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7화: 베를린의 손, 서울의 불
세아의 몸이 침대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이 서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병실의 바닥에 발을 디디고. 마치 자신이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도 침대 위의 어머니처럼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으로. 투명해지고, 사라지고, 단지 말하는 입만 남겨질 것 같은 느낌으로.
복도의 형광등이 세아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병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여기서는 선명했다. 간호사 스테이션의 화면들, 다른 환자들의 모니터 소리, 그리고 가장 멀리서 들리는 엘리베이터의 소리. 도현이가 탔을 엘리베이터. 아직도 하강 중인 엘리베이터. 세아는 그 소리를 추적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귀가 자신의 남동생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세아는 복도의 벽을 봤다. 그 벽은 크림색이었다. 병원색. 중성적이면서도 절망적인 색. 마치 누군가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제거하려고 선택한 색. 세아는 그 색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색 안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거기에 없었다. 단지 공허함만 있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었다.
“세아.”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세아는 몸을 돌렸다. 강리우였다. 강리우가 복도에 있었다. 병실을 떠난 후 돌아온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마치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또는 무언가를 받아들인 것처럼. 그의 눈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에는 이제 다른 종류의 것이 섞여 있었다. 분노와 혼동. 슬픔과 분노. 모든 것이 한 번에.
“내가… 너한테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아.”
강리우의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것을 세라믹처럼 던져서 깨뜨린 것처럼.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피해왔는지를 깨달았다. 이 순간. 강리우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순간. 세아는 그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들어야 했다. 마치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베를린에서 뭐가 있었어?”
세아가 물었다. 그 질문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물었던 것과는 다른 질문이었다. 이것은 선택적인 질문이었다. 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질문. 또는 적어도 들으려고 하는 질문.
강리우가 세아의 옆에 섰다. 마치 자신도 그 크림색 벽을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으로. 그의 어깨가 세아의 어깨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단지 앞을 봤다. 그 벽을. 그 벽 너머를 봤다.
“베를린에서 나는 피아노를 쳤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 문장은 간단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무게는 엄청났다. 세아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 문장 자체가 돌덩어리를 들고 있는 것처럼.
“내 양부모는 음악을 좋아했어. 특히 아버지가.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어. 그리고 나는 좋았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배웠어. 내 아버지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어. 자신의 아들이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뭔가 다르다고. 뭔가 비범하다고.”
강리우가 멈췄다. 그 멈춤은 길었다. 마치 자신이 다음 말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아는 기다렸다. 침묵과 함께 있기를. 그 침묵은 이전의 침묵들과는 달랐다. 이것은 공유의 침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견디고 있는 침묵.
“내가 열여덟 살 때, 강민준이가 나타났어. 그리고 나한테 말했어. 넌 내 아들이라고. 넌 내가 버린 아들이라고. 내 양부모는 그것을 몰랐어. 강민준이가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냥.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그는 내 아버지였어. 그리고 그는 나를 버렸어. 그리고 나는… 나는 미쳤어.”
강리우의 손이 떨렸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벽을 통해서도 봤다. 그 떨림은 통제 불가능했다. 마치 강리우의 신체 자체가 이 기억에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 해 겨울, 나는 베를린으로 갔어. 어머니가 나한테 전화했었어. 자신이 내 어머니라고. 자신이 나를 버렸다고. 자신이 미안하다고. 그리고 자신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받았어. 그리고 나는 가버렸어.”
세아가 강리우를 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또는 자신이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
“베를린의 겨울은 추웠어. 그 추위는 내가 경험한 어떤 추위와도 달랐어. 그건 단지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어. 그건 존재의 문제였어. 나는 거기에서 자신이 아무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내 이름도 거짓이었고, 내 가족도 거짓이었고, 내 정체성도 거짓이었어. 그리고 그 거짓들 위에 내가 지어올린 모든 것들도 거짓이었어. 내 피아노도. 내 음악도. 모두 거짓이었어.”
강리우가 손을 들었다.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어떤 악기도 만지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또는 무언가를 놓아주려고 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나를 이해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정말로 나를 이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왜냐하면 이해는 뭔가가 이미 존재해야 가능한데, 나는 존재하지 않았거든. 나는 단지 거짓이었어. 그리고 거짓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건 아니야.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쳤어. 하루에 열 시간씩. 아니, 더 많았어. 더 많이 쳤어. 마치 내가 피아노를 통해 자신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세아의 가슴이 조여 왔다. 그 조임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강리우였다. 아니, 정확히는 강리우의 말이었다. 강리우의 이야기가 세아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나는 사람을 만났어. 동료 피아니스트. 그 사람은 나보다 더 재능이 있었어. 하지만 그 사람은 나보다 더 행복했어.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거든. 그리고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지도 알았어. 반면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시기했어. 극도로.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는…”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그 멈춤은 이전의 멈춤과는 달랐다. 이것은 거절의 멈춤이었다. 계속할 수 없다는 멈춤.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마치 그의 신체도 자신의 눈물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죽었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 문장은 짧았지만, 그것은 세아의 전 세계를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세아는 숨을 참았다. 자신도 모르게. 마치 숨을 쉬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자살이었어. 그 사람은 자살했어. 그리고 나는…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어. 내 시기와 내 질투와 내 절망이 그 사람을 죽였어. 내가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죽게 했어.”
강리우의 몸이 벽에 기댔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것처럼. 세아는 강리우를 받쳐주지 않았다. 대신 세아도 벽에 기댔다. 마치 자신들 둘 다가 이 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언가 더 단단한 것이 필요한 것처럼.
“그 후로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없었어. 내 손이… 내 손이 거부했어. 마치 내 손이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내 손이 살인자의 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베를린을 떠났어.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어. 그리고 나는… 나는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기 시작했어.”
세아가 강리우의 손을 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 행동처럼.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이 손을 잡지 않으면, 강리우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너는 자신을 구하려고 했어.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통해.”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였다. 마침내. 세아는 강리우를 이해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리고 그 부분적인 이해는 세아의 가슴에 또 다른 종류의 불을 붙였다. 슬픔의 불. 그리고 그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병실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세아는 복도의 끝에서 도현이를 봤다. 자신의 남동생이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 있었다. 마치 모든 피가 그 얼굴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그리고 그의 눈은 세아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질문. 또는 고발. 세아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었다.
“누나.”
도현이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하지만 그것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치 누군가가 벽 전체를 악기처럼 울린 것처럼.
“엄마가 나한테 뭔가를 더 말했어. 그것도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도현이가 멈췄다. 그 멈춤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전체 인생이 다시 한 번 붕괴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금까지는 단지 서막이었던 것처럼. 진정한 폭풍은 이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강민준이가 죽었대. 어제.”
도현이가 말했다.
그 문장이 공중에 떠 있을 때, 세아의 세계는 다시 한 번 기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아는 그것을 붙잡을 것이 없었다. 오직 강리우의 떨리는 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손도 이제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동시에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세아의 손가락이 라이터를 찾았다. 주머니 깊숙한 곳의 라이터. 그것을 꺼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복도의 구석에서. 그리고 불을 붙였다. 세 번. 클릭, 클릭, 클릭. 그 불은 타올랐다. 작고, 파랗고, 절망적인 불.
세아는 그 불을 봤다. 그리고 자신이 이 불을 위해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타오르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타기 위해. 그리고 이제, 마침내, 세아는 자신이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춀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이 불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라이터를 든 손을.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는 그 불을 껐다. 마치 그가 자신의 죄책감도 함께 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불은 다시 붙을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붙을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 붙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아는 이 불이 무엇인지 아직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아니면 단지 자기소멸인지. 그것을 알 때까지, 이 불은 타올 것이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의 눈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세아를 찾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놓친 딸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더 이상 그 어머니의 딸이 아니었다. 세아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사람. 단지 타오르고 있을 뿐인 사람. 그리고 그것이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적어도 이 순간은.
# 불타는 마음
## 1부: 슬픔의 불
세아의 가슴에 또 다른 종류의 불을 붙였다. 슬픔의 불. 그리고 그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물을 천천히 데우듯, 온도가 점차 올라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따뜻함이었다. 어쩌면 위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빠르게 뜨거워졌고, 이제는 견딜 수 없는 열이 되어 세아의 전신을 휩싸고 있었다.
병실 복도를 걸어가며,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들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쪽에 파고들었고, 그 작은 통증은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그것은 현실이었다. 육체적인 것이었다.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달리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마치 자신이 물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복도의 불빛이 너무 밝았다. 형광등이 세아의 눈을 찌르듯 내려쬐었고, 그녀는 눈을 좁혀야 했다. 병원의 냄새—그 소독약의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폐를 압박했다. 세아는 숨을 천천히 내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숨도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제 의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그리고 그 답은 항상 같았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세아는 생각했다.
병실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세아는 복도의 끝에서 도현이를 봤다.
자신의 남동생이 돌아와 있었다.
## 2부: 도현이의 귀환
도현이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 있었다. 마치 모든 피가 그 얼굴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뺨에는 건강한 혈색이라고는 없었고, 입술은 거의 회색에 가까웠다. 세아는 자신의 동생이 이토록 절망적인 표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세아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질문. 또는 고발. 혹은 그 두 가지 모두. 세아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도현이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남동생의 눈을 통해 그 끔찍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나.”
도현이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마치 그 말을 크게 하면 현실이 되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치 누군가가 벽 전체를 악기처럼 울린 것처럼. 세아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도현이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그가 세아를 너무 깨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혹은 자신을 깨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엄마가 나한테 뭔가를 더 말했어. 그것도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도현이가 멈췄다.
그 멈춤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전체 인생이 다시 한 번 붕괴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금까지는 단지 서막이었던 것처럼. 준비 운동이었던 것처럼. 진정한 폭풍은 이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세아의 심장이 자신의 가슴 안에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 박동은 너무 빨라서, 마치 자신의 가슴이 터져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아는 도현이를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봤다.
“강민준이가 죽었대. 어제.”
도현이가 말했다.
## 3부: 세계의 붕괴
그 문장이 공중에 떠 있을 때, 세아의 세계는 다시 한 번 기울었다.
강민준. 그 이름.
세아는 그 이름을 수천 번 들었다. 엄마의 입에서. 아빠의 입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그 이름은 세아의 삶에 항상 존재해 있었다. 마치 배경음악처럼.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하지만 항상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이름은 과거형이 되었다.
세아는 벽에 손을 짚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바닥으로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은 차갑고 단단했다.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 찬 느낌이 세아를 붙들고 있었다.
‘강민준이가 죽었다.’
이 문장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반복해보자, 세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어떤 외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것처럼, 그 단어들은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죽음. 그것은 너무나 확정적이었다. 되돌릴 수 없었다. 다시 쓸 수 없었다.
“언제?” 세아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제라고 했어. 사고였대. 교통사고.”
도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마치 자신이 큰 목소리로 말하면, 모든 것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세아는 자신의 남동생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현이는 울고 있었다. 세아의 남동생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세아의 눈은 건조했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눈물을 흘릴 능력이 없는 것처럼.
“엄마는?”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뭐라고 해야 할지…”
도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아에게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 4부: 불의 의식
이번에는 세아는 그것을 붙잡을 것이 없었다. 오직 벽뿐이었다. 그리고 그 벽도 이제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동시에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찾았다. 그 익숙한 형태. 그 익숙한 무게. 라이터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마치 세아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도현이가 세아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의 눈이 커졌다.
“누나, 뭐 하는 거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라이터를 꺼냈다. 그것은 검은색이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수많은 불을 붙였던 증거들.
“누나!”
도현이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나 세아는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복도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그리고 불을 붙였다.
클릭.
첫 번째 불.
클릭.
두 번째 불.
클릭.
세 번째 불.
그 불은 타올랐다. 작고, 파랗고, 절망적인 불. 마치 세아의 영혼을 반영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불을 봤다. 그리고 자신이 이 불을 위해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타오르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타기 위해. 그것이 세아의 인생이었다. 아니, 그것이 세아 자신이었다.
이 생각은 세아의 뇌를 스칠 때, 마치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명확했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 정확한 순간에, 세아는 알았다. 자신이 불이 되었다는 것을. 불이 아니라, 불 그 자체가 되었다는 것을.
“누나, 제발…”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멀리서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는 소리처럼.
세아의 손가락이 라이터를 더 가까이 들었다. 불이 그녀의 손을 태우기 시작했다.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세아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 통증이 더 필요했다.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로.
‘강민준이가 죽었다.’
이 생각이 다시 들었을 때, 세아는 자신이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이 불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5부: 개입
갑자기 손이 나타났다.
세아의 손을 잡은 손. 강하지만 부드러운 손.
“세아.”
그것은 강리우의 목소리였다. 세아의 아버지. 언제부터 그가 거기에 있었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아는 그를 보지 못했다. 세아는 자신의 불만 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가져갈게.”
강리우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라이터를 빼앗았다. 세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가 이것을 빼앗아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강리우의 손이 라이터를 껐다. 그 작은 불이 사라졌다.
하지만 세아는 알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불은 다시 붙을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붙을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 붙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아는 이 불이 무엇인지 아직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아니면 단지 자기소멸인지. 그것을 알 때까지, 이 불은 타올 것이었다. 아니, 이 불은 항상 타오를 것이었다.
강리우가 세아를 안았다. 그의 팔이 세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따뜻했고, 견고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도, 이 팔은 세아를 붙들고 있을 것처럼.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아버지의 어깨에 파묻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눈물이 흘렀다.
도현이도 울고 있었다. 세 사람이 모두 울고 있었다. 복도의 그 구석에서. 불빛이 밝은 병원의 복도에서.
## 6부: 돌아옴
병실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의 눈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세아를 찾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놓친 딸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알았다. 어머니도 같은 불에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같은 슬픔에 의해 내면이 태워지고 있다는 것을.
“엄마.”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강민준이…”
어머니가 속삭였다.
“알아. 도현이가 말해줬어.”
세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이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물론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아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은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내 잘못이야. 내가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서…”
“엄마, 그렇지 않아.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누군가의 잘못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세아는 더 이상 그 남동생의 딸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딸이 아니었다. 세아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사람. 단지 타오르고 있을 뿐인 사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것이 충분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것. 그것이 충분했다.
강리우가 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도현이도 침대의 다른 쪽에 앉았다.
네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병실의 창밖으로는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치 세아의 내면의 불이 하늘까지 태우는 것처럼.
세아는 그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러나 그 답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답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세아는 살아있었으니까. 불타고 있었지만, 살아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이 순간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