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5화: 손가락이 말하는 것들
강리우는 창문을 통해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유리를 따라 움직였다.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피아노를 치려고 하는 것처럼. 그 손가락들은 떨리고 있었다. 고의적이지 않은 떨림. 신경계가 스스로를 거부하는 떨림. 세아는 그 손가락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자신의 손가락도 떨리고 있었다.
“강민준이는 나를 떠났어.”
어머니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이제 다르게 들렸다. 이전의 고백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이 아니라, 진술처럼. 법정에서의 진술처럼. 사실에 기반한 것.
“강리우를 포기한 지 일 년 후에. 그는 나한테 말했어. 자신은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더 젊은 여자라고. 더 나은 여자라고. 그리고 그는 나한테 물었어. 넌 강리우 없이도 행복할 수 있겠지, 라고.”
도현이가 침대에서 몸을 돌렸다. 이제 완전히 어머니를 등지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호흡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세아는 도현이를 안으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신체가 명령에 응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감정들을 한 번에 받으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느낌으로.
“나는 그렇지 않았어.”
어머니가 계속했다.
“강리우 없이는 행복할 수 없었어. 그 아이가 없으면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가 버린 아들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였어. 그런데도 나는 그를 버렸어. 그리고 그 의미도 사라졌어.”
세아의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형광등의 소리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신체가 내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 형광등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또는 병실 자체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러니까 나는 그를 찾았어. 강리우를. 강민준이를 떠난 지 15년 후에.”
강리우가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 있었다. 마치 모든 피가 그 얼굴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어디서?”
세아가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인이었다. 자신이 아직도 현실 안에 있다는 확인. 아직도 생각할 수 있다는 확인. 아직도 말할 수 있다는 확인.
“입양 기관에. 그곳의 기록을 통해. 강리우는 2살 때 서울의 한 가정에 입양되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멈췄다. 그 침묵은 길었다. 마치 어머니 자신도 다음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그 가정의 아버지가 강민준이의 친구였어. 강민준이가 강리우를 가까운 누군가에게 주려고 한 거였어.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자신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세아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제 더 크게. 통제 불가능한 떨림. 강리우의 손가락이 창틀을 더 세게 눌렀다. 마치 자신이 그것을 부수지 않으면 자신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으로.
“강리우는 자신이 입양된 줄 알았어. 그 가정이 자신의 진정한 가정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강민준이는 가끔 그 집을 방문했어. 강리우의 아버지라고 소개되지 않고. 그냥 아버지의 친구로. 그리고 강리우는 그 남자를 봤어. 매 번.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남자가 자신을 보는 방식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어.”
도현이가 침대에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그것은 울음이었지만, 음성은 없었다. 침묵의 울음. 가장 깊은 종류의 절망이 내는 울음.
“강민준이는 강리우에게 말했어. 넌 내 아들이라고. 넌 내가 버린 아들이라고. 그리고 넌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리우가 열여덟 살 때였어. 그때 강리우는 자신의 전 인생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어. 자신의 이름도 거짓이었어. 자신의 가족도 거짓이었어. 자신의 정체성도 거짓이었어.”
강리우가 병실을 나갔다.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그냥 나갔다.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들 모두가 이미 죽어있는 것처럼, 그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세아는 어머니를 봤다. 그리고 어머니는 세아를 봤다. 그들의 눈이 만났다. 어머니의 눈은 파괴되어 있었다.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눈. 자신이 한 일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눈.
“나는 강리우를 찾으러 갔어.”
어머니가 계속했다. 이제 그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자신을 보지 못했어. 나를 보지 못했어. 자신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어.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어. 나는 너의 어머니라고. 나는 너를 버린 사람이라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도현이의 울음이 소리를 냈다. 이제 통제할 수 없는 울음. 병실을 채우는 울음. 그 울음은 도현이의 울음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그것은 마치 병실 자체가 우는 것처럼. 또는 시간 자체가 우는 것처럼.
세아가 도현이를 안았다. 자신도 모르게. 도현이의 몸은 작았다. 세아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았다. 마치 도현이가 지난 몇 시간 동안 축소되어버린 것처럼.
“그 아이는 나를 보지 않았어. 그냥 돌을 봤어. 또는 공기를 봤어.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내게 물었어. 넌 누구냐고. 그리고 나는… 나는 그에게 말할 수 없었어. 진실을 말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거짓을 말했어.”
세아가 움직였다. 어머니에게 가려고. 하지만 도현이가 자신을 놓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세아를 놓으면, 세아가 어머니를 용서해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나는 그에게 말했어. 나는 너의 아버지의 친구라고. 그리고… 그리고 난 그에게 돈을 줬어. 강민준이가 내게 버린 돈으로.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했어. 이것으로 좋은 삶을 살아. 그리고 나를 잊어. 나는 너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병실의 침묵이 다시 내려왔다. 하지만 이제 그 침묵은 완전했다. 끝이 있는 침묵. 마지막 침묵. 어머니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침묵.
심전도 모니터의 비프음이 느려졌다. 마치 어머니의 심장이 이 고백 이후로는 더 이상 뛸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것처럼.
세아는 천천히 도현이를 놓았다. 그리고 어머니 쪽으로 움직였다. 한 발씩. 마치 자신이 지뢰밭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맞았다. 이 병실이 지뢰밭이었으니까. 매 단어가 지뢰였으니까.
세아가 어머니의 손을 집어 들었다. 그 손은 차갑고 마른 것 같았다. 마치 어머니가 이미 죽어있는 것처럼. 또는 죽고 싶어 하는 것처럼.
“왜… 왜 나한테 말했어?”
세아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깨어진 것처럼 들렸다. 자신도 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눈이 움직였다. 마치 자신이 세아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시선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왜냐하면 넌 알아야 하니까. 넌 알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멈췄다. 그 멈춤은 길었다.
“그리고 넌 강리우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가 봤어. 너의 눈을 통해. 그 아이를 보는 너의 방식을. 그것은 사랑이었어. 또는 운명이었어. 나는 몰라. 하지만 넌 알아야 해. 그 아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상처받아 있는지.”
세아가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천천히. 마치 그것이 뜨거운 것처럼.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세아가 물었다. 그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불완전성 자체가 질문이었다.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그 눈이 다시 열릴지는 알 수 없었다. 또는 알 수 있었지만, 세아는 그것을 아는 것을 거부했다.
“넌… 내 딸이야. 그 부분은 거짓이 아니야. 그리고 강리우는… 강리우는 내 아들이야. 그것도 거짓이 아니야. 하지만…”
어머니가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하지만”이 모든 것을 말했다. 혼란, 배신, 그리고 불가능한 상황. 한 어머니가 두 아이를 가졌다. 그 둘은 다른 아버지를 가졌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한 아이를 버렸고, 다른 아이를 속였다. 그리고 이제 그 둘이 만나고 있었다. 서로를 모른 채로. 또는 이제 막 알게 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도현이가 침대 옆에 앉았다. 마치 자신이 정신을 잃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정신을 잃지 못하는 것처럼.
세아는 병실을 나갔다. 아무 말도 없이. 도현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어머니를 돌아보지도 않고. 단지 나갔다.
그리고 복도에서, 세아는 강리우를 찾았다. 그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유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강리우.”
세아가 말했다.
그 남자가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나는 너의 누나야.”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또는 거짓이었다. 또는 그 둘 다였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문제는 사실이 아니었다. 문제는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진실 위에서. 이 거짓 위에서. 이 불가능함 위에서.
강리우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이미 죽어있는 것처럼.
“우리 어머니는…”
세아가 말을 시작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멈췄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서로를 모르지만, 이제는 같은 것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같은 배신으로. 같은 상처로. 같은 불꽃으로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시간이 흘렀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형광등이 그들 위에서 윙윙거렸다. 마치 그것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냥 계속 빛을 내고 있었다. 의미 없이. 목적 없이. 단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아와 강리우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 존재하는 것. 단지 서 있는 것. 단지 이 진실을 견디는 것.
강리우가 손을 들었다. 세아의 손 쪽으로. 그것은 제안이었다. 또는 구원을 청하는 것이었다. 또는 그냥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세아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마치 자신이 유리를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손이 만났다. 그것은 뜨거웠다. 또는 차가웠다. 또는 그 둘 다였다.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접촉은 실제였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 있었다. 손을 맞잡고.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이해했다. 그녀가 왜 불타고 있었는지. 그녀가 왜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 안의 무언가를 소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자신 안의 깊은 상처를. 그리고 그 상처는 이미 여기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형 강리우와 함께.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절대 치유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서 있었다. 여전히 손을 맞잡고 있었다.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 병실의 문을 나가며
세아는 병실의 문을 밀어냈다. 그 순간, 공기가 그녀의 폐를 스치고 지나갔다. 산소 냄새와 소독약의 냄새. 병원 특유의 그 냄새. 그것은 죽음과 삶이 함께 숨을 쉬는 곳의 냄새였다.
도현이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등을 뚫고 지나갔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그녀는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세아야, 잠깐만…” 하지만 그 말은 이미 과거였다. 세아는 앞만 보고 나갔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발이 병원 복도의 타일 바닥을 울렸다. 딱, 딱, 딱.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한 리듬. 마치 그녀의 심장이 외부로 드러난 것 같았다. 복도 양쪽의 벽은 회색이었다. 병원 벽은 항상 이렇게 생겼나? 이전에는 이렇게 회색이었나?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전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형광등이 천장에서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벌이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뭔가가 죽어가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세아는 그 소리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자꾸만 귀에 들렸다. 윙윙, 윙윙. 마치 자신의 뇌가 발산하는 소음인 것처럼.
복도의 끝자락에서, 세아는 그를 발견했다.
강리우.
그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거대한 병원 창문 앞에. 서울의 야경이 그의 몸 뒤로 펼쳐져 있었다. 불빛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수백만 개의 생명들이 저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태어나고, 죽고, 사랑하고, 배신하고. 그들은 모두 그 불빛 속에 있었다. 그리고 강리우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세아는 그의 손을 봤다. 그의 손가락이 창문의 유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무음의 피아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음악. 하지만 그의 몸은 그 음악을 느끼고 있었다. 미묘한 움직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움직임. 하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강리우.”
세아가 말했다. 그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그는 자신의 형이었다. 아니면 형이 아니었다. 그도 그녀도 더 이상 확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흔들렸다. 기초부터.
남자가 돌아섰다. 천천히. 마치 자신의 몸이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세아의 숨이 멈췄다.
그는 무너져 있었다.
완전히.
마치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어 버린 건축물처럼. 표면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빈 공간. 어둠. 그리고 무한한 낙하.
그의 눈이 그녀를 봤다. 하지만 그 눈은 보고 있지 않았다. 단지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수면을 보는 것처럼.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을.
세아의 입이 열렸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나는… 나는 너의 누나야.”
그 말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떨어지지 않는 먼지처럼.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강리우보다 나이가 많았다. 신분증에는 그렇게 적혀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거짓이었다. 누나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보호하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세아는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그를 책임지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상처 입혔다. 함께 상처 입었다.
아니면 그것도 거짓인가? 함께?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너의 누나야.”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작은 목소리로.
강리우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혹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혹은 더 이상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옷깃에는 먼지가 앉아있었다. 병원 냄새가 그의 몸에 배어있었다. 그는 며칠을 여기서 보냈을까? 어머니 옆에서. 그 여자 옆에서. 그 여자가 그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면서.
세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는…”
하지만 그 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그녀는 누구인가? 그 여자는 세아의 어머니였다. 이십 년 이상을 함께 살았다. 그녀를 낳았다. 그녀를 키웠다. 그녀를 사랑했다. 혹은 그렇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리우의 어머니는 아니었다. 강리우는 다른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그 여자는 지금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세아는 말을 멈췄다. 말할 수 없었다.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가벼운 침묵이 아니었다. 무겁고, 진하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었다.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서로를 모르지만, 이제는 같은 것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같은 배신으로.
같은 상처로.
같은 불꽃으로 타고 있는 두 사람이.
형광등이 그들 위에서 계속 윙윙거렸다. 마치 그것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마치 그것도 이 상황에 놓여있는 것처럼. 단지 빛을 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서. 의미를 묻지 말고. 목적을 묻지 말고. 단지 빛을 내고 있었다.
세아가 시간을 따져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몇 시간? 시간은 이 순간에는 의미가 없었다. 시간은 움직이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멈춰있었다. 그들은 이 순간 속에 갇혀있었다. 영원히.
아니면 단 1초일 수도 있었다. 단 하나의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이 모든 것을 바꿨다. 이전의 세아와 이후의 세아를 나누었다.
창문을 통해 서울이 보였다. 불빛의 도시. 수백만 개의 삶이 저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지금 태어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배신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와 강리우는 그 불빛의 관객이었다. 혹은 배우였다.
강리우의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부자연스럽게. 마치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손이 세아 쪽으로 올라왔다.
그것은 제안이었다. 손을 잡으라는 제안.
혹은 구원을 청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무언가가 그를 이 어둠에서 끌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
혹은 그냥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이미 죽어있지 않다는 것을.
세아의 손이 올라왔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마치 자신이 물 속을 헤엄쳐 나가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유리를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방어막을 뚫고.
그들의 손이 만났다.
그 순간, 세아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을 느껴졌다.
뜨거움. 차가움. 부드러움. 거칠음. 생명. 죽음.
그것은 모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모순 속의 진실.
그들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약간의 진동. 마치 높은 음역대의 음표가 흔드는 유리처럼.
“나는…”
강리우가 말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스러졌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악기처럼.
“나는…”
하지만 그것도 완성되지 않았다. 말은 그의 목구멍에서 막혔다. 거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다. 너무 많은 감정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나오려고 하면서 막혀버렸다. 대홍수가 댐을 부수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입으로 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그것이 그들 사이의 언어였다. 말이 아닌 다른 것. 손의 온기. 눈의 접촉.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그렇게 서 있었다. 손을 잡고.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창문을 통해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깨달았다.
그녀가 왜 불타고 있었는지.
왜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는지.
왜 자신의 삶을 불타는 나무처럼 살고 있었는지.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 안의 무언가를 소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자신 안의 깊고 깊은 상처를. 그 상처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이미 여기 있었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그녀의 어머니 안에서부터. 그리고 그녀의 형 강리우 안에서부터.
그들은 모두 같은 불에 타고 있었다.
같은 상처 위에서 산다는 것의 무게. 진실 위에서. 거짓 위에서. 그 둘의 경계에서.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절대 치유되지 않을 것이었다. 세아는 이제 알았다. 치유란 없다. 단지 살아가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
“강리우…”
세아가 속삭였다.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선언이었다. 너는 나의 형이다. 우리는 같은 배신의 자식이다. 우리는 같은 거짓 위에 서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손을 잡고. 함께.
강리우가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증거인 것처럼. 그것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그들은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세아는 이해했다.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리우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함께 불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구원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병원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더 이상 외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심장박동 같았다. 함께 살아가는 것의 리듬. 불타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의 증거.
창밖의 서울은 여전히 불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불빛 속에서, 함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