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9화: 45페이지를 다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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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화: 45페이지를 다 읽고 나서

전속 계약서 45페이지를 다 읽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세아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바깥에서 술 취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시원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였다. 발소리가 무거웠다. 벽이 얇은 곳이었다 — 옆방에서 누가 이를 닦는 소리도 들렸다. 수도꼭지가 열리는 소리.

하늘이는 세아의 침대 끝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세아가 읽는 동안 하늘이는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가끔 세아가 뭔가를 표시할 때 — 펜으로 밑줄을 그을 때 — 그 소리를 들으면서.

세아가 파일을 덮었다.

“몇 군데야.” 하늘이가 물었다.

“표시한 거요?”

“응.”

세아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빨간 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부분들을 세었다. 열두 군데였다.

“열둘.”

하늘이가 숨을 내쉬었다.

“다 읽어봐.”

세아는 첫 번째 표시 부분으로 돌아갔다. 7페이지. 계약 기간 내 아티스트의 모든 창작 활동은 갑(JYA 엔터테인먼트)의 사전 승인을 필요로 한다. 세아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하늘이는 들었다.

두 번째 표시 부분. 11페이지. 아티스트는 계약 기간 내 타 기획사 또는 독립 레이블과의 협업을 금지한다. 단, 갑의 서면 동의가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세 번째. 19페이지. 음악 활동으로 발생한 수익의 배분은 갑 60%, 을 40%를 기준으로 하며, 초기 2년간은 갑 70%, 을 30%를 적용한다.

네 번째. 23페이지. 아티스트의 대외 발언, 인터뷰, SNS 게시물은 갑의 사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세아는 열두 군데를 다 읽었다.

읽는 동안 방이 더 작아지는 것 같았다. 천장이 낮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 천장은 처음부터 낮았다. 고시원의 천장은 항상 낮다. 그러나 그 느낌은 실재했다.

“다 읽었어.”

“어때.”

세아는 대답하기 전에 잠깐 생각했다. 어떻다고 말해야 하는가.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계약서를 읽고 나서의 느낌을 정확하게.

“새장이에요.”

하늘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JYA 안에서 뭔가를 하게 해주는데, JYA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어요. 내가 만든 것도 JYA 거고, 내가 말하는 것도 JYA 검토를 받아야 하고, 내가 버는 것도 JYA가 먼저 가져가고. 그러면서 나한테 ‘너의 음악을 할 수 있게 해줄게’라고 말하는 거잖아요.”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장이 예쁠 수 있어요. 그 안에 있으면 따뜻하고 밥도 주고 깃털도 관리해줄 수 있어요. 근데.” 세아가 파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새장은 새장이잖아요.”

“…그래.” 하늘이가 말했다. 조용하게.

방 안에 침묵이 왔다.

세아는 테이블 위의 파일을 봤다. 흰 표지. 아무 글씨도 없는 것. 그 안에 45페이지의 계약서가 있었다. 세아의 이름이 적힐 자리가 있는 계약서.

사인을 하면.

사인을 하면 이름을 돌려받는다고 했다. 강리우가 말했다. 박인철이 말했다. JYA가 다른 기획사들에서 저작권을 사와서 내 이름을 원래 자리에 넣어주겠다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 말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계약서에는 그 말이 어디에도 없다.

세아가 다시 파일을 열었다. 열두 번째 표시 부분 앞으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표시한 곳. 43페이지. 본 계약의 해석에 있어 이견이 발생할 경우, 갑의 해석을 우선으로 한다.

세아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글씨 위를 천천히.

“이 문장이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봤다.

“갑의 해석을 우선으로 한다.” 세아가 읽었다. “박인철이 오늘 저한테 한 말들이 있잖아요. 저작권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 근데 그게 계약서에 없어요. 말로 한 약속인 거예요. 근데 이 계약서 43페이지에는 이견이 생기면 JYA 해석이 맞다고 써 있어요.”

하늘이가 팔짱을 꼈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그런 말 했잖아요’라고 해도. JYA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라고 하면. 계약서 기준으로는 JYA가 맞는 거예요.”

방이 조용했다.

하늘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맞다는 것이었다. 세아가 정확하게 읽었다는 것.

“나세아.” 하늘이가 말했다.

“응.”

“너 오늘 계약서 읽었잖아.”

“응.”

“진짜로. 이번엔 진짜로 읽었어.”

세아는 그 말의 무게를 잠깐 생각했다. 하늘이가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것이었다. 세아가 이전과 달라졌는지를.

“응.” 세아가 말했다.

“그러면 이제 다른 파일 봐야지.”

저작권 양도 합의서였다. 세아는 오른쪽 파일을 집었다.


저작권 양도 합의서는 23페이지였다.

전속 계약서보다 얇았지만 더 오래 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 이 합의서 안에 세아의 곡들 목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 제목이 아니라 곡 번호로 적혀 있었다. 곡 코드 YSH-041, YSH-042, YSH-043. 세아는 그 코드들이 자신의 곡이라는 걸 알았다. 알았지만 — 그 코드들이 자신의 곡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지금 당장 없었다.

세아는 그 페이지에서 오래 멈췄다.

“왜.” 하늘이가 물었다.

“내 곡이에요.”

“알아.”

“근데 내 곡이라는 게 여기 없어요.”

하늘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세아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코드 번호만 있네.”

“응. 이 코드들이 내 곡이라고 써 있지 않아요. ‘YSH 소속 창작물’이라고만 써 있어요. YSH가 뭔지도 모르겠고. 이게 다른 회사 이름인지, 아니면 내부 코드인지.”

하늘이가 핸드폰을 꺼냈다. 뭔가를 검색했다.

“YSH.” 하늘이가 중얼거렸다. “YSH 뮤직. 독립 작곡가 에이전시야. 강남에 있어. 서울 서초구.”

세아는 그 이름을 들었다.

YSH 뮤직.

세아가 처음으로 곡을 팔았을 때 연결해준 곳이 그곳이었다. 당시에는 이름도 잘 몰랐다. 중간에 누군가가 있었다 — 같은 클럽에서 세션을 했던 드러머가 소개해줬다. ‘곡 쓰는 사람들이 연결되는 곳이 있어’라고 했다. 세아는 그 드러머가 준 번호로 연락했고, 그 번호의 사람이 YSH 뮤직 직원이었다. 세아는 그 사람한테 곡을 보냈고, 계약서를 받았고, 사인했다.

그 계약서도 읽지 않았다.

“YSH 뮤직이 내 곡들 가지고 있는 거예요.”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JYA가 YSH한테서 사오는 거고.”

“응.”

“그러면 네 이름은 YSH한테 팔아버린 건데.”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 그것이 문서로, 코드 번호로, 인쇄된 활자로 눈앞에 있으니까. 알고 있었다는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있었다. 막연히 아는 것과 정확하게 보는 것 사이의 차이.

성냥이 타는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세아는 코를 움찔했다. 아무 냄새도 없었다. 겨울 고시원 방의 냄새만 있었다 — 건조한 공기, 얇은 이불의 냄새, 형광등 아래의 냄새.

“나세아.” 하늘이가 말했다.

“응.”

“너 YSH랑 계약서 어디 있어.”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노트북 폴더에 있을 거예요. PDF로.”

“꺼내봐.”

세아는 침대 위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전원을 켰다. 파일 탐색기를 열었다. 폴더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 세아의 바탕화면은 폴더들이 많았다. 악보 파일, 데모 녹음 파일, 가사 파일. 이름이 제각각이었다. 날짜로 된 것도 있고, 곡 이름 약자로 된 것도 있고, ‘이거’라고 저장한 것도 있었다.

“야 폴더 정리 좀.” 하늘이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나중에요.”

계약 관련 폴더를 찾았다. ‘계약’ 이라고 이름 붙인 폴더가 있었다. 그 안에 PDF가 세 개 있었다. YSH_계약서_1.pdf, YSH_계약서_2.pdf, YSH_계약서_3.pdf.

세아는 그것들을 봤다.

세 개.

세아가 YSH를 통해 곡을 판 것이 세 번이었다. 세 건의 계약. 그 계약들 안에 세아의 이름이 있었다 — 또는 없었다. 있었다가 사라진 것인지, 처음부터 없었는지.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새벽 한 시가 넘었다.

하늘이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등을 침대에 기댔다. 세아는 침대 끝에 앉아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세 개의 계약서를 다 읽는 데 한 시간 반이 더 걸렸다.

YSH와의 첫 번째 계약서. 7페이지. 짧았다. 세아가 작성한 곡의 저작권을 YSH에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대가는 일회성 원고료였다. 70만 원. 세아는 그 숫자를 봤다. 70만 원. 그 달에 어머니 병원비가 70만 원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기억했다 —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했다.

두 번째 계약서. 같은 구조였다. 원고료 85만 원.

세 번째 계약서. 원고료 90만 원.

합계 245만 원.

세아가 YSH에 판 것들의 가격이었다. 세아의 이름이 없는 곡 세 개. 245만 원.

“세아야.” 하늘이가 말했다.

“응.”

“저작권 양도 계약서 어디 보면 돼?”

“3페이지. 저작재산권 귀속 조항.”

하늘이가 세아의 노트북을 당겨서 화면을 봤다. YSH 첫 번째 계약서 3페이지였다.

“읽어봐.”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읽었다.

제4조 (저작재산권의 귀속) ①을(나세아)이 본 계약에 의거하여 창작하거나 제공한 음악 저작물에 대한 저작재산권은 계약 체결과 동시에 갑(YSH 뮤직)에 귀속된다. ②저작인격권은 을에게 유보되나, 갑이 저작물을 이용함에 있어 을의 동의 없이도 편곡, 제목 변경, 출처 표시 방법 변경이 가능하다.

세아는 그 문장들을 끝까지 읽었다.

저작인격권은 세아에게 있었다. 이 계약서 기준으로는. 저작인격권이란 — 세아가 이 곡의 작곡자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이름을 달 수 있는 권리. 그것은 팔 수 없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그러나 출처 표시 방법 변경은 YSH가 할 수 있었다. 즉, YSH는 세아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할지를 — 또는 표기하지 않을지를 — 결정할 수 있었다. 동의 없이.

“이거.” 세아가 말했다.

“봐.”

“출처 표시 방법 변경.”

하늘이가 읽었다.

방 안에 잠깐 침묵이 왔다.

“그러면.” 하늘이가 말했다. 천천히. “YSH가 네 이름 빼도 계약 위반이 아닌 거야?”

“이 계약서 기준으로는요.”

“야.” 하늘이가 말했다.

그 한 음절 안에 여러 가지가 있었다. 화가 난 것, 어처구니가 없는 것, 세아한테 뭔가 말하고 싶은 것,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말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세아는 그것을 다 들었다.

“응.” 세아가 말했다.

“그러면 JYA가 이 계약서를 보여줬을 때. 박인철이 나한테 이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게 가능한 이유가 뭐야. YSH한테서 저작권을 사오면 이름을 다시 표시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말했어요.”

“근데 그게 전속 계약서에는 없고.”

“응.”

하늘이가 무릎을 세우고 팔을 올렸다.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자세였다.

세아는 하늘이를 봤다. 하늘이의 팔에 있는 타투들이 형광등 빛 아래에서 보였다. 여러 가지 그림들이 겹쳐 있는 팔이었다. 세아는 그 그림들을 봤다 — 하나하나를. 벌 한 마리, 파도 모양, 어떤 글자, 작은 별들.

“어깨 어때.” 하늘이가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괜찮아요.”

“거짓말.”

세아는 어깨를 만졌다. 외투 위에서 성냥 자리를 짚었다. 타투를 한 자리는 여전히 뛰었다. 욱신거리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아파요.”

“그럼 그렇게 말해. 괜찮다고 하지 말고.”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괜찮다고 하지 말고.

그 말이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가.

세아는 그것을 생각했다. 오늘 하루 동안 세아가 괜찮다고 말한 횟수를 생각했다. 아침에 편의점 점장이 “야근해도 돼요?” 물었을 때. 괜찮아요. 리우가 계약서를 건넸을 때 표정이 어땠냐고 물었더라면 아마. 괜찮아요. 국밥을 먹으면서 하늘이가 “배 안 고팠어?”라고 물었을 때. 괜찮았어요.

세아는 항상 괜찮았다.

“하늘.” 세아가 말했다.

“응.”

“나 이거 어떻게 해야 해.”

하늘이가 눈을 떴다. 세아를 봤다.

세아는 그 질문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하루 내내 머릿속에 있었던 질문. 계약서를 받았을 때부터 있었던 질문. 그러나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있을 수 있었다.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실재하는 것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해.

“나도 몰라.” 하늘이가 말했다. “근데 한 가지는 알아.”

“뭐요.”

“오늘 사인하지 마. 오늘은.”


하늘이가 돌아간 것은 새벽 두 시였다.

문을 닫고 나서 세아는 테이블 위의 파일 두 개를 봤다. 전속 계약서와 저작권 양도 합의서. 그것들을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침대 아래에 밀어넣었다.

방에 혼자였다.

노트북 화면이 켜져 있었다. YSH 계약서 파일이 열려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닫았다. 화면이 꺼졌다.

방이 어두워졌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고시원 천장은 아무 무늬도 없었다. 흰 페인트. 형광등의 잔상이 잠깐 남았다가 사라졌다.

어깨가 뛰었다. 타투 자리가 심장박동에 맞춰 욱신거렸다. 세아는 그 박동을 느꼈다. 일정한 박자. 4박자. 세아는 그것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성냥이 타는 속도가 있다.

처음에는 빠르게, 나중에는 느리게, 그리고 꺼진다.

나는 지금 어디쯤인가.

세아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세아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 특히 생각이 많은 날에는. 오늘은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세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을 봤다.

카카오톡이었다. 도현이었다.

도현: 누나 자?

도현: 안 자는 거 알고 보냄 ㅋㅋ

도현: 오늘 학교서 뭔 일 있었는데

도현: 아 아니 별거 아닌데

도현: 근데 그냥 말하고 싶어서

세아는 핸드폰을 들고 일어나 앉았다.

세아: 안 자. 말해.

잠깐 기다렸다. 도현이 답장을 보내는 중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떴다.

도현: 우리 학교에 밴드부 있잖아

도현: 거기서 보컬 뽑는다고 했거든

도현: 나 지원했어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도현: 누나가 뭐라 할까봐 말 못했는데

도현: 근데 말 안 하면 더 이상한 것 같아서

도현: ㅋㅋ 화내도 됨

세아: 화 안 내.

도현: 진짜?

세아: 응. 합격했어?

도현: ㅋㅋㅋ 아직 모름 내일 결과 나옴

도현: 근데 내가 좀 잘했던 것 같기도 하고 ㅋㅋ

도현: 무슨 곡 불렀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 먼저 말함

도현: 누나 곡 불렀어

세아가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현: 아 그 누나 데모 녹음 있잖아 예전에 홈레코딩으로 했던 거

도현: 거기서 멜로디 따왔음 ㅋㅋ 가사는 내가 썼는데

도현: 아 근데 어쩌지 저작권 있나 ㅋㅋ

세아는 그 메시지들을 읽고 또 읽었다.

도현이 세아의 곡으로 노래를 했다. 세아의 멜로디로. 가사는 도현이 쓴 것이었다. 세아가 몰랐던 데모 녹음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도현은 그 멜로디가 좋다고 생각했다 — 오디션에 쓸 만큼 좋다고.

세아의 눈이 뜨거워졌다.

울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뜨거워졌다. 눈 안쪽이 타는 것 같았다. 세아는 그것을 손등으로 눌렀다. 손등이 차가웠다 — 세아의 손은 항상 찼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눈 근처에서 만났다.

세아: 저작권 나한테 있으니까 괜찮아.

세아: 합격하면 알려줘.

도현: ㅋㅋ 누나 진짜 쿨하네

도현: 아 근데 이모티콘 없이 물어보는 거임

도현: 누나 요즘 괜찮아?

세아는 그 질문을 봤다.

이모티콘 없이 물어보는 거임.

도현이 그 말을 썼다. 이모티콘 없이. 진짜로 묻는다는 뜻이었다. 농담으로 덮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도현이 그렇게 물을 때가 있었다 — 드물게, 그러나 정확하게.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괜찮아.

그 두 글자를 타이핑하려다 멈췄다.

괜찮다고 하지 말고.

하늘이의 말이 들렸다.

세아는 핸드폰 화면을 봤다. 타이핑 창이 비어 있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세아: 잘 모르겠어.

보냈다.

도현: ㅇㅋ.

도현: 그럼 잘 모르는 채로 있어도 됨.

도현: 누나가 다 알 필요 없잖아.

도현: 나 잔다 잘 자.

세아는 그 메시지들을 읽었다. 도현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알면서 몰랐다. 도현이 자라고 있었다. 세아가 모르는 사이에, 세아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잘 모르는 채로 있어도 됨.

누나가 다 알 필요 없잖아.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천장을 봤다.

어깨의 박동이 계속됐다. 하나, 둘, 셋, 넷.


아침에 세아가 일어났을 때 핸드폰에 문자가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세아는 그것을 열었다.

나세아씨, 강리우입니다. 어제 계약서 전달드렸는데, 검토하셨으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연락 주세요.

세아는 그 문자를 읽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뒀다.

창문을 봤다. 고시원 창문은 반지하 기준이었다 — 바깥이 발목 높이에서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운동화, 부츠, 구두. 겨울이었다. 두꺼운 신발들이 지나갔다.

강리우가 문자를 보냈다.

강리우가 계약서를 건넸을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세아는 기억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세아는 표정을 잘 읽는 편이었다 — 음악을 만들 때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그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었다. 확신, 불확신, 뭔가를 말하려다 참는 것.

강리우가 이 계약서를 진심으로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세아는 생각했다. 강리우가 세아의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강리우가 세아한테 하는 말들 중에서 얼마가 진심이고 얼마가 일인지를.

그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세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 창을 열었다. 강리우의 번호.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일 오전에 가능해요. 장소는 어디가 좋으세요.

보냈다.

잠깐 기다렸다. 강리우의 답장이 빨리 왔다.

홍대 쪽 카페 괜찮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세아씨 동네 쪽으로.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강리우가 ‘찾아간다’고 했다. 세아의 동네로. JYA 사무실이 아니라.

세아: 합정에 카페 하나 있는데 거기서 만나요.

카페 이름과 주소를 보냈다. 합정역 5번 출구에서 나오면 골목 안에 있는 곳이었다. 세아가 가끔 가는 곳이었다. 넓지 않고 시끄럽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골목이 보였다.

리우: 알겠습니다. 11시에 뵐게요.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오늘이 아니었다. 내일이었다. 오늘 하루가 남았다.

세아는 파일 두 개가 들어 있는 가방을 침대 아래에서 꺼냈다. 가방을 열었다. 파일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노트북을 켰다.


편의점 알바는 오후 세 시부터였다.

세아는 오전 내내 고시원 방에서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계약서 PDF들과 나란히 열어놓은 문서가 있었다. 세아가 직접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목은 없었다. 그냥 메모였다.

메모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들.

그 아래에 세아는 질문들을 적었다.

1. YSH 계약서에서 출처 표시 방법 변경 조항 — 이게 내 이름을 빼도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표기 방식만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인지.

2. 저작인격권 — 내가 이 곡들의 작곡자라는 것을 지금도 주장할 수 있는지. 이미 양도한 저작재산권과 별개로.

3. JYA 계약서 43페이지 — ‘갑의 해석을 우선으로 한다’는 조항이 구두 약속에도 적용되는지. 아니면 구두 약속은 별도로 효력이 있는지.

4. 전속 계약 기간 동안 독립 작곡 활동을 완전히 못 하는지, 아니면 JYA 동의 하에 가능한지.

5. 수익 배분 — 초기 2년 70:30에서 이후 어떻게 변하는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지.

세아는 그것들을 적으면서 생각했다. 이것들을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가. 박인철한테 물어보면 JYA 입장에서 대답할 것이었다. 강리우한테 물어보면 — 강리우가 어느 편인지 아직 모르겠다.

변호사가 필요했다.

세아의 편에 서 있는 변호사.

세아는 그것을 생각했다. 변호사 비용이 얼마인지 몰랐다. 상담 한 번에 얼마인지. 계속 맡기면 얼마인지. 세아의 통장 잔액은 지금 삼십팔만 원이었다. 이번 달 알바비가 들어오면 팔십만 원 정도가 될 것이었다. 어머니 약값이 이십만 원. 도현 교통비가 오만 원. 고시원 월세가 사십오만 원. 남는 것이 열만 원 남짓이었다.

변호사 상담 비용이 그 안에 들어올 수 있는가.

세아는 그것을 계산했다. 계산하다가 멈췄다.

핸드폰을 들었다. 검색창에 ‘음악 저작권 무료 법률 상담’이라고 쳤다.

결과가 나왔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 상담 전화. 법률구조공단 무료 상담.

세아는 그 결과들을 봤다.

무료 상담이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몰랐다. 이전에 찾아본 적이 없었다. 찾아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 왜냐하면 자신이 뭔가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잃은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세아는 한국저작권위원회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고 메모 파일에 다섯 번째 아래에 여섯 번째를 적었다.

6. 무료 상담 예약하기.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나온 것은 밤 열 시였다.

합정역 방향으로 걷다가 세아는 멈췄다. 클럽 ‘루프’ 앞이었다. 세아가 세션 보컬로 일하는 곳.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안에서 소리가 났다.

드럼 소리였다. 기타 소리.

세아는 그 소리를 들었다.

연습이었다. 세아가 모르는 밴드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드럼이 박자를 잡고 기타가 리프를 쳤다. 보컬이 없었다. 아직 보컬이 없는 밴드이거나, 오늘 연습에 보컬이 없는 것이거나.

세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서 있었다.

드럼의 박자가 세아의 어깨 박동과 겹쳤다. 타투 자리. 성냥 자리. 하나, 둘, 셋, 넷.

보컬이 없는 음악도 음악이다.

근데 보컬이 있으면 달라진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알기 때문에 이 일을 했다. 세션 보컬로, 작곡가로, 이름 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음악에 들어갔을 때 달라진다는 것을. 그 변화가 실재한다는 것을.

바람이 불었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겨울 바람이었다. 차가웠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 차가움을 느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늘이었다.

하늘: 야 어때. 오늘 하루.

세아는 클럽 소리를 들으면서 답장을 썼다.

세아: 메모 만들었어요. 법률 상담 찾았고. 내일 강리우 만나요.

하늘: ㅎㄷㄷ 나세아 진짜?

세아: 응.

하늘: 어깨는?

세아: 아직 아파요.

하늘: 잘했다 그 대답.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클럽 안에서 드럼이 멈췄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다른 박자였다. 이전 박자보다 빨랐다.

세아는 그 박자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그 박자 위에 멜로디가 올라왔다. 자동으로. 세아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왔다 — 언제나처럼.

세아는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녹음 앱을 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를 허밍으로 불렀다. 작게. 길에서 혼자.

클럽 드럼 소리와 세아의 허밍이 잠깐 섞였다.

세아는 그것을 녹음했다. 저장했다.

파일 이름을 붙였다.

합정_밤_허밍_1219.m4a

그리고 걸었다. 고시원 방향으로. 내일 강리우를 만날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고시원으로 돌아왔을 때 세아는 책상에 앉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서 메모 파일을 다시 열었다. 여섯 가지 질문이 화면에 있었다. 세아는 그것들을 읽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를 적었다.

7. 강리우는 내 편인가.

잠깐 생각했다. 지웠다.

다시 적었다.

7. 강리우가 이 계약을 왜 가져왔는지 — 그 이유를 물어본다.

이것이 더 정확한 질문이었다. 강리우가 내 편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보다, 강리우가 왜 이것을 가져왔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다. 그 이유를 알면 강리우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보일 수 있었다.

세아는 메모 파일을 닫았다.

노트북을 닫으려다 멈췄다.

새 파일을 열었다. 텅 빈 화면.

세아는 잠깐 그 화면을 봤다.

그리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가사가 아니었다. 악보도 아니었다. 코드 진행도 아니었다.

그냥 쓰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계약서를 읽었다. 전부. 처음으로. 열두 군데에 표시를 했고 여섯 가지 질문을 만들었다. 무료 법률 상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현이 내 멜로디로 오디션을 봤다. 하늘이가 ‘괜찮다고 하지 말고’라고 했다. 나는 오늘 어깨가 아프다고 말했다. 합정 길에서 혼자 허밍을 했다.

내일 강리우를 만난다.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두렵다. 계약서가 두렵다. 이름이 없는 것이 두렵다. 강리우가 내 음악을 진짜로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두렵다. 그것이 진심이 아닐 때의 기분이 두렵다. 진심일 때의 기분도 두렵다.

그런데 오늘 하루가 이전 하루들과 달랐다.

뭔가를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어쩌면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 가지를 하루에 전부 안 것은 처음이었다.

세아는 거기서 멈췄다.

더 쓰려다가 멈췄다.

충분했다. 오늘 하루로는 충분했다.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어깨가 뛰었다. 성냥이 있는 자리가.

세아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괜찮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 있었다 — 그 밤들에 세아는 항상 뭔가를 만들었다. 멜로디이거나 가사이거나 코드이거나. 오늘 밤은 만들지 않아도 됐다. 오늘 밤은 그냥 있어도 됐다.

잘 모르는 채로 있어도 됨.

누나가 다 알 필요 없잖아.

도현의 말이 들렸다.

세아는 그것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어깨의 박동이 느려졌다. 아니었다 — 세아가 그것에 익숙해졌다. 박동은 같은 속도였다. 세아가 달라진 것이었다.

그 박동이 심장 소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냥 자리에서 나는 심장 소리.

살아 있다는 소리.

세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내일을 기다렸다.

창밖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겨울 부츠 소리.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방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세아는 처음으로, 오랫동안 — 정말 오랫동안 — 잠이 들었다.

내일, 강리우는 계약서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져올 것이다.

세아는 아직 그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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