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28화: 법정 이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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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8화: 법정 이후의 침묵

변호사가 마지막 질문을 끝냈을 때, 세아는 이미 진실을 다 말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남겨둘 게 없을 정도로. 반대 심문이라고 불리는 것이 시작되자, 강리우의 변호사가 일어섰다. 그 사람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세아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 보였다. 마치 그의 몸 전체가 의문부호인 것처럼.

“증인께서는 피고가 당신을 ‘통제’했다고 주장하셨는데, 그것이 사랑의 표현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 변호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증언을 뒤집으려는 시도였다. 자신의 상처를 다시 쓰려는 시도였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의미로.

“아니요.”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피고는 당신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습니다. 당신의 형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치료했습니다. 그것들도 통제의 일부라고 생각하십니까?”

변호사가 계속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자신이 진실을 밝혀내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아는 침을 삼켰다. 그것은 자신이 준비한 질문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준비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강리우는 정말로 그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세아는 자신을 더 깊이 묻어버려야 했다.

“돈으로 통제하는 것도 통제입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그 돈을 거절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변호사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의 정확한 정조. 그것이 자신의 목을 졸라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절했어야 한다. 그렇다. 거절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도현이의 학비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은 어머니의 의료비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은 자신이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강리우가 원하던 것이었다. 자신이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증인께서 당신이 ‘타고 있다’고 표현하셨는데, 그것이 당신이 느꼈던 감정의 강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당신이 피고를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그제서야 세아는 이해했다. 이것이 반대 심문의 기술이라는 것을. 자신의 말을 가져가서 그것을 정반대의 의미로 뒤집는 것. 자신의 상처를 다시 쓰는 것. 자신의 진실을 자신의 거짓으로 만드는 것.

“사랑과 고통은 다릅니다.”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확실했다.

“하지만 때로는 같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변호사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것은 제안이었다. 또는 유혹이었다. 자신의 증언을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로 바꾸라는 제안.

세아는 법정을 봤다. 판사는 중립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배심원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적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증언을 적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변호사의 질문을 적고 있는 것일까. 또는 둘 다를 적고 있으면서 어느 것이 더 설득력 있는지 비교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과 고통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학대입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해늘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법정에서 직접 들은 게 아니라, 타투샵의 반지하에서 들었던 말. 손에 바늘을 들고 있던 해늘의 목소리.

변호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피고석 쪽을 바라봤다. 강리우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손가락들은 떨리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미 초월해 있다는 듯이.

법정을 나오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세아는 변호사를 따라 걸었고,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졌다. 질문들이 날아왔다. 하지만 세아는 어느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닫혀 있었다. 또는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할 수 없었다. 증인석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해버린 후, 남은 것은 껍질뿐이었다.

로비에서 해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세아를 봤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그 손의 터치만으로 세아는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땠어?”

해늘이 물었다. 차 안에서. 서울 시내로 돌아가는 길.

“말이 안 돼.”

세아가 대답했다.

“뭐가?”

해늘이 물었다.

“내가 한 말들이. 내가 증인석에서 말한 말들이.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그게 정말 진실인지 확신이 안 서.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 같아. 내 목소리가 아니라.”

세아가 말했다. 손가락들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라이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 강리우가 너한테 폭력을 썼어? 진짜로?”

해늘이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럼 그게 진실이야.”

해늘이 말했다. 목소리는 단순했고 명확했다. 변호사의 목소리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근데 변호사가…”

세아가 시작했지만, 해늘이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추게 했다.

“변호사는 돈을 받고 말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의 직업은 진실을 지키는 게 아니라, 자기 의뢰인을 지키는 거야. 반대로 너는 뭐야? 너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증인석에 앉은 거야. 그럼 누가 더 힘내야 돼?”

해늘이 말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서울의 거리들이 지나갔다. 강남의 빌딩들. 강북의 주택들. 한강의 물. 모든 것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시간도 흘러가야 한다는 신호처럼.

“판결은 언제 나와?”

해늘이 물었다.

“3주.”

세아가 대답했다.

“그 동안 뭐 할 거야?”

해늘이 물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 3주 동안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 잠? 음악?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자신에게는 불가능해 보였다. 마치 증인석에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낸 후, 남은 것이 진공뿐인 것처럼.

“타투 맞을 거야?”

해늘이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에 뭔가가 울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가슴 속에 손을 넣어서 뭔가를 핥아내는 것처럼.

“응.”

세아가 대답했다.

“뭐 할 거야? 어디에?”

해늘이 물었다.

세아는 생각했다. 이전의 타투들. 쇄골 아래의 타투. 팔의 타투. 모든 것이 이전의 자신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제 새로운 타투는 뭘 표시해야 할까. 증인석에서의 자신을 표시해야 할까. 아니면 증인석 이후의 자신을 표시해야 할까.

“어디에든.”

세아가 마침내 대답했다.

해늘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가 아니라, 인정의 미소였다. 자신이 세아를 이해했다는 인정의 미소.

그들이 합정역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한강 위의 하늘이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하늘에 불을 붙인 것처럼.

“세아.”

해늘이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응?”

“너 혼자 고시원에 있지 말고, 가끔 타투샵에 와. 알겠지?”

해늘이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해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아는 혼자가 되고 싶었다. 3주 동안. 판결이 나올 때까지. 그 시간 동안 자신이 뭐가 되어가는지를 보고 싶었다. 불이 꺼지는지, 아니면 다시 피어오르는지를.

고시원에 돌아왔을 때, 세아는 즉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들이 다시 보였다. 그것들은 지난 3일 동안 더 자라났을 것이다. 보이지 않을 때도 자라나는 것들처럼. 세아는 그 자국들을 봤다. 하나하나를 세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을 세는 것이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전화가 울렸다. 도현이였다. 시간은 오후 4시 23분.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누나. 잘됐어?”

도현이의 목소리는 신경쓰는 목소리였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근데 그게 진짜야? 법정에서 모든 걸 말했어?”

도현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다시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 도현이의 걱정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나. 미안해.”

도현이가 말했다.

“뭐가?”

세아가 물었다.

“모든 게. 내가 너한테 부담이 되고 있다는 거. 내가 너를 묶어두고 있다는 거. 그리고 너는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었을 때는 다르다. 누군가가 직접 말해줬을 때는 다르다. 그것이 자신이 이미 아는 사실이 되는 것이다.

“미안하지 말아. 넌 뭐도 안 했어.”

세아가 말했다.

“그것도 거짓이잖아.”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침을 삼켰다. 아이는 언제부터 이렇게 정확해진 걸까. 또는 자신이 그렇게 만든 걸까.

“응. 거짓이야. 넌 많이 했어. 그래서 미안해.”

세아가 말했다.

“그럼 뭐 할 거야? 지금부터?”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계속 봤다. 하나, 둘, 셋. 계속 세고 있었다.

“모르겠어.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 같아.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뭐 할지 생각해봐야겠어.”

세아가 말했다.

“그게 3주냐?”

도현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럼 3주 동안 뭐 할 거야? 편의점?”

도현이가 물었다.

“아니. 그냥… 있을 거야. 그것만.”

세아가 말했다.

도현이는 다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자신의 이해라는 신호라는 것을 세아는 알고 있었다.

“누나. 사랑해.”

도현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받았다. 그 말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면서 뭔가가 녹아내렸다. 또는 타고 있었다. 아니면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응. 나도.”

세아가 대답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고시원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직 세아의 숨소리만 남았다. 그리고 천장에서 들리는 물소리. 위층 사람이 샤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빗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라이터를 찾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불을 켜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에서 불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손가락은 불을 만들 수 없다. 오직 불을 켤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뭐였을까. 불을 켜는 손가락인가. 아니면 불 자체인가. 아니면 불이 타고 있는 무언가인가.

세아는 손을 들어 천장을 봤다. 곰팡이 자국들이 손가락 사이로 보였다. 그 손가락들은 떨리지 않고 있었다. 증인석에서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진실을 다 말해버린 후, 더 이상 떨릴 이유가 없다는 듯이.

밤이 깊어갔다. 고시원의 반지하 창문으로는 행인들의 다리만 보였다. 누군가는 빨리 걸어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걸어간다. 모두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세아만 이곳에 있었다. 3주 동안. 판결이 나올 때까지.

그 사이에 자신이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호사도 모르고, 판사도 모르고, 도현이도 모르고, 해늘도 모른다. 오직 세아만이 알 수 있다. 또는 알아야 한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강리우의 손가락을 다시 봤다. 증인석에서 본 그 손가락들. 떨리지 않는 손가락들. 자신의 손가락들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들. 하지만 그 둘은 이제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트라우마의 언어로. 법정의 기록으로. 판결의 대기 속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세아는 그 불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 속에서. 또는 고시원의 벽 속에서. 또는 전체 서울의 어딘가에서. 그 불이 타오를 때까지, 세아는 그것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다.

3주. 그 기간은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길었다. 마치 모든 시간이 그렇듯이.

# 판결을 기다리며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화면에 떠 있는 도현이의 연락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맴돌았다. 마침내 누르자,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목구멍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여보세요?”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여전히 어렸다. 세아의 남동생.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목소리. 하지만 최근 몇 개월간 그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무거운 것을 계속 짊어지다 보니 목도 함께 내려앉은 것처럼.

“응, 나야.”

세아는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도 낯설게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강경함을 가장한 목소리.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방어막이었다. 도현이가 자신의 흔들림을 보지 않도록.

“뭐야, 뭔가 있어? 목소리가…”

도현이가 물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세아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그냥…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 같아.”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법정에서 받은 심문처럼, 자신의 말도 자신에게 증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판결을 앞두고,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판사가 판단할 때까지 생존하는 것뿐이었다.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뭐 할지 생각해봐야겠어.”

세아가 덧붙였다. 창밖을 통해 밤거리가 보였다. 고시원의 반지하 방에서 보이는 세상은 항상 다리부터 시작된다. 빨간 운동화, 검은 구두, 회색 스타킹. 누군가는 빠르게 걸어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걸어간다. 모두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들은 목표가 있다. 일터로 가거나, 집으로 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거나. 하지만 세아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그게 3주냐?”

도현이가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3주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마치 모든 기간이 그렇듯이, 그것은 상황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드는 신축성 있는 개념이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간결한 대답.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도현이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판결 공고일까지 정확히 삼주일이라는 것을. 변호사도 말했고, 법정 직원도 확인해줬고, 인터넷에도 떠 있었다. 하지만 알아도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은 항상 더 길고, 더 무겁고, 더 복잡했다.

“그럼 3주 동안 뭐 할 거야? 편의점?”

도현이가 물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세아가 해야 할 일. 먹을 것을 사고, 버티고, 숨쉬고, 잠을 자고, 또 다시 깨어나는 일. 이 고시원에서, 또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하지만 도현이의 목소리 속에는 다른 질문도 숨어 있었다. ‘누나, 넌 정말 괜찮아? 이 모든 게 끝난 후에는 뭐가 될 거야? 나는 어떻게 해야 돼?’

“아니. 그냥… 있을 거야. 그것만.”

세아가 말했다. 창밖으로 또 다른 다리가 지나갔다. 누군가의 발걸음. 빠르고, 결정적이고, 방향이 정해진. 반면 세아의 발걸음은 고정되어 있었다. 이 방에. 이 고시원에. 이 3주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전화선을 통한 침묵. 그것은 불편함이 아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침묵이 도현이의 이해라는 신호라는 것을.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침묵으로 전달하는 방식. 법정에서도 그렇게 했다. 증인석에 앉아, 말해야 할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누나. 사랑해.”

도현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말은 갑작스러웠고, 그래서 더욱 무거웠다. 평소처럼 농담 섞인 말도 아니고, 뭔가 미안해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냥 순수한 고백.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누나를 향한 단순한 사랑의 선언.

세아는 그 말을 받았다. 휴대폰을 귀에 더 밀착시켰다. 도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이 자신의 몸을 통과할 때, 뭔가가 녹아내렸다. 또는 타고 있었다. 아니면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얼음과 불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응. 나도.”

세아가 대답했다. 그 말은 충분했다. 그것이 이 대화의 끝이었다.

전화가 끊어졌다. 스크린이 검어졌다. 고시원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직 세아의 숨소리만 남았다. 가쁜 숨. 정상적이지 않은 숨. 마치 물 위에서 헤어치고 있는 사람의 숨처럼.

그리고 천장에서 들리는 물소리. 위층 사람이 샤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빗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 물소리 속으로 자신을 떨어뜨렸다. 함께 흘러가고 싶은 심정으로.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좁은 방 안을 걸었다. 라이터를 찾아야 했다. 담배를 피워야 했다. 연기를 들이마셔야 했다. 그것이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터가 없었다. 어디에? 책상 위? 침대 옆? 창문틀? 어디도 아니었다. 아, 맞다. 어제 외출할 때 가져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또 다른 것을 잃어버렸다. 세아는 손가락으로 불을 켜려고 했다. 마치 마술사처럼. 손가락을 튕기면 불이 일어날 것처럼.

하지만 손가락에서 불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손가락은 불을 만들 수 없다. 오직 불을 켤 수 있을 뿐이다. 마찰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뭐였을까. 불을 켜는 손가락인가. 아니면 불 자체인가. 아니면 불이 타고 있는 무언가인가.

증인석에서 자신의 손가락들은 떨렸다. 질문받을 때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당신은 그것을 목격했는가요?’ ‘당신은 그것을 원했는가요?’ 매 질문마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그 떨림이 거짓의 신호인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진실이 너무 컸을 때의 두려움.

세아는 손을 들어 천장을 봤다. 곰팡이 자국들이 손가락 사이로 보였다. 검은 자국들. 습기가 만든 흔적들. 이 방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들. 그 손가락들은 떨리지 않고 있었다. 증인석에서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진실을 다 말해버린 후, 더 이상 떨릴 이유가 없다는 듯이.

밤이 깊어갔다. 고시원의 반지하 창문으로는 행인들의 다리만 보였다. 누군가는 빨리 걸어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걸어간다. 누군가는 신나는 발걸음으로, 누군가는 지쳐 있는 발걸음으로. 모두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목표가 있거나, 또는 그저 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세아만 이곳에 있었다. 이 좁은 방에. 3주 동안. 판결이 나올 때까지.

그 사이에 자신이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호사도 모르고, 판사도 모르고, 도현이도 모르고, 해늘도 모른다. 해늘.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아팠다. 해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도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버렸을까.

오직 세아만이 알 수 있다. 또는 알아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뭘 원했는지. 자신이 무죄인지 유죄인지. 판사는 법에 따라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의 심장을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책임이었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곰팡이 자국들이 마치 별처럼 보였다. 밤하늘의 별들. 하지만 그것은 별이 아니라 부패의 흔적이었다. 습기가 만든 균. 생명력 없는 것들의 흔적.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그 사이에 강리우의 손가락을 다시 봤다. 증인석에서 본 그 손가락들. 떨리지 않는 손가락들. 자신의 손가락들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들. 하지만 그 둘은 이제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트라우마의 언어로. 법정의 기록으로. 판결의 대기 속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둘 다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밤 열두 시.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시간. 세아는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무도 연락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말을 다 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변호사와의 면담에서. 경찰서에서.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세아는 그 불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 속에서. 또는 고시원의 벽 속에서. 또는 전체 서울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그 불이 타오를 때까지, 세아는 그것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을 꺼낼 수도 없었다.

창밖으로 또 다른 발걸음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집으로 가고, 누군가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누군가는 새로운 만남을 향해 가고 있다. 세아는 그 발걸음의 소리를 들었다. 아스팔트 위의 발자국. 시간의 증거. 흘러가는 것의 증거.

3주. 그 기간은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길었다. 마치 모든 시간이 그렇듯이. 과거는 항상 너무 길고, 미래는 항상 너무 짧다. 현재만이 정확한데, 그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판결을. 자신의 끝을. 또는 새로운 시작을.

세아는 그 사이의 3주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깼다. 오전 6시. 햇빛이 반지하 창문으로 들어오기 전, 그 회색 시간대에. 마치 자신의 몸이 판결의 시간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했다. 물로 얼굴을 씻고, 검은 커피를 마시고, 창밖의 발걸음을 센다. 몇 개의 발걸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 후, 또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의 곰팡이를 센다.

도현이는 이틀에 한 번씩 전화를 했다. 항상 같은 질문으로. “뭐 해? 밥 먹어?” 그리고 세아는 항상 같은 대답으로. “응. 괜찮아.” 거짓이었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변호사는 판결 하루 전에 연락했다. “준비하세요. 판사는 예측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 측 증거도 충분합니다.” 그 말은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세아는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판결의 날이 왔다.

법정은 여전히 차갑고, 엄숙했다. 판사가 입장했을 때 모두가 일어섰다. 세아도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는 순간, 자신의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판사가 말했다. 판결문을 읽었다. 법적 용어들. 사건의 경위. 증거 검토.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고인 세아에게…”

그 순간, 세아의 귀는 작동을 멈췄다. 판사의 입이 움직이는 것은 보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대신 들렸던 것은 자신의 심장음이었다. 두근거리는 소리. 규칙적이고, 절망적이고, 살아있다는 증거.

그 이후의 일들은 흐릿했다. 변호사가 뭔가를 말했고, 누군가가 축하했고, 법정을 나왔고,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밤이 왔다. 고시원의 반지하 방.

세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판결은 났다. 하지만 무엇이 판정되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자신이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판결이 유죄든 무죄든 상관없이.

창밖으로 또 다른 밤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어딘가로 가고 있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고,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걸어가고 있다.

세아는 손을 들어 천장의 곰팡이를 봤다. 이제 그것들이 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곰팡이였다. 습기가 만든 흔적. 살아가는 것의 증거.

그리고 세아는 느꼈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불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언제 꺼질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분명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3주는 끝났다. 하지만 다른 3주가 시작되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3주. 그리고 또 다른 것들. 판결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세아는 이제 알고 있었다. 판결은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다음 날을. 그 다음 날을.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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