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8화: 강남의 약속
강리우의 전화는 밤 11시 57분에 왔다. 세아는 편의점 카운터에서 야간 근무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다. 화면에는 그의 이름이 떴다. 아무 장식 없는 이름. 강리우.
“지금 괜찮아?”
음성이 차분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해놓은 사람의 목소리.
“네. 편의점에 있어요.”
“좋아. 내일 저녁 8시에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만나.”
“왜죠?”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그리고… 아버지와 얘기했어.”
세아의 숨이 멈추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여전히 밝게 켜져 있었고, 계산대 옆 냉장고에서는 작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멀어 보였다.
“어떻게… 됐어요?”
“내일 얘기해. 이제는 전화로 할 말이 아니야.”
“근데 도현이 학원비는…”
“내가 알아볼게. 너는 계약서를 아직 제출하지 말고, 내일 만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단 30초. 전화를 끊은 후 세아는 한 손으로 카운터를 잡았다. 다리가 떨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처럼. 강리우가 아버지와 얘기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결정이 내려졌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자신의 삶을 바꿀 가능성이 높았다.
밤 11시 58분. 종호가 카운터 옆의 휴게실에서 나왔다. 그는 야간 근무의 다른 직원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지금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는 사람이었다. 6개월 뒤 군대를 가야 한다는 미래 때문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일시적이라고 생각하는 표정을 항상 짓고 있었다.
“세아, 너 뭐 하니? 얼굴이 진짜 이상해.”
“괜찮아. 그냥… 피곤해.”
“또 거짓. 넌 거짓말할 때 눈을 안 깜빡해.”
세아는 종호를 바라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거짓말할 때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 제주에서 배운 습관이었다. 엄마가 물속에 있을 때 숨을 참으면서, 눈을 크게 떠서 수면 위를 바라보는 습관. 그 습관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래. 미안해. 그냥 복잡한 일이 있어.”
“그래도 내일은 쉬어야 해. 넌 이미 충분히 많이 일했어.”
종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충분히 많이 일했다. 그 말은 비단 편의점 아르바이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아는 지난 몇 일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거짓말을 하고, 계약서를 읽고, 강리우를 믿기로 결정하고, 하늘이의 걱정을 받아내고, 도현이의 학원비 걱정을 가슴에 품고.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점점 더 작게 만들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 하나를 켤 때마다 따뜻함을 느끼고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다음날은 오후부터 시간이 이상하게 흘렀다. 세아는 오후 2시부터 일을 했다. 계산, 상품 진열, 손님 응대. 모든 일이 자동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만, 자신이 움직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정오가 되자 핸드폰이 울렸다. 하늘이의 전화였다.
“야, 뭐 해?”
“일하고 있어.”
“몇 시까지?”
“7시까지.”
“그 다음에 뭐 해?”
세아는 대답을 잠시 고민했다. 하늘이에게 강리우를 만난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할까.
“강리우 만나.”
전화 너머의 침묵이 길었다. 아주 길었다.
“어디서?”
“강남역.”
“아, 진짜…”
하늘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실망, 걱정, 그리고 체념. 세아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하늘아, 미안해.”
“미안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강남이 뭔지 알아? JYA가 있는 곳이야. 그리고 강리우도 거기 살겠지. 넌 그 남자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하늘이가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리고 거기서 넌 무조건 지게 돼.”
전화는 끊겼다. 하늘이가 먼저 끊은 것이 아니라, 세아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서 자동으로 끝난 것 같았다. 카운터 뒤에서, 계산기 앞에서, 그 차갑고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세아는 혼자 남겨졌다.
오후 7시 정확히. 세아는 앞치마를 벗었다. 회색 앞치마. GS25의 로고가 왼쪽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그녀는 그 로고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이 앞치마를 입을 때는 나세아가 아니라 #2847이다. 그리고 강리우를 만나러 갈 때는 또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 자신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
강남역은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지하철역 중 하나였다. 11번 출구를 나오면 거리는 명품 브랜드의 대형 광고판으로 가득했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샤넬. 세아는 이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1500원짜리 편의점 캔 커피가 조금 부끄러워 느껴졌다.
강리우는 이미 출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마치 담배를 집는 것처럼 말려 있었다. 그는 세아를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좋아, 시간에 맞춰 왔네.”
“네.”
그 인사 이후로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강리우는 단지 앞으로 걸었고, 세아는 그를 따랐다. 강남 거리는 저녁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붐볐다. 쇼핑백을 들은 여자들, 정장을 입은 남자들,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청소년들. 모든 사람이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세아만 강리우의 뒤를 따라갈 뿐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15분을 걸었을까. 강리우는 한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회색 강화 유리로 된 현대적인 건물. 입구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RW MUSIC STUDIO”.
“여기가 뭐죠?”
“내 회사야. 정확히는 내가 만들려던 회사.”
강리우가 카드키를 꺼냈다. 건물의 입구 게이트가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5층. 문이 열렸을 때 세아는 숨이 멎었다.
스튜디오였다. 음악 스튜디오. 검은색 방음 처리된 방들. 큰 유리창으로 된 메인 스튜디오. 그 안에는 프로 레벨의 장비들이 가득했다. 마이크, 믹싱 보드, 신스, 피아노, 드럼. 그리고 강리우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세아를 손짓으로 초대했다.
“이거… 언제 만들었어요?”
“6개월 전에 샀어. 아버지 몰래.”
강리우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이 건반 위에 올려졌다. 하지만 치지는 않았다. 마치 손가락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베를린에서 유학 중일 때, 난 계획이 있었어. 독립 레이블을 만들고, 진정한 음악을 하는 거. 기획사의 입김이 없는, 순수한 음악만. 그리고…”
그가 멈추었다.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떨리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그리고 피아노를 치지 못했어.”
강리우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목소리.
“왜죠?”
“모르겠어. 어느 날부터 손이 고정되었어. 건반 위에 올려놓으면 움직일 수 없었어. 그래서 베를린에서 포기했고, 서울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회사에 들어갔어. 그리고 이 스튜디오를 만들었지. 직접 치지는 못하지만, 남들이 치는 음악은 들을 수 있도록.”
세아는 그의 손을 봤다. 길고, 마디가 굵고, 따뜻한 손. 하지만 지금은 떨리고 있었다.
“근데 너를 봤을 때…”
강리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안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너를 봤을 때, 처음으로 그 손들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어. 네 음악을 하면, 내 손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 거야.”
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리우가 자신을 원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음악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으로 자신의 손을 치유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늘이가 말한 것이 맞다. 강남에 오면 무조건 진다. 그의 욕망 앞에서.
“그래서… 계약서는요?”
“아버지와 얘기했어. 너의 저작권을 되돌려주기 위한 방법이 있는지. 법적으로.”
강리우가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프린트된 메일이었다.
“변호사가 말했어. 계약서가 유효하더라도, 너의 동의 없이는 곡을 발매할 수 없다고. 그리고 네가 지금 제출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기한을 연장하도록 강제할 수 없어. 법적으로.”
세아가 그 종이를 읽었다. 법적 용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핵심은 명확했다. 자신은 아직도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럼… 도현이 학원비는?”
“내가 낼게. 너는 신경 쓰지 마.”
“근데…”
“너는 대신 이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만들어. 너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가 너의 곡을 만드는 걸 도와줄 거야. 너의 계약서를 무효화할 수 있을 때까지. 그게 내 계획이야.”
강리우가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검은색 방음 처리된 벽들. 그 안의 모든 기계들.
“여기서, 넌 나세아야. 그리고 넌 노래해. 너의 이름으로.”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강리우의 말은 너무 완벽했다. 너무 계획된 것처럼. 마치 자신을 만나기 전부터 모든 것을 준비해놓은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것. 누군가의 곡이 아니라 자신의 곡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발매하는 것.
“약속해 줄 거 있어요?”
“뭐?”
“저를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거. 제가 당신의 손을 치유해 주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
강리우는 오래도록 세아를 봤다. 마치 그 얼굴 속에서 무언가를 읽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너한테 거짓말 하지 않을게. 너는 내 손을 치유해 주는 도구가 아니야. 넌 그보다 훨씬 더 큰 존재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스튜디오의 어딘가에서 음악이 들렸다. 강리우가 틀어놓은 음악. 클래식 피아노 곡. 매우 아름답고, 매우 슬픈 곡. 그리고 세아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희생인가, 아니면 거래인가.
강리우는 그녀를 스튜디오의 메인 마이크 앞으로 데려갔다. 헤드폰을 씌워줬다. 음악이 더 가까워졌다. 더 큰 소리로.
“여기서 부르면 돼. 아무거나. 너가 원하는 거. 이 스튜디오에서는 누군가의 곡을 부르지 않아도 돼.”
세아는 마이크 앞에 섰다. 오직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부른 적 없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올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새벽 2시에 자신의 방에서 혼자 지어낸 곡이 떠올랐다. 도현이를 위한 곡. 엄마를 위한 곡.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곡.
세아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래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강남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부르는 노래. 그 노래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강리우만. 오직 그 따뜻한 손을 가진 남자만. 그리고 세아는 그 순간, 자신이 이미 무언가를 거래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불꽃은 이미 타기 시작했으니까.
# 불꽃의 시작
## 1부: 제안
강남역 11번 출구를 나선 세아는 핸드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주소는 맞았다. 강리우가 보낸 메시지도 명확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정말 이게 맞는 선택인가?’
늦가을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서울의 거리는 언제나 분주했다.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자동차들, 어딘가로 급하게 향하는 발걸음들. 세아는 그 소음 속에서 자신만 고독해 보였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트로트 음악―엄마가 좋아하던 가수의 곡―이 그 고독을 더 깊게 만들었다.
‘도현이 학원비를 낼 수 있으면, 엄마의 약을 더 좋은 걸로 바꿔 드릴 수 있고…’
세아는 가방 속의 은행통장을 만져봤다. 얇은 통장 속에는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지난 3년간 쌓은 돈들. 청소년 드라마 촬영비, CF 출연료, 음악방송 출연 수당들. 모두 다 사라졌다. 도현이의 학원비로, 엄마의 의료비로, 전세금 이자로.
‘강리우가 도현이 학원비를 낸다니…’
그 남자는 어제 처음 봤다. 정확히는 어제 처음 제대로 본 것이었다. 그 전에는 거리에서 몇 번 마주쳤던 것 같지만, 세아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JK엔터테인먼트의 계약 해지 협상이 있던 날이었다. 회의실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변호사들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계약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발생합니다.”
“아직 미성년자이시므로 법정대리인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3년 더 계약을 유지하시거나, 5억의 위약금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세아의 엄마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자궁암 말기. 의사는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 방에는 의료기계들이 쉬지 않고 울었다. 피피피피― 규칙적이지만 절망적인 음향. 세아는 그 음향에 맞춰서 살고 있었다.
5억. 엄마의 6개월 간의 집중 치료비보다도 많은 돈.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회의실의 온도가 내려간 것 같았다. 변호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강리우라는 이름의 남자―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태도로 방 한구석에 섰다.
“Park Seo-ah는 미성년자입니다. 이 계약의 체결 과정에서 법적 절차가 적절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성년자 계약의 경우 보호자의 충분한 이해 하에 진행되어야 하는데, 당시 보호자가 질병으로 입원 중이었습니다.”
그의 손가락들이 탁자를 가리켰다. 세아는 그 손을 봤다. 섬세하지만 강해 보이는 손. 피아니스트의 손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상처 입은 손이었다. 왼쪽 손의 약지와 소지가 없었다.
“또한, 계약 내용 중 미성년자에게 부당한 노동 조건을 강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경우, 귀사가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변호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강리우는 아무 감정 없이 계속 말했다.
“계약 해지에 동의하신다면, 추가 협상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30분 후, 계약은 해지되었다.
회의실을 나온 세아는 강리우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마주봤다.
“왜… 도와주신 거예요?”
강리우는 자신의 왼손의 상처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마치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
“너를 본 적이 있어. 거리에서. 혼자 음악을 흥얼거리면서 걷는 너를. 그때 생각했어. ‘저 아이는 누군가에게 억압당하고 있구나.’ 라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갔다. 세아의 심장도 함께 내려갔다.
“그래서… 나중에 찾아봤어. 너에 대해서. Park Seo-ah. JK엔터테인먼트 소속. 데뷔 3년, 드라마 3편, 영화 2편, 음악방송 출연 20회 이상.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발매한 음악은 단 한 곡도 없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곡을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쓴 대사를 읽고, 다른 사람들의 곡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어. 너는 너 자신이 아니었어.”
세아의 눈이 맺혔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만약 누군가가 너를 도와준다면? 만약 너에게 기회를 준다면? 너는 정말 좋은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 거야. 너의 이름으로.”
—
강리우의 스튜디오는 강남 한복판의 빌딩 4층에 있었다.
세아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깊은 검은색이었다. 방음재로 처리된 벽들이 검은색이었고, 바닥도 검은색이었고, 천장도 검은색이었다. 마치 어느 깊은 광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내 스튜디오야. 몇 년 전에 만들었어. 손가락을 잃기 전까지는 여기서 작곡을 하고 피아노를 쳤었어.”
강리우는 스튜디오의 중앙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그 악기는 마치 검은 새처럼 보였다. 아름답지만, 위험해 보이는 새.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어.”
세아는 조심스럽게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한쪽 벽에는 수십 대의 음향 기기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마이크, 믹서, 앰프, 스피커들. 그리고 방음 처리된 부스 안에는 녹음 마이크가 놓여있었다. 이 모든 게 전문적이고, 비싼 장비들이었다.
‘이걸 다 사서… 나를 위해?’
“도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지? 서울 수학학원비가 월 200만원 정도야. 나는 그걸 낼 거야. 그리고 너는…”
강리우가 세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마치 어떤 온기를 전해주려는 듯.
“… 너는 여기서 음악을 만들어. 너의 이름으로.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너의 곡들을 만들고, 그걸 발매할 때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너의 계약을 무효화할 거야.”
세아의 목이 메었다.
“근데… 왜 그러세요? 저를 모르시잖아요.”
강리우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피아노로 향했다. 그 검은 악기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어떤 포기 같은 것들이 섞여있었다.
“나는 한때 음악가였어. 유명한 음악가였어.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했고, 음악원을 나왔고, 국제 콩쿠르에도 나갔어. 그리고… 음악을 정말 사랑했었어.”
그의 왼손을 다시 봤을 때, 세아는 처음으로 그 손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손가락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손의 일부가 화상으로 손상되어 있었고, 흉터들이 그 흔적을 담고 있었다.
“사고가 있었어. 불이 났어. 내 손이 타버렸고,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어. 의사들은 다시는 음악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나는… 죽고 싶었어. 음악이 없는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정말로… 많은 시간을 절망 속에서 보냈어.”
세아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이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을 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물 속에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았다―숨이 차지만, 필요한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어. 음악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를 도와서 그들의 음악을 만들도록 하는 것. 그것도 음악을 하는 것과 같다는 걸.”
강리우가 세아를 바라봤다.
“넌 음악을 하려고 태어난 아이야. 나는 그걸 봤어. 그래서… 내가 너를 도와주는 거야. 내 음악을 너의 음악으로 만들어줄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이니까.”
세아는 눈물이 흘렀다. 첫 번째 눈물은 그의 이야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눈물은 자신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내 도구가 아니기를…’
—
“약속해 줄 거 있어요?”
강리우가 스튜디오의 콘솔 앞에 앉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
“저를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거. 제가 당신의 손을 치유해 주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
그 말은 용감했다. 너무 용감해서, 세아 자신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강리우는 어떤 목적을 가진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쁜 목적은 아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목적이었다.
강리우는 오랫동안 세아를 봤다. 마치 그 얼굴 속에 무언가 중요한 글자들이 적혀있는 것처럼. 그의 검은 눈동자들이 움직였다. 위로, 아래로, 좌우로. 마치 책을 읽듯이.
그리고 천천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너한테 거짓말 하지 않을게. 너는 내 손을 치유해 주는 도구가 아니야. 넌… 그보다 훨씬 더 큰 존재야.”
“…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직 넌 모를 거야.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알게 될 거야.”
그 순간, 스튜디오의 어딘가에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강리우가 헤드폰을 집어 들고 스피커를 켠 것이었다. 클래식 피아노 곡이 흘러나왔다. 매우 아름답고, 매우 슬픈 곡이었다.
‘이 곡은…’
세아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곡은 어디서 본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아니었다. 어디서 들은 드라마의 배경음악도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영혼이 직접 건반을 두드린 것 같은 음악이었다. 깊은 곳에서 나온 음악. 절망의 어두운 밤 속에서 나온 음악.
‘이게 희생인가, 아니면 거래인가?’
그것이 세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질문이었다.
—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잡고 스튜디오의 중앙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메인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문가용 마이크. 가수들이 정말로 중요한 곡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마이크.
“이게…”
“이건 좋은 마이크야. 너의 목소리가 가장 잘 나올 수 있는 마이크야.”
강리우가 헤드폰을 세아의 귀에 씌워줬다. 음악이 더 가까워졌다. 더 큰 소리로. 마치 누군가의 심장박동음처럼.
“여기서 부르면 돼. 아무거나. 너가 원하는 거. 이 스튜디오에서는 누군가의 곡을 부르지 않아도 돼. 너의 이름으로. 너의 감정으로.”
세아는 마이크 앞에 섰다. 헤드폰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은 점점 더 커졌다. 그 음악은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픔과 희망, 절망과 기대, 포기와 도전―모든 것이 섞여있는 음악.
‘지금까지 나는 누구의 음악을 부르고 있었나?’
세아는 생각했다. 지난 3년간, 그녀가 부른 모든 곡들. 드라마의 OST, 영화의 주제곡, 음악방송의 무대. 모두 다 누군가의 것이었다. 유명한 작곡가들의 곡들. 유명한 가사 쓰는 사람들의 가사들.
그런데 정작 자신의 것은?
‘새벽 2시, 나의 방에서 혼자 지어낸 곡들…’
세아는 갑자기 그것을 기억했다. 작년 겨울, 엄마가 처음으로 입원했을 때. 그녀는 밤새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곡을 지었다. 엄마를 위한 곡. 도현이를 위한 곡.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곡.
그 곡들이 지금 세아의 목에서 떠올랐다.
강리우가 녹음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켜졌다.
세아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했다.
—
그 노래는 매우 작은 노래였다. 큰 무대에서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 노래였다. 도현이를 위한 노래. 엄마를 위한 노래. 그리고 자신을 위한 노래.
가사는 없었다. 오직 멜로디만 있었다. 그 멜로디는 마치 물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부드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강리우는 콘솔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노래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석상처럼. 하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곡이 끝났을 때, 세아는 숨이 차 있었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수영을 하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처럼.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좋아?”
강리우가 물었다.
“네… 좋아요. 정말 좋아요.”
“그럼 계속해. 계속 부르고, 계속 만들고, 계속 성장해. 너의 이름으로.”
강리우는 스튜디오의 한쪽 벽에 있는 액자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어린 강리우의 사진이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소년. 그의 손가락들이 건반 위에 있었다. 온전한 손가락들.
“내 꿈은 죽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