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03화: 강남의 불빛, 제주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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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3화: 강남의 불빛, 제주의 침묵

강리우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강남역 인근 오피스텔. 유리로 된 벽. 서울의 야경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올라가고 있었다. 32층. 33층. 34층. 숫자는 의미를 잃었다. 단지 높이만 남았다. 하늘과의 거리.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어머니의 병원에서 온 메시지. 아니, 그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알림이었다. 이름 없는 연락처에서 온 알림. 간호사가 보낸 것.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내용. 반응이 있다는 내용. 강리우는 그 메시지를 읽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계속 올라갔다.

아버지 사무실. 그는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강남역 근처라고만 했다. “서류들이 있는 곳이다. 네가 찾아야 할 서류들.”

“어떤 서류?”

강리우가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침묵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아무 설명도 없이.

34층에 도착했을 때, 강리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세아처럼. 아니, 세아의 어머니처럼. 아니, 자신처럼. 모두가 떨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이 밤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 깊은 회색의 벽. 카펫. 어딘가 묵직한 냄새가 났다. 돈의 냄새. 아니, 비밀의 냄새. 아니, 죄책감의 냄새. 강리우는 그것을 정확히 이름 지을 수 없었다.

3407호. 작은 명패에는 “K.M.J INVESTMENT”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의 이니셜. 강민준. Kang Min-Jun. 강리우는 그 문자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왜 아버지의 이름을 30년간 말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문은 잠금장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일부러 열어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미리 열어둔 것일까. 강리우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컴퓨터 모니터도 없었다. 사진도 없었다. 인물의 흔적도 없었다. 단지 가구만 있었다. 검은색 책상. 검은색 의자. 검은색 캐비닛.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심장을 색칠한 것처럼.

캐비닛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강리우는 자신이 정말로 그것을 열고 싶은지를 모르고 있었다. 열면 뭘 알 것이다. 어머니가 왜 침묵했는지를. 세아가 왜 존재했는지를. 자신이 왜 존재했는지를.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 알기가 자신을 완전히 부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병실의 온도는 정확히 21도씨였다. 적절한 온도. 환자에게 좋은 온도. 하지만 세아는 추웠다.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더 추웠을지도 모른다. 겹겹이 입은 것들이 자신의 열을 가두는 것 같았다.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도현이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쥐고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의미를 잃었다. 단지 손의 온기만 남았다. 어머니의 손이 따뜻해졌는가. 아니면 도현이의 손이 차가워졌는가.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누나.”

도현이가 또 말했다. 이번에는 다르게.

“뭐.”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 형이 아까 말했는데, 아버지가 엄마한테서 돈을 가져갔대. 엄마가 해녀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엄마가 우리를 키우기 위해 모은 돈을. 아버지가 그걸 가져갔대. 그리고 사라졌어. 엄마가 임신했을 때.”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강리우 형한테 말했대. 자기가 아이를 낳기 전에 돈을 모아서 아이를 키우려고 했다고. 그런데 돈이 사라졌다고. 아버지가 가져갔다고. 그래서 엄마가 다시 물로 들어갔대. 임신한 상태로. 위험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도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너한테 강리우가 그런 말을 했어?”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 형이 너를 찾으려고. 너한테 말해야 할 게 많다고. 근데 너는 계속 피했으니까. 내가 대신 들었어. 그리고 엄마가 깨어나면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해봤어.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도현이가 물었다. 그것은 17살 남자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의 끝이었다. 그 이후는 어른의 영역이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봤다. 서울의 야경. 강남의 불빛. 그 불빛 어딘가에 강리우가 있고, 아버지의 서류가 있고, 자신이 몰랐던 모든 것이 있었다.

“제주 가자.”

세아가 말했다.

“뭐?”

도현이가 물었다.

“엄마 깨어나면 제주 가자. 엄마, 우리, 그리고… 강리우 형. 그리고 하늘이. 다 같이 가자. 엄마가 말하고 싶은 거 들으면서.”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도망이었다. 하지만 도망은 때로 필요했다. 멈춰서 마주보기 전에.

도현이가 세아의 얼굴을 봤다. 처음으로 세아가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두려움과 함께. 하지만 결정은 결정이었다.

“알았어.”

도현이가 말했다.


강리우는 서류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말한 서류. 세아의 출생증명서. 아버지의 서명. 그런 것들. 캐비닛을 열고 닫고, 책상 서랍을 열고 닫고, 벽장을 열고 닫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서랍. 아래쪽. 가장 깊은 곳. 거기에는 편지가 있었다. 봉투. 손글씨. “리우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강리우는 그 편지를 집었다. 봉투를 뜯지 않았다. 그냥 들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찾았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착했다. 마치 이것이 예상된 것처럼.

“편지가 있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걸 읽어. 그리고 서울로 와. 우리가 이야기할 게 있어.”

아버지가 말했고, 전화를 끊었다.

강리우는 편지를 읽지 않았다.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로 내려갔다. 32층. 31층. 30층. 계속 내려갔다.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강리우였다.

“강남에서 뭘 찾고 있어?”

세아가 물었다.

“너.”

강리우가 대답했다.

침묵. 병실의 형광등 소리. 어머니의 호흡음. 도현이의 숨소리.

“제주로 가자.”

세아가 말했다.

“뭐?”

“제주로 가자. 엄마가 깨어나면. 다 같이. 너도 포함해서. 그리고 말해. 뭐든지. 모든 거.”

강리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세아는 강리우도 자신처럼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혈연. 같은 두려움. 같은 불타는 것.

“알았어.”

강리우가 말했다.

“근데 한 가지만. 엄마가 깨어나면, 아버지 얘기는 하지 말아. 아직은. 엄마가 준비될 때까지.”

세아가 말했다.

“왜?”

“아직 아버지가 뭘 하려는지 모르니까. 아직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아직은… 침묵이 필요해.”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는 길에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서울의 밤거리. 강남의 불빛. 아버지의 글씨.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모든 것들이 종이 위에 펼쳐졌다.


새벽 4시. 병실의 시간은 여전히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세아는 의자에 누워 있었다. 도현이의 어깨에 기대서.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팔이 저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또 떨렸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더 분명하게 이번에는. 마치 어머니가 깊은 물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제주로 가자. 세아는 그 말을 반복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마주 봐야 할 것들을 미루면서. 하지만 미루는 것도 필요했다. 때로는. 이렇게 밤이 새도록. 손을 잡으면서. 침묵 속에서. 불타지 않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형광등이 병실을 밝히고 있었다. 하얀 빛.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하지만 세아는 그 빛 아래에서도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가의 그림자. 도현이의 입가의 긴장. 자신의 손의 떨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제주의 해로 흘러갈 것이었다.

조용한 파도. 어머니의 침묵. 강리우의 편지. 그리고 자신의 불타는 목소리. 아직은 나오지 않았지만. 곧 나올.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세아는 눈을 감았다. 병실의 온기 속에서. 강남의 불빛과 제주의 파도 사이에서. 자신을 다시 불태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침묵하는 밤.


시간 표기:

– 강리우: 밤 11시 경, 강남역 오피스텔

– 세아와 도현이: 병실, 새벽 2시~4시

– 강리우의 전화: 밤 11시 30분경

– 세아의 휴대폰: 새벽 3시경

핵심 장면:

1. 강리우가 아버지 사무실에서 편지를 발견 (의도적으로 읽지 않은 상태로 남김 — 다음 화의 떡밥)

2. 세아가 “제주로 가자”는 결정을 내림 (주도권 회복)

3. 도현이가 어머니의 과거를 전달 (세대 간 정보 전달)

4. 어머니의 손가락이 더 분명하게 움직임 (깨어남의 신호 강화)

5. 침묵에 대한 합의 (세아와 강리우 간의 감정적 계약)

상징:

– 강남의 불빛 vs 제주의 침묵 (도시 vs 치유)

– 편지 (말하지 못한 것들의 물리적 형태)

– 떨리는 손가락 (모두가 공유하는 두려움)

– 형광등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 가리는 것)

톤 변화:

– 강리우 시점: 고독하고 불안정한 톤 (상승 음정)

– 세아 시점: 침착하고 결정적인 톤 (하강 음정으로의 이동)

– 전체: 침묵과 결정 사이의 긴장감 유지

다음 화 예고:

– 어머니의 완전한 깨어남

– 강리우의 편지 내용 공개

– 제주로의 여정 시작

# 침묵의 밤, 결정의 시간

## 제1부: 강남의 불빛

강리우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피스텔 31층. 강남역 위의 하늘. 밤 11시경, 서울은 여전히 깨어 있었고, 그 깨어남의 증거들이 창밖으로 흘러내렸다. 수천 개의 불빛들. 각각의 빛 뒤에 누군가의 밤이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의 고민, 누군가의 불안, 누군가의 욕망이.

강리우도 그 중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 이 방에서.

책장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회색 스웨이드 소파 위에는 몸을 굽혀 앉은 그의 형체만 보였다. 넓고 높은 이 공간에서,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작아 보였다. 흙빛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은 채, 손에는 아버지의 편지를 들고 있었다.

아직 열지 않은 편지.

손가락이 봉투의 모서리를 만졌다. 종이의 질감이 뚜렷했다. 비싼 종이. 아버지가 즐겨 쓰던 것. 하지만 강리우는 이것을 읽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신을 지배했다. 읽는 순간, 뭔가가 바뀔 것 같았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자신에 대한 이해가, 혹은 더 깊은 무언가가.

“아버지는 뭘 남겨두고 싶었던 걸까.”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들렸다. 이 낯선 공간, 이 높은 층 위에서, 서울의 밤은 여전히 가차 없이 빛나고 있었다.

강리우는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손에는 여전히 편지가 들려 있었다. 밤의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강남의 불빛들이 격자 무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신경망처럼. 혹은 그물처럼. 누군가를 잡아두려는.

*세아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11시 30분. 가능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편지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비밀을 모른 상태에서,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강리우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편지를 다시 들었다.

봉투는 가벼웠다. 하지만 무거웠다.

## 제2부: 병실의 침묵

새벽 2시.

세아의 팔은 저렸다. 완전히 저린 상태를 넘어서, 이제는 저림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변해 있었다. 무감각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인가. 세아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이유가 저림이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언젠가는 깨어날 것 같았다. 그 저림도, 이 침묵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하지만 생명력이 있었다. 맥박이 느껴졌다. 약하지만, 분명히.

“세아.”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깨어 있었다. 어머니의 병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반쯤 어둠 속에 있었다. 형광등의 빛이 그의 턱선만 밝혔다. 강한 턱선. 그 아래 약한 목. 약한 가슴.

“뭐.”

“어머니… 손가락이.”

세아는 감각에 집중했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미미한 움직임. 떨림. 마치 물 아래에서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알아. 나도 봤어.”

침묵이 돌아왔다. 병실의 침묵. 밤의 침묵. 어머니의 침묵. 이 침묵 속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진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도현아.”

“응.”

“어머니가… 어머니가 이 전에 제주에 가고 싶다고 했어? 아버지와?”

도현이가 움직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세아에게 더 가까워졌다.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도현이를 바라봤다. 오빠의 얼굴이 밝혀졌다. 그의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더 깊은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한 번은…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제주로 가자고 했어. 아버지는 시간이 없다고. 일이 많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도현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그것이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머니는 혼자 가고 싶다고 했어.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화를 냈어. 자존심이 상한 거 같았어.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어머니는… 그 이후로는 말하지 않았어.”

세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창밖의 거리등 불빛이 그녀의 윤곽을 그렸다. 폐쇄된 눈. 조용한 입.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

“제주로 가자.”

말이 세아의 입에서 나왔다. 그것이 자신의 말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정이었다.

“제주로 가자. 우리. 어머니와 함께.”

도현이가 세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불빛이 그의 동공에 반사되었다.

“세아… 지금?”

“지금이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야. 어머니가 깨어나고 있어. 손가락이… 손가락이 움직여.”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더 깊게 잡았다. 팔이 저렀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접촉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것이 유일한 언어였다. 말이 필요 없는 언어.

도현이가 일어나 걸어갔다. 창가로. 그리고 밤의 서울을 바라봤다.

“알았어. 제주로 가자.”

## 제3부: 형광등 아래의 진실

새벽 3시.

형광등이 병실을 밝히고 있었다. 하얀 빛. 차갑고 무자비한 빛.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세아는 그 빛 아래에서도 어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역설이었다.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깊은 어둠을 본다는 것.

어머니의 눈가에 가는 주름들. 그 주름들 사이의 그림자. 입가의 창백함. 목의 가늘어짐. 모든 것이 드러났다. 모든 고통이, 모든 시간이.

도현이의 입가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는 소파에 누워 있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눈이 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은 천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을.

세아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팔의 저림은 이제 고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고통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통.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통.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리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세아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봤다. 울림이 계속되었다. 도현이가 일어났다.

“받아. 강리우가 뭔가 있으니까 보낸 거야.”

세아가 휴대폰을 들었다.

“응.”

“세아.”

강리우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밤의 진정함이 그의 목소리에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뭐 해?”

“어머니 곁에 있어. 도현이도. 넌?”

“아버지 서재에 있어. 세아… 뭔가 있어. 어머니가… 우리가 뭔가 놓쳤어. 아버지 편지가.”

침묵.

세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도현이를 봤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댔다.

“강리우. 지금은… 우리 제주로 가기로 했어. 어머니와 함께.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모든 걸 말해 줄게.”

다시 침묵.

“제주?”

“응. 제주. 어머니가 가고 싶어 했대. 예전에. 그래서 우리가… 우리가 데려갈 거야. 제주로.”

“알았어. 세아… 나도 가도 돼?”

세아는 어머니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더 분명하게 이번에는. 마치 어머니가 깊은 물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응. 와. 우리 함께 가자.”

“알았어. 내일 아침에…”

“강리우.”

“응?”

“편지… 아직 읽지 마. 제주에서 함께 읽자. 우리 함께.”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동의였다.

## 제4부: 침묵의 합의

새벽 4시.

세아는 눈을 감았다. 병실의 온기 속에서. 강남의 불빛과 제주의 파도 사이에서.

팔은 완전히 저렸다. 감각이 돌아왔다. 혹은 더 깊은 감각으로 변했다. 그것은 더 이상 신체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연결이었다.

어머니의 손.

도현이의 숨소리.

강리우의 침묵.

그리고 자신의 불타는 가슴.

*제주로 가자. 세아는 그 말을 반복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마주 봐야 할 것들을 미루면서. 하지만 미루는 것도 필요했다. 때로는. 이렇게 밤이 새도록. 손을 잡으면서. 침묵 속에서. 불타지 않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형광등은 여전히 병실을 밝히고 있었다. 하얀 빛.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하지만 세아는 그 빛 아래에서도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가의 그림자. 도현이의 입가의 긴장. 자신의 손의 떨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제주의 해로 흘러갈 것이었다.

조용한 파도. 어머니의 침묵. 강리우의 편지. 그리고 자신의 불타는 목소리. 아직은 나오지 않았지만. 곧 나올.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도현이가 세아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세아는 감사의 눈길로 오빠를 봤다. 도현이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따뜻했다.

“잠깐만 쉬어. 내가 지켜볼게.”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더욱 깊게 잡았다.

## 제5부: 야경의 끝

밤 11시 45분, 강남역 31층 오피스텔.

강리우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편지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봉투는 닫혀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세아와의 대화가 남아 있었다.

*“제주에서 함께 읽자. 우리 함께.”*

강리우는 그 말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것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울의 밤은 여전히 가차 없이 빛나고 있었다. 강남의 불빛들. 각각의 빛 뒤의 누군가들. 그들도 밤을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강리우는 아버지의 편지를 들었다. 봉투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제주.*

그 단어가 계속 울렸다.

어머니가 그곳을 원했다. 아버지는 거절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침묵했다. 몇 십 년 동안.

하지만 지금 세아가 말했다. 제주로 가자고. 어머니와 함께.

*우리가 가자.*

강리우는 편지를 들고 침실로 향했다. 명일의 짐 준비를 위해. 제주로 가기 위해. 모든 것이 바뀌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밤을 지나기 위해.

창밖의 서울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하지만 강리우는 이제 눈을 감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에필로그: 새벽의 침묵

새벽 5시, 병실.

어머니의 손가락이 떨렸다.

도현이가 그것을 봤다. 세아가 그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곧, 그들은 모두 제주로 갈 것이라는 것을.

형광등은 여전히 병실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 안에는 이제 희망이 가득했다.

침묵 속의 희망.

말하지 않은 약속들이.

손과 손이 만나는 곳에서.

**다음 화 예고:**

어머니의 눈이 떠진다. 제주로 가는 길.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편지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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