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79화: 불이 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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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9화: 불이 꺼지기 전에

밤 열시 삼십분. 세아는 여전히 한강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늘이는 옆에서 폰을 보고 있었는데, 그 화면의 불빛이 하늘이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세아는 하늘이의 프로필 사진을 봤다. 타투 샵의 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모두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세아는 그것을 생각했다. 모든 웃음은 결국 멈춘다. 모든 불은 결국 꺼진다.

“도현이가 또 문자했어.”

하늘이가 말했다. 스크린을 내리면서.

“뭐라고?”

세아가 물었다.

“’누나 병원 와. 엄마가 계속 너를 찾고 있어. 제발.’”

하늘이가 읽었다.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엄마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 그것은 엄마가 깼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는 깼다. 엄마는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목소리에 대해 뭔가 말했다. 세아는 그 순간을 회피하고 싶었다. 병원을 떠났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가야 해.”

하늘이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라 선언.

“응.”

세아가 대답했다.

둘 다 일어섰다. 한강 공원의 밤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무언가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 일어나기 직전의 침묵처럼. 세아는 한강을 한 번 더 봤다. 물은 여전히 검었고, 그 위에 떨어진 불빛들은 여전히 눈물처럼 보였다.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는 중년의 남성이었고, 라디오에서는 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경제 뉴스. 주식. 환율. 세상의 모든 숫자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이 흘러갔다. 강남. 강북. 강동. 이 도시의 모든 지역이 마치 같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올림픽공원역 근처인가요?”

운전기사가 물었다.

“응. 서울대병원.”

하늘이가 대답했다.

운전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라디오에 집중했다. 세아는 옆에 앉은 하늘이를 봤다. 하늘이의 얼굴은 심각했다. 마치 하늘이가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는 것처럼. 세아가 엄마와 얘기했을 때, 엄마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너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완전히 말해 봐.”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이미 말했잖아.”

세아가 말했다.

“아니야. 너는 반만 말했어. 너는 항상 반만 말해. 나머지는 자신 안에 가둬둬. 그런데 난 알아. 넌 항상 그래. 중요한 것일수록 더.”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침묵했다. 하늘이의 말이 맞았다. 세아는 항상 반만 말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 안에 숨겨둔다. 마치 그것을 말하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마치 침묵 속에 있으면 그것이 아직 가능성일 것 같아서.

“엄마가 말했어. 아빠가 자신의 목소리를 두려워했다고. 그리고… 그 목소리가 뭔가를 했다고.”

세아가 천천히 말했다.

“뭔가를 했다?”

하늘이가 반복했다.

“응. 정확히는 모르겠어. 엄마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 말투에서 뭔가… 두려움이 있었어. 마치 엄마가 뭔가 위험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

세아가 말했다.

택시가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밤 열시 사십오분. 늦은 밤이지만 여전히 차들이 흘러갔다. 서울은 밤도 낮처럼 움직인다. 이 도시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마치 이 도시도 불을 켠 채로 계속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너 혹시… 뭔가 할 수 있다는 거야? 목소리로.”

하늘이가 물었다.

“뭘?”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뭔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든지. 뭔가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생각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말이 되는가. 세아의 목소리는 그저 목소리일 뿐이다. Club Underscore에서 부르던 노래. 누군가의 곡을 부르는 목소리. 하지만 하늘이가 말한 것이 맞다면. 만약 자신의 목소리가 정말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버지가 두려워한 이유도 이해가 된다.

“Club Underscore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하늘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너 그날 노래했어. 그리고 난… 정말로 신기했어. 마치 넌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영혼을 건드리는 것 같았어. 너는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울고 있었어. 이해가 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날을 기억했다. 2년 전. 홍대의 작은 클럽. 파란 네온 불빛. 누군가의 생일 파티. 세아는 그저 세션 보컬로 일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늘이가 말한 것이 맞다. 그 날 세아를 보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었다. 마치 세아의 노래가 그들을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처럼. 마치 세아의 목소리가 그들의 가슴을 열어버리는 것처럼.

“난 특별하지 않아.”

세아가 말했다.

“너는 특별해. 넌 모르겠지만, 넌 정말로 특별해. 그리고 그 특별함 때문에 누군가는 너를 두려워했을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택시가 올림픽공원역을 지났다. 병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아의 심장이 빨라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마음을 앞서 반응하는 것처럼. 손가락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항상 떨렸다. 하지만 이 떨림은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공포와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는 떨림. 마치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체의 떨림.

“세아.”

하늘이가 세아의 이름을 불렀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너 혼자 하지 마. 알겠지?”

하늘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항상 혼자 했다. 혼자 노래했고, 혼자 고민했고, 혼자 타올랐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세아는 모른다. 또는 모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혼자여야 자신의 불이 누군가를 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택시가 병원 입구에 멈췄다. 밤 열시 오십분. 병원은 여전히 밝았다. 응급실 불빛. 중환자실 불빛. 모든 불들이 켜져 있었다. 마치 이 건물이 밤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이 건물이 스스로도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세아와 하늘이는 내렸다. 하늘이가 택시 요금을 냈다. 그리고 둘은 병원으로 걸어갔다. 자동문이 열렸다. 병원의 냄새. 소독약.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죽음.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냄새가 세아를 맞이했다.

“5층이래.”

하늘이가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엘리베이터 안. 거울 벽. 세아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 자신이 얼마나 창백해 보였는지. 자신의 눈이 얼마나 공허해 보였는지. 마치 자신이 이미 누군가의 그림자인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불이 꺼진 상태인 것처럼.

“너 병원 와서 엄마 얘기 들었을 때 뭐했어?”

하늘이가 물었다.

“그냥 들었어.”

세아가 대답했다.

“듣기만 했어?”

하늘이가 반복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1층. 2층. 3층. 4층. 5층에 도착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향해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어딘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상태로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5층의 복도. 형광등 불빛. 병실 번호들. 505. 506. 507. 세아는 번호를 따라갔다. 하늘이는 세아 옆에 있었다. 마치 세아가 무너질까봐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510번 병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세아는 안을 봤다. 침대. 침대 위의 사람. 엄마. 엄마는 자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는 도현이가 앉아 있었다. 도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도현이 자신도 병에 걸린 것처럼.

“누나!”

도현이가 세아를 봤을 때 외쳤다.

엄마의 눈이 떠졌다. 천천히.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엄마의 눈이 세아를 찾았다. 그리고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세아.”

엄마가 말했다. 한 단어. 세아의 이름. 하지만 그 한 단어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엄마의 두려움. 엄마의 후회. 엄마의 사랑. 그리고 엄마의 죄책감.

세아는 침대로 걸어갔다. 천천히. 마치 자신이 이 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면, 자신이 이 순간 이후를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의 발은 계속 움직였다. 자신의 신체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는 항상 먼저 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세아는 침대 옆에 앉았다. 엄마와의 거리. 한 팔 정도.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하지만 세아는 손을 뻗지 않았다.

“미안해.”

엄마가 말했다.

“뭐가?”

세아가 물었다. 자신도 모르는 목소리로.

“모든 게. 너한테 말해야 했던 것들. 너한테 숨겼던 것들.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리고?”

세아가 물었다.

엄마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어졌다. 세아는 엄마를 봤다. 엄마의 얼굴. 얼마나 많은 주름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피로가 담겨 있는지. 세아는 엄마의 손을 봤다. 해녀의 손. 바다에서 일한 손. 그 손이 이제 백색증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그 손도 자신을 떠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너를 지켜내지 못했어. 너를 보호하지 못했어. 너를 누군가의 딸이 아닌, 그냥 너로서 지켜내지 못했어.”

엄마가 말했다.

세아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약해지고 있는 손. 하지만 여전히 강한 손. 해녀의 손. 세아는 그 손을 잡고 있으면 자신도 깊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 아빠에 대해서.”

세아가 물었다.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지금은 그냥 나를 봐줄래? 그냥… 너의 엄마로서.”

엄마가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도현이는 여전히 침대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하늘이는 문 옆에 서 있었다. 모두 침묵했다.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침묵. 모두가 같은 불을 보고 있는 침묵.

밤 열한시 십분.

병실의 형광등이 계속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이 엄마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세아는 엄마를 봤다. 정말로 봤다. 처음으로. 마치 엄마를 그림으로 남기려고 하는 것처럼. 왜냐하면 세아는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 순간 이후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그리고 이 불빛이 언제까지 켜져 있을지.

“세아야.”

엄마가 다시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넌 계속 불태우지 마. 알겠지?”

엄마가 말했다.

그 말은 하늘이가 한강 공원에서 한 말과 비슷했다. 넌 계속 불태우고 있어. 하지만 엄마의 말은 달랐다. 엄마의 말에는 명령이 있었다. 계속 불태우지 마. 멈춰. 이제는 멈춰.

“응.”

세아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세아는 정말로 멈추고 싶었다.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아도 모르는 것 중에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힘. 자신의 존재. 그것이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계속 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병실에는 여전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이해와 동정이 담긴 침묵. 그리고 무엇보다 — 무엇도 바뀔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침묵.

밤은 계속되었다. 형광등은 계속 켜져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 그리고?

“그리고?”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답변을 재촉하는 목소리. 병실의 형광등 아래서 그 두 글자는 공기를 가르며 엄마에게 전해졌다.

엄마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어졌다. 5초. 10초. 20초. 시간이 진주 같은 침묵으로 변해갔다. 세아는 엄마를 봤다. 정확히는 엄마의 얼굴을 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주름이 생겼을까? 이마의 깊은 골짜기들. 눈가의 미세한 선들. 입가의 쓸쓸한 흔적들. 그것들이 모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해녀의 인생. 바다의 소금이 파고든 세월의 흔적들.

하지만 더욱 세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엄마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 속의 무언가. 마치 물속에서 산소가 떨어지는 순간의 그것. 절박함. 두려움. 그리고 깊은 죄책감.

세아는 엄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녀의 손. 몇십 년을 바다에서 일한 손. 깊고 검게 그을린 피부. 굳은살이 앉은 손가락들. 그런데 최근에 그 손에 변화가 생겼다. 하얀 반점들. 백색증. 마치 그 손도 자신을 떠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엄마의 신체가 천천히 엄마를 버리고 있는 것처럼.

병실의 형광등이 그 손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너를 지켜내지 못했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떨리는 목소리.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오는 소리 같은. 세아는 엄마의 입술을 봤다. 그 입술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너를 보호하지 못했어.”

엄마가 계속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 침대 옆의 생리식염수가 떨어지는 소리.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삼켰다.

“너를 누군가의 딸이 아닌, 그냥 너로서 지켜내지 못했어.”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다웠다. 고해성사 같은 침묵. 속죄의 침묵.

세아의 눈물이 흘렀다. 언제부터 흘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분노. 이해. 용서. 그리고 깊은, 깊은 사랑.

세아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약해지고 있는 손. 하지만 여전히 강한 손. 해녀의 손. 세아는 그 손을 잡는 순간, 자신도 깊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엄마의 손이 자신에게 산소를 불어넣는 것처럼. 마치 그 손이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처럼.

“엄마가 뭐라고 했어?”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는 더 이상 추궁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를 구하는 목소리였다.

“아빠에 대해서?”

병실은 조용했다. 도현이는 침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하늘이는 문 옆에 서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경계인 그 자리에서. 그도 이 순간을 존중하려고 하는 것처럼.

엄마의 손이 더 세게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가 더 약해졌다. 마치 물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작고 부드러웠다.

“지금은… 지금은 그냥 나를 봐줄래?”

세아는 엄마의 얼굴을 봤다. 엄마의 눈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냥… 너의 엄마로서.”

그 말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었을까? 엄마도 모르는 소리들. 엄마가 평생 누르고 있던 것들. 딸이 아닌 아내로, 아내가 아닌 해녀로, 해녀가 아닌 어떤 다른 누군가로만 살아온 인생. 그 모든 것이 이 몇 마디의 말에 응축되어 있었다.

“그냥… 너의 엄마로서.”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마치 그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행동인지 아는 것처럼.

그리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의 손을 놓지 않고.

도현이는 여전히 침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이 굳어 있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하지만 그의 눈은 계속 움직였다. 엄마를 본다. 세아를 본다. 이 장면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눈.

하늘이는 여전히 문 옆에 서 있었다. 손이 자신의 옷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들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 근처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도 이 순간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그도 이 침묵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해하고 있었다.

모두 침묵했다.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침묵. 모두가 같은 불을 보고 있는 침묵. 마치 깊은 물 속에서 함께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밤 열한시 십분.

병실의 형광등이 계속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이 엄마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노란 불빛이 엄마의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고, 눈의 충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세아는 엄마를 봤다. 정말로 봤다. 처음으로 정말로.

마치 엄마를 그림으로 남기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엄마의 이 모습을 영원히 보관하려고 하는 것처럼.

왜냐하면 세아는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 순간이 얼마나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인지. 이 순간 이후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엄마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질 것인지. 엄마의 손이 더욱 약해질 것인지. 그리고 이 병실의 형광등이 언제까지 켜져 있을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세아야.”

엄마가 다시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넌 계속 불태우지 마. 알겠지?”

엄마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죽어가는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도 바다에 나가는 해녀의 목소리였다. 아직도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넌 계속 불태우지 마.”

엄마가 다시 말했다. 마치 세아가 듣지 못한 것 같이. 마치 이 말이 가장 중요한 말인 것처럼.

그 말은 하늘이가 한강 공원에서 한 말과 비슷했다. ‘넌 계속 불태우고 있어.’ 하늘이의 목소리. 그 날의 바람. 그 날의 한강의 냄새. 그 모든 것이 세아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달랐다.

엄마의 말에는 명령이 있었다. 분명하고,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명령.

‘계속 불태우지 마. 멈춰. 이제는 멈춰.’

그것은 죽음 앞에서의 최후의 명령이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세아는 정말로 멈추고 싶었다. 이 순간에, 엄마의 손을 잡으면서, 이 침묵 속에서, 세아는 정말로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아도 모르는 것 중에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힘. 자신의 존재. 자신을 누군가의 딸로만 본 세상에 대한 분노. 자신을 누군가의 아내로만 본 세상에 대한 분노. 자신을 누군가의 엄마로만 본 세상에 대한 분노.

그것이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계속 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세아는 엄마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손가락이 엄마의 손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병실에는 여전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이해와 동정이 담긴 침묵. 그리고 무엇보다 — 무엇도 바뀔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침묵. 엄마는 죽을 것이고, 세아는 계속 불태울 것이고, 하늘이는 계속 걱정할 것이고, 도현이는 계속 그 중간에서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었다.

병실의 형광등이 계속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이 엄마의 얼굴을 계속 비추고 있었다. 밤은 계속되었다. 새벽까지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깊은 물 속의 불처럼.

꺼질 수 없는 불처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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