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6화: 계약서 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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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화: 계약서 뒤의 침묵

세아가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GS25의 형광등은 항상 같은 밝기로 켜져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날씨가 어떻든,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세아는 그 일관성을 좋아했다. 세상이 계속 흔들려도, 이 편의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형광등이 더 밝아 보였다. 혹은 자신의 눈이 더 민감해졌거나.

카운터 뒤에는 종호가 서 있었다. 25세, 고등학교 동창.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지만 6개월 뒤에는 군대를 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약간 우울해 보였다.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우울함. 세아는 그 기분을 이해했다.

“야, 세아. 어제는 왜 안 나왔어?”

“아팠어.”

거짓이었다. 하지만 종호는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거짓을 알아도 추궁하지 않는다. 특히 그 거짓이 상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래. 얼굴이 좀 이상하긴 했어. 아직도 안 괜찮아?”

세아는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회색 앞치마. GS25의 로고가 왼쪽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그 로고 위에 적힌 사원번호로만 알려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나세아가 아니라 #2847이었다.

“괜찮아. 이제.”

앞치마를 입으면서 세아는 강리우의 말을 생각했다. 너는 그냥 노래해. 계속. 지금처럼. 하지만 지금처럼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처럼이란 무서워하면서도 계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노래하는 것인가. 세아는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편의점의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직장으로 돌아갔고, 저녁 손님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의 공백. 세아는 그 공백을 좋아했다. 계산대 옆에 서서 스마트폰을 만질 수 있는 시간.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카톡 목록. 하늘이의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어제부터 읽지 않은 메시지 3개. 세아가 그것을 열었다.

[하늘] 야 뭐 해. 계약서 제출 했어?

[하늘] 답해… 진짜로

[하늘] 알았어. 이따가 뭐 하냐고 물어볼 거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난 상관없어. 너 맘대로 해. 근데 진짜로 그 강리우라는 인간 믿는 거 아니지?

세아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답장을 하려면 사실을 말해야 했고, 사실을 말하려면 강리우를 설명해야 했고, 강리우를 설명하려면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카톡 목록을 내렸다. 그 아래로 엄마 이름이 있었다. 어제 오후에 온 메시지. 음성 메시지.

[엄마] 세아야, 도현이가 학원 등록비 낼 시간이라고 했어. 이번 달은 좀 어려울까?

음성 메시지를 다시 들을 수 없었다. 한 번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항상 미안해했다. 딸이 자신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세아는 그 미안함을 들을 때마다 계약서에 사인했던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250만 원이면 도현이의 학원비를 낼 수 있었고, 엄마에게 좀 더 좋은 약을 사줄 수 있었고, 자신도 한두 끼는 편의점 도시락이 아닌 다른 것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강리우가 말했다. 계약서를 제출하지 마.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했는가. 계약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250만 원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도현이의 학원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엄마의 미안함은 계속될 것인가.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화면이 꺼졌다. 검은 화면. 그 안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지하철 형광등 아래에서 본 자신의 얼굴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세아, 라면 하나 주실래요?”

고객이 들어왔다. 70대의 할머니. 매일 오후 3시쯤 들어와서 라면 하나와 계란 한 개, 그리고 우유 한 팩을 사가는 할머니였다. 세아는 그분의 구매 패턴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일상을 기억하는 것이 취미였다.

“네, 어떤 거 원하세요?”

“신라면이 좋아. 진짜 맵지만 그게 좋아.”

세아가 냉장고에서 계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선반에서 신라면 하나를 내렸다. 그 일련의 동작은 자동이었다. 뇌를 거치지 않은 몸의 기억. 얼마나 많이 반복했으면 이렇게까지 익숙해졌을까. 세아는 그 생각을 하면서 카운터로 물품을 가져왔다.

“요새 좋은 일 있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잠깐 멈추었다. 좋은 일. 그게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려웠다.

“네, 좋은 일이 있어요.”

“그래? 얼굴에서 보인다. 뭔가 다르네.”

세아는 계산을 시작했다. 라면, 계란, 우유. 7,800원. 하지만 할머니는 항상 10,000원을 내놨다. 잔돈은 받지 않으셨다.

“이거는 뭐예요?”

할머니가 가리킨 것은 세아의 목 아래, 쇄골 아래에 있는 타투였다. 하늘이가 그려준 성냥 모양의 타투. 세아는 그것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아주 미세한 웃음.

“친구가 그려줬어요.”

“이쁘네. 뭐 의미가 있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를 말하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했다. 성냥팔이 소녀와 불꽃과 소멸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여전히 타고 있는 불꽃에 대해.

“좋은 일 계속 되길.”

할머니가 물품을 들고 나가며 말했다. 그 인사는 세아의 귀에 들어왔지만 뇌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배경음처럼. 편의점 형광등 소리처럼.

오후 4시. 세아는 카운터에 기대어 서 있었다. 종호는 음료수 섹션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도 세아처럼 자동이었다. 손가락이 캔을 집고, 선반에 올리고, 돌리고, 반복. 기계가 하는 작업을 인간이 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세아는 화면을 보지 않고 벨을 끄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멈추었다. 발신자는 강리우였다.

“네?”

“너 지금 일하고 있어?”

“네.”

“퇴근이 몇 시야?”

“열 시.”

강리우가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은 계획을 짜는 침묵이었다. 세아는 그를 충분히 알아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열한 시에 너를 집으로 데려다줄게. 집 밖에서 기다려. 혼자.”

“뭐해요.”

“아버지와 얘기했어. 2시간. 그리고 뭔가 나왔어.”

세아의 손이 떨렸다. 핸드폰을 쥔 손. 그 떨림은 강리우도 느낀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말했으니까.

“나빠진 건 아니야. 오히려…”

“오히려?”

“오히려 생각보다 낫다고 해야 할까. 너한테 직접 얘기해야 될 것 같아. 그래서 열한 시에 만나자.”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리우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계약서 원본이 있는 거 맞지?”

“네. 가지고 있어요.”

“좋아. 그거 꼭 챙겨.”

전화가 끝났다. 강리우는 자신이 시간을 정하고, 요구를 하고, 지시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것이 그의 성질인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지금 그것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거부하지 않는 것이 평온이었다.

종호가 물었다.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거짓이었다. 하지만 종호는 묻지 않았다.

저녁 8시.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맥주와 안주를 사가기 시작했다. 금요일이었다.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편의점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세아는 그 에너지를 맞받이하지 않았다. 그냥 계산만 했다. 바코드 스캔, 금액 입력, 거스름돈 건네기. 반복.

오후 9시 50분. 세아는 앞치마를 벗고 있었다. 종호는 이미 마무리 정리를 끝냈다. 그는 세아를 보면서 말했다.

“뭐 하게?”

“집에 가.”

“이 시간에? 혼자?”

“응.”

종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때때로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감사해했다.

밤 10시. 세아는 고시원 밖에 서 있었다.

반지하 입구의 계단 옆. 거기서는 거리가 보였다. 합정동의 밤거리. 라이브 클럽의 네온사인이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그 불빛들이 세아의 눈을 자극했다. 마치 노래하라고 부르는 것처럼.

세아는 손에 쥔 봉투를 봤다. 계약서 원본. 강리우가 요청한 것. 그녀는 왜 그것을 가져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강리우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 그것으로 충분했다.

11시 정각. 검은색 벤츠가 도착했다.

창이 내려갔다. 강리우의 얼굴이 보였다. 밤의 불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더 선명했다. 아침 커피숍에서의 피로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연함인가. 아니면 절박함인가.

“타.”

세아가 탔다. 차 안은 따뜻했다. 난방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추웠다. 자신의 추위가 아닌 다른 것의 추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의 추위.

강리우는 운전을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았다. 신호를 기다리고, 회전하고, 가속하는 일련의 동작만 반복했다. 마치 계획된 루트인 것처럼. 혹은 이미 여러 번 한 루트인 것처럼.

“어디로 가요?”

“우리 집.”

“리우’s 집?”

“응. 아버지는 아팠어. 오늘은 안 들어올 거야. 그래서 우리 집에서 얘기하기로 했어.”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핸들을 강하게 잡고 있었다. 피가 빠진 손가락. 마디가 하얀 손가락.

강남의 밤은 서울의 다른 지역과 달랐다.

건물들이 더 높았고, 불빛이 더 많았고, 자동차가 더 비쌌다. 세아는 이곳에 올 때마다 자신이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는 기분을 했다. 마치 책 속의 다른 챕터로 이동한 것처럼. 혹은 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차는 강남역 근처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35층. 강리우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세아를 옆에 둔 채로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는 그들의 모습이 비쳤다. 부자인 남자와 가난한 여자.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해 보였다. 마치 그림의 오류처럼.

문이 열렸다. 복도. 그리고 강리우의 집.

현관을 들어선 순간, 세아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집은 크기가 아니었다. 높은 천장과 넓은 창문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강남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의 모든 불빛이 여기 모여 있었다. 마치 별들이 내려온 것처럼.

“와.”

세아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감탄이 아니었다. 그냥 반응이었다.

강리우는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가 세아를 가리켰다. 자신 옆에 앉으라는 뜻.

세아가 앉았다.

“계약서 봤어?”

“네.”

“읽어봤어?”

“완전히는 아니고…”

“그래도 돼. 어쨌든 함정이 있다는 건 알겠지.”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리우가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계약서처럼 보이지 않은 종이. 더 얇았고, 더 비공식적으로 보였다.

“아버지가 이거를 줬어. 계약서의 법적 분석. 변호사한테 맡겼어. 그리고 결론은…”

강리우가 멈추었다. 그의 눈이 세아의 눈을 만났다.

“3페이지, 7항. 저작권 양도 조항. 이건 명백하게 불법이야.”

세아의 손이 떨렸다.

“불법?”

“응. 한국 저작권법에서는 저작자가 인격권을 포기할 수 없어. 그리고 저작권도 명시적인 동의 없이는 양도될 수 없어. 이 계약서는 그 양쪽을 모두 위반했어.”

강리우가 종이를 세아에게 건넸다. 그것은 법률 용어로 가득 차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해요?”

“뭐라고냐면… 너가 제출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거야. 만약 제출했으면 소송 대상이 됐을 거야. 너뿐만 아니라 JYA도. 회사가 불법 계약을 강제하려고 했다는 죄로.”

세아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가 불법이라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왜 회사는 그런 계약을 제시했는가.

“왜요?”

“왜 불법 계약을 제시했냐고?”

“네.”

강리우가 웃음을 냈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인 아티스트들은 법률을 모르니까. 그냥 서명하고, 제출하고, 나중에 깨닫지. 그렇게 되면 이미 늦어. 회사는 벌금을 내겠지. 하지만 너의 음악은 벌써 그들 손에 있어. 돌려받을 수 없어.”

세아가 이해했다. 그것은 사기였다. 합법적인 외모를 한 사기.

“그래서 뭐해요. 이제.”

“너는 이 계약서를 제출하지 않아. 그리고 난 아버지한테 얘기했어. 너를 다시 계약할 거면 합법적인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아버지가 동의했어요?”

“동의했어.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한테 소송의 위험성을 설명했거든. 그리고… 다른 것도.”

강리우가 다시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뭔가 무거운 것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것처럼.

“내가 회사를 나간다고 했어.”

세아의 심장이 멈추었다.

“뭐요?”

“JYA에서 나가. A&R 직책도, 회사도, 다 나가.”

“왜요?”

강리우는 창밖의 강남을 봤다. 그의 눈에는 도시의 불빛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반사일 뿐, 감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으니까. 음악을 돈으로 만드는 일. 재능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 그리고 너를 보면서 깨달았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럼 뭐해요?”

“모르겠어. 아직은. 하지만 뭔가는 할 거야. 너의 음악을 진짜로 지키는 일.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지키는 일. 뭐가 됐든.”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번엔 약속의 방식으로.

“너는 이제 자유야. 계약서에서도, 나한테서도. 너가 원하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자유인지, 아니면 강리우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계약의 진실

세아는 강리우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봤지만, 그 말들이 뇌에 도달하지 않았다. 마치 두꺼운 유리판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왜곡되고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테이블의 나뭇결을 따라가며 현실감을 되찾으려 했다. 차가운 목재의 질감이 손끝에 전해졌지만,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요?”

세아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마치 물 밑에서 나오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녀는 강리우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뭐라고냐면… 너가 제출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거야.”

강리우가 천천히,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그것은 무언가 중대한 것을 오래 짊어지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만약 제출했으면 소송 대상이 됐을 거야. 너뿐만 아니라 JYA도. 회사가 불법 계약을 강제하려고 했다는 죄로.”

*불법 계약.*

그 단어들이 세아의 뇌에서 반복되었다. 불법. 그녀가 서명한 계약서가? 자신이 정중하게 다루었던, 밤새 읽고 또 읽었던 그 문서가?

세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밤하늘은 검은색이었지만, 강남의 건물들은 천개의 불빛으로 반짝였다. 그 불빛들이 모두 거짓처럼 보였다. 현란한 외모를 한 무언가의 속임수처럼. 마치 그녀가 서명한 계약서처럼.

“이해가 안 돼요.”

세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은 건조했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가 불법이라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왜 회사는 그런 계약을 제시했는가.”

강리우가 그녀의 혼란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왜요?”

“왜 불법 계약을 제시했냐고?”

“네.”

그 단순한 질문 뒤에는 더 깊은 불안감이 숨어있었다.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회사가 의도적으로 불법 계약을 제시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은 나이브한 신인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속았단 말인가?

강리우가 웃음을 냈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아니, 슬픔이라는 단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깊은 절망과 동정과 분노가 섞인 웃음이었다. 마치 이 세상의 불공정함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내는 웃음처럼. 강리우의 입술이 올라갔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 보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인 아티스트들은 법률을 모르니까.”

강리우의 목소리는 이제 명확했다. 그것은 판사처럼 들렸다. 아니면 의사처럼. 진단을 내리는 사람의 목소리.

“그냥 서명하고, 제출하고, 나중에 깨닫지. 그렇게 되면 이미 늦어. 회사는 벌금을 내겠지. 하지만 너의 음악은 벌써 그들 손에 있어. 돌려받을 수 없어.”

세아의 뺨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이 어떻게 되는지 상상해보려고 했다. 자신이 밤낮으로 작곡하고, 편곡하고, 녹음했던 곡들. 자신의 영혼을 담아낸 음악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변형되고 상품화되는 것. 그것은 신체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기.*

그 단어가 세아의 입술에서 나왔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것은 사기예요. 합법적인 외모를 한 사기.”

강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안도감이 떠올랐다. 마치 그녀가 드디어 진실을 이해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것처럼.

“그래서 뭐해요. 이제.”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이미 지쳐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계약서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고, 강리우도 모르던 그때로.

“너는 이 계약서를 제출하지 않아.”

강리우가 명확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가 있었다. 마치 그것이 법칙인 것처럼.

“그리고 난 아버지한테 얘기했어. 너를 다시 계약할 거면 합법적인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세아가 놀라 눈을 떴다. 강리우의 아버지는 JYA의 회장이었다. 그는 이 회사의 최고 권력자였다. 그리고 강리우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대항했다는 것인가?

“아버지가 동의했어요?”

“동의했어.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한테 소송의 위험성을 설명했거든.”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 아래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면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다른 것도.”

강리우가 다시 멈추었다. 이 침묵이 이전의 침묵과는 달랐다. 이것은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그 안에 뭔가 중대한 것이 들어있었다.

세아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강리우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어깨에 거대한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그의 턱이 팽팽해졌고, 눈 주변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내가 회사를 나간다고 했어.”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의 심장이 멈추었다. 정확하게는 멈춘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빨라졌다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뭐요?”

세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JYA에서 나가. A&R 직책도, 회사도, 다 나가.”

강리우가 반복했다. 이번엔 더 명확하게. 마치 자신이 한 결정에 확신을 갖기 위해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말하는 것처럼.

세아의 뇌는 이 정보를 처리할 수 없었다. 강리우는 JYA의 A&R 이사였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의 경력이었다. 그의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을 버린다고?

“왜요?”

“왜냐하면 나는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으니까.”

강리우가 창밖을 봤다. 강남의 밤하늘이 그의 얼굴에 반사되었다. 그의 눈에는 도시의 불빛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반사일 뿐, 감정은 아니었다. 마치 검은 거울처럼, 강리우는 아무것도 반영하지 않았다.

“음악을 돈으로 만드는 일.”

그가 천천히 말했다.

“재능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너를 보면서 깨달았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이 말이 세아에게 미친 영향은 물리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가슴을 누군가 누른 것처럼,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야 했다. 강리우의 아버지. 그 남자는 강리우가 말하기를 꺼렸던 인물이었다. 세아는 강리우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한다니.

“그럼 뭐해요?”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모르겠어. 아직은.”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 솔직함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마치 절벽 끝에 서있는 사람의 두려움처럼.

“하지만 뭔가는 할 거야. 너의 음악을 진짜로 지키는 일.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지키는 일. 뭐가 됐든.”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에 그가 잡을 때는 주인이 소유물을 잡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엔 다를 수 있었다. 이번엔 약속의 방식이었다. 함께 무언가를 견디기 위한 손잡음이었다.

“너는 이제 자유야. 계약서에서도, 나한테서도. 너가 원하면.”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강리우의 손을 바라봤다. 그것은 따뜻했다. 그리고 떨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자유인지, 아니면 강리우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와 강리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그를 놓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선택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인가?

강리우의 손이 그녀의 손 위에 놓여있었다. 세아는 그 손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 접촉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해도 된다고?”

세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뭐라고 해도 돼.”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럼… 좀 더 시간을 줄 수 있어요?”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웃음을 냈다. 이번엔 슬픈 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지친 웃음이었다.

“응. 시간은 줄 수 있지. 하지만 너는 알아야 해. 나는 기다릴 거야. 너가 얼마나 오래 걸리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이야.”

세아는 그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진실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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