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8화: 강민준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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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화: 계약서 3페이지 7항

하늘이가 대답하기 전에 국밥집 할머니가 깍두기를 더 가져왔다.

작은 그릇이었다. 빨간 깍두기가 서너 조각.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세아는 그 손을 봤다. 오래 일한 손이었다. 손등에 주름이 많았다. 국물이 튀어 생긴 것인지 세월이 만든 것인지 모를 얼룩이 손목 아래에 있었다.

하늘이는 깍두기를 집었다. 천천히 씹었다. 대답을 미루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내가 JYA 로고 보면 치가 떨린다고 했잖아.”

세아는 기억했다. 하늘이가 한강에서 했던 말.

“그 이유가 있어.”

하늘이가 숟가락을 그릇 위에 걸쳐놨다. 젓가락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놨다. 뭔가를 말하기 전에 정리를 하는 행동이었다 — 물건이든 생각이든.

“내 친구가 있었어. 타투 배우기 전에. 같이 인디 밴드 했던 애. 기타리스트였는데. 곡도 썼어. 걔가 JYA 오디션 나갔다가.”

“나갔다가?”

“거기서 곡을 보여줬거든. 오디션 자료로. 그리고 탈락했어. 근데 그 다음 해에 JYA 신인이 그 곡 비슷한 거 냈어. 멜로디가 달랐는데 구조가 똑같았거든. 코드 진행이. 걔가 항의하러 갔을 때 박인철이가 나왔어.”

세아의 숟가락이 멈췄다.

“박인철이가 나왔어?”

“응. 그 변호사가 직접 나와서 얘기했어. 오디션 신청서에 서명한 거 있지 않냐고. 오디션 참가자는 제출 자료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고. 5포인트 글씨로 맨 아래에 박혀 있는 거. 걔가 그거 읽었겠어? 안 읽었지.”

국밥집 안에서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중년 남자 혼자였다. 할머니에게 “항상 먹던 거요”라고 말하고 카운터 옆 서서 먹는 자리에 섰다. 그가 가방을 내려놓을 때 지퍼 소리가 났다.

“걔는 어떻게 됐어.” 세아가 물었다.

“포기했어. 변호사 비용도 없었고. 소송해봤자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고. JYA가 큰데 거기 변호사한테 이기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걔한테 돈이 어딨어.” 하늘이가 잠깐 멈췄다. “지금 대전에서 편의점 하고 있어.”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목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국밥집의 낡은 창틀이 약간 흔들렸다. 할머니가 국물을 저을 때 쇠 국자가 냄비 벽에 부딪히는 소리.

“박인철이 JYA 변호사라는 거. 그래서 내가 알아.” 하늘이가 말했다. “그 변호사가 나한테는 친절했을 수도 있어. 나세아한테도 친절했을 거야. 근데 그 사람은 JYA 편이야. 항상. 그 사람이 가져온 계약서는 JYA를 위한 계약서야.”

세아는 깍두기를 집었다. 씹었다. 신맛이 났다. 잘 익은 깍두기였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 음식의 맛을. 아까 삼각김밥을 먹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고시원 가서 읽어야겠다.”

“지금 바로 가자.”

“밥 다 먹고.”

“그래. 밥 다 먹고.”

두 사람은 남은 국밥을 마저 먹었다. 할머니가 계산할 때 하늘이가 먼저 지갑을 꺼냈다. 세아가 말리려 했다.

“내가 낼게.”

“됐어. 내가 데려온 거잖아.” 하늘이가 계산했다. 두 그릇에 만이천 원이었다.

골목을 나오면서 세아는 어깨를 만졌다. 타투를 한 자리. 두꺼운 겨울 외투 아래였지만 그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쇄골 아래, 왼쪽. 성냥이 있는 자리.

바람이 불었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고시원 방에 불을 켰을 때, 세아는 가방에서 파일 두 개를 꺼냈다.

왼쪽 파일. 전속 계약서.

오른쪽 파일. 저작권 양도 합의서.

둘 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테이블은 작았다 — 노트북이 올라가면 거의 꽉 차는 크기. 파일 두 개를 나란히 놓으니 테이블이 가득 찼다.

하늘이가 방을 둘러봤다. 처음 오는 것이었다.

“좁다.”

“응.”

“그래도 깨끗하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를 하나 꺼내 하늘이한테 줬다. 자신은 침대 끝에 앉았다. 두 사람이 테이블을 마주 보는 구도였다.

“넌 어느 거 먼저 읽을 거야?”

세아는 왼쪽 파일을 집었다.

전속 계약서였다. 45페이지였다. 세아는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늘이는 조용히 있었다. 방 안에서 소리가 없었다 — 옆방에서 드라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누군가 싸우는 장면인 것 같았다.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세아는 읽었다.

두 번째 페이지. 세 번째 페이지.

계약 기간: 5년. 자동 갱신 조항 있음. 갱신 조건은 4페이지에 있었다. 세아는 4페이지를 읽었다.

“하늘.”

“응.”

“자동 갱신이 2회까지야. 총 15년이 돼.”

하늘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계속 읽어.”

저작권 관련 조항은 7페이지였다. 세아는 7페이지를 펼쳤다. 읽었다. 한 번 읽고, 다시 읽었다.

“하늘이가 말한 거.”

“응?”

“3페이지 7항.”

세아는 3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7항이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계약 기간 중 작성, 제작, 공표된 모든 음악 저작물의 저작재산권은 JYA 엔터테인먼트에 귀속된다.”

방이 조용해졌다.

옆방의 드라마 소리도 잠깐 멎은 것 같았다.

“모든 음악 저작물.” 하늘이가 말했다. “계약 기간 중에 만드는 거 전부.”

“응.”

“5년 동안 만드는 곡 전부가 JYA 거야. 자동 갱신되면 15년.”

세아는 그 조항을 다시 봤다. 글씨는 분명했다. 법률 용어가 섞여 있었지만 뜻은 분명했다. 세아가 5년 동안 쓰는 노래는 전부 JYA의 것이 된다. 세아의 목소리, 세아의 멜로디, 세아가 새벽 두 시에 잠을 못 자면서 뽑아낸 모든 것들이.

“그리고 이미 만든 것들은?”

세아는 오른쪽 파일을 집었다. 저작권 양도 합의서. 이것을 아직 제대로 읽지 않았다.

펼쳤다. 읽었다.

두 번째 페이지. 별첨 A. 세 곡의 제목.

그리고 그 아래.

세아는 그것을 읽었을 때 파일을 들고 있는 손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온도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 피부가 아니라 안에서.

“하늘.”

“응.”

“이미 발매된 세 곡에 대한 저작권. JYA가 인수하고, 원저작자를 나로 다시 등록한다고 나와 있어.”

“그게 조건이잖아.”

“근데 그 아래에. 3항에.”

세아가 읽었다.

“단, 원저작자 등록은 전속 계약 발효 이후에만 진행된다. 전속 계약 해지 시 원저작자 등록은 자동 취소되며, 저작재산권은 JYA에 귀속된다.”

하늘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문장 앞에서 침묵했다. 드라마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웃음 소리였다. 코미디 장면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이름을 돌려준다는 게.” 세아가 말했다. “계약이 살아있을 때만이야.”

“응.”

“계약 끝나면 다시 JYA 거야.”

“응.”

세아는 파일을 덮었다.

닫는 소리가 작게 났다. 종이가 겹쳐지는 소리. 세아는 그것을 덮어서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그냥 앉아 있었다.

“이건 선물이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응.”

“이름을 돌려준다는 게 선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름을 인질로 잡는 거야.”

하늘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아 옆에 와서 침대 끝에 같이 앉았다. 고시원 침대는 좁아서 두 사람이 앉으면 어깨가 붙었다.

“세아야.”

“응.”

“이거 사인하면 안 돼.”

세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뭔가 다른 것이 왔다. 확정되는 느낌. 선택지가 하나 없어지는 느낌.

“근데.” 세아가 말했다.

“근데?”

“이름이 돌아오면 어떨까 싶었어. 잠깐.”

하늘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Still Water 발매됐을 때. 내 이름이 없었잖아. 스트리밍에서 곡 찾으면 그냥 다른 사람 이름이 있어. 내가 어떤 날 밤에 만든 건지, 뭘 생각하면서 만든 건지. 그런 거 아무것도 없어. 근데 그 곡이 재생이 됐어. 스물만 번. 거기서 누군가 들으면서 댓글 달았어. 이 노래 들으면 왜 눈물 나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세아는 잠깐 멈췄다.

“그게 내 거라는 걸 내가 아는데.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하늘이가 세아의 어깨에 기댔다. 가볍게. 세아가 타투를 한 어깨가 아니라 반대쪽 어깨. 하늘이는 그것을 알고 기댄 것 같았다.

“알아.”

“그래서 잠깐. 그냥 사인할까 싶었어. 이름 하나 때문에.”

“그 이름이 5년이야. 15년이 될 수도 있어. 5년 동안 만드는 거 전부 JYA 거야. 세아야.”

세아는 천장을 봤다. 고시원 천장은 낮았다. 형광등이 하나 있었다. 깜빡거리지는 않았다 — 세아가 전구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이사 오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전구를 바꾸는 것이었다. 깜빡거리는 불빛 아래서는 곡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강리우는 알고 있었을까.”

그 말이 나왔을 때 세아 자신도 몰랐다 — 그것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이라는 것을.

하늘이가 몸을 일으켰다.

“뭐?”

“이 계약 조항들. 강리우가 알고 나한테 가져온 걸까.”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그날 밤 세아는 곡을 쓰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됐다. 세아가 항상 곡을 쓰는 시간. 하늘이는 아홉 시쯤 돌아갔다 — 내일 오전에 예약이 있다고 했다. 가면서 “밥 챙겨 먹어, 진짜로”라고 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조용했다.

세아는 노트북을 열었다. 작업 파일들이 있었다. 폴더 이름들이 나열됐다. 세아는 그것들을 봤다. 폴더 이름은 날짜가 아니라 감각으로 붙여놨다. 비 오는 날. 도현 목소리. 한강 밤. 엄마가 물에서 올라올 때. 어머니가 물에서 올라올 때의 숨비소리 — 그것을 기억하면서 만든 곡이 그 폴더에 있었다.

세아는 그 폴더를 클릭하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봤다.

계약서를 사인하면 이 폴더들도 JYA의 것이 된다. 비 오는 날도. 도현 목소리도. 한강 밤도. 엄마가 물에서 올라올 때도.

세아는 노트북을 닫았다.


다음 날 오전 열한 시에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세아는 편의점 알바가 있는 날이었다. 오후 한 시 출근. 아직 두 시간이 있었다.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나세아 씨?”

남자 목소리였다. 낮고 천천히 말하는 목소리.

“누구세요.”

“강민준입니다.”

세아는 잠깐 멈췄다.

강민준. JYA 엔터테인먼트 대표. 강리우의 아버지.

“네.”

“한 번 뵙고 싶어서요. 잠깐 시간 되시면.”

세아는 창문을 봤다. 반지하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오늘은 겨울 부츠들이 많았다. 춥다는 뜻이었다.

“언제요.”

“오늘 오후 어떠세요. 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오후에 일이 있어요.”

“몇 시부터세요?”

“한 시요.”

“그러면 지금은요. 지금 바로 만나면?”

세아는 시계를 봤다. 열한 시 사 분.

“어디서요.”

“청담동으로 오실 수 있으세요? JYA 건물 지하 카페가 있어요. 거기로.”

세아는 서울 지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합정에서 청담동까지. 지하철로 갈아타면 사십 분 정도. 지금 가면 열두 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야기하고 나오면 열두 시 반쯤. 편의점까지 뛰면 늦지 않을 수 있었다.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검은 화면에 세아의 얼굴이 흐릿하게 반사됐다.

왜 강민준이 직접 전화했을까. 박인철을 통해서 연락하지 않고.

세아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재킷을 집었다.


JYA 엔터테인먼트는 청담동 메인 거리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곳에 있었다.

건물이 유리로 됐다. 사층짜리였다. 화려하지 않았다 — 깔끔하고 차가웠다. JYA 로고가 유리 문 위에 있었다. 금속 재질이었다. 햇빛이 그것에 반사됐다.

세아는 건물 앞에서 잠깐 섰다.

하늘이가 이 로고를 보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세아는 지금 그것을 보면서 뭔가를 느끼는지 확인하려 했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유리 건물이었다. 그냥 금속 로고였다. 세아는 들어갔다.

로비에서 안내 직원에게 말했다. 강민준 대표님 약속이 있다고. 직원이 전화를 했다. 잠깐 기다렸다. 다른 직원이 나와서 세아를 안내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카페는 지하에 있었다.

일반 카페가 아니었다. 회사 내부 공간이었다. 직원들이 쓰는 것 같은 공간. 그러나 테이블이 좋았다. 조명이 낮았다. 커피 향이 진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리가 없었다.

강민준이 이미 앉아 있었다.

세아는 그를 처음 봤다.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었다. 오십 대 중반이었다. 키가 컸다 — 앉아 있어도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반백이었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수트 재킷이 정확하게 맞았다. 구겨진 곳이 없었다.

강리우와 닮았다.

그런데 달랐다. 강리우의 얼굴에는 뭔가 미완성된 것이 있었다 — 감추려는 것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 강민준의 얼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완성된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루어온 사람의 얼굴.

“나세아 씨.”

강민준이 일어났다. 악수를 건넸다. 손이 컸다. 악수가 짧고 정확했다.

“앉으세요.”

세아가 앉았다.

직원이 왔다. 강민준이 세아를 봤다.

“뭐 드시겠어요?”

“아메리카노요.”

직원이 사라졌다. 강민준은 자신의 커피를 — 이미 절반쯤 마신 것 같았다 — 천천히 들었다가 내려놨다.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계약서는 받으셨죠?”

“네.”

“읽어보셨고요.”

“읽었어요.”

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세요.”

세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어떠세요. 두 글자가 짧았지만 그 안에 든 것이 컸다. 세아는 어떻게 대답할지 잠깐 생각했다.

“질문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3페이지 7항이요.”

강민준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작권 귀속 조항이요.”

“네.”

“계약 기간 중 작성한 모든 음악 저작물이 JYA에 귀속된다고 나와 있는데요.”

“맞아요.”

“그러면 저는 5년 동안 내가 만드는 곡을 내 것으로 가질 수 없는 거예요.”

강민준이 잠깐 세아를 봤다.

“나세아 씨.”

“네.”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세아는 기다렸다.

“음악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세요? 지금 인디 씬에서 아무리 재능 있어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유통, 홍보, 법적 보호, 계약 — 그게 다 자본이에요. 나세아 씨 곡들이 좋은 거 알아요. 진짜로. 근데 그 좋은 곡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면 그게 무슨 의미예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JYA가 관리하면 달라져요. 제대로 된 스트리밍 계약, 해외 라이선스, 앨범 작업. 나세아 씨 이름이 — 진짜로 사람들한테 들릴 수 있어요. 지금처럼 크레딧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커피가 왔다. 세아는 그것을 집었다. 따뜻했다. 세아는 그 온기를 느꼈다 — 손바닥에.

“저작권이 JYA에 귀속되는 건 표준 전속 계약이에요. 업계 관행이에요. 나세아 씨만 그런 게 아니에요.”

“업계 관행이 맞다는 건 아니잖아요.”

강민준이 멈췄다.

세아가 말한 것이 예상 밖이었는지, 아니면 예상했지만 직접 나올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세아를 봤다.

“맞아요.” 그가 말했다. “관행이 옳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요.”

“그러면, 나세아 씨가 저한테 역제안을 할 수 있어요. 조항을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 있어요. 저도 고려해볼 수 있어요.”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역제안.

세아는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협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아의 인생에서 선택은 항상 — 받아들이거나, 포기하거나였다. 협상은 자신이 뭔가를 가지고 있을 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강민준이 여기까지 나왔다. 대표가 직접 전화했다. 박인철을 통하지 않고. 청담동 JYA 건물 지하 카페까지 세아를 불렀다.

그것은 세아가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볼게요.” 세아가 말했다.

“물론이에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강민준이 커피를 들었다. “근데 나세아 씨.”

“네.”

“한 가지만.”

“말씀하세요.”

“리우 얘기.”

세아의 손가락이 커피잔 위에서 멈췄다.

“리우가 나세아 씨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음악적으로든, 다른 의미로든.” 강민준이 말했다. “그 애가 어릴 때부터 어떤 아이였는지. 나는 알아요. 리우는 뭔가에 빠지면 그게 음악이든 사람이든 — 전부를 걸어요. 근데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나세아 씨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세아는 강민준을 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리우가 베를린에서 왜 돌아왔는지 알아요?”

세아는 몰랐다. 그것은 세아가 리우에게 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피아노를 그만뒀어요.” 강민준이 말했다. “베를린에서 연주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 무대에서 그냥 일어났어요. 연주를 못 하겠다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연주를 안 했어요.”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리우가 편의점 앞에서 피아노 얘기를 했을 때의 표정. 손을 주머니에 넣던 것. 손을 보여주지 않던 것.

“무대에서 일어난 게 — 그게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당시에 리우가 사귀던 사람이 있었어요. 같이 유학 간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리우 곡을 가져다가.”

강민준이 멈췄다.

“리우 이름으로 작업한 곡들이 그 사람 이름으로 등록됐어요. 베를린 음악 학교에서.”

세아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잠깐 걸렸다.

“리우가. 크레딧을 도용당한 거예요.”

“응.” 강민준이 처음으로 존댓말을 빠뜨렸다. 그것이 뭔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게 리우를 망가뜨렸어요. 그래서 귀국했어요. 그래서 피아노를 못 해요. 지금도.”

세아는 커피잔을 내려놨다.

창가가 없는 지하 공간이었다. 빛이 인공적이었다. 낮은 조명이 강민준의 얼굴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세아는 생각했다.

리우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하는가. 아버지가 아들의 가장 아픈 부분을 세아에게 왜 말하는가.

이것도 계산인가.

“강리우 씨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 거예요.”

강민준이 세아를 봤다.

“나세아 씨가 리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우가 나세아 씨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알아요. 그 애가 음악에 반응한 게 4년 만에 처음이에요. 그래서 제가 — 걱정돼요.”

“리우 씨가 걱정되세요?”

“둘 다 걱정돼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둘 다. 강민준이 세아를 걱정한다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리우에 대한 걱정은 — 그것은 진짜 같았다. 아버지의 목소리 안에 있는 것.

그것이 더 복잡했다.

“나세아 씨가 계약을 하면. 리우가 관여하지 않아요. A&R 팀에서 다른 사람이 담당해요.”

“왜요.”

“리우가 나세아 씨 담당을 하면 — 그 애한테 좋지 않아요. 4년 만에 음악에 반응했는데. 그게 사람한테 묶이면. 그 사람이 사라지면 다시 무너져요.”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리우가 사라지면.

강민준이 말하는 것은 — 세아가 계약을 하면 리우와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리우를 위한 것이라고. 그것이 나세아 씨를 위한 것이라고.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세아는 강민준의 얼굴을 봤다.

완성된 얼굴. 감출 것이 없는 얼굴. 그런데 세아는 알 수 없었다 — 그 완성된 얼굴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볼게요.” 세아가 말했다.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뜻이 달랐다.

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가 일어났다.

“나세아 씨.”

“네.”

“리우한테는 오늘 만난 거 말 안 해도 되어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것을 들은 자리에서 잠깐 섰다. 말 안 해도 된다는 것이 말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것을. 세아는 알았다.

“안녕히 계세요.”

세아가 나왔다.


지하 계단을 올라오면서 세아는 전화기를 꺼냈다.

카카오맵. 청담동 JYA 엔터테인먼트 → 마포구 편의점. 지하철 7호선 청담역 → 6호선 환승 → 합정역. 사십이 분.

열두 시 십 분이었다.

뛰어야 했다.

세아는 뛰었다. 청담역으로 가는 길에 겨울 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차갑고 날카로웠다. 눈이 시렸다. 세아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뛰었다.

강민준이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돌아갔다.

계약 기간 중 작성한 모든 저작물은 JYA에 귀속된다.

리우가 크레딧을 도용당했어요.

리우한테는 오늘 만난 거 말 안 해도 되어요.

세아는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철 입구. 교통카드를 댔다. 개찰구가 열렸다.

플랫폼에서 기다리면서 세아는 그 말들을 다시 생각했다.

강민준이 리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 리우가 베를린에서 크레딧을 도용당했다는 것. 그것이 리우를 망가뜨렸다는 것.

그것이 사실이라면 — 리우는 세아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음악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 자신의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

그런데 그 리우가. 지금 JYA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 회사에서. 아버지의 방식으로 음악 산업이 돌아가는 곳에서.

지하철이 들어왔다. 세아는 탔다.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지하철 안은 낮 시간이어서 비교적 한산했다. 맞은편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에어팟을 끼고 있었다. 무언가를 들으면서 입술이 약간 움직이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저 사람이 지금 무얼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저 사람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 누군가의 노래가 저 사람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저 사람은 알까. 크레딧에 있는 이름이 진짜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의 이름인지 저 사람은 알까.

세아는 창문에 기댔다.

지하철이 달렸다. 터널 안에서 어두워졌다가 역에서 밝아졌다가.

리우한테는 오늘 만난 거 말 안 해도 된다.

세아는 그것을 말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생각했다. 말하지 않으면 — 강민준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었다. 말하면 — 어떻게 될까.

리우가 어떻게 반응할까.

세아는 리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편의점 앞에서 서있던 모습. 그 멜로디, 2절에서 반음 올리면 더 아플 것 같은데요, 라고 처음 말했을 때의 표정.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던 것.

손이 떨린다고 했다. 피아노 앞에서.

그것이 진짜라면.

세아는 눈을 감았다.


편의점 알바는 오후 한 시부터 여섯 시까지였다.

세아는 열두 시 오십팔 분에 도착했다. 2분 남았다. 앞치마를 두르면서 숨을 고르는데 점장이 봤다.

“왔어요? 오늘 좀 힘들 것 같아요. 배달 많이 들어와서.”

“네.”

“밥은요?”

“먹었어요.”

점장이 세아를 봤다. 세아가 밥을 먹었다고 하면 항상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늘도 그 표정이었다. 세아는 앞치마를 매고 카운터로 갔다.

오후 내내 세아는 일했다.

손님이 들어오면 응대했다. 배달을 정리했다. 유통기한 검사를 했다. 카운터에서 서서 계산을 했다. 편의점 안에서 세아의 몸은 일을 했고 — 세아의 머릿속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강민준의 말. 리우의 베를린. 계약서 3페이지 7항.

네 시쯤에 카카오톡이 왔다.

도현이었다.

누나 밥 먹었어? (이모티콘 없이 물어보는 거임)

세아는 잠깐 웃었다. 카운터에서 혼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웃었다.

먹었어. 국밥.

오 진짜? 어디서?

홍대 골목.

ㄹㅇ? 맛있었어?

응.

잘됐다. 그리고 누나한테 할 말 있는데.

뭐.

전화로 하면 안 되고 직접 봐야 해. 이번 주말에 서울 올라갈 수 있어?

세아는 그 메시지를 봤다.

도현이 직접 보자는 것이 처음이었다. 도현은 항상 카톡으로 했다. 전화도 세아가 먼저 걸었다. 직접 보자는 것은 — 무언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 무슨 일인데.

ㅋㅋ 별거 아닌데 그냥 직접 보고 싶어서. 엄마도 누나 보고 싶다고 하더라.

엄마는 괜찮아?

응 요즘 좀 나아졌어. 약 잘 먹어서.

세아는 잠깐 서 있었다.

엄마가 나아졌다. 도현이 서울에 온다. 이번 주말이면 사흘 뒤였다.

응. 볼게.

ㅋㅋ 오케. 그리고 누나.

응.

강리우인가 걔. 인스타에 새 게시물 올렸던데. 피아노 사진.

응?

그냥 알려주는 거야. 찾아봐. 아 그리고 신고 안 할게 일단. 아직은.

세아는 카운터 뒤에서 잠깐 서 있다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피아노 사진.

손님이 들어왔다.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다섯 시가 넘었다. 저녁 시간이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편의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삼각김밥을 집어가는 손, 캔 맥주를 고르는 손, 도시락을 집어 드는 손. 세아는 그것들을 하나씩 계산했다.

여섯 시에 앞치마를 벗었다.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겨울 공기가 얼굴에 왔다. 세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강리우. 검색했다.

계정이 나왔다. 팔로워 팔십이만 명. 도현 말대로였다. 세아는 최근 게시물을 봤다.

피아노 사진이었다.

클로즈업 사진이었다. 건반 일부만 나왔다. 흑백이었다. 피아노 위에 손이 있었다 — 손가락이 건반 위에 올라가 있었지만 누르지 않고 있었다. 그냥 올려져 있었다. 누르기 직전인지, 누르다가 멈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캡션이 있었다.

영어로 써있었다.

not yet.

그뿐이었다.

세아는 그 사진을 봤다.

손이 건반 위에 있지만 누르지 않는 사진. not yet. 아직 아니야.

세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못 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할 준비가 됐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인지.

세아는 인스타그램을 닫았다. 카카오톡을 열었다. 강리우의 채팅방을 찾았다. 마지막 대화가 이틀 전이었다. 세아가 먼저 보낸 적이 없었다. 항상 리우가 먼저였다.

세아는 채팅창을 열었다.

오래 봤다.

그리고 입력창을 눌렀다.

강리우 씨.

보냈다.

잠깐 기다렸다. 답이 없었다. 세아는 다음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 오늘 강민준 대표님 만났어요.

보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합정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다. 세아는 그것을 손으로 치웠다.

왼쪽 어깨 쇄골 아래에 성냥이 있었다. 타투. 어젯밤 하늘이가 새겨준 것. 겨울 외투 아래, 피부 위에,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세아는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꺼냈다.

강리우였다.

지금 어디 있어요.

세아는 그 메시지를 봤다.

합정역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퇴근하는 사람들, 카페 들어가는 사람들, 편의점에서 나오는 사람들.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세아는 답을 입력했다.

합정이요.

보냈다.

리우의 답이 빠르게 왔다.

거기 있어요. 나 지금 가도 돼요?

세아는 그것을 읽었다.

강민준이 말했다. 리우한테는 오늘 만난 거 말 안 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세아는 알았다.

그리고 세아는 방금 먼저 말했다.

네. 와도 돼요.

보냈다.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람이 불었다. 합정역 방향으로 가는 길에 가로등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겨울 저녁이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이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지만 — 곧 어두워질 것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면서도 걷고 있었다.

리우가 온다.

강민준이 한 말들을 리우에게 전할 것이었다. 계약서 3페이지 7항도. 이름을 인질로 잡는 구조도. 그리고 — 베를린에서 있었던 일도. 당신 아버지가 나한테 말해줬어요, 라고.

그것이 리우를 어떻게 할지 세아는 몰랐다.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화나게 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데도 말하기로 했다.

왜인지 — 그것도 세아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강민준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겠다는 것.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리우가 베를린에서 크레딧을 도용당했다면.

리우는 세아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 세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합정역이 보였다.

세아는 역 입구 앞에서 멈췄다. 리우를 어디서 만날지 생각했다. 고시원은 아니었다 — 너무 좁았다. 카페는 — 사람이 많았다.

한강이 있었다.

세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한강으로 와요. 합정역 1번 출구에서 나와서 한강공원 방향으로 오면 돼요.

보냈다.

그리고 한강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겨울 한강은 추웠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갔다. 어머니가 물속에서 올라올 때 세아는 항상 숨을 참았다. 올라올 때까지.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숨을 참고.

이번에는 숨을 참지 않을 것이었다.

리우가 올 때까지 — 세아는 한강 난간 앞에 서서 기다릴 것이었다. 숨을 쉬면서.

바람이 강 쪽에서 불어왔다. 강물 냄새가 났다. 겨울 물의 냄새. 차갑고 깊고 어두운 냄새. 세아는 그것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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