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4화: 손 위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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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4화: 손 위의 약속

강리우의 손은 따뜻했다.

세아는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전까지는 강리우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손이 차가워진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손 위에 그의 손이 올려져 있으니, 반대가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의 손이 차가워진 게 아니라, 강리우의 손이 따뜻해서 그 대비가 더 도드라졌던 것이었다.

세아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손을 그대로 두었다. 강리우도 그 손을 덮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순간을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비누 거품처럼.

커피숍의 시계가 울렸다. 정각을 알리는 소리. 오전 일곱 시 삼십분. 그제서야 강리우가 손을 내렸다.

“계약서에 사인하지 마.”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신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자.”

세아의 목이 움직였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음절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강리우는 세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아침 햇빛 아래에서 더 진했다. 마치 카라멜 같은 색이었다. 혹은 호박. 따뜻한 색. 세아가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던 색.

“내가 아버지와 얘기해볼게. 너는 일단… 계약서를 들고만 있어. 제출하지 마. 시간을 버는 거야.”

“시간을 버면… 뭐가 달라져요.”

강리우가 숨을 쉬었다. 깊은 숨. 마치 물속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는 달라질 거야. 항상 그렇거든.”

세아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강리우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지탱하는 거짓이라면 더욱.

“당신은 왜… 이러세요.”

“왜라니.”

“저를 도와요. 당신 아버지 회사에 손해가 될 일을 왜.”

강리우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이번엔 커피잔을 집었다. 이미 비어 있는 잔.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입에 가져가려고 했다. 그리고 멈췄다. 잔이 비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그는 잔을 내려놨다.

“너는… 내가 왜 베를린에서 돌아왔는지 알고 싶어.”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세아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강리우가 계속 말했다.

“내가 거기서 뭘 했는지. 왜 피아노를 그만뒀는지. 왜 손이 떨리는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얘기할 거야. 너한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너를 지켜야 돼. 그게 먼저야.”

“왜…”

“왜냐하면 내가… 너를 빌미로 내 문제를 풀어보고 싶었거든.”

강리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이전의 통제된 톤에서 벗어났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에서 손을 빼어낸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너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내가 잃어버린 뭔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너를 원했어. 순수하게. 그런데 아버지가 계약서를 건넸을 때, 나는… 나는 그걸 막지 않았어.”

세아가 강리우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햇빛으로 인해 명확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의 모든 선, 모든 주름, 모든 피로가. 그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새벽 열 개의 전화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다. 더 깊은 곳에서 비롯된 피로였다.

“내가 약했어. 너를 지킬 수 없는 약함.”

그의 손이 다시 테이블 위에 있었다. 이번엔 주먹을 쥐고 있었다. 세아는 그 주먹을 봤다. 길고 마디 굵은 손이 단단하게 움켜쥔 주먹.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베를린에서의 기억인가. 아니면 자책인가.

“그런데 지금은 다를 거야. 지금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펴 주고 싶었다. 그 주먹을 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박소진은 어떻게 돼요.”

강리우가 웃음을 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넌 정말 이상해. 너는 너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걱정해.”

“답해 주세요.”

강리우가 주먹을 펼쳤다. 천천히. 손가락이 하나씩 펼쳐졌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박소진도… 뭔가 할 거야. 아버지는 그 애를 버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너한테 준 곡들은… 그건 다시 생각해볼 거야. 아마도.”

“아마도.”

“응. 나도 아버지와 싸워본 적이 없거든. 처음이야. 너 때문에 처음 진짜로 싸워보는 거야.”

그의 얼굴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그의 눈이 더 밝아 보였다. 마치 울려고 하는 눈처럼.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단지 세아를 봤다.

“내가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세아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그리고 약속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위협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너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를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자신이 먼저 잡았다. 그의 펼쳐진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따뜻함을 느꼈다. 자신의 손이 그의 손을 덥히기도 하고, 그의 손이 자신의 손을 덥히기도 했다. 온도가 섞였다.

“저도…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이 나온 순간, 세아는 그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혹은 진실일 수도 있었다. 그 둘의 차이는 뭘까. 혹은 그 차이가 중요할까. 세아는 모르겠다. 단지 그 말을 했다.

강리우의 눈이 더 진해졌다. 마치 호박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그래. 그럼 우리 함께 뭔가 해보자.”

“뭘 해요.”

“음악. 우리 음악을 만들어보자. 내가 곡을 쓸 테니까, 너는 그것을 노래해 줘.”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곡을 안 써요. 당신은…”

“피아니스트라고 했지. 하지만 나는 곡도 쓸 수 있어. 단지 오래 하지 않았을 뿐이야. 베를린 이전에는… 나는 곡을 많이 썼어. 그 다음에는 안 했지만. 지금은 다를 것 같아.”

그의 목소리가 다시 변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에 손을 대고 있다가, 조금씩 손을 빼어내는 것처럼. 목소리가 더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우리 곡을 만들고, 그걸 회사를 통해서 내자. 내 이름으로. 너의 이름으로. 아버지 몰래.”

“몰래라니요.”

“응. 아버지한테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할 거야. 내가 알아. 그래서 우리는 그냥 한다. 너의 곡들을 우리가 재구성해서. 새로운 곡으로 만들어서.”

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리우의 손을 더 단단하게 쥐었다.

“당신이… 그 정도까지 위험을 감수해요?”

강리우가 웃음을 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웃음이었다. 거의 한숨 같은 웃음.

“내가 이미 한 번 잃어버렸거든. 베를린에서. 그래서 나는… 두 번 잃고 싶지 않아. 너를 두 번 잃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난 싸울 거야. 이번엔 진짜로.”

창밖으로는 강남의 아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 바쁜 사람들, 돈의 냄새.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강리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우리 곡 제목을 뭘로 할까.”

강리우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럼 나중에 정하자. 지금은 우리가 뭘 할 건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들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손을 맞잡은 채로. 강남역 8번 출구 앞의 작은 커피숍에서. 오전 일곱 시 사십분. 둘 다 밤새 자지 않은 사람들처럼. 하지만 지쳐 있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뭔가가 시작되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가 고시원에 돌아온 것은 오전 아홉 시였다.

강리우와 헤어진 후, 그녀는 한강을 다시 따라 걸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강리우와 함께한 시간을 자신 안에 안고 걸었다. 그의 손의 따뜻함. 그의 목소리. 그가 했던 약속들. 그것들을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켜자마자 문자가 들어왔다. 하늘이였다.

“야 나세아. 넌 뭐 해? 연락이 없어서 진짜 걱정했거든.”

세아가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는 뭐야. 어제는 뭐 한 거야. 정신 차려. 너 회사에서 계약서 보냈다고? 엄청한데.”

“네. 이미 봤어요.”

“그래서.”

“거절할 거예요.”

하늘이가 침묵했다. 그 침묵은 이전의 침묵과 달랐다. 이전의 침묵은 지지하는 침묵이었다면, 지금의 침묵은 깜짝 놀란 침묵이었다.

“정말로.”

“네.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강리우가 뭔가 했어.”

“네.”

다시 침묵. 그리고 하늘이의 한숨.

“그 인간이 좋아하는 거 맞지.”

“…네.”

“아이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데. 당신들이 뭔가 대안을 가지고 있는 건가.”

세아가 생각했다. 강리우가 말한 것들. 곡을 만들기. 새로운 곡으로 만들기. 아버지 몰래 내기.

“음악을 만들 거예요.”

“음악을… 뭐. 맞네. 넌 그래야지. 그래야 할 일을 하는 거지. 계약서 사인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

“하늘이.”

“응.”

“고마워요.”

하늘이가 웃음을 냈다.

“아, 진짜. 그런 말 하지 말고. 내가 뭘 했다고. 넌 자기 할 일을 하는 거고, 나는… 나는 그냥 옆에 있는 거야. 그게 전부야.”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방에 앉았다. 침대 끝에. 어제와 같은 위치에.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마음으로. 어제는 계약서를 본 후 무언가가 무너진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가 다시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혹시 지금 집에 있어.”

“네.”

“좋아. 나중에 곡 하나를 만들어서 보낼 거야. 피아노 버전으로. 너는 그걸 듣고 어떻게 부를지 생각해. 가사도 써도 되고. 아니면 그냥 받아들여도 돼. 우리가 할 음악은 계약이 아니니까. 자유야.”

“네.”

“그리고 계약서는?”

“거절할 거예요.”

강리우가 웃음을 냈다. 아주 짧은 웃음.

“좋아. 그럼 우리 시작해보자.”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방을 둘러봤다. 작은 방. 반지하 고시원.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 여기서 자신은 지난 몇 년을 살았다. 여기서 자신은 몇십 곡을 썼다. 여기서 자신은 자신을 억눌렀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자신은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려고 한다.

세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로. 거의 들리지 않는 크기로. 하지만 그 목소리는 존재했다. 세아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방 안에 퍼져나갔다. 작은 방 안에 가득 찼다.

강리우가 곡을 보낼 때까지 며칠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이미 그 곡이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었다. 따뜻할 것이다. 길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은 것처럼.

밤이 오자, 편의점 알바 시간이 되었다.

세아는 옷을 입고 나갔다. 합정동 거리를 걸으면서, 자신이 지난 며칠을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했다. 계약서를 받고. 하늘이를 만나고. 밤새 한강을 따라 걷고. 강남역에서 강리우를 만나고. 손을 잡고. 약속을 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알바생이 세아를 봤다.

“어제는 못 왔네.”

“네. 죄송합니다.”

“상관없어. 다른 사람이 커버했어. 근데 너 좀 빠져 보이는데, 괜찮아.”

세아가 옷을 입고 계산대에 섰다. 익숙한 위치. 익숙한 냄새. 익숙한 고객들. 밤이 되면서 고등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면을 끓이려고. 초콜릿을 사려고. 음료를 마시려고.

세아는 그들의 얼굴을 봤다. 각각의 얼굴에는 뭔가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는 사랑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상처받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었다.

세아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노래를 생각했다. 강리우가 만들 곡. 그리고 자신이 부를 그 곡. 그것이 누군가의 밤을 밝혀줄 수 있을까.

밤 열한 시. 문자가 왔다. 강리우였다.

“곡이 완성됐어. 내일 아침에 너한테 보낼게. 그리고 세아. 너는 정말 잘 했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세아는 그 문자를 읽고 있었다.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에서. 주변은 라면의 냄새와 전자레인지의 소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세아가 들었던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강리우의 목소리였다. 그의 약속이었다.

세아는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저도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전송.

그 순간, 세아는 느꼈다. 뭔가가 자신 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억눌렀던 뭔가가. 불꽃처럼.


밤이 깊어질수록, 세아는 더 명확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계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의 곡을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곡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새벽 한 시.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음성 메일로. 그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세아. 나야. 지금 곡을 다 마쳤어. 네 목소리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어. 그래서 아마 이 곡은 너를 위한 곡일 거야. 누구를 위한 곡이 아니라. 너를 위한. 이 곡의 제목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야. 좋아.”

음성 메일이 끝났다.

세아는 화면을 봤다. 강리우가 이메일로 악보를 보냈다. 피아노 악보. 그리고 그 아래에는 쓰여 있었다.

“이 곡은 너를 위한 곡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곡이다.”

세아는 악보를 다운로드했다. 그리고 그것을 열었다. 악보를 봤다. 음표들이 악보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봤을 때, 그 음표들이 노래로 들렸다. 아직 강리우의 피아노로 연주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이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표들은 이미 노래였다.


권의 마지막 시간이 오고 있었다.

세아는 편의점 계산대에 서 있었다. 새벽 두 시. 손님이 거의 없었다. 단지 한 명의 노인이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세아는 악보를 다시 봤다. 스마트폰 화면에 띄운 악보. 강리우의 음표들. 강리우의 약속.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알았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이전의 세아 — 침묵하고, 억누르고, 남을 위해 불타던 세아 — 는 이제 과거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아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불타는 세아. 자신의 이름을 가진 세아.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부르는 세아.

계약서는 아직 세아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사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강리우의 악보를 인쇄했다. 종이에. 그리고 그것을 침대 옆에 붙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제목을 읽으며, 세아는 웃음을 지었다.

그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을 위해 불탈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 가장 위험한 불꽃이었다.

#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1부: 메시지

세아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밤 11시 47분. 스크린의 차가운 빛이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원룸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두꺼운 종이, 복잡한 법률 용어들, 그리고 서명 대기선. 그것은 마치 그녀의 인생 전체를 가두는 쇠사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세아의 눈은 계약서가 아닌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리우.

그의 이름만 봐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한 시간 전 그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세아. 미안해. 내가 먼저 말해야 했어. 넌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넌 몰라도 난 안다. 넌 자신을 너무 작게 본다. 너를 봐. 제발.”*

그 메시지를 읽었을 때 세아의 눈가가 따뜻해졌었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참았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다고.

지금, 세아는 응답을 입력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면을 가볍게 누르며, 한 글자 한 글자가 쌓여갔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녀는 잠깐 멈췄다. 커서가 깜박였다. 화면 밝기는 밤의 어둠 속에서 유독 밝았다. 이 말을 전송하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은 단순한 감사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저도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입력을 완료했다.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 떠있었다. 그 버튼은 마치 절벽의 끝처럼 보였다. 한 번 누르면, 그녀는 더 이상 뒤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눌렀다.

*핑.*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그 순간, 세아는 느꼈다. 뭔가가 자신 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억눌렀던 뭔가가. 깊은 물 속에 가라앉혀 있던 불꽃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위험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었다.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봤다. 피아니스트의 손. 얇고 길쭉한 손가락들. 이 손들은 지난 5년간 누군가 else의 음악을 연주해왔다. 남의 곡, 남의 이름, 남의 꿈.

하지만 이제…

세아는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방의 창은 작았지만, 거기서는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밤의 서울은 무수한 불빛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의 인생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선택이 있을 것이다.

세아는 창문에 손을 얹었다. 유리는 차갑고 딱딱했다. 밖의 바람은 한겨울의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작은 음성으로,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세아는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강리우가 그녀에게 말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 음악 스튜디오에서. 그녀가 남의 곡을 연주하고 있을 때, 그가 옆에서 말했던 것.

*“너는 왜 자신의 곡을 안 써?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아니, 넌 반드시 해야 해. 왜냐하면 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거든.”*

그녀는 웃었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저는…”

“넌 뭐가 부족해? 말해봐.”

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려움의 문제였다.

## 2부: 밤의 깊음

밤이 깊어질수록, 세아는 더 명확해졌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들이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디어, 정말로, 진심으로.

그것은 계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의 곡을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보좌자가 되는 것도,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곡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세아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천장은 희고 평평했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미래의 빈 캔버스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세아는 벌떡 일어났다. 시간은 새벽 1시 03분. 그리고 화면에 떠있는 것은…

강리우.

하지만 음성 통화가 아니었다. 음성 메일이었다.

세아는 스피커를 켰다.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질은 조금 뭉쳤지만, 그의 성대의 떨림은 명확히 들렸다. 그는 감정적이었다.

*“세아. 나야. 지금 곡을 다 마쳤어.”*

세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네 목소리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어. 너의 메시지를 읽고, 그 이후로 계속 손가락이 움직였어. 마치 누군가 내 손을 움직이는 것 같았어. 아니, 그건 너였다. 너의 목소리가 내 손을 움직였어.”*

세아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래서 아마 이 곡은 너를 위한 곡일 거야. 누구를 위한 곡이 아니라. 너를 위한. 오직 너를 위한.”*

음성 메일의 배경에서 피아노 음이 들렸다. 부드럽고 슬프고 아름다운 음.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악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이 곡의 제목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야. 넌 이해할 거야. 왜 이 제목인지. 왜냐하면 그건 너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거야. 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타지 않을 거야. 너는 자신을 위해 불탈 거야. 그리고 그건… 가장 아름다운 불꽃이 될 거야.”*

음성 메일이 끝났다.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하지만 그녀의 내부는 폭발하고 있었다. 감정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기쁨, 두려움, 희망, 절망, 사랑.

휴대폰을 봤다. 새로운 메시지. 강리우가 이메일로 악보를 보냈다.

세아는 서둘러 노트북을 켰다. 부팅되는 동안, 그녀의 손가락은 책상을 두드렸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이. 리듬은 불규칙했다. 그녀의 심장 박동처럼.

노트북이 켜졌다. 이메일을 열었다.

제목: *“너를 위한 곡”*

첨부파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_Piano Score.pdf”*

그리고 본문에는:

*”세아,*

*이 곡은 너를 위한 곡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곡이다.*

*강리우”*

세아의 손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PDF를 다운로드했다. 파일 크기는 3.2MB. 작지 않은 곡이었다. 긴 곡이었다.

악보가 열렸다.

세아는 화면을 봤다. 악보는 깔끔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강리우의 악필로 몇 가지 음악 기호들이 손으로 써져 있었다. 음표들이 악보 위에 펼쳐져 있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음악이 흘러가고 있었다.

도입부는 조용했다. 거의 속삭임 같은 피아노. 마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은 음악.

그 다음은 점진적으로 강해졌다. 음이 쌓였다. 화음이 복잡해졌다. 마치 어떤 거대한 힘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반부에서, 갑자기 폭발이 있었다. 음악이 격렬하게 분출되었다. 마치 불꽃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은 음악.

세아는 악보를 따라 읽었다. 손가락으로 음표를 추적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악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강리우의 피아노로 연주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이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표들은 이미 노래였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음악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는 소리. 그의 음악이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 그리고 그 음악 위에, 자신의 목소리가 얹혀지는 것.

한 줄의 가사가 악보 위에 써져 있었다. 강리우의 필기체로.

*“I’m burning for myself now”*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위해 불타고 있다.

세아는 그 문장을 읽으며, 목이 메어왔다.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고, 그것은 좋았다. 따뜻했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눈물이었다.

## 3부: 새벽의 확인

밤이 더 깊어졌다. 시간은 새벽 2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고요했다. 도시가 잠든 시간이었다.

세아는 편의점 계산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야간 알바를 하고 있었다. 5개월간. 용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독립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엄마에게. 아니, 자신에게.

계산대 근처에서는 편의점의 불빛이 형광색으로 밝았다. 그 밝음 속에서, 세아는 유령처럼 보였다. 창백하고, 무표정하고, 마치 자신의 몸 밖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손님은 거의 없었다. 단지 한 명의 노인이 카운터 옆의 좌석에 앉아,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그 노인은 세아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세아를 보지 않는다. 세아는 배경이었다. 벽지였다. 공기였다.

세아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시간은 새벽 2시 47분. 그리고 그녀는 다시 악보를 열었다.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악보의 음표들이 그녀의 눈에 반사되고 있었다.

강리우의 악보.

강리우의 약속.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알았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이전의 세아 — 침묵하고, 억누르고, 남을 위해 불타던 세아 — 는 이제 과거가 될 것이었다. 마치 낡은 의류처럼, 마치 벗겨진 뱀의 피부처럼, 마치 죽은 꽃처럼.

그 세아는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세아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불타는 세아.

자신의 이름을 가진 세아.

자신의 곡을 부르는 세아.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부르는 세아.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계산대를 봤다. 그 위에는 계산기, 영수증 롤, 신용카드 리더기가 있었다. 모두 무거운 물건들이었다. 모두 그녀를 누르고 있던 무게였다.

하지만 이제, 그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세아는 일을 마쳤다. 새벽 3시. 그녀는 앞치마를 벗었다. 주인에게 인사했다. 주인도 그저 고개를 끄덕했을 뿐, 뭔가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아는 거리로 나갔다.

밤의 거리는 차갑고 고요했다. 길가의 가로등들이 주황색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불빛 속을 걸으며, 세아는 생각했다.

계약서는 아직 그녀의 방에 있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채로. 서명을 기다리며.

그녀는 그것에 사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강리우의 악보를 인쇄했다. 색깔 프린터로. 종이에. 고급 종이에. 그것을 침대 옆에 붙였다. 핀으로. 마치 보물처럼 벽에.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 악보를 봤다.

제목을 읽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그건 자신이었다. 맞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을 위해 불탈 것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아무도 원하지 않아도, 오직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리고 그것은 — 가장 위험한 불꽃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가장 순수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불꽃이었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그 천장 위로, 그녀는 미래를 상상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

강리우의 피아노.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하지만 이제 그 소녀는 불타고 있었다.

자신의 불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으로.

그리고 그것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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