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07화: 손가락 사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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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7화: 손가락 사이의 시간

도현이의 목소리가 끝나고 남은 것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도현이의 모든 것이 있었다. 엄마를 걱정하며 밤새 깨어 있던 밤들. 학원 가는 길에 세아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그 입술. 전화를 받지 않는 누나에게 계속 문자를 보냈을 그 손가락들.

세아는 도현이를 바라봤다. 도현이의 얼굴. 도현이의 눈. 도현이는 세아를 보고 있었지만, 마치 세아를 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세아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분노 너머의 무언가. 자신의 상처 너머의 무언가.

“나한테 맞아. 화내.”

세아가 말했다.

“뭐?”

도현이가 물었다.

“네가 화낼 권리 있어. 진짜로. 나한테 화내. 나한테 소리 질러. 나를 때려도 돼. 근데 나는 너한테 뭔가 설명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숨을 한 번 깊게 쉬었다. 그 숨이 나올 때, 세아는 자신이 오래 동안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숨을 참고 있었다. 강리우를 만난 그 날부터. 아니, 그보다 더 전부터. 서울에 와서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부터.

“강리우라는 사람이 있었어.”

세아가 말을 시작했다.

도현이가 움직였다. 고개를 조금 들었다. 세아의 말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은 움직임.

“나를 만났어. 처음엔 좋은 사람처럼 보였어. 나를 도와준다고 했어. 나의 음악을 지켜준다고 했어. 그리고 내가… 멍청했던 거야. 그 말을 믿었어. 정말로 그 사람이 날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세아가 계속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계속했다. 세아는 도현이가 들어야 할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세아가 엄마에게 말했던 것과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엄마에게는 세아가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보여줬다면, 도현이에게는 세아가 책임자로서의 자신을 보여줘야 했다.

“그 사람은 나를 조종했어. 내 음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 그리고 내가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자, 날 협박했어. 날 다치게 했어. 날 한강 다리로 데려갔어. 그리고…”

세아가 말을 멈췄다. 도현이의 얼굴을 봤다. 도현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짜로. 마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리고 뭐?”

도현이가 물었다.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경찰에 신고했어. 내 모든 이야기를 다 말했어.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은… 더 이상 날 할 수 없어. 더 이상 누구도 할 수 없어.”

세아가 말했다.

도현이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세아의 말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마치 도현이의 뇌가 세아의 말을 처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누나가…”

도현이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쳤다.

“내가 모르는 게 많았어. 너무 많았어. 그래서 네가 혼자 다 짊어지게 된 거야. 엄마 걱정. 내 걱정. 그리고 너 자신의 안전까지.”

세아가 말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었어?”

도현이가 물었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진짜 질문이었다. 자신이 무력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질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넌 그냥 고등학생이었어. 그냥 이 모든 것 속에서 살아가야 했어. 그게 다야. 그래서 넌 충분했어. 정말로. 엄마를 챙기려고 하고, 학원도 다니고, 내 전화를 받으려고 한 그것으로 충분했어.”

세아가 말했다. 도현이를 보면서. 도현이의 눈을 직접 보면서.

“그런데 누나는?”

도현이가 물었다.

“나는…”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끝내지 못했다. 자신이 뭐였는지. 자신이 뭘 한 건지. 자신이 뭘 해야 했는데 못 했는지. 그것을 말하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했다.

제주의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낮이 끝나가고 있었다. 해는 수평선에 가까워져 있었고, 빛은 더 이상 노란색이 아니라 빨간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마치 세아의 가슴이 타오르는 것처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세아가 말했다.

“뭘?”

도현이가 물었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내가 뭘 원하는 건지.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지. 그런 것들.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너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밴드도 하고, 그렇게 너의 길을 찾아가고 있어. 근데 나는…”

세아가 말했다.

“누나는?”

도현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계속 누군가의 것이었어. 아버지의 딸. 엄마의 딸. 그 다음엔 강리우의… 뭔가. 그리고 이제는? 경찰의 증인. 법원의 피해자. 그런 식으로 계속 누군가의 것으로만 정의되고 있어.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 내 이름이 뭔지도 가끔 헷갈려. 정말로.”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진짜로. 세아는 가끔 거울을 봤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신의 얼굴을 봤을 때 낯설었다. 마치 그 얼굴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도현이가 천천히 세아에게 다가갔다. 세아의 손을 보고. 세아의 손가락을 본다. 세아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본다.

“누나의 손이 떨려.”

도현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도현이가 자신의 손을 세아의 손 위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세아의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씩.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마치 세아의 손이 피어나는 것처럼.

“나는 누나를 모르는 누나로 만나고 싶지 않아.”

도현이가 말했다.

“뭐라는 거야?”

세아가 물었다.

“누나가 지금 여기 있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누나가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누나고 그런 것도 있겠지. 근데 지금 이 순간에는. 누나는 그냥 누나인 거야. 내가 못 본 누나가 아니라. 내가 기다렸던 누나가 아니라. 그냥 이 순간에 여기 있는 누나. 그게 누나야.”

도현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명확했다.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도현이의 얼굴. 도현이의 눈. 도현이는 세아를 보고 있었다. 진짜로. 처음으로 도현이가 세아를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비난으로 보지도 않고, 미안함으로 보지도 않고. 그냥 보고 있었다.

“미안해.”

세아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였다. 자신이 없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자신이 도현이의 기대를 무너뜨렸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도현이가 자신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만 미안해해. 누나. 제발.”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의 손이 도현이의 손 안에서 멈췄다. 떨림이 조금씩 멈추고 있었다. 마치 도현이의 손이 세아의 손을 다시 데우고 있는 것처럼. 마치 도현이의 손이 세아를 다시 지구에 묶어주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제주의 해안도로에서. 저 멀리 바다는 계속 흐르고 있었고, 해는 점점 더 내려가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고, 먼저 나타나기 시작한 별들이 하나둘 점등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하늘의 불들을 하나씩 켜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세아를 위해 길을 밝혀주는 것처럼.

“집 들어가자.”

엄마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나왔다. 문이 열렸다. 엄마가 문틀에 서 있었다. 세아와 도현이를 보고 있었다. 오래 동안. 마치 자신의 아이들이 정말로 여기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응.”

도현이가 먼저 말했다. 그리고 세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마치 세아가 어디론가 가지 않도록. 마치 세아를 다시 잃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세아는 도현이의 손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낡은 담장을 지나. 페인트가 벗겨진 문을 지나. 어린 시절의 냄새가 나는 집으로. 거실의 소파. 주방의 냄새. 욕실의 곰팡이 자국들. 그것들이 모두 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어제 나갔던 것처럼. 마치 몇 개월이 흐르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가 거실의 불을 켰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안정적으로 밝혀졌다. 거실이 밝아졌다. 그 밝음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 도현이 옆에 있는 자신의 그림자. 엄마 뒤에 있는 자신의 그림자.

“밥 먹어야지.”

엄마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거기서. 그 거실에서.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경찰서에서 증언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리우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세아의 목소리였다. 가장 평범한 “응”이라는 한 글자. 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도현이는 세아를 거실의 소파로 이끌었다. 세아를 앉혔다. 마치 세아가 깨지기 쉬운 것처럼. 마치 세아를 더 이상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처럼.

“피곤해?”

도현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여기서 좀 쉬어. 내가 엄마 도와서 밥 할게.”

도현이가 말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엄마와 함께. 주방의 불이 켜졌다. 냄비 소리. 물 끓이는 소리. 나이프로 채를 자르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거실로 들려왔다. 일상의 소리. 집의 소리. 가족의 소리.

세아는 소파에 앉아 그 소리들을 들었다.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이 이 소리들을 잃어버렸고, 지금 다시 찾은 것처럼. 마치 자신이 오래 동안 다른 세계에 있었고, 지금 다시 돌아온 것처럼.

거실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안정적으로 밝혀졌다.

세아의 손이 소파 옆에 있었다. 떨림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천천히 세아의 손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세아를 천천히 다시 살려내고 있는 것처럼.

주방에서 엄마와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가 뭔가 웃기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가 그것에 답하고 있었다. 완전하지 않은 웃음. 완전하지 않은 대화. 하지만 그것은 충분했다. 정말로. 그것들이 충분했다.

세아는 눈을 떠서 주방을 봤다. 엄마와 도현이가 함께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없어도 괜찮은 것처럼. 마치 세아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세아가 돌아왔으니까 이제 뭔가가 달라질 것처럼.

“누나, 밥 먹을 때 뭐 먹고 싶어?”

도현이가 거리에서 물었다.

“뭐든.”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세아는 이 순간에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이 뭐든 상관없이. 맛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세아를 살아 있게 했다.

“반찬은?”

엄마가 물었다.

“뭐든.”

세아가 다시 대답했다.

“미역국 해줄까?”

엄마가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엄마는 이미 세아를 위해 미역국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언제 돌아올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세아를 위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세아는 소파에 누웠다. 거실의 천장을 봤다. 천장에 물때가 있었다. 물이 샌 자국. 오래된 집의 흔적. 하지만 그 천장이 세아에게는 안전해 보였다. 그 천장 아래에서 세아는 죽지 않았다. 그 천장 아래에서 세아는 살아남았다.

주방에서 물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역국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아는 그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고. 손을 제주 공기에 맡기고. 자신이 정말로 여기 있다는 것을 천천히 믿기 시작했다.

도현이가 거실로 나왔다. 세아를 봤다.

“누나 자?”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동안 잠들지 못했던 사람의 깊은 수면. 마치 자신의 몸이 마침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몸이 도현이를 신뢰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도현이는 거실의 담요를 꺼내 세아를 덮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세아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마치 이 순간을 영원히 지키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제주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별들이 더 밝아지고 있었다. 해는 완전히 져 있었다. 바다는 검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거실의 형광등은 계속 밝았다. 거실 안은 따뜻했다. 미역국의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아는 마침내 쉬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밤.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 밤. 그런 밤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12,847자]

# 살려내고 있는 것처럼

제주도의 바다 냄새가 밖에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소금기 있고 습한, 그렇지만 어딘가 포근한 냄새. 세아는 소파에 누워서 천천히 그 냄새를 마셨다. 살아 있다는 신호.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 마치 자신의 폐가 처음으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 달, 아니 더 오래 동안 세아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깊이 있는 숨을 마신 적이 없었다.

눈을 감은 채로 세아는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약했지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이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감각이 손 전체로 퍼져나갔다. 팔뚝으로. 어깨로. 그리고 가슴으로. 세아는 자신의 가슴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규칙적으로, 계속해서, 변함없이.

“살려내고 있는 것처럼.”

세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몸에게. 혹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게. 이 몸이 자신을 살려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믿기 시작하는 것.

주방에서 엄마와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우면서도 먼, 그렇지만 확실히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 세아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도현이, 이 미역은 어제 불린 거야. 너무 푹 불려있지?”

엄마의 목소리였다. 실제로 미역국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는 목소리. 집중하고 있는 목소리.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모든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그 특별한 톤.

“어, 엄마. 미역이 뭐 해요?”

도현이가 웃으며 물었다. 열여섯 살 남자아이의 목소리. 조금 변성이 진행 중인, 하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목소리. 세아는 도현이의 웃음을 들었다. 어떤 특정한 농담 때문이 아닌, 그냥 엄마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서 나오는 웃음.

“미역이 뭐하긴, 우리 누나 위해 맛있게 만들어야지.”

엄마가 대답했다. 그 말 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기다림. 걱정. 그리고 희망.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도현이의 웃음도 조금 과하게 큰 것 같았다. 마치 자신들이 정상인 척 연기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충분했다. 정말로.

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움직임이 조금 어색했다. 오래 누워 있었던 몸이 깨어나는 과정. 근육들이 다시 신호를 받는 과정. 뼈들이 다시 제 무게를 지탱하기 시작하는 과정. 이 모든 것이 마치 새로운 탄생처럼 느껴졌다.

소파에서 일어나 세아는 주방을 바라봤다. 엄마와 도현이가 함께 서 있었다. 엄마는 미역을 헹굼이에 헹구고 있었고, 도현이는 그 옆에서 무언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마도 파일 것이다. 세아는 일주일 전만 해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세아는 이 집을 떠나 있었다. 혹은 이 집에 있으면서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이 따뜻한 주방의 풍경은 세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세아는 이 풍경에 속해 있었다.

“누나, 밥 먹을 때 뭐 먹고 싶어?”

도현이가 갑자기 물었다. 세아를 본 것이다. 거실 소파에서 일어난 세아를 발견한 것이다. 도현이의 얼굴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놀람? 기쁨? 안도? 모든 감정이 섞여 있었다.

“뭐든.”

세아가 대답했다. 그 대답이 거짓인지 아닌지, 세아 자신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짓 같지는 않았다. 세아는 정말로 이 순간에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맛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세아를 살아 있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찬은?”

엄마가 물었다. 물음표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선언에 더 가까웠다. 엄마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엄마는 이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뭐든.”

세아가 다시 대답했다.

“미역국 해줄까? 네가 좋아하는.”

엄마가 말했다. 그것은 명백히 질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확인이었다. 엄마는 이미 미역국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헹군 미역은 물에 적셔져 있었다. 국물을 낼 멸치는 아마도 이미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딸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혹은 알고 싶었다. 혹은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언제 돌아올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좋아.”

세아가 대답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세아는 엄마의 미역국을 좋아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아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인 것 같았다. 열두 살 때. 아니, 더 작을 때부터인가. 엄마의 손으로 만든 음식. 그것만으로도 세아를 살려낼 수 있는 것 같았다.

도현이가 환하게 웃었다. 세아의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형아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미역국.”

도현이가 말했다. 아, 도현이도 함께 만든다는 뜻이었다. 세아는 도현이를 바라봤다. 몇 살이었을까? 세아가 마지막으로 집에 있을 때 도현이는 열세 살이었다. 지금은 열여섯? 열일곱? 아이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나이. 세아는 그 시간들을 놓쳤다. 도현이의 성장을 놓쳤다. 그렇지만 지금 도현이는 여기 있었다. 세아를 위해 미역국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세아는 소파로 돌아와 누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전처럼 깊은 좌절감 속에서 누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누운 것이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거실의 천장에는 물때가 있었다. 오래되고, 낡고, 여러 번 수리했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는 천장.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는지를 증명하는 천장.

하지만 그 천장 아래에서 세아는 죽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했다. 그 천장 아래에서, 이 좁은 거실에서, 이 낡은 집에서 세아는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이 천장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 집을 초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아에게 이것은 안전함이었다. 이것은 집이었다. 이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주방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신경을 곤두세운 듯한, 아주 세한 소리였지만, 세아의 귀에는 명확하게 들렸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올려지고, 물이 천천히 데워지고,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소리. 미역국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제주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 그것은 따뜻했고, 습했고, 소금기가 있었다. 세아는 그 공기를 천천히 마셨다. 자신의 폐를 채웠다. 자신의 몸 전체를 그 공기로 채웠다.

“내가 정말로 여기 있는 건가?”

세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 자신 자신에게만 하는 질문. 그 질문의 대답은 몸으로 돌아왔다. 가슴의 고동. 폐의 호흡. 피부를 타고 흐르는 혈액. 모든 것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당신은 여기 있다. 당신은 살아 있다. 당신은 돌아왔다.

도현이가 거실로 나왔다. 세아를 바라봤다. 말없는 확인. 누나가 정말로 여기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누나, 자?”

도현이가 물었다.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마치 세아가 다시 사라질까봐 두려운 것처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는 척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었다. 세아의 몸은 지쳐 있었다. 오래 동안 긴장하고, 도망치고, 숨어 있던 몸. 그 몸은 이제 이 거실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잠에 빠져들었다. 오래 동안 올 수 없었던 깊은 잠. 마치 자신의 몸이 마침내 안전하다고 결론지은 것처럼.

도현이는 거실 구석에 놓여 있던 담요를 꺼내 들었다. 겨울 담요는 아니었다. 봄날에 사용하는 얇은 담요. 세아를 깨우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도현이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세아 위에 그 담요를 펼쳤다. 발부터. 그 다음 다리. 그리고 배. 마지막으로 가슴까지. 모든 움직임이 신중했다. 마치 깨어난 새를 다루는 것처럼. 마치 이 순간을 영원히 지키고 싶은 것처럼.

도현이는 담요를 펼친 후, 잠시 세아를 바라봤다. 움직이지 않는 누나. 처음으로 평온해 보이는 누나의 얼굴. 도현이의 얼굴에 무언가가 흘렀다. 눈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도현이는 그것을 손등으로 빠르게 닦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엄마, 누나가 자요.”

도현이가 말했다.

“그래. 많이 피곤했을 거야.”

엄마가 대답했다. 목소리에 뭔가가 섞여 있었다. 안도감. 슬픔. 그리고 희망.

제주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해는 완전히 져 있었다. 하늘은 검게 변해 있었다.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파도의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밤의 제주. 낮의 제주와는 다른, 어딘가 신비로운 제주.

하지만 거실 안은 밝았다. 천장의 형광등이 계속 켜져 있었다. 거실 안은 따뜻했다. 주방의 가스레인지에서 나오는 열.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따뜻함. 가족의 따뜻함.

미역국의 냄새가 거실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국물의 냄새. 미역의 냄새. 그리고 엄마의 손으로 만든 음식의 냄새. 그것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지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홀로가 아니다.

세아는 그 냄새 속에서 자고 있었다. 깊은 수면. 꿈도 없는 수면. 혹은 달콤한 꿈의 수면.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아의 얼굴은 평온했다. 가슴은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손가락들은 담요를 가볍게 움켜쥐고 있었다.

도현이와 엄마는 조용히 국을 만들었다. 말없이. 혹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만. 마치 세아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이 순간의 신성함을 존중하려는 것처럼. 누나가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

밤이 더 깊어졌다. 열 시쯤 되었을 것이다. 혹은 더 늦을 수도 있었다.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 이 순간이었다. 거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자고 있는 딸. 주방에서 미역국을 끓이고 있는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도현이.

“국이 다 됐어.”

엄마가 말했다.

“그럼 밥은?”

도현이가 물었다.

“밥도 지어야지. 누나가 깨어날 때쯤.”

엄마가 대답했다.

엄마는 밥솥으로 향했다. 밥을 씻고, 물을 맞추고, 밥솥을 켰다. 모든 움직임이 자동적이었다. 몇십 년을 반복해온 움직임. 하지만 오늘 밤의 움직임은 특별했다. 오늘 밤의 움직임은 그 누구보다 신중하고, 정성스럽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 깊은 잠 속에서 세아는 무언가를 꾸고 있을 것이다. 혹은 아무것도 꾸지 않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세아는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했다.

밤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도 뭔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준비하고 있었다. 돌아온 딸을 위해. 돌아온 누나를 위해. 그리고 그 돌아옴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누나가 정말로 돌아왔어.”

도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누나가 돌아왔어.”

엄마가 확인했다.

거실에서는 세아가 계속 자고 있었다. 담요에 싸인 채로. 거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따뜻한 집 안에서. 가족의 품 안에서.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밤은 이제 끝났다.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 밤은 이제 없을 것이었다. 세아는 여기서 기다려진다. 여기서 원해진다. 여기서 사랑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살려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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