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29화: 9살의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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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9화: 9살의 손가락

할머니는 세아에게 물을 마시라고 했다. 손이 떨리는 할머니가 물잔을 건넸고, 세아는 그것을 받아 마셨다. 물은 차갑고, 미네랄 맛이 났다. 제주 물의 맛이라고 세아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순간에는, 9살 세아에게 그것은 그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시는 액체였다.

“엄마가 보냈어?”

할머니가 물었다. 그 물음에는 희망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뇨. 아무도 몰라요.”

세아가 대답했고, 할머니의 얼굴이 더 깊게 구겨졌다.

병실 침대 위에서, 세아의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그 침묵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24년 동안 살아온 시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숨을 참고 있는 시간이었다. 물속에 있으면서,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버티는 시간이었다.

“9살이었어?”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신뢰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들은 것이 거짓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네.”

세아가 대답했다.

“할머니는 엄마한테 연락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왔어요. 다음날.”

어머니가 눈을 떴다. 그 눈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쓰인 글귀를 읽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천장의 곰팡이가 있었을 뿐이다.

“내가 너한테 말했어. 넌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넌 서울로 가야 한다고. 그곳에서 나는 너를 돌볼 수 없다고. 강민준이가 나를 추적할 거고, 그 남자가 너를 찾으면 넌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그 남자의 소유물이 될 거라고.”

“그래서 다시 줄 거였어요?”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마치 자신이 이 질문을 크게 말하면, 그것이 현실이 될까봐 두려운 것처럼.

“아니었어. 난…”

어머니가 침을 삼켰다. 그 행동에는 고통이 담겨 있었다.

“난 너를 데려가고 싶었어. 진심으로. 하지만 난 할머니를 봤고, 너는 할머니를 따르고 있었고, 그래서 난…”

“포기했어요.”

세아가 완성했다.

“맞아.”

어머니가 인정했다.

“내가 너를 포기했어.”

그 말 다음에 오는 침묵은, 이전의 침묵들과는 달랐다. 이전의 침묵들은 숨을 참고 있는 침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숨을 내쉰 후에 오는 침묵이었다. 마치 누군가 24년 동안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고 난 후의 침묵처럼.

세아는 병실을 나갔다. 자신이 그 결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몸이 움직인 것이다. 마치 자신이 외부에서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것처럼, 거리감을 둔 채로.

병실 밖의 복도는 길었다. 형광등의 불빛이 천장을 따라 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 불빛들이 마치 자신의 신경계처럼 느껴졌다. 차갑고, 인공적이고, 그러나 빛나고 있었다.

도현이가 복도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지만,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들고만 있었다. 마치 그것이 생명유지 장치인 것처럼.

“누나.”

도현이가 세아를 봤다.

“어머니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옆에 앉았다. 그 거리는 어깨가 거의 닿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더 깊은 거리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한 거리.

“누나, 난…”

도현이가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뭐?”

세아가 물었다.

“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누나가 강리우를 만났다고. 그리고 강리우가 누나한테 뭐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이 상태가 된 거 같아서.”

도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17살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가져야 할 그 진동이 거기에 있었다.

“내 탓이야?”

세아가 물었다.

“아니. 난…”

도현이가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밀었다. 어떤 기사가 나타났다. 제목은 “JYA 엔터테인먼트 대표 강민준, 별세”였다. 날짜는 3년 전이었다.

“강리우가 아버지예요.”

도현이가 말했다.

“강민준이의 아들이야. 그리고 누나가 찾던 그 사람이 아니라, 누나의 형이야.”

세아는 기사를 읽지 않았다. 그저 제목만 봤다. 그 제목이 충분했다.

“어머니가 알고 있었어?”

“응. 어머니가 말했어. 강리우가 왔을 때, 어머니가 깨어났을 때. 강리우가 어머니 손을 잡았을 때, 어머니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어. 그리고 어머니가 무너졌어. 그래서…”

도현이가 멈췄다.

“그래서 뭐?”

“그래서 내가 누나한테 전화했어. 그리고 누나가 안 받았어.”

도현이의 목소리에 책임감이 있었다. 아주 무거운 책임감. 17살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무게의 책임감.

“미안해.”

세아가 말했다.

“넌 미안할 게 없어. 난…”

도현이가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내가 어머니한테 물었어. 왜 누나를 포기했냐고. 그리고 어머니가…”

도현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마치 그것도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행동인 것처럼.

“어머니가 말했어.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누나를 주지 않으면, 강민준이가 누나를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대. 그래서…”

“그래서 날 버렸어.”

세아가 완성했다.

“맞아.”

도현이가 인정했다.

병실 안에서, 강리우는 여전히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세아의 어머니는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서, 그 여자는 24년 동안 버린 딸의 존재를 다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늦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한강이 보였다.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항상 변하고 있는 그 방식으로. 세아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흐르고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누나.”

도현이가 다시 말했다.

“넌 어디로 갈 거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강리우가…”

도현이가 말을 이어갔다.

“강리우가 누나한테 뭔가 전해달라고 했어. 어머니가 깨어나기 전에. 강리우가 말했어. 자신이 누나의 형이라는 거.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뭐든 할 거라고.”

“난 형이 필요 없어.”

세아가 말했다.

“내가 필요한 건…”

세아가 멈췄다. 자신이 필요한 게 뭔지 몰랐다. 24년 동안,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모두 억눌렀으니까. 자신의 필요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 뒤에 있었다. 어머니의 필요, 도현이의 필요, 강민준이의 거부와 그로 인한 필요들. 그 모든 것들 뒤에.

“누나…”

도현이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형광등 아래에서도 따뜻한 인간의 손.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자신의 9살 손가락이 할머니의 손을 잡던 느낌. 자신의 어린 몸이 처음으로 자신의 엄마가 아닌 누군가의 손을 잡던 느낌.

“내가 있어. 난 여기 있어.”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보았다. 그 손가락들. 17살 손가락. 아직 어린 손가락.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짐을 들고 있는 손가락들.

“고마워.”

세아가 말했다.

“그런데…”

세아가 도현이를 봤다.

“난 여기 있을 수 없어.”

도현이의 손이 경직되었다.

“왜?”

“몰라. 그냥… 여기 있으면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아.”

세아가 일어섰다. 도현이의 손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이 한 번 더 누군가를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현이를. 어머니를. 강리우를. 그리고 자신을 가장 먼저.

병실로 돌아갔을 때, 강리우는 어머니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누르려다 멈춘 손처럼.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뭔가를 말하려는 표정으로.

“누나.”

강리우가 불렀다. 그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 “누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 혈연이 가지는 무게.

“난 가야 해.”

세아가 말했다.

“어디로?”

“몰라. 근데 여기는 아니야.”

세아가 병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천천히. 도현이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강리우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병원의 로비는 밤 10시의 밤 로비였다.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발을 보았다. 자신의 발이 어디로 가는지만 봤다.

밖으로 나갔을 때, 한강의 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짠 냄새가 나는 바람. 제주 바다의 냄새. 할머니의 손의 냄새. 9살 세아가 알았던 냄새.

그리고 세아는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단지, 더 이상 누군가의 딸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누군가의 여동생으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누군가의 피해자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한강을 따라 걷는 밤거리는 조용했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호흡음을 들었다. 살아 있다는 증명. 아직도 불타고 있다는 증명.

하지만 불은 무엇을 위해 타고 있는가.

그것이 세아가 물어야 할 유일한 질문이었다.


화 끝

# 확장된 화: 손의 언어

## 1부: 형광등 아래의 온기

병실의 형광등은 오후 3시부터 켜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여름 햇빛이 충분했지만, 누군가는 항상 그 스위치를 켜두었다. 아마도 어둠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어둠은 현실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봤다.

그것은 작은 손이 아니었다. 17살 남자아이의 손치고는 제법 크고, 손가락도 길었다. 피아노를 배웠던 흔적이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약간 노란 굳은살들. 하지만 지금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묘하게, 겨우 알아챌 정도로.

도현이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세아는 숨을 쉬지 않았다. 형광등 아래서도 따뜻했다. 병원의 무균 공기 속에서도,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서도, 그 손은 따뜻했다. 인간의 손이 가지는 체온. 혈액이 흐르는 증거. 살아 있다는 증거.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자신의 9살 손가락이 할머니의 손을 잡던 느낌이 돌아왔다. 제주 해변에서, 파도 소리가 귀를 울리던 그곳에서. 할머니의 손은 이렇게 따뜻했었다. 구겨진 피부, 나이 든 손가락들. 하지만 그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담겨 있었다. 아이를 지켜주는 힘. 무조건적인 사랑의 힘.

자신의 어린 몸이 처음으로 자신의 엄마가 아닌 누군가의 손을 잡던 느낌. 그것은 반란이었다. 아버지의 손은 아니었고, 어머니의 손도 아니었다. 할머니의 손이었다. 그 손이 빨아당기는 순간, 세아의 어린 마음은 깨달았다. 세상에는 안전한 곳이 있다는 것을. 그곳은 엄마의 품이 아니라, 할머니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있어. 난 여기 있어.”

도현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세아는 처음으로 도현이의 목소리에서 눈물을 들었다. 눈물이 목소리에 어떻게 묻어나는지를 알았다. 마치 빗소리처럼, 마치 먼 곳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처럼.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보았다.

그 손가락들. 17살 손가락. 아직 어린 손가락.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짐을 들고 있는 손가락들. 어떤 짐인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학비를 버는 짐. 동생을 돌보는 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짐. 이 가족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짐.

그 손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차가웠다.

“고마워.”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도 놀랐다. 입에서 말이 나왔다는 것이. 아직도 자신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아직도 목소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그런데…”

세아가 도현이를 봤다.

눈을 마주쳤다. 도현이의 눈은 자신의 눈과 같은 색깔이었다. 같은 아버지의 눈. 같은 아버지의 무책임함이 담긴 눈. 하지만 도현이의 눈에는 그것만 있지 않았다. 책임이 있었다. 성숙함이 있었다. 슬픔이 있었다.

“난 여기 있을 수 없어.”

세아가 말했다.

도현이의 손이 경직되었다. 살아 있는 손이 죽은 손처럼 변했다. 혈액이 흐르지 않는 손. 찬 손. 마치 시체의 손처럼.

“왜?”

도현이가 물었다.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왜 날 버리는가? 왜 이 가족을 버리는가? 왜 엄마를 버리는가? 왜 나를 혼자 두는가?

“몰라. 그냥… 여기 있으면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아.”

세아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숨을 쉬지 못했다. 병실의 공기가 폐를 누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침대가 세아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도현이의 눈이 세아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세아는 질식하고 있었다.

세아가 일어섰다.

느리게, 도현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 과정에서 도현이의 손가락이 세아의 손가락을 쓸었다. 마지막 접촉. 작별의 인사.

도현이의 손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이 한 번 더 누군가를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 알았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듯이, 명확하게 알았다.

도현이를 버리고 있다. 이 소년을. 자신의 혈형제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 소년을.

어머니를 버리고 있다. 그 여자를. 아무리 무능했어도, 아무리 약했어도, 그래도 자신을 낳은 그 여자를.

강리우를 버리고 있다. 아직 어린 그 아이를.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자신이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은 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먼저 버리고 있다. 세아 자신을.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처럼 행동하는 그 자신을.

## 2부: 침묵의 무게

병실로 돌아갔을 때, 강리우는 어머니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누르려다 멈춘 손처럼. 아주 미세한 진동.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약한 신호 같은 떨림.

강리우는 겨우 11살이었다. 11살의 손가락이 어머니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버지도 해주지 못한 것을. 11살의 아이가 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려고. 어머니의 열을 내려주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뭔가를 말하려는 표정으로. 오빠도 아니고, 누나도 아니고, 그냥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는 표정으로. 11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시선이 세아를 따라갔다. 마치 익사하는 사람이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을 붙잡으려 하듯이.

“누나.”

강리우가 불렀다.

그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 “누나”. 지금까지 강리우는 세아를 이름으로 불렀다. “세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달랐다. “누나”라고 불렀다.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를 세아는 느꼈다. 혈연이 가지는 무게. 가족이 가지는 무게. 버려질 수 없는 관계가 가지는 무게.

“누나”라고 불리는 순간, 세아는 더 이상 세아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누나였다. 누군가의 책임이었다. 누군가의 보호자였다.

세아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난 가야 해.”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미 병실을 떠나 있었다. 정신이 이미 밖으로 나가 있었다. 신체만 여기 남겨져 있었다.

“어디로?”

강리우가 물었다.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어른의 절망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또 한 번 잃을 수 없다는 절망. 엄마가 없으면 누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절망.

“몰라. 근데 여기는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정직했다. 세아는 정말로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계획이 없었다. 목표가 없었다. 단지 여기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이 병실이 아니어야 하고, 이 병원이 아니어야 하고, 이 도시가 아니어야 하고, 이 삶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세아가 병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천천히. 전에는 뛰었지만, 이제는 걸었다. 마치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무덤으로 가는 것처럼.

도현이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세아는 기다렸다. 출입문을 열기 전에, 도현이가 자신의 손목을 잡을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손목을 잡는 손은 없었다. 도현이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누나가 떠나가는 것을 보지 않고 있었다.

강리우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

세아는 거기서도 기다렸다. 조그만 발자국 소리를 기다렸다. “누나, 가지 마”라는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강리우는 어머니의 옆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세아는 마지막으로 한 번 어머니를 봤다.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었다. 세아가 떠나간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은 감겨 있었다. 닫혀 있었다. 마치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마치 딸이 떠나가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 3부: 로비의 유령들

병원의 로비는 밤 10시의 밤 로비였다.

깊은 밤의 로비. 형광등이 더욱 희게 빛나는 시간.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들. 환자들. 보호자들.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누군가의 회복을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들은 모두 같았다. 희망과 절망이 섞여 있는 얼굴. 마치 유령들처럼 보였다. 산 유령들. 아직 죽지 않은 유령들.

하지만 세아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발을 보았다. 자신의 발이 어디로 가는지만 봤다. 왼쪽 발, 오른쪽 발. 한 발짝, 한 발짝. 기계적인 움직임. 마치 인형의 다리가 움직이듯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세아의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들이 세아를 봤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아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눈이 감겨 있었다. 아니, 눈은 떠 있었지만, 마음이 감겨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아무것도.

병원을 나갔을 때, 한강의 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짠 냄새가 나는 바람. 밤 바람이 가지는 특유의 차가움. 마치 얼음물에 손을 담갔을 때의 그 충격. 마치 죽음의 손가락이 목을 스칠 때의 그 떨림.

제주 바다의 냄새였다.

세아는 그 냄새를 맡았을 때, 갑자기 9살로 돌아갔다. 제주 바다에서. 할머니와 함께. 파도가 발목을 적시고, 모래가 발가락 사이에 끼고, 염분이 입술을 짠 맛으로 물들던 그 시간.

할머니의 손의 냄새였다.

할머니는 바다에 자주 갔다. 제주의 해녀였던 할머니는 바다에 몸을 담그고 돌아왔다. 옷에도, 손에도, 머리카락에도 바다의 냄새가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세아가 처음 알았던 할머니의 냄새였다.

9살 세아가 알았던 냄새였다.

그 냄새는 안전을 의미했다.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할머니의 손 안이라면, 세상의 모든 나쁜 일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죽었다.

세아가 12살일 때, 할머니는 갑자기 죽었다. 심장마비였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할머니가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세아는 안전한 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손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손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도현이의 손도 아니었다.

세아는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한강을 따라 걷는 밤거리는 조용했다. 차가운 바람만 불고, 물의 소리만 났다. 마치 세상이 잠든 것처럼. 마치 세아 혼자만 깨어 있는 것처럼.

단지, 더 이상 누군가의 딸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그 여자의 딸이 아니기 위해서. 무능한 어머니의 딸이 아니기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딸이 아니기 위해서.

더 이상 누군가의 여동생으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도현이를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강리우를 보호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누군가를 지탱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누군가의 피해자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의 피해자가 아니기 위해서. 어머니의 피해자가 아니기 위해서. 이 가족의 피해자가 아니기 위해서. 이 세상의 피해자가 아니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세아는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사라져야 했다. 이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걸었다.

한강의 다리 위를 걸었다. 밤 10시 반.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들도 세아를 보지 않았다. 또 다른 유령이 지나가갈 뿐이었다.

## 4부: 호흡의 증명

한강을 따라 걷는 밤거리는 조용했다.

정적이 있었다. 도시의 정적. 밤이 만드는 침묵. 마치 세상이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호흡음을 들었다.

“헉, 헉.”

숨을 쉬는 소리. 폐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 너무 당연해서 들리지 않는 소리. 너무 자명해서 의식하지 않는 소리.

살아 있다는 증명.

세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쿵, 쿵”. 규칙적인 박동. 혈액이 흐르고 있다는 증명. 신경이 살아 있다는 증명. 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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