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6화: 전화 너머의 침묵
하늘이의 목소리는 세아의 귓가에 들어왔지만,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강의 물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르고 있었다. 밤 여덟 시의 한강은 낮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불빛이 물에 부서지고, 다시 모여지고, 흩어졌다. 세아는 그 과정을 반복해서 봤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도 그렇게 계속 부서지고 있는 것처럼.
“세아?”
하늘이가 다시 불렀다.
“응.”
세아가 겨우 말했다. 한 음절. 호흡 같은 것. 말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소리.
“뭐야, 목소리가 이상한데. 괜찮아?”
하늘이가 물었다. 언제나 그렇게 물었다. 세아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하늘이는 즉시 눈치챘다. 마치 하늘이가 자신의 영혼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마치 하늘이만이 세아를 정말로 아는 사람인 것처럼.
그런데 이제 알았다. 아무도 세아를 모른다는 것을. 세아 자신도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너 지금 어디야?”
하늘이가 계속 물었다. 질문의 폭주. 마치 세아가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한강 공원.”
세아가 대답했다.
“혼자?”
하늘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침묵이 전화 선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아는 그 침묵을 필요로 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군가 자신을 설명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시간.
“내가 지금 가도 돼?”
하늘이가 물었다. 명령이 아니라 물음. 하지만 그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하늘이는 이미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세아가 대답하지 않아도 하늘이는 올 것이다. 그것이 하늘이였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세아는 폰을 내려놨다. 한강의 바람이 세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서울의 밤공기. 매연과 누군가의 향수와 한강의 습기가 섞여 있었다. 세아는 그 냄새를 마셨다. 깊게. 마치 자신이 이 도시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자신은 이 도시에 속해 있지 않았다. 자신은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제주도 아니고, 서울도 아니고,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가족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도현이가 또 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아는 확인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할까. 자신이 한강 공원에 앉아 있다는 것? 자신이 엄마가 병원에 있는데도 왜 여기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벤치 옆에 버려진 커피 컵이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누군가 여기 앉아서 무언가를 마시고 간 것이다. 그 사람은 이제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를 만나러 갔을까. 아니면 혼자 걸어가고 있을까.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까. 그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까.
세아의 손이 떨렸다. 아니, 항상 떨렸다. 하지만 지금 그 떨림이 더욱 심했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정신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손가락들이 자신의 뇌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너는 누구인가. 넌 정말로 존재하는가.
폰의 화면이 켜졌다. 문자 메시지. 강리우였다.
“누나. 엄마한테서 들었어. 나 미안해. 정말로. 내가 어떤 의도로 너한테 다가갔든,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고 싶어. 넌 정말로 특별해. 넌 정말로 누군가가 되어야 해.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넌 그냥 너이기 때문이야.”
세아는 문자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그 단어들이 계속 변할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읽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바뀔 것처럼.
특별하다고.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라고.
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지 않은 웃음. 마치 자신도 그것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 한강의 밤은 조용했지만, 세아의 웃음은 그것을 깨뜨렸다. 마치 누군가의 비명 같은 웃음.
강리우가 자신을 찾아다닌 이유. 강리우가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 이제 알았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오빠의 누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피의 부름이었다. 혈연의 집착이었다.
하지만 강리우가 마지막에 보낸 말은 어땠는가. 그것은 혈연을 벗어난 말이었다. 그것은 순수하게 세아라는 인간을 보는 말이었다.
세아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신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강미준의 딸이 아닌 누군가의 얼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자신의 얼굴은 자신의 아버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워질 수 없었다.
강미준. 그 이름이 자신의 가슴에 박혔다. 마치 못처럼. 영원히 뽑을 수 없는 못처럼.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한강 공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친 호흡. 빠른 발걸음. 세아는 얼굴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하늘이의 윤곽이 보였다. 타투 가득한 팔. 오버사이즈 후드. 세아에게 달려오는 하늘이.
하늘이는 세아 옆에 앉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았다. 마치 말을 하는 것이 이 순간을 오염시킬 것 같은 느낌으로.
“엄마가 뭔가 말했어.”
세아가 처음으로 말했다.
하늘이가 기다렸다. 더 많은 말이 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강미준이… 내 아버지예요.”
세아가 말했다. 존댓말로. 마치 자신이 누군가에게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것처럼. 마치 이것이 뉴스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강리우는… 내 오빠예요.”
세아가 계속했다.
하늘이가 손을 내밀었다.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타투 바늘이 닿은 손. 그 손이 세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 알았어.”
하늘이가 말했다.
“알았다고?”
세아가 물었다.
“응. 알았어. 그리고?”
하늘이가 물었다. 마치 이것이 중요한 정보도 아닌 것처럼. 마치 세아가 자신이 초콜릿을 먹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그리고 뭐… 나는 누구예요?”
세아가 물었다.
하늘이가 세아의 얼굴을 봤다. 밤의 불빛 속에서. 한강의 불이 하늘이의 눈에 반사됐다. 마치 하늘이가 자신의 영혼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너는 나세아야. 내 친구야.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까칠한 여자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울음도 섞인 웃음이었지만, 그것은 웃음이었다.
“근데 정말로 강미준이 너 아버지예?”
하늘이가 물었다. 이제는 호기심으로.
“응.”
세아가 대답했다.
“씨… 그럼 JYA 엔터테인먼트는?”
하늘이가 물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너는?”
하늘이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뭐가 되어야 하는 건지. 뭐가 바뀌는 건지. 엄마는 뭐가 달라진 거 없다고 했지만… 모든 게 달라진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세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 너는 여전히 너야. 그리고 나는 여전히 너한테서 떠나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누구든, 오빠가 누구든. 너는 그냥 나세아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하늘이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의 혈액이 바뀌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하늘이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도현이한테 전화해야 해.”
세아가 말했다.
“응. 하지만 먼저 너를 데려갈 데가 있어.”
하늘이가 말했다.
“어디?”
세아가 물었다.
“카페. 너 밥 안 먹었지? 손 봐봐, 차가워.”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정말로 차가웠다. 마치 자신이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영혼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처럼.
하늘이와 세아는 한강 공원을 떠났다. 밤 여덟 시 반. 서울의 밤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사랑은 여기서 시작되고, 누군가의 사랑은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한강은 계속 흘렀다.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계속 변하고 있는 물처럼.
카페는 홍대 근처였다. 밤 아홉 시에도 열어 있는 작은 카페. 하늘이가 자주 가는 곳이었다. 세아는 여기 와본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최근의 기억들이 모두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뇌를 물에 빠뜨린 것처럼.
바리스타는 하늘이를 알아봤다.
“어서오세요, 하늘이 손님. 오늘도 아메리카노?”
바리스타가 물었다.
“응. 그리고 이건… 뭐 먹을 거 있어?”
하늘이가 세아에게 물었다.
세아는 메뉴판을 봤다. 글자들이 떨렸다. 마치 자신의 눈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현실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거나.”
세아가 말했다.
“치즈케이크 하나요.”
하늘이가 바리스타에게 말했다.
그들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밖으로는 홍대의 밤거리가 보였다. 클럽에서 나오는 사람들. 술에 취한 젊은이들. 누군가의 웃음소리. 누군가의 울음소리. 밤의 홍대는 낮의 홍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다른 세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리우가 좋았어?”
하늘이가 물었다. 갑자기.
“뭐?”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 너 그 사람이 좋았어? 정말로?”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 의존? 혈연의 부름? 그것들의 혼합?
“난 물어본 거 아니고… 너를 위해 말하는 거야. 넌 그 사람을 위해 너 자신을 태워버렸어. 알아?”
하늘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태웠는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이제 그만해. 너는 그 사람의 누나가 아니라, 그냥 너야. 알았어?”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이미 누군가의 누나였다. 그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혈액 속에 섞여 있었다.
커피가 도착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세아는 그 김을 봤다. 마치 자신의 영혼도 그렇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엄마를 봐야 해.”
세아가 말했다.
“응. 근데 먼저 좀 쉬어. 너 지금 상태가…”
하늘이가 말했다. 하지만 완성하지 않았다. 마치 세아의 상태를 설명할 단어가 없는 것처럼.
“상태가 뭐?”
세아가 물었다.
“위험해.”
하늘이가 대답했다. 매우 조용히. 마치 이 말을 말하는 것이 저주를 걸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떨렸다. 아니, 항상 떨렸다. 하지만 지금 그 떨림이 더욱 심했다. 마치 자신의 손가락들이 자신의 이름을 쓰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치즈케이크가 도착했다. 세아는 포크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포크가 흔들렸다. 세아는 포크를 내려놨다.
“못 먹어?”
하늘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하늘이는 포크를 들었다. 세아의 입 근처로 가져다 주었다. 마치 세아가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세아가 자신을 돌볼 수 없는 것처럼.
세아는 입을 벌렸다. 치즈케이크의 맛. 달콤하고 신맛이 섞여 있었다. 마치 세아의 입 안이 감각을 다시 깨우고 있는 것처럼.
“좋아?”
하늘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밖으로는 홍대의 밤이 계속 흘렀다.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비명. 누군가의 사랑과 이별. 하지만 여기, 이 작은 카페 안에서는 오직 세아와 하늘이뿐이었다.
폰이 울렸다. 도현이였다. 세아는 이번에 받았다.
“누나! 어디야? 엄마가 너를 자꾸만 찾아.”
도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로 울고 있었다.
“지금 가. 나 가고 있어.”
세아가 말했다.
“응. 그리고… 엄마가 아버지 이야기했어?”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전화를 끊었다. 하늘이가 세아를 봤다. 마치 세아가 깨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자.”
하늘이가 말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왔다. 밤 아홉 시 반. 병원으로 가는 길. 하늘이가 세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도망치지 않을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강미준의 딸인지, 강리우의 누나인지, 아니면 단지 나세아인지.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하늘이의 손의 온기만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 도현이가 로비에 서 있었다. 피곤한 얼굴. 겁먹은 눈빛. 세아의 남동생. 자신의 혈연. 하지만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
“누나!”
도현이가 세아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세아는 그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자신은 도현이의 누나였다. 강미준의 딸이 아니라. 강리우의 누나가 아니라. 단지 도현이의 누나였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END OF CHAPTER 176
# 176장 – 확장판
## 떨림
세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항상 떨리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시작된 이 떨림은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을 배반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떨림이 유독 심했다.
세아는 손가락을 꾹 눌러봤다.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손가락들이 자신의 이름을 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마치 그들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자꾸만 떠올랐다. 강미준의 딸? 강리우의 누나? 아니면 단순히 나세아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인간? 그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카페의 조명이 따뜻했다. 홍대 골목 깊숙이 숨어 있는 작은 카페. 벽에는 누군가의 그림이 붙어 있었고, 카운터 옆에는 핸드드립 커피의 향이 언제나 떠다니고 있었다. 세아는 이 카페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자신이 누구여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는 이미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 액체가 하얀 컵에 담겨 있었고, 김이 피어올랐다. 하늘이의 얼굴은 창밖의 불빛 때문에 반쯤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세아는 그런 하늘이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자신의 불행을 동정하고 있는 걸까.
“치즈케이크 나왔습니다.”
웨이터가 하얀 접시를 세아 앞에 놨다. 치즈케이크는 그림처럼 예뻤다. 황금색의 베이스 위에 부드러운 크림 같은 치즈가 올려져 있었고, 딸기 소스가 카라멜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래 이런 음식은 맛있어야 했다. 원래라면.
세아는 포크를 들었다. 손가락들이 떨렸다. 포크의 끝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마치 펜을 들고 있지만 쓸 말이 없는 학생처럼. 세아는 한숨을 쉬고 포크를 내려놨다.
“못 먹어?”
하늘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있었다. 항상 그랬다. 하늘이는 세아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했다. 호흡의 깊이, 눈동자의 흔들림, 손의 떨림까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응.”
세아가 대답했다. 짧은 대답. 왜냐하면 긴 대답을 할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크를 들고. 그리고 그것을 세아의 입 근처로 가져다놨다. 치즈케이크의 한 조각이 포크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먹어봐.”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세아가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세아가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원래라면 세아는 이 상황에서 화를 냈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입을 벌렸다.
달콤함이 혀 위에 퍼졌다. 신맛도 함께 흘러들었다. 치즈의 부드러움과 크래커의 바삭함이 입안에서 섞였다. 마치 세아의 입 안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감각을 다시 깨우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몸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처럼.
“좋아?”
하늘이가 물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
그들은 침묵 속에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하늘이는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셨고, 세아는 하늘이가 떠먹여주는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이것이 그들의 관계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소통하는. 눈빛으로 감정을 전하는.
밖으로는 홍대의 밤이 계속 흘렀다.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활기찼다. 누군가는 크게 웃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지나갔고, 다른 커플은 다투며 헤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사랑과 누군가의 이별. 누군가의 설렘과 누군가의 절망. 그 모든 것이 밤의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이 작은 카페 안에서는 오직 세아와 하늘이뿐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있었지만, 세아의 세계에는 없었다. 그들의 세계는 이 테이블에만 존재했다. 두 개의 컵, 한 개의 접시, 그리고 두 사람의 손.
세아는 하늘이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가락들은 떨리지 않았다. 강하고 안정적이었다. 세아는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들이 왜 떨리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이 하늘이의 손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하늘이의 마음처럼 안정적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도현이”라는 이름이 떴다. 세아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하늘이는 세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누나! 어디야? 엄마가 너를 자꾸만 찾아.”
도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로 울고 있었다. 목이 메어 있었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가. 나 가고 있어.”
세아가 말했다. 거짓이었다. 세아는 아직 가고 싶지 않았다. 이 카페에, 하늘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도현이의 목소리는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응. 그리고… 엄마가 아버지 이야기했어?”
도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예상할 수 없는 뉴스, 가족의 균열, 세아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흔들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 수 없었다. 만약 입을 열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신 세아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끊겼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페 안의 배경음악이 더 크게 들렸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세아의 세계에는 오직 자신의 심장소리만 있었다.
하늘이가 세아를 봤다. 그의 눈빛은 깊었다. 마치 세아가 깨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자.”
하늘이가 말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제안이었다. 아니, 초대였다. 자신과 함께 그곳으로 가자는 초대.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하늘이가 계산을 했다. 카페를 나갔다.
—
밤 아홉 시 반. 서울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에게는 모든 것이 흑백 사진 같았다.
병원으로 가는 길. 그것은 세아가 가고 싶지 않던 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그 길의 끝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목소리들이 있었으니까.
하늘이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안정적이었다. 마치 세아가 도망치지 않을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아니, 마치 세아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손을 꽉 잡았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과 함께였다. 강미준의 딸이 아니라면? 강리우의 누나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란 말인가?
길을 걸으며 세아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다. 어린 시절, 자신은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안아줬고, 어머니는 자신의 입맛에 맞춰 밥을 해줬다. 도현이는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세계였다.
하지만 정상은 언제나 깨진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비밀들은 언제나 터진다.
“뭐 생각해?”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하늘이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아가 거짓말했다. 하지만 하늘이는 그 거짓말을 받아줬다.
—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 도현이가 로비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했다. 밤샘이 계속된 것 같았다. 눈가에는 검은 자국이 있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없었다.
겁먹은 눈빛. 그것이 세아가 가장 먼저 읽은 감정이었다. 도현이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누나가 올 때까지 엄마를 혼자 돌봐야 한다는 무서움이 아니라. 무언가 더 큰 것에 대한 무서움이었다.
세아의 남동생. 자신의 혈연. 하지만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 자신은 아버지의 비밀을 모르고 살았지만, 도현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누나!”
도현이가 세아에게 달려왔다. 팔을 벌리고. 마치 작은 아이처럼. 세아는 도현이를 안았다. 그 순간,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다.
도현이의 몸에서 나는 세제 냄새. 병원의 소독약 냄새. 자신의 어린 시절이 감도는 그 냄새. 세아는 도현이를 더 꽉 안았다.
“미안해. 내가 늦었어.”
세아가 중얼거렸다.
“괜찮아. 누나가 왔잖아.”
도현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강미준의 딸이 아니었다. 강리우의 누나도 아니었다. 단지 도현이의 누나였다. 자신의 남동생을 안고 있는 한 명의 누나였다. 그 남동생이 필요로 하는 누나. 그 남동생을 보호해야 하는 누나.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세아는 하늘이를 바라봤다. 하늘이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마침내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병원의 로비는 여전히 밝았다. 형광등이 흰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빛이 생겨났다. 불확실함 속에서 찾은 작은 확실함.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었다.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이는 뒤에서 따라왔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병원 복도에 울렸다.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자신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에는 그 떨림이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책임감의 떨림이었다.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말이나 이름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현이의 손을 잡는 것으로. 하늘이 옆에 서 있는 것으로.
세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자신은 도현이의 누나였다.
—
**176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