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45화: 거짓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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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5화: 거짓의 끝

카페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1초, 2초. 그리고 다시 밝혀졌다. 그 순간 세아는 강리우의 얼굴을 완전히 보게 되었다. 판결 이후 처음으로. 형광등 아래에서 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같은 사람이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법정에서의 강리우는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변론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카페에서, 밤 11시의 형광등 아래에서 그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옷을 벗겨진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를 벗겨진 것처럼.

“나를 구하겠다고 한 건 거짓이었어.”

세아가 말을 이었다. 강리우가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먼저 끝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순간도 또 다른 거짓으로 변할 것 같았다. 강리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로 변질될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변하게 했다. 마치 마술처럼. 아니, 속임수처럼.

“네가 나를 구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을 구하려고 했어. 너는 자신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왜냐하면 넌 베를린에서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으니까.”

강리우의 손이 멈췄다. 떨림이 멈춘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멈춘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손목을 잡은 것처럼. 그리고 세아는 알았다. 자신이 맞다는 것을.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자신은 강리우라는 사람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각도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왜 그가 자신에게 집착했는지. 왜 그가 자신을 “구원”하려고 했는지. 왜 그의 손가락이 떨렸는지.

“너는 피아니스트였어. 베를린에서.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가 죽었어. 누군가 중요한.”

세아는 강리우가 법정에서 절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 말하고 있었다. 변호사가 막지 않는 곳에서. 증거가 없는 곳에서. 단지 두 사람의 목소리만 있는 곳에서. 그리고 강리우의 침묵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추측이 확실한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을 구할 수 없었어. 피아노를 잘 쳤어도 구할 수 없었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었어. 그래서 너는 자신을 미워했어. 그리고 그 미움을 달래기 위해 나를 구하려고 했어. 나를 통해서 자신을 구원받으려고 했어.”

카페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누군가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었다. 세아가 제목을 알 수 없는 곡. 하지만 강리우는 알았을 것이다. 그의 몸이 반응했기 때문이다. 어깨가 웅크러들었다. 마치 자신을 더 작게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너는 내가 너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내가 너를 치료하면, 너도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왜냐하면 넌 처음부터 나를 보지 않았으니까. 넌 나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너 자신의 죄책감을 보고 있었어. 내 얼굴 위에 너의 상처를 투영하고 있었어.”

세아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약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말이 공기를 가르고 있는 것처럼. 형광등의 불빛을 자르고 있는 것처럼. 강리우의 모든 거짓을 자르고 있는 것처럼.

강리우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음성은 없었다. 마치 더빙이 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더 처참했다. 왜냐하면 세아는 그의 입술의 움직임만으로도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그 두 글자. 가장 쉬운 말이면서도 가장 거짓인 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세아가 먼저 말했다. “그건 또 다른 거짓이야. 넌 나한테 미안한 게 아니라, 너 자신한테 미안한 거야. 그리고 그 미안함도 나한테 돌려주려고 하고 있어. 마치 내가 너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거 증명하기 위해. 하지만 난 너의 구원이 아니야. 난 그냥 누군가야. 그냥 여자애일 뿐이야.”

강리우의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3초 간격이 아니었다. 더 빠르고, 더 불규칙하고, 더 격렬했다. 마치 그의 몸이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신호처럼. 세아는 그 떨림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손가락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떨림이었다. 하지만 강리우의 손가락은 절망에서 비롯된 떨림이었다. 그것은 더 깊은 것이었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베를린에서 누가 죽었어?”

세아가 물었다. 이제 자신은 추측하지 않았다. 확인했다.

강리우가 말했다. 목소리가 마치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친구였어. 음악 대학교 친구. 우리는 함께 경쟁했어. 같은 피아노 콩쿠르에서. 그리고 난 3등을 했고, 그놈은… 그놈은 떨어졌어.”

“그리고?”

“그놈은 자살했어. 점수를 받은 다음날 밤에.”

카페의 음악이 바뀌었다. 피아노 곡에서 현악기 곡으로. 누군가의 바이올린이었다. 슬픈 곡이었다. 아니, 슬픔을 넘어선 곡이었다. 절망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음악이 강리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더 명확하게 만들었다.

“난 살아남았어. 그리고 그놈은 죽었어. 그게 다야. 난 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 왜 내가 살아야 했는지 모르겠어. 난 더 약했어. 더 작았어. 더 겁이 많았어. 근데 난 살아남았어. 그리고 그놈은… 그놈은 더 이상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어.”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는 그 손. 그 손은 피아노를 칠 수 없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물었을 때 강리우는 “트라우마”라고 대답했다. 손가락이 굳는다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제 세아는 알았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죄책감의 물리적 표현이었다. 그의 몸이 자신을 처벌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자신을 속이기 시작했어. 내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내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더라도, 내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그리고 너를 만났어.”

강리우가 이제 세아를 직접 봤다. 처음으로.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의 죄책감을 봤다. 자신의 필요를 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는 세아를 봤다. 완전한 세아를. 자신의 투영이 아닌, 자신의 구원이 아닌, 단순한 한 사람으로서의 세아를.

“넌 내 구원이 아니었어. 넌 그냥 누군가였어. 하지만 나는 너를 내 구원으로 만들려고 했어. 그래서 넌 타올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내가 너를 태웠으니까.”

세아는 앉았다. 마침내. 강리우의 맞은편에. 그리고 그 순간, 둘 다 손가락이 3초마다 떨렸다. 같은 리듬으로. 같은 속도로. 마치 둘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세아는 이제 알았다. 그것은 상처의 공명이었다. 두 개의 상처가 만났을 때의 그 음향적 진동. 그것이 자신들이 착각했던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

“너 언제부터 알았어?”

강리우가 물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어떤 방어도 없었다. 어떤 거짓도 없었다. 단지 사실만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 얘기를 할 때부터. 그 말들이… 너의 말들이었거든. 같은 구조였어. 같은 거짓이었어.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거짓.”

세아의 목소리는 이제 차가웠다. 감정 없었다. 아니, 감정이 너무 많아서 차가워진 것이었다. 마치 물이 어느 정도 이상 찬 것처럼 불이 아니라 얼음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내가 너한테 해줄 말은 없어. 미안해도 안 돼. 용서도 안 돼. 그런 건 너와 너 자신의 문제야. 너의 죄책감과 너의 트라우마와 너의 자살한 친구는. 그건 모두 너의 것이야. 그리고 내가 그걸 짊어질 수는 없어. 이미 충분히 무거우니까.”

강리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세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그 수용이, 그 항복이 세아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것도 또 다른 거짓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묵도. 그의 눈물도. 그의 떨림도. 모두가 거짓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거짓을 너무 많이 말했으니까.

“우리는 끝이야.”

세아가 말했다. “이미 끝났어. 법정에서 끝났어. 아니, 그 전에 이미 끝났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너한테 ”아니“라고 말했을 때부터.”

“그렇다면… 왜 왔어?”

강리우가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왜 넌 나한테 왔어? 왜 날 만나러 왔어? 왜 이 말들을 듣기 위해 강남까지 왔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3초마다 떨리는 손가락. 그리고 그 떨림이 이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자신의 분노. 자신이 이토록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분노.

“왜냐하면 넌 내 시간을 빼앗았거든.”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넌 내 음악을 빼앗지 않았어. 넌 내 몸을 빼앗지 않았어. 넌 내 영혼을 빼앗지 않았어. 넌 그보다 더 소중한 걸 빼앗았어. 넌 내 시간을 빼앗았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을 시간을.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을 시간을. 내가 내 음악을 정말로 노래할 수 있었을 시간을.”

강리우의 얼굴이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고통이 아니었다.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가장 처참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엄마도. 넌 엄마의 시간도 빼앗았어. 엄마가 나한테 했던 모든 말들을. 엄마가 나한테 해줄 수 있었던 모든 말들을. 그걸 지금에야 듣게 했어. 지금에야.”

카페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1초, 2초. 그리고 다시 밝혀졌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들이 떨리는 것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제 가.”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를 보지 않으면서.

“세아…”

강리우가 말했다.

“더 이상 날 이름으로 부르지 마. 넌 그럴 권리가 없어.”

세아가 일어섰다. 그리고 카페를 나갔다. 강남역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밤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의 손가락은 여전히 3초마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자신의 분노. 자신이 이제 느낄 수 있게 된 감정. 그리고 그 분노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강남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친 유리창에서 봤다. 자신은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울고 있었다. 엄마처럼. 해 위에서. 물 위에서. 그리고 그 침묵의 울음이, 그것이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강리우가 주지 않은 것. 강리우가 만들지 않은 것. 오직 자신의 것.

지하철이 도착했다. 8번선. 홍대로 돌아가는 열차. 세아는 승차했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을 켜서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강남에 안 갔어. 아니, 갔었는데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어. 아버지 얘기해줘서 고마워. 처음 알았어. 그리고…”

문자를 다시 읽었다. 지우고 다시 썼다.

“그리고 사랑해.”

전송.

답장이 즉시 왔다.

“어리석은 것. 그런 건 처음부터 당연했어.”

그리고 그 다음.

“잘했어.”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작은 불꽃들이. 마치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세아는 알았다. 그 불꽃들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들은 단지 빛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빛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지하철은 계속 나아갔다. 홍대를 향해. 그리고 세아의 손가락은 여전히 3초마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악이 아니라 신호였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신호. 자신이 느낄 수 있다는 신호. 자신이 분노할 수 있다는 신호.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 마도(魔道)

카페의 형광등이 또다시 깜빡였다. 1초, 2초, 3초. 세아는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매번 불이 꺼질 때마다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엄마가 자신을 안고 있던 어둠 속으로.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더 이상 온기가 없었다. 형광등이 다시 밝혀졌고, 세아는 눈을 떴다.

강리우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조명을 반사하는 모습이 마치 검은 호수처럼 보였다. 깊고, 어둡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호수.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그 호수 속에 빠져 있었는지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숨을 참으며 살았는지. 얼마나 오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바랐는지.

“마도. 넌 엄마의 시간도 빼앗았어.”

세아의 목소리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게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낸 목소리였다. 진짜 자신의 목소리. 강리우가 만들어내도록 강요한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목소리.

카페 안은 조용했다. 저녁 8시 반이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은 세아와 강리우의 얼굴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듯. 혹은 보여도 모르는 척하기를 바라는 듯. 세아는 그걸 이해했다. 이 장면이 얼마나 위험한 것처럼 보이는지. 마치 두 마리의 포식자가 마주친 것처럼.

“엄마가 나한테 했던 모든 말들을. 엄마가 나한테 해줄 수 있었던 모든 말들을.”

세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이 그 떨림을 증폭시켰다. 잔 안의 검은 액체가 흔들렸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들이 3초마다 떨리고 있었다. 규칙적인 떨림.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마치 심장박동처럼. 마치 자신의 생명이 흘러가는 속도를 측정하는 것처럼.

이 떨림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세아는 생각했다. 지난 6개월 동안? 아니면 지난 6년 동안? 아니면 처음부터? 처음 강리우를 만난 그 순간부터?

“그걸 지금에야 듣게 했어. 지금에야.”

세아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것은 비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비명은 침묵 속에서 울렸다. 마치 방음 처리된 스튜디오 안에서처럼. 세아는 자신의 분노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분노는 조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처럼. 강리우처럼.

강리우가 입을 열려고 했다. 세아는 그것을 막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떨리는 손을. 그 손이 공중에서 떨리고 있는 것을 강리우도 봤을 것이다. 강리우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었어. 죽는 날까지 몰랐어. 그런데 넌… 넌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나한테 스스로 알아내도록 강요했어. 마치 시험처럼. 마치 게임처럼.”

세아는 호흡을 멈췄다. 자신의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가슴 안에서 마치 새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내부에서 파고 나오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었다. 1초, 2초, 3초. 손가락이 떨리는 속도로.

“넌 엄마가 주고 싶었던 말들을 빼앗았어. 사랑한다는 말도. 고마워한다는 말도. 용서한다는 말도. 그리고 그것들을 영원히 잃게 만들었어.”

세아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물만 흘렀다. 마치 빗소리 없는 비처럼. 마치 음성 없는 울음처럼.

강리우의 얼굴이 변했다. 그것은 처음이었다. 6개월 동안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마치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자신이 그의 표정 변화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이미 그로부터 벗어나가고 있다는 것.

“나는… 너를 알고 싶었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었어.”

“거짓말.”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넌 날 알고 싶지 않았어. 넌 날 소유하고 싶었어. 엄마처럼. 아버지처럼. 넌 날 마도로 만들고 싶었어. 넌 날 너 자신의 복제품으로 만들고 싶었어.”

카페의 형광등이 또 깜빡였다. 1초, 2초. 그 어둠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들이 떨리는 것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마치 심장처럼. 마치 뼈처럼. 마치 자신의 영혼처럼.

형광등이 다시 밝혀졌다. 그리고 세아는 강리우를 마주봤다. 그의 눈동자가 더 이상 검은 호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단지 검은 구슬일 뿐이었다. 광택이 있고, 차갑고, 비어있는 구슬.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은 항상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세아가 채우려고 했던 것들 외에는.

“내 엄마가 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했어. 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안다. 넌 자기가 준 것도 빼앗아가. 그리고 그게 자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해.”

세아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카페의 직원이 눈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누군가의 일은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이제 가.”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를 보지 않으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것이 약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아는 그걸 견딜 수 없었다. 강리우의 표정이 자신을 다시 끌어당기기 전에. 다시 자신을 담금질하기 전에. 다시 자신을 마도로 만들기 전에.

“세아…”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 감정이 진짜인지 조작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구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분하는 순간, 자신이 다시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그 검은 호수 안으로.

“더 이상 날 이름으로 부르지 마. 넌 그럴 권리가 없어.”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은 자신에게도 방어막이 되는 말이었다. 강리우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주문처럼. 마치 마법처럼.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강리우와 얼마나 닮았는지. 자신도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말의 힘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래서 자신이 더 빨리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아가 일어섰다. 그리고 카페를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강리우가 자신을 따라올까봐. 강리우가 자신의 손목을 잡을까봐. 강리우가 자신을 다시 그 검은 호수 안으로 끌어당길까봐.

밤의 강남역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녁 8시 반, 퇴근 시간과 외출 시간이 겹치는 시간대. 세아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마치 물결을 헤치는 배처럼. 마치 역류하는 강물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자신은 혼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강남역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밤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니, 아직 8시 반이었다. 하지만 세아의 내부 시계는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오래된 자아가 죽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세아는 알았다.

그리고 세아의 손가락은 여전히 3초마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자신의 분노. 자신이 이제 느낄 수 있게 된 감정. 그리고 그 분노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마치 불처럼. 마치 생명력처럼. 마치 자신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강남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친 유리창에서 봤다. 자신은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울고 있었다. 마치 엄마처럼. 해 위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했던 엄마처럼. 물 위에서 자신을 안기 위해 울음을 참았던 엄마처럼.

그리고 그 침묵의 울음이, 그것이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강리우가 주지 않은 것. 강리우가 만들지 않은 것. 강리우가 통제하지 않은 것. 오직 자신의 것. 자신의 슬픔. 자신의 분노. 자신의 눈물.

“미안해요.”

옆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세아의 눈물을 본 듯.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는 30대 정도로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도 슬픔의 자국이 있었다.

“괜찮아요. 다들 그럴 때가 있어요.”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세아에게 휴지를 건넸다. 세아는 그것을 받았다. 낯선 사람의 따뜻함. 그것은 강리우의 따뜻함과 달랐다. 그것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눈물로 번진 자신의 얼굴을. 그것은 마치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다시 만드는 것 같았다.

지하철이 도착했다. 8번선. 홍대로 돌아가는 열차. 세아는 승차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난 여자도 함께 탔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세아는 그 여자의 존재를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열차가 출발했다. 세아는 자신의 휴대폰을 켜서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지만, 그녀는 계속 글자를 입력했다.

“엄마. 나 강남에 안 갔어. 아니, 갔었는데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어. 아버지 얘기해줘서 고마워. 처음 알았어. 그리고…”

세아는 일시 중지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것은 여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낯설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 얼굴을 알아가면 되니까. 자신이 시간을 들여서 자신을 알아가면 되니까.

문자를 다시 읽었다. 지우고 다시 썼다.

“그리고 사랑해.”

손가락이 떨렸지만, 세아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첫 번째 진심 어린 고백. 강리우가 강요하지 않은 첫 번째 사랑 고백.

답장이 즉시 왔다.

“어리석은 것. 그런 건 처음부터 당연했어.”

세아는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여전히 같은 엄마였다. 차갑고, 날카롭고,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엄마. 강리우가 빼앗을 수 없었던 엄마.

그리고 그 다음, 엄마로부터 또 다른 문자가 왔다.

“잘했어.”

단 3글자. 하지만 그것은 세아가 6개월 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자신을 인정하는 말. 자신을 격려하는 말. 자신을 사랑하는 말.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눈물이 또 흘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눈물이었다. 시작의 눈물이었다. 자신으로 돌아오는 눈물이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작은 불꽃들이. 마치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세아는 알았다. 그 불꽃들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들은 단지 빛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빛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지하철은 계속 나아갔다. 홍대를 향해. 자신의 집을 향해. 자신의 삶을 향해. 세아의 손가락은 여전히 3초마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악이 아니라 신호였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신호. 자신이 느낄 수 있다는 신호. 자신이 분노할 수 있다는 신호. 그리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신호.

“나는 내 손가락의 떨림을 안아줄 거야.”

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과 약속하듯. 마치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주문처럼.

“나는 내 분노를 사랑할 거야. 나는 내 눈물을 자랑할 거야. 나는 내 침묵을 존경할 거야.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나의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하철은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세아도 계속 나아갔다. 자신의 삶 속으로. 자신의 미래 속으로. 자신이 될 누군가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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