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32화: 강민준이라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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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2화: 강민준이라는 불

세아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듣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수심 깊은 물 아래에 있으면서, 위의 세상을 통해 음성을 받는 것처럼. 왜곡되고, 지연되고, 부분적으로만 도달하는 음성들. 강민준. 26살. 춤. 무대. 그 단어들이 세아의 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는 나한테 기회를 줬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기회였는데, 그때 내게는 그게 세상의 모든 것처럼 느껴졌어.”

어머니가 계속했다. 손을 움직이지 못한 채로. 침대에 누운 그대로. 마치 자신의 몸이 과거의 무게로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나를 좋은 곳에 데려갔어. 강남의 어떤 펜트하우스. 나는 그곳의 천장을 본 적이 없었어. 그것이 얼마나 높은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는 나한테 말했어.”

침묵.

도현이가 어머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마치 자신이 어머니를 현실에 붙잡아 두지 않으면, 어머니가 그 펜트하우스로 다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느낌으로. 강리우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등이 세아를 향하고 있었다. 등은 말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 슬픔, 또는 그보다 더 무거운 것.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상처였는지를 알게 된 깨달음.

“그는 내게 말했어. 넌 아주 특별하다고. 그리고 난 그 말을 믿었어.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았고, 어머니는 늘 두려워했어. 나의 목소리를. 나의 움직임을. 나의 존재 자체를. 그런데 강민준은 나를 봤어. 정말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세아는 귀를 기울였다. 마치 자신이 더 가까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거리는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었으니까. 시간도 거리였다. 이해도 거리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 거리였다.

“우리는 3년을 함께했어. 3년 동안 나는 강민준이의 세상에 살았어. 그것은 아름다웠어. 그리고 무섭기도 했어. 왜냐하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춤추는 방식. 내가 웃는 방식. 내가 생각하는 방식. 모든 것이.”

세아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떨림. 심전도 모니터가 잡아채지 못할 정도의 떨림. 하지만 세아는 느꼈다. 자신의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그 미묘한 붕괴.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임신했어. 강리우를.”

강리우의 등이 더 굳어졌다. 마치 돌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 움직임 없는 움직임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움직임이기도 했으니까. 자신과 강리우는 같은 아버지의 자식이었다. 그들의 신경계는 아마도 비슷한 것들에 반응했을 것이다. 상처, 거절, 그리고 원래부터 있지 않아야 했던 존재라는 깨달음.

“강민준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 그는 명확하게 말했어. 넌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고. 넌 내 계획의 일부가 아니라고. 넌 나의 미래의 일부가 아니라고.”

어머니가 멈췄다. 세아는 그 침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 말이 무엇일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할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다른 것이었다. 모르는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 후자가 훨씬 더 깊은 거짓이었다.

“그는 나한테 돈을 줬어. 많은 돈을. 그리고 그는 나한테 말했어. 이것으로 지워. 이 아이를 없애. 그리고 다시 나한테 돌아와. 그럼 우리는 계속될 거라고.”

도현이가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마치 자신이 그 손을 잡으면, 자신도 오염될 것 같은 느낌으로. 세아는 그 움직임을 봤다. 도현이의 표정 변화. 그 얼굴 위에 떠오르는 것들. 분노, 혐오,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혼란.

“나는 그 돈을 들고 도망쳤어.”

어머니가 계속했다. 목소리에 힘이 조금 더 돌아왔다. 마치 이 부분이 자신의 생애에서 유일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처럼.

“제주도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곳으로. 그곳에서 나는 강리우를 낳았어. 혼자. 병원에도 가지 않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그리고 강리우가 태어난 그 밤, 나는 자신이 아주 큰 실수를 했다고 깨달았어.”

세아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그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왜냐하면 강민준은 나를 찾았거든. 그는 언제나 나를 찾았어. 어디든 내가 있었던 곳. 그리고 그는 나한테 말했어. 아이는 내 아이라고. 내가 낳았어도, 그는 내 소유라고.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깨졌다. 세아는 그 깨짐을 들었다. 그것은 음성 자체의 깨짐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언가의 붕괴였다. 자존감. 의지. 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나는 그의 말을 들었어. 그리고 나는 강리우를 주기 위해…”

어머니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조용한 눈물이었다. 소리 없는 눈물. 마치 자신이 이미 울 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세아는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 옆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자신의 손가락으로는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흘러내렸다.

“근데 아버지가…”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가 실제로 강리우를 데려갔어요?”

침묵.

강리우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창밖의 흐린 서울 하늘과 같았다. 구름이 가득하고, 그 사이사이로 무언가 타고 있는 것 같은 회색빛. 그의 눈이 세아의 눈과 만났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이해했다. 강리우가 자신을 처음 본 이유를. 자신의 손을 잡으려고 했던 이유를.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모든 이유들을.

강리우는 자신의 형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버려진 사람이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는 나를 데려갔어.”

강리우가 말했다. 첫 번째로 이 병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겨우 풀려나온 것처럼.

“나는 강민준의 소유였어. 장난감이었어. 또는 그보다도 더 못한 무언가였어. 나는 그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내 이름도, 내 얼굴도, 내 목소리도 그가 원하는 대로 변할 수 있었으니까.”

세아가 강리우를 봤다. 그리고 이제 그 얼굴을 다르게 읽을 수 있었다. 그 떨리는 눈. 그 경직된 턱. 그 말의 사이사이에 있는 무언가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다. 생존. 그리고 생존의 대가.

“그가 죽고 난 후, 나는 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엄마가 너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강민준의 기록들 속에서. 그리고 나는…”

강리우가 세아에게 한 발 다가갔다.

“나는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그리고 동시에 너를 구하고 싶었어. 나처럼 되지 말라고. 나처럼 그의 것이 되지 말라고. 그래서 나는 너한테 손을 내밀었어. 그런데 넌…”

강리우가 멈췄다.

“넌 나를 마치 강민준처럼 봤어. 그리고 그건… 맞았어. 왜냐하면 나는 강민준의 아들이니까. 내 안에는 그것도 있었으니까. 그의 피. 그의 욕망. 그의 통제의 욕구.”

세아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강리우가 말한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부분적으로 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듣는가였다.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강리우의 울음이. 그의 음성 뒤에 있는 울음이. 그것은 자신의 울음과 같은 것이었다. 같은 불에 탄 사람의 울음.

“그래서 뭐예요?”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형이 뭐라는 거예요?”

강리우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더 강하게. 세아는 그 손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그 손 위에 올렸다.

병실 안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마치 자신도 이 가족의 일부가 되려고 하는 것처럼. 도현이는 침대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단단했다. 17살 남자아이가 너무 빨리 배워야 했던 것들로. 어머니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종류의 눈물이었다. 경고의 눈물이 아니라, 해방의 눈물. 또는 그 둘의 어중간한 무언가.

“내가…”

강리우가 말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싶었던 이유는 뭐냐고 물어봐.”

“왜요?”

세아가 물었다.

“왜냐하면 너는 아직도 불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미 사그라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내가 너의 불을 꺼주면, 내가 살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너를 구하면, 나도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강리우의 목소리가 더 깊어졌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누군가의 불을 꺼주는 것으로는 자신의 불을 잠재울 수 없어. 그건 그냥 두 개의 불이 함께 타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건 아름답지 않아. 그건 그냥 파괴일 뿐이야.”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형이 뭘 하고 싶어요?”

“모르겠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너를 구하고 싶지도 않고,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냥…”

강리우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자신이 물속에서 나오려고 하는 것처럼.

“나는 그냥 다시 시작하고 싶어. 강민준이 아닌 누군가로. 강민준의 아들이 아닌 누군가로. 그리고 너도, 엄마도 함께.”

어머니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다시 열렸다. 그리고 그 눈에는 무언가가 일어났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무언가가. 깨끗한 것이 아니라, 절망적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인 무언가가.

“강리우…”

어머니가 강리우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그리고 그 이름이 입 밖에 나왔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죄책감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아들로서의 인정. 그리고 그 인정은 시간이 걸렸지만, 도착했다. 24년이 걸렸지만.

세아는 형의 손을 놓고, 어머니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그 손 위에 강리우의 손도 올렸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손은 모두 겹쳐 있었다. 어머니의 손, 세아의 손, 그리고 강리우의 손. 도현이도 일어났다. 침대에 가까이. 그리고 그들의 손 위에 자신의 손도 올렸다.

병실 안의 침묵이 다시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침묵이었다. 이전의 침묵들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번 침묵은 말할 수 있게 된 것들이 쌓여 있는 침묵이었다.

“우리가 뭘 하죠?”

도현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17살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생존한 사람의 질문.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의 질문.

“모르겠어.”

어머니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함께 그것을 찾아야 해. 혼자가 아니라.”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희망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말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그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병실에서. 같은 손이 겹쳐진 상태로.

형광등이 여전히 윙윙거렸다. 멀리서는 서울의 자동차 사운드가 들렸다. 심전도 모니터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비프음을 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 다르게 들렸다. 마치 음악처럼. 또는 어떤 박자처럼. 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을 알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다만 이 손들이 계속 겹쳐 있다는 것뿐이었다. 강민준이라는 불이 그들을 태워버리지 않도록, 그들이 함께 버틸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아주 작은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희망이라고 부르기는 너무 큰 이름이었지만, 무언가는 분명히 시작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앞으로의 많은 날들이 말해줄 것이었다.

# 새로운 시작

병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강리우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물속에 잠긴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물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수면은 계속해서 내려앉으려고 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숨을 쉬고 싶지만 쉴 수 없는, 말을 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

그러나 강리우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다시 시작하고 싶어.”

목소리가 나왔을 때,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낯선 목소리.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강리우는 그 말이 계속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멈추면 다시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민준이 아닌 누군가로. 강민준의 아들이 아닌 누군가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이름을 짓밟는 것처럼. 강리우의 손이 떨렸다. 병상의 시트를 움켜잡은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너도, 엄마도 함께.”

마지막 말이 나왔을 때, 강리우는 눈을 들어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변했다. 눈이 떠졌다. 24년 동안 닫혀 있던 눈이 드디어 떠진 것이다. 그리고 그 눈 속에는 무언가가 일렁였다. 복잡한 것들이.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들이.

어머니는 입술을 떨었다. 강리우는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기다렸다. 그것이 거절일지도, 수용일지도 모르는 그 말을.

“강리우…”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이전의 모든 호출들은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죄책감, 미안함, 자책.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이 입에서 나왔을 때, 그것은 순수했다. 인정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아들로서의 인정. 강민준의 아들이 아닌, 강리우로서의 인정.

세아가 형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다시 잡았다. 따뜻한 손.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 세아는 형의 손도 어머니의 손 위에 올렸다.

“형아.”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우리가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도현이가 침대에 가까이 다가왔다. 17살의 소년. 이 병실 속에서 가장 어린 사람. 하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견뎌낸 사람. 그의 손도 겹쳐진 손들 위에 올려졌다.

네 개의 손이 이제 겹쳐 있었다. 어머니의 손, 세아의 손, 강리우의 손, 그리고 도현이의 손.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손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손들. 하지만 이 순간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병실의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의 침묵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전의 침묵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 수치심, 절망.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침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다르다. 이것은 말할 수 있게 된 것들이 서서히 쌓여가는 침묵이었다. 아직 완전히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하지만 말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우리가 뭘 하죠?”

도현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17살 소년의 목소리였지만, 거기에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생존자의 질문.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의 질문.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질문.

강리우는 도현이를 봤다. 이 아이가 강민준의 다른 가족에서 나온 아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이 아이는 강민준의 죄를 대가 없이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아이는 ‘우리’라고 말했다. 강민준의 죄를 나누어 짊어지기 위해 함께 할 우리라고.

“모르겠어.”

어머니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결단력. 어머니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이었다. 24년 동안, 어머니는 알고 있다고 가정했었다. 강민준의 죄가 무엇인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함께 그것을 찾아야 해. 혼자가 아니라.”

그 말이 나왔을 때, 강리우는 눈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따뜻함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준 것처럼.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희망인지 절망인지 판단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판단할 수 없었다. 세아는 자신이 너무 피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단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자신은 모든 에너지를 이미 소모해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말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그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병실에서. 같은 손이 겹쳐진 상태로.

형광등이 여전히 윙윙거렸다. 멀리서는 서울의 자동차 사운드가 들렸다. 누군가의 경적음. 누군가의 짧은 외침. 이 도시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강민준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강리우의 고백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계속 돌아갔다.

심전도 모니터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비프음을 냈다. 그 소리는 누군가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강민준이 아닌, 이 방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심장이.

“형, 너는?”

세아가 강리우에게 물었다. “앞으로 뭘 할 거야?”

강리우는 생각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했다. 자신이 앞으로 뭘 할 것인가. 강민준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강리우로 살아가는 것을 시작할 것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모르겠어.”

강리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여기 있고 싶어. 너희들과 함께.”

그 말을 하고 나서, 강리우는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깨달았다. 24년 동안, 자신은 혼자였다. 강민준의 아들로서 혼자였고, 그 죄책감 속에서 혼자였고,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혼자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도현이가 강리우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그 어린 손의 힘이 강리우에게 전달되었다. 이 아이도 외로웠을 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형제들을 잃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이 아이도.

“우리가 함께라면, 그게 다야.”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더 강해졌다. “우리가 함께라면, 우리는 버틸 수 있어.”

강리우는 어머니를 봤다.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얼굴에 그은 선들. 눈가의 주름들. 세월이 만들어낸 흔적들. 하지만 그 얼굴 속에는 새로운 무언가도 있었다. 결단. 수용. 그리고… 사랑.

“엄마.”

강리우가 말했다. “미안해.”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미안해. 너에게, 세아에게, 도현이에게. 내가… 너무 오래 잘못된 것들에만 집착했어. 죽은 것들에만. 내가 살리지 못한 것들에만. 하지만 여기, 여기 있는 것들을 보지 못했어. 너희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감지 않았다. 눈을 계속 떴다. 감지 않기로 결심한 것처럼.

“우리가 뭘 하죠?”

도현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요.”

강리우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살아가. 함께. 강민준의 그림자 없이. 강민준의 죄 없이. 우리 자신으로만.”

“그게 가능할까?”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손들이 겹쳐진 이 순간부터.”

병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침묵이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침묵이었다. 많은 고통이 있을 것이다. 많은 질문이 있을 것이다. 많은 의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만 이것이었다. 네 개의 손이 겹쳐져 있다는 것. 그리고 네 개의 심장이 같은 병실에서 같은 시간에 뛰고 있다는 것. 강민준이라는 불이 그들을 완전히 태워버리지 못했다는 것. 그들이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것.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그 소리가 이제는 음악처럼 들렸다. 또는 어떤 박자처럼. 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그들이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약속으로서.

“우리 함께 할 수 있어?”

도현이가 물었다. 정말로.

“응. 함께 할 수 있어.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함께 있거든.”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주 작은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희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무언가. 그렇다고 절망이라고 부르기에도 아닌 그런 무언가. 그냥 계속 살아가기. 함께 살아가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앞으로의 많은 날들이 말해줄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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