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9화: 강남의 문턱
강남역은 서울에서 가장 깊은 지하에 있었다. 여덟 층을 내려가야 도착할 수 있는 그곳은 마치 다른 세상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지하철 안내문은 영어로도 표기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옷에서 나는 향수의 가격대가 달랐고, 지하철 벽면의 광고는 모두 명품 브랜드였다. 세아는 11번 출구를 향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한 계단씩 올라가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이 자신을 밀어 올리는 느낌이었다.
지상에 나온 순간, 세아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강남역 주변은 세아가 살던 합정의 반대편이었다. 빌딩의 높이, 사람들의 걸음 속도, 하늘까지의 거리가 모두 달랐다. 가로수길은 가지런하게 다듬어졌고, 카페의 창문은 모두 깨끗했으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걷는 것 같았다.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손톱이 깨져 있었고, 손가락 관절에는 편의점 바코드 스캐너를 만지며 생긴 검은 자국이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시간은 오후 7시 58분이었다. 강리우는 정확히 8시에 나타났다.
그는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입으로는 가볍다고 하겠지만, 그 가벼움 자체가 무거웠다. 코트가 단순히 몸을 덮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분을 선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검은 패딩을 내려다봤다. 지난겨울에 산 것. 이미 솜이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강리우가 먼저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뭔가 다른 톤이 섞여 있었다. 승리? 아니면 미안함? 세아는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서 조금 더 가자.”
강리우는 세아의 손목을 잡았다. 따뜻한 손. 세아는 이 손이 언제부터 따뜻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따뜻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를 따라 걸으면서 세아는 자신이 마치 물속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상의 속도가 느려 보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먹먹해 들렸으며, 자신의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강리우는 세아를 한 카페로 이끌었다. 회색 외벽, 최소한의 간판, 그리고 거울처럼 반사되는 유리 창. 내부는 더 놀라웠다.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 뒤에 직원이 서 있었지만, 객석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오후 8시 10분, 업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는요?”
“내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야. 이 시간에는 안 온다.”
강리우는 안쪽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세아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앉았다.
“너를 여기 데려온 이유는… 몇 가지가 있어.”
강리우가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의 손가락은 길었고, 손 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축적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세아의 손은 움직임만 있었다. 무언가를 하고, 누군가를 돌보고, 계속 움직이기만 한 손.
“첫 번째,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아버지한테 너에 대해 얘기했을 때, 나는 너를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 아버지가 들은 건 ‘훌륭한 신인’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어.”
세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강리우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계약서는 아직도 제출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강민준이라는 사람이 세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두 번째. 너의 계약서 상황이 복잡해졌어. 공식적으로는 너를 아직도 원하고 있어. 너의 음악이 좋으니까.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너를 배제하려고 할 거야. 왜냐하면 너는 나한테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이거든.”
“제가?”
세아는 놀랐다. 자신이 강리우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강리우는 강남에 살고, JYA 엔터테인먼트의 아들이며,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아는 합정에 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고, 계약서를 제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래. 너는 나의 일탈이야. 아버지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종류의 일탈. 너를 도와주면, 내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거고, 그것은 회사의 체계를 흔드는 것이기도 해. 그래서 아버지는 절대로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때까지는.”
강리우가 말을 멈추고, 세아를 오래 바라봤다. 그의 눈 아래에는 정말 깊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마치 몇 밤을 자지 않은 사람처럼.
“세 번째.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강리우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흰색 봉투. 세아는 그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이게 뭐예요?”
“너의 도현이 학원비. 그리고 너의 엄마 약값. 그리고…”
강리우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너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 변호사 비용, 법적 자문료, 그리고 너가 이 일을 견딜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
세아는 봉투를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치 자신의 몸 안에 불이 타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감사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제가 이걸 받으면 어떻게 되어요?”
“복잡해진다.”
강리우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복잡해진다는 게 뭐예요?”
“내가 너를 도우면, 아버지는 나를 더 감시하게 돼. 그리고 너도 감시 대상이 돼. 우리 둘 다 아버지의 그림판 위에서 움직이는 졸 같은 존재가 되는 거야.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강리우가 손을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서 세아의 손을 찾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따뜻했다. 항상 따뜻했다.
“나는 너를 믿어. 그리고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비록 그것이 복잡하고, 위험하고, 우리 둘 다를 상처 입힐지라도.”
세아는 자신의 손이 강리우의 손 안에서 얼마나 작은지 느꼈다. 마치 자신이 처음부터 작았던 것처럼. 아니면 강리우가 자신을 작게 만드는 것일까.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 더 있어.”
강리우가 다시 말했다.
“박소진이라는 사람 알아?”
“아니요.”
“JYA의 신인 가수야. 아버지가 최근에 데뷔시킨 아이. 너에게 보여줄 게 있어.”
강리우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한 음악 영상을 틀었다. 가사가 한국어였다. 멜로디는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맑았다. 하지만 세아는 그 곡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썼다.
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강리우의 손에서 뺐다. 그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영상을 멈추고, 다시 재생하고, 또 멈추고. 마치 그 곡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임을 증명하고 싶은 것처럼.
“작곡가 이름이 뭐예요?”
“프로듀서 박인철. 작곡팀.”
“이건 제 곡이에요.”
세아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알아. 나도 알고, 아버지도 알고, 박인철도 알아. 하지만 세상은 모르는 거야.”
강리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세아는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눈물로 표현되지 않는 분노였고, 목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분노였다.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서 타오르는 불이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을 켤 때마다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세아도 이 분노를 느낄수록 자신이 더 작아지는 것을 알았다.
“왜 이걸 저한테 보여줬어요?”
“너를 깨우기 위해서야. 너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계약서는 단지 종이일 뿐이야. 진짜 문제는 너의 음악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을 계속할 거야. 너를 통제하면서.”
강리우가 다시 휴대폰을 가져갔다.
“이게 첫 곡이 아니야. 너는 몰라도 되지만, 너의 음악은 이미 여러 곳에 팔려 나갔어. 너의 이름 없이.”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밤을 새워 만든 곡들.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고 싶었던 곡들. 자신이 존재하는 증거였던 그 곡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제가 뭘 해야 되는 거죠?”
“일단, 이 봉투를 받아. 그리고 계약서를 제출하지 말아. 그 다음에는…”
강리우가 말을 멈추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우리가 같이 생각해. 어떻게 할지.”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세아는 그 손을 뺄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페의 형광등 아래에서. 강남의 깊은 지하에서.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 더 말해도 될까?”
강리우가 조용히 물었다.
“뭐요?”
“너는 지금 분노하고 있어. 그것이 좋아. 왜냐하면 분노는 행동으로 바뀔 수 있거든. 하지만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는 생각해 봐. 나일 수도 있고, 아버지일 수도 있고, 박인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일 수도 있어. 너는 어디로 향하고 싶어?”
세아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는지. 자신의 음악을 빼앗은 사람들에게인지, 자신을 이용한 시스템에게인지, 아니면 자신을 보호한다면서 더 깊은 물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이 남자에게인지.
“이제 돌아가. 너는 내일도 일이 있지. 그리고 하늘이가 걱정할 거야.”
강리우가 서 있었다. 세아도 일어났다. 그들은 카페를 나왔다. 강남역 입구까지 함께 걸었다. 그 길에서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단지 걷기만 했다. 강리우의 따뜻한 손과 세아의 차가운 손이 함께.
지하철 역 계단 앞에서 강리우가 멈추었다.
“너는 여기서 내려가. 나는 여기서 올라가.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해.”
“언제 만나요?”
“모르겠어. 아버지가 다음 움직임을 할 때까지. 그때까지는 조용히 지내. 그리고…”
강리우가 세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 절박함이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
강리우가 손을 놓았다. 세아는 계단을 내려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올라오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하철 안에 앉아 있으면서, 세아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흰색 봉투를 만져 보았다. 그것은 무거웠다. 돈의 무게가 아니라, 책임의 무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하늘이로부터의 전화였다.
“어디야? 아직도 강남에 있어?”
“아니. 지금 지하철 타고 가는 중이야.”
“그 남자는?”
“헤어졌어.”
“좋아. 그럼 이따 만나. 너 뭐 해?”
“모르겠어. 그냥… 집에 갈 것 같아.”
“집에 말고 내 가게 와. 뭔가 줄 게 있어.”
하늘이가 전화를 끊었다. 세아는 강리우가 준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돈만 있을까, 아니면 다른 것도 있을까. 그녀는 그것을 열지 않았다. 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은 계속 움직였다. 강남에서 합정으로. 깊은 지하에서 얕은 지하로. 세아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공허함만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다 타버린 성냥처럼.
하늘이의 가게는 홍대 뒷골목 깊숙이 있었다. 합정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데 15분이 걸렸다. 밤 9시 30분. 가게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하늘이는 누군가의 팔에 타투를 새기고 있었다. 세아가 들어갔을 때, 하늘이는 바늘을 멈추지 않았다.
“앉아.”
세아는 가게 한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타투를 받는 손님이 나갈 때까지.
“어. 좋다. 다 했어.”
손님이 일어났다. 팔에는 붉은 글씨로 뭔가 새겨져 있었다. 세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다. 손님이 나간 후, 하늘이는 세아 앞에 앉았다.
“너 뭐 한 거 있어?”
“아니요.”
“진짜?”
“네.”
“그럼 이거 받아.”
하늘이가 무언가를 세아에게 건넸다. 작은 디자인 종이. 그 위에는 성냥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매우 정교하고, 매우 아름답게.
“이거 뭐예요?”
“너를 위한 타투 디자인. 어깨에 하나 해줄까?”
세아는 그 그림을 보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하늘이를 안았다. 말 없이. 단지 안았다. 그리고 하늘이는 그 안아 줌을 받아 주었다.
“우리 같이 싸워. 좋아? 혼자가 아니야.”
하늘이가 속삭였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이미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강리우도 있고, 하늘이도 있고, 도현이도 있고, 엄마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음악이 아직도 자신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팔려 나갔을지라도, 자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강남의 불꽃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합정의 불꽃은 더 뜨거웠다.
# 성냥처럼 타버린 마음
## 첫 번째 부: 단절
휴대폰의 화면이 밝아졌다. 발신자는 ‘하늘이’였다. 세아는 한참을 망설였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기만 했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남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세아의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뜨거운 숯불을 삼킨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이미 너무 오래 연기해 왔으니까. 감정을 숨기는 것쯤은 이제 본능이 되어 있었다.
“헤어졌어.”
전화기 너머에서 하늘이가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긴 침묵이 흘렀다. 지하철 안의 소음—바퀴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어딘가에서 울려 나오는 알림음—이 그 침묵을 채웠다. 세아는 창 너머로 터널을 통과하는 지하철의 어두운 내부를 보고 있었다. 벽면의 검은 타일들이 연속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좋아.”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동정이 있었고, 분노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이해가 있었다. 그녀는 세아를 오래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올 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따 만나. 너 뭐 해?”
세아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들이 자신의 통제를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손처럼 보였다. 피부가 창백했다. 손톱 주변의 큐티클이 살짝 떨어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방치했을까? 언제부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을까?
“모르겠어. 그냥… 집에 갈 것 같아.”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세아는 정말로 집에 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싶었다. 혹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싶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고 싶었다. 더 나아가, 존재하지 않고 싶었다.
“집에 말고 내 가게 와. 뭔가 줄 게 있어.”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다른 톤이 묻어났다. 보통의 친구로서의 관심을 넘어선, 마치 누군가를 구출해야 한다는 절실함 같은 것이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감지했고, 거부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알았어. 30분 후에 봐.”
전화를 끊으면서 세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나올 때마다 폐 속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풍선인데 점점 공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곧 자신은 쭈그러들어진 풍선처럼 될 것이다. 쓸모없이.
지하철 차량 안은 저녁 시간대답게 꽤 붐비고 있었다. 옆에 선 여대생은 휴대폰 화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 뒤에 선 중년 남성은 졸음이 오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마치 투명한 벽으로 나뉜 개별의 우주처럼.
세아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있었다. 봉투였다. 강리우가 준 봉투였다. 종이는 두꺼웠고, 황금색의 진주광택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봉투였다. 마치 결혼식 초대장을 담는 봉투처럼.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돈만 있을까. 아니면 다른 것도 있을까. 편지? 사진? 약속의 편지?
세아는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무게감이 있었다. 상당한 무게감이. 그것은 분명 돈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배신. 또 다른 거래. 돈으로 침묵을 사는 것. 그녀의 음악을,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의 영혼을 돈으로 거래하는 것.
결국 세아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은 그것을 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자신이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착각이었다. 자신은 용감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선택지가 없어서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선택지 없는 용감함은 용감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필사적인 것일 뿐이었다.
지하철은 계속 움직였다. 강남에서 합정으로. 깊은 지하에서 얕은 지하로. 세아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분노도 없었다. 슬픔도 없었다.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공허함만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다 타버린 성냥처럼. 불을 밝혀 줄 열정도 없고,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줄 온기도 없는. 그저 검은 재처럼 남겨진 나무 막대기처럼.
세아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를 보든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창에 비친 모습, 옆 승객들의 눈에 비친 모습,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비친 모습.
그 모든 것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너는 끝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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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부: 재회
합정역의 출구를 나서는 순간, 저녁 공기가 세아의 얼굴에 닿았다. 서울의 가을 밤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피부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등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홍대 뒷골목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익숙했다. 세아가 서툰 아마추어 싱어로 활동했던 시절부터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그때 하늘이는 이미 자신의 타투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는 작았지만, 분위기는 독특했다. 마치 예술가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15분을 걸어가며 세아는 자신의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리듬을 맞춰가며 걸었다. 마치 음악의 박자를 세우는 것처럼.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 활동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슬펐다. 숨을 쉬기. 심장을 뛰게 하기.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밤 9시 30분.
가게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세아가 문을 밀고 들어가자, 타투 기계의 소리가 들렸다. 웅웅거리는 저음의 진동음. 그것은 마치 벌의 울음 같기도 했고, 기계의 심장음 같기도 했다.
하늘이는 누군가의 팔에 바늘을 대고 있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고, 얼굴의 절반만 세아에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아는 하늘이가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이는 타투를 하는 동안 절대로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수술실의 의사처럼, 중요한 것이었다.
“앉아.”
하늘이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내지 않으면서. 세아는 가게 한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세아는 가게 주변을 둘러봤다. 벽에는 수많은 타투 디자인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나비, 장미, 해골, 나침반, 선, 문자, 기호들. 모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각각의 타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인생의 한 부분을 영구적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영구적. 그 단어가 세아의 마음에 꽂혔다.
영구적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지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아는 자신의 인생 어디엔가 영구적으로 기록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생각해 봤다. 자신의 음악? 하지만 그것도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통? 그것은 이미 충분히 기록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 곳곳에, 자신의 마음 곳곳에.
“어. 좋다. 다 했어.”
손님이 일어났다. 팔에는 붉은 글씨로 뭔가 새겨져 있었다. 세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다. 글씨가 너무 빨간 색으로, 너무 신선한 상처로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피처럼 보였다.
손님이 나간 후, 하늘이는 세아 앞에 앉았다. 가까이 앉았다. 세아가 하늘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하늘이는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귀에는 여러 개의 피어싱이 있었다. 목에도 타투가 있었다. 사람들은 하늘이를 보면 쉽게 판단했다. 반항심 많은 여자. 일탈을 즐기는 여자. 그런 식으로. 하지만 세아는 알고 있었다. 하늘이는 가장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외형과는 상관없이.
“너 뭐 한 거 있어?”
하늘이가 물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 괜찮아?’라는 뜻이었고, ‘너한테 뭐가 있어?’라는 뜻이었고, ‘너 혼자가 아니야’라는 뜻이었다.
“아니요.”
세아가 거짓말을 했다.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배신감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고, 절망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진짜?”
하늘이는 세아의 눈을 들었다. 깊은 눈빛이었다. 마치 바다처럼 깊은 눈빛. 그 눈빛 안에는 세아의 모든 거짓이 반사되고 있었다.
“네.”
세아가 다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일어났다.
“그럼 이거 받아.”
하늘이가 무언가를 세아에게 건넸다. 작은 디자인 종이였다. 앙투어 페이퍼였다. 그 위에는 성냥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세아는 그 그림을 보면서 숨이 멎었다.
성냥. 정확히는 다 타버린 성냥이었다. 검은 재로 남겨진, 불이 꺼진 성냥. 하지만 그림 속의 성냥은 아름다웠다. 마치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마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매우 정교한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처럼. 매우 아름답게. 그림 속에는 바람의 흐름도 보였다. 마치 성냥이 아직도 바람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이거 뭐예요?”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너를 위한 타투 디자인. 어깨에 하나 해줄까?”
하늘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누군가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세아는 그 그림을 보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에는 물기가 맺혔지만, 그것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반항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대신 세아는 하늘이를 안았다.
말 없이. 설명 없이. 단지 안았다.
그것은 감사의 포옹이었고, 용서의 포옹이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혼자가 아니다’는 것을 확인하는 포옹이었다. 세아는 하늘이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하늘이는 그 안아 줌을 받아 주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우리 같이 싸워. 좋아? 혼자가 아니야.”
하늘이가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아의 귀 바로 옆에 있었다.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처럼. 마치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음이. 마치 봄날 햇빛에 녹는 눈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신이 이미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강리우도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음악을 도둑질했지만, 동시에 그 음악의 가치를 인정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강리우는 자신의 생명을 변화시킨 사람이었다.
하늘이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안고 있는 이 친구. 이 여자는 자신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자신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자신이 아무도 아니었을 때부터 옆에 있었던 사람.
도현이도 있었다. 자신의 형.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사람.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혈육.
그리고 엄마도 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엄격했던 사람.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음악이 아직도 자신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팔려 나갔을지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돈을 벌고 있을지라도.
자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도 거래할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도 영구적으로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음악.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