강민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세아는 거울 앞에 섰다. 다시 한 번 화장을 했다. 이번에는 더 신경을 썼다. 립스틱을 바를 때는 손이 떨렸다. 그건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정오가 되자, 세아는 준비를 끝냈다.
## 3부: 지하철, 어제와 오늘의 차이
오후 1시 30분.
세아는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철. 2호선. 같은 노선이었다. 어제와 같은 노선. 같은 시간대. 거의 같은 시각.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어제는 강리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강민준이 “누군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을 때, 세아는 희망을 품었다. 혹시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일까. 혹은 자신과 함께 음악을 만들 누군가일까. 그런 희망을 품고 탔던 지하철이었다.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자신의 음악을 포기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 회사의 계약금을 받고, 자신의 음악을 버리고, 강민준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한 길이었다.
지하철 안은 붐비지 않았다. 평일 오후였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창 옆의 좌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어두운 터널이 지나갔다.
터널 안에서 자신의 얼굴이 창에 비쳤다. 회색 카디건을 입은 자신. 화장을 한 자신. 하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낡아 보였다. 어떤 옷을 입어도, 어떻게 화장을 해도, 그 낡음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건 겉의 문제가 아니라 안의 문제였으니까.
기차가 강남역에 다다랐다.
“강남역입니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승객들과 함께 내렸다. 강남역은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 쇼핑을 하러 가는 여자들, 사업을 하는 남자들. 모두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이 역을 오가고 있었다.
세아도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이 정해준 것이었다.
## 4부: 강남역 9번 출구, 회색 건물
9번 출구.
세아는 거기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상에 나왔다.
강남의 거리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 명품 브랜드의 간판들. 깔끔한 옷을 입은 사람들. 모든 것이 정렬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을 완벽하게 설계한 것처럼. 완벽함이 만드는 공포가 있다. 세아는 그 공포를 느꼈다.
건물을 찾았다.
회색의 건물. 거울처럼 반사되는 유리. 반사된 하늘이 유리에 비쳤다. 마치 건물 자체가 하늘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저 안에는 하늘이 아니라, 사무실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무실들 안에는…
음악이 있을 것이었다. 아니, 음악을 흉내 낸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세아는 건물 앞에 섰다.
입구에는 초인종이 있었다. CCTV 카메라도 있었다. 세아는 자신이 지금 감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건물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강민준이. 강리우도. 그들 모두가.
카메라의 렌즈가 검게 보였다. 마치 눈처럼. 무감정한 눈처럼.
세아는 초인종을 눌렀다.
음성 통신기가 울렸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나세아입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올라와.”
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어제 전화를 건 사람일 것이었다. 그 사람은 세아의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단지 “올라와”라고만 했다. 명령조로. 마치 동물을 부르듯이.
문이 열렸다.
## 5부: 엘리베이터, 올라감
세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로비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크지 않은 공간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대리석 바닥. 금속 난간. 모든 것이 차갑고 딱딱했다. 음악회사라기보다는 법률사무소 같았다. 혹은 금융회사. 어떤 감정도 들어설 수 없는 곳.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세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20층. 그 버튼이 가장 위에 있었다. 마치 그 층이 가장 중요한 층인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위로. 계속 위로.
엘리베이터 안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배경음악. 마치 쇼핑몰의 배경음악처럼, 누군가가 정해놓은 음악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세아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것도 음악일까. 이것도 누군가의 창작일까. 아니면 단지 소비되는 음악일까. 아니, 이건 음악이 아니다. 이건 음악을 흉내 낸 것일 뿐이다.
층이 올라갔다.
5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누군가가 탔다.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세아를 보지 않았다. 그냥 지나갔다. 마치 세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10층. 다시 멈췄다. 누군가가 내렸다. 누군가가 탔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15층. 계속 올라갔다.
세아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었다. 거울 같은 금속 벽. 그 안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거울처럼 명확하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 하나를 켤 때마다 따뜻해지지만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도 그런 건가. 무언가를 얻을 때마다 더 사라지는 건가.
20층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 6부: 20층, 만남
그 앞에는 강민준이 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강민준의 모습이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강민준. 아니, 같은 강민준이지만, 세아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강민준.
어제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으로 보였다. 음악을 해줄 사람으로 보였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