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02화: 손가락이 도달할 수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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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2화: 손가락이 도달할 수 없는 곳

하늘이의 목소리는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병실에 들어왔다. 세아가 결국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섯 번째 울림 직전에. 손가락이 화면에 닿으면서 자동으로.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을 배반하는 것처럼.

“여기 있었어? 지금 어디야. 진짜로.”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포기의 끝자락. 세아는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친구를 오래 알면 그런 식으로 들린다. 목소리 뒤에 있는 것들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병원이야.”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디 병원인지. 누구 때문인지.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그런 세부사항은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 거?”

하늘이가 물었다. 순간적으로.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현이를 봤다. 도현이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또는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신호도 감지하기 위해. 아주 작은 깨어남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아야.”

하늘이가 말했다. 이제 분노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피로였다. 깊은 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피로. 누군가를 걱정하는 피로. 그 모든 것.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한 글자.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새벽에 집에 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와. 물도 마시지 말고. 라면도 먹지 말고. 그냥 와서 자. 알았어?”

하늘이의 명령이었다. 친구의 명령. 세아는 그것을 듣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깨어나려고 하고 있는데. 강리우가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도현이가 손을 쥐고 있는데. 세아는 어떻게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세아. 세아!”

하늘이가 외쳤다. 세아는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하늘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치 세아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또는 신호가 약해지는 것처럼. 또는 세아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이전 밤의 반복이었다.

도현이가 세아를 봤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도현이는 배웠다. 어떨 때 침묵이 말보다 강한지를. 어떨 때 질문이 상처가 되는지를. 17살의 아이가 배워야 할 것들을 이미 다 배웠다. 그리고 그것은 세아의 잘못이었다.

휴대폰 화면이 꺼졌다. 하늘이와의 통화가 끝났다. 또 하나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람이 세아의 세계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아니, 빠져나간 게 아니라 세아가 밀어낸 것이다. 의식적으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정말로 죄책감이 없었을까.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 가늘고 창백한. 손톱이 짧은. 편의점에서 일할 때 깨져서. 손가락이 가늘었다. 가늘지만 강했다. 그런데 지금 그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누군가가 매우 먼 곳에서 그 손가락을 집어당기는 것처럼.

어머니의 손가락도 떨렸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 밀리미터 단위의. 하지만 분명한. 마치 누군가 매우 먼 곳에서 그 손가락을 집어당기는 것처럼. 또는 깊은 물 아래에서 올라오려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는 움직임처럼.

깊은 물 아래에서. 제주의 해. 어머니가 잠수하는 해. 세아는 어릴 때 그 해에 들어갔었다. 어머니를 따라. 물 위에서. 어머니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숨을 참으면서.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렇게 오래 올라오지 않은 적이 있을까. 이렇게 깊이 내려간 적이 있을까. 어머니가 죽은 건 아닐까.

그런데 어머니는 올라왔다. 항상. 검은 고무옷을 입고. 얼굴은 보이지 않고. 손만 먼저 올라와서.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때의 손은 따뜻했다. 물 속에 있었음에도 따뜻했다. 어머니의 체온이 전해졌다. 살아있다는 신호.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어머니의 손이 차갑다. 기계의 따뜻함이 아니라 진짜 따뜻함을 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깊은 물 속에 있고, 세아는 물 위에 있고, 손가락이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누나.”

도현이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세아가 대답했다.

“응.”

“강리우 오빠가 아버지한테 뭔가 물어볼 거야? 우리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도현이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탄원이었다. 누군가 이것을 설명해 달라는 탄원.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 달라는. 이 모든 혼란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달라는 탄원.

세아는 그런 설명을 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세아는 정말로 몰랐다. 강리우가 강남의 어디로 가는지. 강민준의 집이 어디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 모든 것이 불명확했다.

병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아주 미세하게. 한 순간. 마치 누군가가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하지만 아무도 만진 것이 없었다. 그저 오래된 건물의 오래된 전기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할 뿐이었다. 밤 새벽 시간에. 누군가 고통받는 곳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곳에서.

세아는 시계를 봤다. 오전 2시 14분. 도현이가 처음 전화했을 때와 정확히 23분이 지났다. 그 23분 동안 어머니는 움직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뇌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강리우는 강남으로 가고 있었다. 자동차 안에서. 야간 도로에서. 어딘가로 향해서.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카톡을 열었다. 하늘이의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하늘이: “새벽에 집에 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와. 물도 마시지 말고. 라면도 먹지 말고. 그냥 와서 자. 알았어?”

그 메시지 아래에 새로운 메시지가 없었다. 하늘이는 포기했을 것이다. 또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아가 답장을 할 때까지. 하지만 세아는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그 손가락들이 다른 누군가의 것인 것처럼.

“누나, 혹시 강리우 오빠 번호 있어?”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강리우는 항상 세아를 찾아왔다. 세아가 강리우를 찾은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일종의 패턴이었다. 강리우가 주도하고, 세아가 따르는. 또는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은 항상 따르고 있었다.

도현이가 손을 놨다. 어머니의 손. 그 손이 침대 위에 떨어졌다. 마치 무언가가 부러진 것처럼 그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는 음성이 없었지만, 세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엄마가 우리를 버렸어?”

도현이가 물었다. 갑자기. 마치 이 질문을 오래 참아온 것처럼.

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침묵. 말하지 않음.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아니지. 엄마가 우리를 버린 게 아니라, 우리가 엄마를 몰랐던 거야. 몰랐으니까 버린 줄 알 수가 없었지.”

도현이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마치 자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또는 자신에게 허락을 주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해도 된다는 허락을. 이렇게 이해해도 된다는 허락을.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17살의 아이. 아직 미성년자.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해야 할 나이.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이 얼마나 복잡할 수 있는지. 사랑이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침묵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강리우 오빠가 이 집에서 자라지 않았잖아. 강민준이 거기서 자라도록 놔뒀잖아. 그럼 강리우 오빠도 피해자야. 우리처럼.”

도현이가 계속했다. 마치 이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또는 자신에게.

세아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도현이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강리우도 피해자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피해자였다. 모두가 상처받았다. 모두가 무언가를 놓쳤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누군가에게 돌렸다. 마치 가족이란 그런 것이듯이. 상처를 주고받는 곳. 사랑과 증오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곳.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하늘이가 아니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세아는 받지 않았다. 그냥 울리도록 두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도현이가 세아의 휴대폰을 봤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울림이 멈췄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알 수 없는 번호: “세아 씨. 저 강리우입니다. 지금 아버지 집에 도착했어요. 여기 서류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머니 이름으로 된 것들이. 편지들이. 당신이 봐야 할 것들이.”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손가락들이 다른 누군가의 것인 것처럼.

“뭐라고?”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휴대폰을 도현이에게 건넸다. 도현이가 화면을 읽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편지들이?”

도현이가 중얼거렸다.

세아도 그 말을 반복했다. 입으로. 소리를 내서. 마치 그렇게 하면 그것이 더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편지들.”

그 순간, 어머니의 눈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꿈속에서 누군가 어머니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또는 어머니가 깊은 물 속에서 무언가를 들은 것처럼. 그 어떤 신호였다. 작지만 분명한.

세아와 도현이는 모두 어머니를 봤다. 움직이지 않은 눈. 여전히 닫혀 있는. 하지만 무언가가 그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안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오려고 하면서.

도현이가 간호사 벨을 눌렀다. 이번에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아는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고 있는지를 느꼈다. 비정상적으로. 기계가 아닌 생물의 심장처럼. 통제 불능. 예측 불가능.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이 지배할 수 없는.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었을까. 통제할 수 없는 것. 손이 도달할 수 없는 것. 깊은 물 속에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물 위에서 기다리는 것. 숨을 참으면서. 심장이 빨라지면서. 올라올 때까지.

간호사가 다시 들어왔다. 다른 간호사였다. 30대 여성. 이름표에 ‘이은희’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확인했다. 눈을 들어올리고. 맥박을 확인하고. 호흡을 듣고.

“의사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변화가 있으신 것 같아요.”

이은희 간호사가 말했다.

변화. 그 단어가 세아의 몸을 관통했다. 변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 더 이상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는 뜻.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뜻.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도현이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얼굴. 여전히 닫혀 있는 눈. 하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이.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마지막 힘을 모아서.

“누나.”

도현이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도현이의 손. 따뜻한. 살아있는. 현재의. 지금 이 순간의.

세아는 그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도현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가 아니라, 이번에는 세아가 먼저 손을 잡았다.

“응.”

세아가 말했다. 한 글자.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그것.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다. 그런 의미였다.

의사가 들어왔다. 50대 남성. 세아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어머니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전문적이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수천 번을 반복한 사람의 손길. 어머니의 눈을 들어올리고. 손전등을 비추고. 반응을 확인하고.

“좋은 신호네요.”

의사가 말했다.

그 말이 병실에 울렸다. 마치 종소리처럼. 또는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향한 신호음처럼.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도 모르게. 마치 누군가가 내부에서 그것을 짜내고 있는 것처럼.

도현이의 손이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또는 더 따뜻해졌다. 또는 더 현실적이 되었다. 그 손을 통해 세아는 알 수 있었다. 도현이도 울고 있다는 것을. 17살의 아이도. 이 밤을 함께 견디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강리우는 강남 어딘가에서 편지들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쓴 편지들을. 강민준에게 보낸 편지들. 또는 자신을 위해 쓴 편지들. 또는 세아를 위해 쓴 편지들. 손가락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던 편지들.

그 편지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세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가족의 방식이었다.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한다. 듣고 싶지 않지만 들어야 한다. 만지고 싶지 않지만 만져야 한다.

의사가 나갔다. 또 다른 환자. 또 다른 가족. 또 다른 밤. 그리고 세아와 도현이는 어머니 옆에 남겨졌다. 형광등 아래에서. 심전도 모니터의 신호음 속에서. 새벽 2시 47분. 아직 아침이 아니고, 더 이상 밤이 아닌 그 시간에.

세아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강리우의 메시지를 읽었다.

“여기 서류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머니 이름으로 된 것들이. 편지들이. 당신이 봐야 할 것들이.”

그리고 세아는 답장을 했다.

“알겠습니다.”

두 글자. 한국어로. 존댓말로. 마치 낯선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세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지금은. 이 밤에. 이 병실에서.

도현이가 계속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세아도 다른 손을 잡았다. 양쪽에서. 어머니를 감싸면서. 마치 그렇게 하면 어머니가 더 이상 깊은 물 속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밤은 계속되었다. 새벽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 이 순간의 무게

## 1부: 손의 언어

병실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세아는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냉동실에 갇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손은 따뜻했다. 도현이의 손. 그것만큼은.

세아는 자신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봤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손이 천천히 도현이의 손을 향해 움직였다.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지금까지 도현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병실에 들어온 그 첫날, 어머니가 의식을 잃기 전에. 그때 도현이는 세아의 손을 잡았고, 세아는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수동적으로. 마치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그 접촉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아의 손가락들이 도현이의 손등에 닿았다. 그 손등의 질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17살 소년의 손. 그 손이 떨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세아는 그 떨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응.”

세아가 말했다. 한 글자.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그것.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다. 그런 의미였다.

도현이는 그것을 이해했다. 아마도. 도현이는 세아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고, 세아도 그것을 놓지 않았다. 둘 다 어머니의 침대를 향해 몸을 기울이면서. 마치 그렇게 하면 그들의 사랑이 더 잘 전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병실의 모니터들이 계속해서 신호음을 냈다. 비프, 비프, 비프.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어머니의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다는 증거. 그 소리가 세아에게는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비극적인 음악. 하지만 아직은 음악이었다.

## 2부: 의사의 발걸음

문이 열렸다.

의사가 들어왔다. 50대 남성. 흰 코트를 입은, 잔주름이 눈가에 깊게 패인 남자. 세아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며칠간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출입했고, 그들의 이름들은 모두 흐릿한 그림자처럼 뭉개져 있었다.

하지만 이 의사는 달랐다.

그는 마치 어머니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전문적이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수천 번을 반복한 사람의 손길. 그의 손이 어머니의 눈꺼풀을 들어올렸고, 손전등의 빛이 어머니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

의사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의사의 얼굴은 전문가의 얼굴이었다. 희망도, 절망도 드러내지 않는. 다만 관찰하고, 확인하고, 기록할 뿐.

손전등이 꺼졌다. 의사의 손이 어머니의 팔을 확인했다. 그의 손가락이 맥박을 세는 것처럼 보였다. 세아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하나, 둘, 셋… 마치 자신의 생명이 그 손가락의 속도에 달려 있는 것처럼.

“좋은 신호네요.”

의사가 말했다.

그 말이 병실에 울렸다. 마치 종소리처럼. 또는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향한 신호음처럼.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처럼.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도 모르게. 마치 누군가가 내부에서 그것을 짜내고 있는 것처럼.

그 눈물들이 뜨거웠다. 세아의 뺨을 타고 내려왔다. 맛있는 눈물. 짠 눈물.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또는 슬픔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 더 깊은 것이었다. 석방의 눈물. 해방의 눈물.

도현이의 손이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또는 더 따뜻해졌다. 또는 더 현실적이 되었다.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도현이도 울고 있다는 것을. 그 소년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17살의 아이도. 이 밤을 함께 견디고 있다는 것을.

의사가 몇 마디 더 말했다. 전문 용어들. 뇌파의 회복, 신경학적 반응의 개선, 다음 검사 스케줄… 세아는 그 말들을 들었지만, 진정으로 들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들이 그녀를 지나갔다. 마치 투명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의사가 나갔다. 또 다른 환자를 보러. 또 다른 가족을 만나러.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모니터의 신호음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신호음은 이제 희망의 신호음처럼 들렸다.

## 3부: 강리우의 편지들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이 밝아졌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 밝기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세아는 눈을 좁혀야 했다.

강남의 어딘가에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강리우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을 세아는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전화로만 이야기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마치 검사나 경찰관처럼.

“여기 서류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머니 이름으로 된 것들이. 편지들이. 당신이 봐야 할 것들이.”

메시지의 문장들이 세아의 눈에 들어왔고, 다시 나갔다. 마치 그 문장들이 투명한 것처럼. 또는 세아가 투명한 것처럼.

강리우는 강민준의 변호사였다. 그 사람은 강민준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민준이 남긴 비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세아는 어머니가 강민준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쓰는 사람이었다. 낮에는 어머니였지만, 밤에는 작가였다. 또는 그 반대였다. 세아는 항상 확신하지 못했다.

그 편지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세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가족의 방식이었다.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한다. 듣고 싶지 않지만 들어야 한다. 만지고 싶지 않지만 만져야 한다. 그 비밀들을 마주하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어둠 속에 남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의 비밀들은 자라난다. 곰팡이처럼. 독버섯처럼.

세아는 답장을 했다.

“알겠습니다.”

두 글자. 한국어로. 존댓말로. 마치 낯선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세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지금은. 이 밤에. 이 병실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화면이 다시 어두워졌다.

## 4부: 양쪽 끝

도현이가 계속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세아도 다른 손을 잡았다. 양쪽에서. 어머니를 감싸면서.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 손의 주름들. 손가락의 길이. 손톱의 모양.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또는 마지막 보는 것처럼.

어머니의 손은 부드러웠다. 의외로. 병원에서 보낸 이 많은 날들 동안에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세아는 그 부드러움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댔다. 아주 잠깐. 도현이가 보지 못하도록.

“어머니.”

세아는 속삭였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오직 입술의 모양으로만.

“나는 여기 있어요. 도현이도 여기 있어요. 우리는 여기 있어요.”

그 말들이 어머니에게 전해지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들을 말함으로써, 세아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도현이가 입을 열었다.

“누나.”

세아가 도현이를 바라봤다.

“응.”

“어머니가… 어머니가 괜찮을 거 같아. 의사가 그렇게 말했잖아.”

도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희망이 있었다. 17살 소년의 희망.

“응. 그래. 괜찮을 거야.”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도현이가 희망을 갖는 것이었다.

병실의 창문으로 새벽의 어둠이 밀려들었다. 아직 아침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밤도 아니었다. 그 애매한 시간. 무(無)와 유(有) 사이의 시간.

모니터의 신호음이 계속되었다. 비프, 비프, 비프.

어머니의 생명의 박동. 그 리듬. 그 음악.

## 5부: 깊은 물 속에서

세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얼굴이 마치 깊은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머니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세아와 도현이는 위에 있었다. 물의 표면에. 어머니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서.

어머니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세아는 그것을 본 건지 상상한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머니?”

세아가 속삭였다.

“저 봤어요? 어머니가 움직였어.”

도현이가 일어났다.

“정말?”

“응. 입술이. 조금 움직였어.”

둘은 어머니의 얼굴을 더욱 가까이서 살펴봤다. 마치 그 미세한 움직임들을 놓치면 안 될 것처럼. 마치 그 움직임들 속에 무언가 중요한 메시지가 암호화되어 있는 것처럼.

“어머니가… 뭔가 말하려고 했던 거 같아.”

도현이가 말했다.

“그런 거 같아.”

세아가 동의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미세한 움직임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어머니가 세상에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신호였던 것처럼.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어머니가 더 이상 깊은 물 속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치 사랑의 힘이 물의 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세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사랑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죽음, 시간, 변화. 그런 것들은 사랑도 막을 수 없었다.

## 6부: 새벽 2시 47분

벽에 붙은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47분이었다. 그 시간에 세아는 생각했다. 이 시간이 가장 외로운 시간이라고.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모두가 자고 있고, 세계가 멈춘 것 같은. 하지만 모니터들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어머니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다.

그 대조가 세아를 자꾸만 헷갈리게 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데, 어머니의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어머니는 깊은 물 속에 있지만,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간호사가 한 번 들어왔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나갔다. 그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친절한 미소.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가. 그것을 세아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이가 졸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세아는 도현이의 머리를 바라봤다. 그 검은 머리. 어머니의 머리색이었다. 도현이는 어머니를 닮았다. 눈도, 코도, 입도. 세아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것이 항상 세아를 조금 슬프게 했다. 마치 자신이 가족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순간에, 세아는 느꼈다. 자신도 가족의 일부라는 것을. 그 손의 온기를 통해. 그 어둠 속에서. 함께.

## 7부: 강민준의 편지들

세아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강리우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여기 서류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머니 이름으로 된 것들이. 편지들이. 당신이 봐야 할 것들이.”

그 “당신이 봐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세아는 상상해봤다. 어머니가 강민준에게 쓴 편지들. 그 편지들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

“내 아들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또는 더 어두운 것들.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

세아는 그런 문장들을 상상했다. 하지만 상상만 했다. 아직은 그 편지들을 읽지 않았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가 되는 날이 올 것이었다. 어머니가 완전히 깨어나는 날. 또는 그 반대의 날. 그 어느 쪽이든.

세아는 답장을 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가 회복되면, 그때 가서 보겠습니다.”

강리우는 금방 답장을 했다.

“그렇게 하세요. 그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세아는 조금 놀랐다. 그것이 검사나 변호사 같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삶을 오래 살면서 배운 말 같았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

## 8부: 양쪽에서

도현이가 깊은 잠에 빠졌다.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더욱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치 도현이가 깨어날까봐. 마치 이 순간이 깨지기 쉬운 것처럼.

그리고 어머니의 다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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