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52화: 엄마의 침묵, 세아의 목소리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Prev152 / 190Next

# 제152화: 엄마의 침묵, 세아의 목소리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도 많은 눈물. 마치 몇 년을 참아온 눈물을 한 번에 흘리는 것처럼. 심장 모니터가 비프비프 울음을 높였다. 의료진이 들어올 시간이 다 됐다는 신호처럼.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병실은 그렇게 작은 세계였다. 세 명의 인간, 하나의 침대, 그리고 눈물.

도현이가 일어났다. 엄마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누나, 의사 부를까?” 그의 목소리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직 17살인데도 이미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목소리에 실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니, 괜찮아.”

엄마가 손을 들었다. IV 튜브가 팔을 관통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아를 향해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을 움직이려는 것처럼.

“세아. 여기 와.”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요청이었다. 간청이었다. 엄마는 평생 자신의 딸을 명령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세아가 엄마를 돌봐왔다. 엄마의 약을 챙기고, 엄마의 밥을 준비하고, 엄마의 심장이 언제 멈출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엄마를 봐왔다. 그런데 이제 엄마가 손을 펼치고 자신의 딸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것이 얼마나 낯선 일인지를 세아는 깨달았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마치 물 속에서 헤어 나오는 것처럼. 의자를 미루는 소리가 났다. 병실이 작아서 모든 음성이 증폭되었다. 의자 음성, 옷이 문지르는 소리, 신발이 타일 바닥을 밟는 소리.

엄마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정확히는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침대에 몸을 기댄 것이었다. 마치 자신도 함께 누워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마치 자신도 이 심장 모니터의 신호에 몸을 맡겨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내가… 뭔가 너한테 말해야 할 게 있어.”

엄마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병실의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약과 병원 냄새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손은 살아 있었다.

“뭐?”

세아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자신도 몰랐다. 며칠 만에 처음 사용하는 목소리. 녹슨 악기처럼 떨리는 목소리.

“너… 아빠.”

엄마의 말이 끊겼다.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심장 모니터의 비프음이 더 빨라졌다. 의사의 경고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너무 흥분하면 안 된다. 너무 감정적이면 안 된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감정의 파도 속에 있었다.

“엄마, 진정해. 나중에 얘기하자.”

도현이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흔들었다. 머리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결연한.

“아니야. 지금 말해야 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말하지?”

그 말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자신이 다시 쓰러질 수 있다는 두려움. 자신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 깨달음 앞에서 자신의 딸에게 말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절박함.

세아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넌 아빠를 본 적이 없어. 제주에서 나고 자랐을 때도. 그 이유를 엄마가 너한테 말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엄마 자신도 정확히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다.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또는 물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세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제주의 바다. 엄마가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던 시간. 숨을 참고 있던 시간.

“너는… 해녀 아들이야.”

그 말이 세아에게 미친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충격.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를 흔드는 종류의 충격.

“뭐?”

“내가 물 속에서 널 가졌어. 어떤 남자와 함께. 그 남자는… 술꾼이었어. 우리는 몇 번 만났고, 그러다가 너를 가졌고, 그리고 그 남자는 사라졌어. 제주에서 일하던 관광객이었거든. 계절 일꾼이었어.”

엄마가 멈췄다. 심호흡을 했다. 의료진의 경고를 무시하듯이.

“그리고 엄마는… 너를 혼자 키웠어. 정말 혼자. 엄마 엄마, 그러니까 너의 할머니도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어. 해녀는 딸이 미혼모가 되는 걸 받아주지 않는 세대였거든.”

도현이가 손가락을 엄마의 팔 위에 놨다. 마치 엄마의 말이 너무 심장에 부담을 줄까봐. 마치 자신이 엄마를 물리적으로 지탱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세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의 손이 어떻게 떨리는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여섯 살 때, 새로운 남자가 있었어. 너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가. 그 사람은 착했어. 정말 착했어. 그리고 너를 자신의 딸처럼 아껴줬어. 너는 그걸 몰랐지만, 그 사람은 너한테 정말 좋은 아빠였어.”

엄마의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손으로 닦을 수 없었다. IV 튜브 때문에. 그래서 눈물은 그냥 뺨을 타고 흘렀다.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너는 여덟 살이었어. 교통사고로. 그리고 엄마는… 엄마는 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그냥 ‘아빠가 없어’라고 말했어.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아빠는 있었어. 아빠는 죽었을 뿐이었어. 그리고 엄마는 너한테 그 차이를 설명해주지 않았어. 너는 아빠가 없는 아이라고 알고 자랐어. 하지만 사실 넌 아빠가 죽은 아이였어. 그건 다른 거야.”

세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기억. 누군가가 자신에게 노래를 부르던 기억. 그런데 그 얼굴이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물 속에서 본 것처럼 흐릿했다.

“그리고… 너의 아버지가 죽은 후, 엄마는 너한테 이렇게 말했어. ‘너는 강하게 살아야 해. 아빠 대신.’ 엄마는… 정말 미안해. 그건 너한테 너무 큰 짐을 줬어. 너는 아이였어. 그냥 아이였어야 했어. 근데 엄마는 너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어.”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심장 모니터가 경고하듯이 울음을 높였다.

“그리고 너는… 정말 강했어. 너무 강해서 무섭기도 했어. 너는 울지 않았어. 너는 불평하지 않았어. 넌 그냥 살아갔어. 아빠 대신. 엄마 대신. 도현이를 위해서. 그런데 엄마는 그걸 보면서도 뭔가 하지 않았어. 그냥 너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어.”

도현이가 엄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나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니, 단순히 엄마를 만지고 싶었던 것 같았다. 엄마가 너무 멀리 가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리고 나중에… 그 남자가 나타났어. 강리우.”

엄마가 그 이름을 말했을 때,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엄마는 그 남자를 봤어. 그리고 엄마는 알았어. 그 남자도 너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태어난 아이라는 걸. 그 남자도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다른 누군가를 괴롭히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말했어. ‘그 남자를 만나지 마.’ 근데 넌 만났어. 그리고 엄마는 그걸 막지 못했어.”

세아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눈 뒤에서 뭔가가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처럼.

“엄마가… 정말 미안해. 넌 그럴 자격이 없었어. 그 모든 고통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 근데 엄마가… 엄마가 너를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어. 엄마가 너를 봐주지 못했어. 엄마는 너의 엄마가 아니라 그냥… 너한테 짐을 주는 누군가일 뿐이었어.”

엄마의 말이 끝났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숨이 가빠져 있었다. 심장 모니터가 경고음을 울렸다.

“의사 부를까?”

도현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목소리로.

“아니.”

세아가 말했다. 자신도 깜짝 놀랐다. 자신이 말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니.”

다시 한 번 말했다. 더 크게.

세아는 엄마의 침대에 몸을 누웠다. 침대는 좁았다. 엄마 옆에 누우면 거의 몸이 겹쳤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것이 필요했다. 이 순간에.

엄마가 세아를 안았다. 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했다. 어떤 힘도 필요 없었다. 단지 몸이 닿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미안해.”

엄마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세아의 머리 위에서.

“엄마도.”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엄마의 가슴에 닿았다. 심장 모니터의 비프음이 천천히 규칙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의 심장이 안정을 찾은 것처럼. 마치 자신의 딸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처럼.

도현이가 침대의 다른 쪽에 누웠다. 세 명이 한 침대에 누웠다. 병원의 좁은 침대에. 모니터와 IV 튜브의 소음 속에서.

“난 왜 이런 가족에 태어난 거야?”

도현이가 속삭였다. 농담인 것처럼.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진심이 있었다.

“운이 좋아서.”

엄마가 대답했다.

“어?”

“넌 운이 좋아서. 이 가족에 태어난 거야. 넌… 누나하고 엄마를 보려고 태어났어. 넌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산 적이 없지. 근데 그건 나쁜 게 아니야. 그건 착한 거야. 그건 정말 소중한 거야.”

엄마가 도현이의 머리를 쓸어줬다. 그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의도적인 떨림이 아니라 사랑의 떨림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엄마의 손. 도현이의 몸. 자신의 몸. 이 세 개의 것이 한 침대 위에서 만나는 감각.

그리고 처음으로,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타고 있던 불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불이었다. 자신을 살아 있게 하는 불이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하는 불이었다. 자신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불이었다.

병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밝았다. 병원의 냄새는 여전히 강했다. 심장 모니터는 여전히 울음을 울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속에서, 세 명의 인간은 한 침대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한 엄마, 한 누나, 한 남동생.

그리고 세아의 입가에 처음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미소라고 부르기도 미묘한 그것. 하지만 분명한 것. 살아 있다는 표시. 정말로.

“엄마.”

세아가 말했다.

“응?”

“날 봐줘. 이제부터.”

“응. 엄마가 볼게.”

엄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미안함도, 희망도, 약속도.

도현이의 손이 세아의 손을 찾았다. 그리고 엄마의 손이 도현이의 손을 찾았다. 세 손이 만났다. 병실의 좁은 침대 위에서. 모니터와 약과 절망의 냄새 속에서.

외부에서는 11월의 오후가 밝아지고 있었다. 서울의 빌딩들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강남역의 지하철 역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작은 병실 속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또는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간이.

세아는 눈을 감았다. 엄마의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엄마의 심장 박동이 귀에 들렸다. 살아 있다는 증거.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알았다.

자신이 진짜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END OF CHAPTER 152

# 제152장 확장판: 손의 온기

병실의 형광등이 세아의 눈을 자극했다. 그 차갑고 하얀 빛은 현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냈다. 병원의 냄새—소독약과 죽음이 함께 섞인 그 냄새—가 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심장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 소리는 마치 세상을 재촉하는 듯했다. 멈추지 말고 계속 살아가라고. 계속 뛰어라고.

세아는 침대의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중간에, 도현이는 반대쪽에 있었다. 병원의 좁은 침대에 세 명이 누워 있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하지만 여기서는 가능했다.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도현이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팔다리는 여전히 약했다. 얼굴은 창백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아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의 눈. 그곳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더 깊은 것. 더 진실한 것.

도현이가 침대의 천장을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속삭임이 들렸다. 농담인 것처럼 말해지는 것. 하지만 진심이 스며나오는 그런 말씀.

“난 왜 이런 가족에 태어난 거야?”

도현이의 목소리는 약했다. 수술 후 성대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 약함 속에는 힘이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그 약함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힘 말이다.

세아는 웃음을 터뜨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웃지 않았다. 대신 숨을 쉬었다. 깊게, 천천히.

엄마가 도현이를 바라봤다.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마치 그 눈물들도 이 순간을 영원하게 보존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운이 좋아서.”

엄마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부서질 듯 했지만, 동시에 가장 단단했다.

도현이가 엄마를 바라봤다. 의아함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

“넌 운이 좋아서. 이 가족에 태어난 거야. 넌…”

엄마가 말을 멈췄다.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다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느끼려는 듯이.

“누나하고 엄마를 보려고 태어났어. 넌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산 적이 없지. 근데 그건 나쁜 게 아니야. 그건 착한 거야. 그건 정말 소중한 거야.”

세아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가슴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정확히 어디가 움직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심장일 수도, 폐일 수도, 영혼일 수도 있었다.

엄마가 도현이의 머리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그 손가락이 도현이의 모든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엄마들은 언제나 그렇게 믿는다. 그 믿음 자체가 치유인 줄 알면서도.

엄마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약함의 떨림이 아니었다. 세아는 그걸 알았다. 그것은 사랑의 떨림이었다. 모든 것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그래서 흐르는 감정들을 견디지 못해 떨리는 손의 떨림이었다.

세아는 그 손을 보고 있었다. 그 손이 도현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모습을. 그리고 도현이의 몸이 그 손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리고 자신의 몸이 그 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세 개의 것이 한 침대 위에서 만났다. 엄마의 손. 도현이의 머리. 자신의 눈. 그리고 그것은 촉각이었고, 시각이었고, 뭔가 더 깊은 감각이었다.

그 순간, 세아는 처음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마치 깊은 물 속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 그런 깨달음이었다.

자신이 타고 있던 불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아는 자신의 인생을 빠르게 되짚어야 했다.

도현이가 아팠을 때. 그때 자신 안에 뭔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증오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향한 증오. 아버지를 향한 증오. 이 불공평한 세상을 향한 증오. 하지만 그 불은 점점 커졌고, 점점 더 뜨거워졌고, 결국 자신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자신을 태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병실에서, 이 침대 위에서, 엄마의 손이 도현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것을 보면서—세아는 깨달았다.

그것이 증오의 불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사랑의 불이었다.

자신을 살아 있게 하는 불이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하는 불이었다. 도현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 엄마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 이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그 모든 것을 태우는, 자신을 태우는 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파괴하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불이었다.

병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밝았다. 그 하얀 빛은 여전히 차갑고 무정했다. 병원의 냄새는 여전히 강했다. 산소와 약물과 죽음의 냄새. 심장 모니터는 여전히 울음을 울고 있었다. ‘삐’, ‘삐’, ‘삐’. 규칙적으로. 무정하게. 하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로.

하지만 그 모든 것 속에서, 세 명의 인간은 한 침대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한 명은 아이였다. 약했고, 죽음을 경험했고, 하지만 돌아온 아이.

한 명은 어머니였다. 죄책감과 사랑으로 부서져 있는 어머니.

한 명은 딸이었다. 증오와 사랑을 구분하지 못했던 딸. 하지만 지금 그것을 배우고 있는 딸.

그들의 숨소리가 같은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마치 한 명의 생물체처럼. 한 심장처럼.

세아의 입가에 뭔가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자신의 얼굴에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얼굴을 고정시켜 두었기 때문에.

미소라고 부르기도 미묘한 그것.

하지만 그것은 분명했다.

살아 있다는 표시.

정말로.

세아가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만났다. 그 순간,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세아가 입을 열었다.

“엄마.”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부드럽게. 이렇게 따뜻하게.

엄마가 대답했다.

“응?”

한 음절. 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기대함이, 두려움이, 희망이.

“날 봐줘. 이제부터.”

세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도현이만큼 약했다. 하지만 명확했다.

엄마가 대답했다.

“응. 엄마가 볼게.”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전부면 충분했다. 그 약속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미안함도, 희망도, 미래도. 함께할 내일들도.

도현이가 움직였다. 그의 손이 침대 위를 미끄러져 갔다. 천천히. 약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그의 손이 세아의 손을 찾았다.

그 순간, 세아는 도현이의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느꼈다. 병원의 차가움이 그 손에 담겨 있었다. 죽음의 차가움도. 하지만 동시에, 그 손 안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살아 있다는 따뜻함이.

그리고 엄마의 손이 도현이의 손을 찾았다.

세 손이 만났다.

병실의 좁은 침대 위에서. 모니터와 약과 절망의 냄새 속에서. 그것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초월해서.

세아는 그 손의 감각에 집중했다. 도현이의 손가락. 엄마의 손가락. 자신의 손가락. 그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뭔가가 전달되고 있었다. 혈액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 영혼의 유체 같은 것.

외부에서는 11월의 오후가 밝아지고 있었다.

병실의 창문을 통해 서울의 빌딩들이 보였다. 그 빌딩들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반짝이고 있었다. 수백만 개의 창문들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창문들 뒤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들의 고통을 안고 있었다. 자신들의 사랑을 안고 있었다.

강남역의 지하철 역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출퇴근하는 사람들. 쇼핑하는 사람들. 연인들. 친구들. 그들은 모두 아래에서, 지하에서, 이 병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병실 속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또는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삶이.

세아는 눈을 감았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의 어둠이 아니었다. 평온의 어둠이었다. 자궁 속의 어둠. 안전의 어둠.

그리고 세아는 엄마의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엄마의 몸이 받아들였다. 마치 세아가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처럼. 아니, 다시 한 번 살아나는 것처럼.

엄마의 심장 박동이 귀에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규칙적인 박동. 살아 있다는 증거.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

세아는 그 박동에 자신의 호흡을 맞췄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도현이의 손이 자신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약한 힘이었지만, 그것은 충분했다.

병실의 모든 소리가 희미해졌다. 모니터의 소리도, 환기 장치의 소리도, 복도의 발걸음 소리도. 마치 그들 세 명만 남겨진 것처럼.

세아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자신이 진짜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도현이가 살아나는 것이었나?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엄마를 용서하는 것이었나?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용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것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 침대 위에서. 이 병실에서. 모니터와 약과 죽음의 냄새 속에서.

함께 있는 것. 함께 숨을 쉬는 것. 함께 손을 잡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아가 진짜로 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여기 있었다.

이 순간 속에.

이 침대 위에.

이 병실에.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이 타고 있던 불은 자신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불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은 여기서, 이 침대에서, 엄마와 도현이와 함께 타고 있다는 것을.

따뜻하게.

밝게.

영원하게.

병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그녀는 내부의 빛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외부의 빛보다 더 밝았다. 더 따뜻했다. 더 진실했다.

그것은 사랑의 빛이었다.

세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 있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미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내부에서 생겨나는 미소였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증거.

정말로.

“엄마…”

세아가 다시 속삭였다. 눈을 감은 채로.

“응…”

엄마가 대답했다. 그 음성은 눈물로 잠겨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도현이가 움직였다. 그의 다른 손이 엄마의 손을 찾았다. 이제 네 손이 만났다. 세아, 도현이, 엄마의 네 손.

아니, 셋이었다. 어쩌면 한 손일지도 몰랐다. 하나의 심장으로 박동하는 한 손.

병실은 조용했다. 정말로 조용했다.

오직 세 개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숨소리들은 점점 같은 리듬을 찾고 있었다.

외부의 세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출퇴근하고, 장을 보고, 사랑하고, 싸우고, 죽고, 살고 있었다. 강남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고, 빌딩들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고, 서울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병실 안에서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삶.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

그리고 세아는 그것 속에 완전히 침잠해 있었다.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함께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영원이었다.

세아는 미소 지었다. 눈을 감은 채로. 그 미소는 깊었고, 조용했고, 진실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을, 세아는 알고 있었다.

살아가는 것의 진정한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152장 끝

152 / 190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