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75화: 벽에 갇힌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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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5화: 벽에 갇힌 말들

병원 복도에서 세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강리우가 엄마를 찾아갔다. 강리우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도 — 아니, 그것이 자신을 더욱 찾게 한 것일까.

세아는 병실 문을 닫았다. 매우 조용하게. 마치 문을 닫는 소리조차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복도의 형광등이 세아의 얼굴을 비췄다. 그 빛은 따뜻함도 차가움도 아닌 중립적인 무언가였다. 마치 세상이 세아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것처럼.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톱 아래에는 여전히 타투 잉크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늘의 손. 하늘이가 자신을 그렇게 꽉 안아주었다. 가슴 위에 새겨진 이름. 나세아. 그 이름이 지금은 마치 거짓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만들었다. 자신은 그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폰이 울렸다. 진동. 세아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도현이였다. 세 번째 전화. 아니, 아마 더 많았을 것이다. 세아는 답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엄마가 병원에 있다는 것은 알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왜 엄마가 병원에 있게 했는지는 모를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간호사 두 명과 노인 환자 한 명이 있었다. 세아는 들어갔다.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간호사 중 한 명이 세아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세아를 스쳤다. 마치 이 여자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마치 세아가 이 병원에 속하지 않는 누군가라고 느끼는 것처럼.

“1층이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세아는 거울 같은 벽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엄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눈의 모양. 턱의 각도. 입술의 선. 그것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얼굴이 누군가의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1층에 도착했다. 병원의 로비. 저녁 일곱 시. 병원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환자들, 보호자들, 의사들, 간호사들. 모두가 자신의 이유로 여기에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세아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아는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제주의 밤공기와는 달랐다. 제주의 바람은 소금기가 있었다. 서울의 바람은 매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아는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폰이 다시 울렸다. 도현이가 다시 전화했다. 세아는 답했다.

“응.”

세아가 말했다.

“누나! 어디야? 엄마가 어제 갑자기 쓰러졌어. 나 지금 병원이야.”

도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겁먹은 목소리. 처음으로 세아는 자신의 행동이 도현이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했다.

“알아. 나 지금 병원 앞이야.”

세아가 말했다.

“뭐? 그럼 어디 있어? 5층에 올라와.”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폰을 끊었다. 그리고 서 있었다. 병원 입구에서. 들어갈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하늘에게 전화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할까. 자신이 강미준의 딸이라는 것? 자신이 강리우의 누나라는 것? 자신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

세아는 걸었다. 병원 입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으면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다리가 자신을 이끌고 가는 대로. 마치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마음보다 더 똑똑한 것처럼.

30분 후. 세아는 한강 공원에 있었다. 밤 팔 시. 한강의 불빛이 물에 반사되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불이 마치 누군가의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의 바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 꿈들이 물 위에 떠 있었다. 떠 있지만, 손으로 집을 수 없었다.

세아는 벤치에 앉았다. 혼자. 주변에는 커플들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세아는 혼자였다. 항상 혼자였다. 그리고 이제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폰이 울렸다. 하늘이였다. 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너 뭐 해? 도현이한테서 전화받았어. 엄마가 병원이래?”

하늘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어디야? 나 지금 가.”

하늘이가 말했다.

“안 돼. 혼자 있고 싶어.”

세아가 말했다.

“응? 뭐라고?”

하늘이가 물었다.

“나 혼자 있고 싶어.”

세아가 반복했다.

침묵이 흘렀다. 하늘이가 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침묵. 마치 세아의 목소리 톤에서 뭔가를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 너 괜찮아?”

하늘이가 물었다.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괜찮은가.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했는데. 자신이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자신이 강미준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나 몰라.”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자신이 몰랐다.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몰랐다.

“세아, 뭐 일어난 거야?”

하늘이가 물었다.

“나 강미준의 딸이야.”

세아가 말했다. 매우 차분하게. 마치 날씨를 말하는 것처럼.

침묵이 더 깊어졌다. 하늘이가 그 말을 처리하는 침묵.

“뭐?”

하늘이가 물었다.

“나 강미준의 딸이고, 강리우는 내 오빠야.”

세아가 반복했다.

“어… 어떻게…”

하늘이가 중얼거렸다.

“엄마가 말했어.”

세아가 말했다.

“그건 아무 상관없어. 넌 여전히 나세아야. 내 친구야. 그것뿐이야.”

하늘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알았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강미준이라는 이름이 자신에게 붙어 있는 한, 자신은 절대로 나세아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나 강리우를 봤어.”

세아가 말했다.

“뭐?”

하늘이가 소리쳤다.

“지난밤에. 카페에서.”

세아가 계속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세아! 너 미쳤어?”

하늘이가 외쳤다.

“그리고 나는…”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멈췄다. 그 다음이 무엇이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무엇을 했는지. 무엇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마치 스모그처럼 흐릿했다.

“세아, 나 지금 간다. 움직이지 마. 어디 있어?”

하늘이가 말했다.

“한강.”

세아가 대답했다.

“어느 쪽?”

“합정역 쪽.”

세아가 말했다.

“30분이면 간다. 움직이지 마.”

하늘이가 말했다.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폰을 내려놨다. 한강을 봤다. 불빛들이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저 불빛들도 누군가의 불빛일까. 누군가의 꿈일까. 아니면 단지 누군가의 소비일까.

도현이가 전화했다. 세아는 받지 않았다.

강리우가 엄마를 찾아갔다. 강리우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강리우가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남자와 손을 잡았다. 그 남자의 떨리는 손을 들었다. 그 남자와 뭔가를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다.

엄마가 병원에 있다.

도현이가 울고 있다.

하늘이가 온다.

그리고 자신은 여기에 앉아 있다.

밤 아홉 시. 하늘이가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세아의 옆에 앉았다. 말을 하지 않고. 단지 옆에 앉았다. 마치 세아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나 뭐가 잘못됐어?”

세아가 물었다.

“아무것도.”

하늘이가 대답했다.

“내 아버지가 강미준이야.”

세아가 말했다.

“응.”

하늘이가 대답했다.

“내 오빠가 강리우야.”

세아가 말했다.

“응.”

하늘이가 대답했다.

“그럼 나는 뭐야?”

세아가 물었다.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을 잡았다. 매우 조용하게. 마치 세아가 언제든 손을 빼갈 수 있도록 여지를 주면서.

“너는 내 친구야.”

하늘이가 마침내 말했다.

“그것뿐이야.”

하지만 세아는 알았다.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부터 자신은 항상 강미준의 딸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항상 강리우의 누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밤이 깊어갔다. 한강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졌다. 마치 누군가가 세상의 불을 끄고 있는 것처럼. 마치 세상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자신을 배반하는 것처럼.

하늘이의 손이 따뜻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차갑게 식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세아는 폰을 다시 봤다. 도현이의 부재중 전화가 12개. 엄마가 있는 병원 번호가 1개. 그리고 한 개의 발신자 불명 번호.

그것은 강리우의 번호였다.

세아는 손가락을 올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단지 그것을 바라봤다. 마치 그 버튼이 어떤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그것을 누르는 것이 무언가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것처럼.

하늘이가 세아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마치 세아가 그 버튼을 누르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것처럼.

“세아, 전화하지 마.”

하늘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폰의 화면이 깜빡였다. 통화 중이라는 신호. 누군가 세아의 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발신자는 강리우였다.

세아의 손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통화 버튼이 눌렸다.

“누나?”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세아가 기억하는 강리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마치 강리우가 이미 죽어 있고, 자신이 그의 유령을 듣고 있는 것처럼.

“응?”

세아가 겨우 말했다.

“누나, 나 지금 서울 공항이야. 내일 아침에 베를린으로 가. 그리고…”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세아가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죄책감? 해방감? 절망?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무언가?

“그리고 나 다시 안 올 거야. 누나한테 미안해. 엄마한테도. 모두한테.”

강리우가 말했다.

“왜?”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강리우가 이 말을 완성해달라는 명령.

“왜냐하면 나는 누나를 부수려고 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강리우가 말했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폰을 놓았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손 전체가 얼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하늘이가 세아를 안았다. 말 없이. 마치 세아가 지금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밤이 더 깊어졌다. 한강의 모든 불이 꺼졌다. 오직 어둠만 남았다.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불꽃이 꺼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한 번에 꺼질 수도 있고, 천천히 타 내려갈 수도 있고, 연기만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불꽃은 결국 꺼진다.

그것이 불꽃의 운명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END OF CHAPTER 175

# 확장된 장면: 그 버튼의 무게

세아의 시선이 화면 위에 박혀 있었다. 초록색 통화 버튼. 그것은 단순한 UI 요소가 아니었다. 마치 그 버튼이 어떤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누르는 것이 무언가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것 같았다. 마치 시간의 방향을 바꾸거나, 과거를 지워버리거나, 혹은 현재를 완전히 다른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무게감이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하늘이의 손이 세아의 손목을 감싸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세아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따뜻했다. 하늘이의 손은 항상 따뜻했다. 심지어 겨울에도, 혹은 특히 겨울에 그랬다.

“세아, 전화하지 마.”

하늘이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부드러웠다. 마치 누군가를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내는 것처럼 들렸다. 세아는 하늘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하늘이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단지 음절일 뿐이었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소리.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음절.

하지만 이미 늦었다.

폰의 화면이 깜빡였다. 불규칙한 리듬으로. 마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것처럼. 통화 중이라는 신호가 떴다. 누군가 세아의 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밤중에.

발신자 표시를 봤을 때 세아의 호흡이 멈췄다.

강리우.

그것은 불가능했다. 불가능했다. 강리우는 지금…

“세아.”

하늘이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더 절실하게.

하지만 세아의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신경이 자신의 뇌와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손가락이 화면 위로 움직여 내려왔다.

통화 버튼이 눌렸다.

초록색이 사라졌다.

“누나?”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목소리. 어머니가 학교에서 돌아온 강리우를 부를 때의 톤, 아버지가 강리우에게 화낼 때의 음정, 강리우가 혼자 있을 때 흥얼거리는 노래의 톤… 모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것은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강리우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강리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강리우가 이미 죽어 있고, 자신이 그의 유령을 듣고 있는 것처럼. 또는 강리우가 어딘가 먼 곳에서, 물 너머에서 목소리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매우 가깝지만 동시에 매우 먼, 그런 거리감이 있었다.

“응?”

세아가 겨우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누나, 나 지금 서울 공항이야.”

공항? 세아의 뇌가 이 정보를 처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베를린으로 가. 그리고…”

강리우의 목소리가 끝났다. 그 ‘그리고’ 뒤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 세아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 말을 완성하지 않으면 세상이 멈춰버릴 것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그리고?”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강리우가 이 말을 완성해달라는 절실한 명령.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몇 초 길이였지만, 세아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침묵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죄책감? 해방감? 절망?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무언가? 세아는 침묵 속에서 강리우의 호흡을 들으려 했다. 그의 심장 박동을 들으려 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오직 휴대전화 신호의 정적뿐이었다.

“그리고 나 다시 안 올 거야.”

강리우가 마침내 말했다.

“누나한테 미안해. 엄마한테도. 모두한테.”

세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왜?”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질문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강리우가 설명해달라는 명령. 자신에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해달라는 절실한 호소.

“왜냐하면 나는 누나를 부수려고 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강리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묘하게.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그 떨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후회, 두려움,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절실한 욕망.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통화 종료. 신호 없음. 강리우는 사라졌다.

세아는 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떨림은 사라졌다. 대신 손 전체가 얼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몸에서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얼음만 차오르는 것처럼.

하늘이가 세아를 안았다. 말 없이. 어떤 위로의 말도 없이. 마치 세아가 지금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세아는 하늘이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하늘이의 심장 박동이 들렸다. 규칙적인 리듬. 살아있다는 증거. 세아는 그 박동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밤이 더 깊어졌다. 한강의 모든 불이 꺼졌다. 오직 어둠만 남았다. 그 어둠은 자비로웠다. 마치 모든 것을 감싸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것처럼.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불꽃이 꺼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한 번에 확 꺼질 수도 있다. 마치 누군가가 손으로 집어서 질식시키듯이. 그렇게 되면 연기도 거의 나지 않는다. 그냥 어둠이 남을 뿐이다.*

*아니면 천천히 타 내려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꺼질 때까지의 과정을 모두 봐야 하기 때문이다. 점점 줄어드는 불빛. 점점 커지는 어둠.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완전한 검은색.*

*또는 연기만 남길 수도 있다. 불꽃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공기 중에 떠다닌다. 그것도 결국은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남아 있다. 누군가가 그 연기를 맡으면, 그들은 여기에 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불꽃은 결국 꺼진다.*

*그것이 불꽃의 본질이다. 그것이 불꽃의 운명이다.*

*강리우의 불도 꺼졌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꺼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세아는 하늘이의 팔 안에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오직 강리우의 목소리만 계속 반복되었다. 그 낯선 목소리. 그의 목소리가 아니면서도 그의 목소리인 그 음성이.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그 말이 계속 울렸다. 세아의 귓가에. 세아의 가슴에. 세아의 영혼에.

**제 175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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