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16화: 잊혀진 자들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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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6화: 잊혀진 자들의 언어

강리우의 손이 멈췄다. 움직이지 않는 손. 피아니스트의 손이 건반을 누르려다 중간에 멈춘 것처럼. 세아는 그 손을 봤다—손가락이 공중에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음을 찾으려다 찾지 못한 손처럼.

병실이 조용해졌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그리고 모니터가 어머니의 심장박동을 기록하는 소리. 규칙적인 비프음. 살아 있다는 증명. 하지만 그 증명 안에는 파편들이 있었다. 24년 전의 결정. 강민준의 손가락. 어머니의 침묵. 그리고 강리우—법적으로는 아무도 아닌 사람.

세아의 어머니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뜨고 있었다. 마치 천장 위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또는 천장을 뚫고 그 너머를 보려고 하는 것처럼.

“그 남자가 왜 그런 선택지를 줬어?”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 며칠 동안 세아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병원 복도를 돌아다니며, 의료진의 말을 듣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지금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였다.

“왜냐하면 그게 그 남자의 방식이니까.”

어머니가 대답했다. 여전히 천장을 보면서.

“강민준은 모든 것을 선택지로 만들어. 아니면 아니면 둘 중 하나. 회색지대는 없어. 그리고 그 선택지는 항상—항상 그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

강리우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무릎이 그런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몸이 무거워진 것처럼. 아니, 이제 비로소 무게를 느껴진 것처럼. 자신이 존재한다는 무게. 자신이 어떤 결정의 결과라는 무게.

“너는…”

강리우가 말하다 멈췄다.

“내가 뭔데?”

그가 다시 물었다.

“넌 그냥 너야.”

어머니가 마침내 천장에서 눈을 돌려 강리우를 봤다.

“넌 강민준의 실패한 계획이면서 동시에 내가 선택한 것이야. 난 너를 낳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넌 태어났어. 그것은 내 선택을 깨뜨린 거야. 그래서… 넌 특별해.”

그 말이 공기 중에 떠 있었다. 특별하다. 세아는 그 단어의 무게를 생각했다. 그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세아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손씩. 검지, 중지, 약지, 소지. 한, 둘, 셋, 넷. 그리고 다시. 이 행동은 이미 중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접지하는 유일한 방법.

“엄마가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

세아가 물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세면서.

“뭐가?”

어머니가 물었다.

“침묵하는 사람이 됐어. 우리 앞에서는.”

침묵. 그 단어가 떠올랐을 때, 세아는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 전체를 다시 봤다. 14일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얼굴. 근육이 조금 늘어져 있고, 눈 밑이 까맣고,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아래에는 다른 얼굴이 있었다. 20대의 얼굴. 강남역 지하의 클럽에서 무대에 섰던 얼굴. 목소리로 세상을 울렸던 얼굴.

“난 너를 낳은 후, 강민준과의 계약을 파기했어. 전부. 내가 노래할 권리도, 그것으로 돈을 벌 권리도, 내 목소리를 쓸 권리도.”

어머니가 말했다.

“그것이 조건이었어. 넌 내 아이가 되지 않고, 난 음악을 포기한다. 그 대신 강민준도 나한테서 돈을 받지 않기로. 그것이 거래였어.”

세아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none’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너는?”

강리우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나는 제주로 갔어. 해녀가 됐어. 또는 해녀처럼 살았어. 물 속에서. 깊은 곳에서. 숨을 참고.”

어머니의 손이 침대 위에서 움직였다. 손가락이 마치 무언가를 집으려고 하는 동작.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봤고,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강리우에게 가져가려고 했다.

강리우가 어머니의 손을 받았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더 심하게.

“그리고 난 너에게 설명해야 했어. 넌 알 권리가 있어. 넌 존재할 권리가 있어. 법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어머니가 강리우를 봤다. 그 시선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죄책감. 사랑. 그리고 너무 늦은 인정.

세아는 병실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이 순간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머니와 강리우 사이의 것이었다. 24년의 침묵을 깨뜨리는 순간.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왜 지금 말했어?”

세아가 물었다. 갑자기.

“왜 지금? 왜 14일을 기다렸어? 왜 혼수상태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했어?”

어머니가 세아를 봤다.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봤다. 마치 세아의 내부를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너를 봤으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뭐?”

“너를 봤어. 넌 강민준 같았어. 그의 손가락. 그의 방식. 그리고… 너도 침묵하고 있었어.”

세아의 몸이 경직됐다.

“너는 날 봤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14일 동안. 넌 손가락만 세고 있었어. 그리고 난 그것을 보고 있었어. 혼수상태 속에서. 그리고 깨달았어. 내가 너에게 물려준 게 뭔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침묵.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었어. 침묵과 무게. 그리고 누군가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법.”

강리우가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마치 그 손이 뜨거워진 것처럼. 아니, 뜨거웠던 것처럼. 어머니의 손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오전 7시 47분. 서울은 계속 깨어나고 있었다. 자동차의 엔진음. 건설 소음. 누군가의 웃음소리. 모두가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병실 안에서는 침묵이 있었다. 아니,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도.

“너도 그 남자를 알아?”

강리우가 갑자기 물었다. 세아에게.

“강민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준은 멀리 있었다. 강남역 지하의 어딘가. JYA 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 그곳은 세아의 세상이 아니었다. 또는 세아는 그곳의 세상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날 찾을 거야.”

강리우가 말했다.

“왜?”

“왜냐하면 난 이제 그의 실패가 증거로 남았으니까.”

강리우가 어머니를 봤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넌 그 남자의 딸이야?”

강리우가 세아에게 물었다.

세아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그것은 복잡한 질문이었다. 강민준은 세아의 아버지인가. 생물학적으로는 아니었다. 세아의 아버지는 따로 있었다. 그 남자는 세아를 키웠고, 세아의 이름을 지어줬고, 세아를 사랑했다. 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강민준은 세아의 음악을 만들었다. 세아의 목소리를 원했다. 세아의 계약을 사인하게 했다.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침묵하면서.

“아니야.”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는 그 대답을 듣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의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럼 뭐야?”

강리우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설명하면 돼?”

그 질문이 공중에 떠 있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강민준의 뭐였는가. 그의 투자? 그의 장난감? 그의 또 다른 실패?

“우리가 뭐든 상관없어.”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뭐냐가 아니라, 우리가 뭘 할 거냐야.”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뭘 할 거냐. 세아는 그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세아는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었다. 편의점에 가고, 손가락을 세고, 침묵하고, 숨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선택지가 있었다. 혹은 선택지가 생겼다.

강리우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의 손을 놓으면서.

“난 가야 해.”

그가 말했다.

“어디로?”

세아가 물었다.

“그 남자를 찾아.”

강리우의 눈이 변했다. 마치 무언가로 불이 켜진 것처럼. 그것은 분노였다. 아니, 그것은 더 깊은 것이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불.

“그리고 물어볼 거야. 왜 나한테 이런 선택지를 줬냐고. 왜 내 엄마한테 이런 거래를 제시했냐고. 왜 너는 자유인데, 우린 아직도 너의 손가락 아래에 있냐고.”

강리우가 문을 향해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고 불안정했다. 마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기다려.”

어머니가 말했다.

“뭐?”

강리우가 돌아섰다.

“그 남자를 찾기 전에, 우리한테 시간을 줄래?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난 아직 너한테 말할 게 남아 있어.”

강리우는 문 앞에서 멈췄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 그것은 어머니의 손가락 같았다. 아니, 강민준의 손가락 같았다. 유전이라는 것은 단순히 외모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떨림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깨닫는 떨림.

“언제?”

강리우가 물었다.

“내일. 아침. 여기서.”

강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병실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세아는 자신도 함께 떠나고 싶었다. 이 병실에서. 이 진실에서. 이 무게에서.

하지만 세아는 남았다.

어머니가 세아를 불렀다.

“세아.”

“응.”

“넌 날 미워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형광등이 윙윙거리고, 모니터가 비프음을 내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강리우처럼. 어머니처럼. 강민준처럼.

“난 모르겠어.”

세아가 말했다.

“뭘?”

“너를 미워하는 건지, 날 미워하는 건지.”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 안에는 14일의 침묵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이해. 또는 포기. 또는 둘 다.

“그게 정답이야.”

어머니가 말했다.

“정답?”

“응. 우리는 모두 동시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야. 동시에 침묵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있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맞아.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진실이야.”

세아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동시에 두 가지. 그것은 모순이었다. 그런데 모순이 유일한 진실일 수도 있을까.

병실의 창밖으로 서울이 계속 깨어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회사에 가고, 누군가는 학교에 가고,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을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병실 안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24년이 한 순간에 흘러들어온 곳에서.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또는 세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엄마.”

세아가 말했다.

“응.”

“난 뭘 해야 돼?”

어머니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넌 너의 목소리를 찾아야 해. 내가 잃어버린 것처럼. 강리우가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노래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을 깨뜨리는 목소리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 목소리였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병실 밖에서 강리우의 발걸음이 복도를 빠르게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발걸음은 결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떤 결정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아도 알았다. 자신의 결정도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전 7시 52분. 아침이 더 깊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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