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화: 숨비소리
세아가 편의점 카운터 뒤에서 처음으로 그 곡을 들은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이었다 — 라디오에서, 자신이 쓴 줄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GS25 합정점의 형광등은 항상 약간 깜빡였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처럼, 아니면 세상이 잠깐씩 이 공간의 존재를 잊는 것처럼. 나세아는 그 깜빡임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여덟 달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각도로 같은 형광등을 올려다봤으니까. 새벽 열두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주 오 일. 야간 알바의 좋은 점은 손님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나쁜 점은 그래서 너무 많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라디오 볼륨은 거의 최소였다. 점장이 틀어놓고 간 채널 — 아무도 듣지 않는, 그러나 아무도 끄지 않는 그런 라디오. 세아는 유통기한 스티커를 붙이다가 손을 멈췄다.
멜로디가 공기를 바꿨다.
정확하게 그런 느낌이었다. 형광등 깜빡임의 주파수가 달라진 것처럼, 편의점의 공기가 갑자기 다른 무게를 가진 것처럼. 세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은 멈춘 채로, 그냥 들었다.
피아노 인트로. 4/4박자인데 3박처럼 느껴지는 리듬 — 엇박이 아니라 숨이 짧아서 그런 것. 그다음 목소리. 여자, 스물셋쯤 됐을까, 허스키하게 처리된 보컬. 가사는 겨울과 창문과 누군가의 이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렴이 왔다.
세아는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스티커 묶음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 이 멜로디가 어디서 왔는지. 새벽 세 시의 고시원 방, 벽에 기대앉아 핸드폰 메모장에 코드를 받아 적던 밤. 창밖에서 비가 왔고, 아래층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고, 세아는 이 멜로디가 좋다고 생각했다. 좋다고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게 자신이 쓴 것 중에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곡이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 없이.
DJ의 목소리가 흘렀다. “지금 들으신 곡은 박소진의 〈창가에서〉였습니다. 이번 주 스트리밍 차트 4위, 진입한 지 이틀 만에 올라왔네요. JYA 엔터테인먼트의 신인이라고 하는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아티스트입니다.”
세아는 카운터에 양손을 짚었다.
차갑다. 카운터 상판이 차갑다. 그리고 형광등이 깜빡인다. 그리고 라디오는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이렇게 평온하게 계속된다는 것이.
그녀는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유통기한 스티커 묶음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나세아가 처음 서울에 온 건 스물둘 때였다.
제주에서 화물선이 아니라 배를 타고 왔다 —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바다를 오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뱃전에 기대서 제주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봤다. 어머니가 해녀복을 입고 물에 들어가는 뒷모습처럼, 섬이 천천히 잠겼다. 세아는 그때 울지 않았다. 울 것 같았는데 눈물이 안 나왔다. 그 대신 뭔가 단단한 것이 가슴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돌멩이 같은 것. 그게 아직도 있다.
서울에서 처음 구한 방은 마포구 합정동의 반지하 고시원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 삼십오만 원. 창문이 하나 있는데 반지하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보였다. 세아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발목은 거짓말을 안 한다. 급하게 걸으면 급하게 걷는 발목이고, 술에 취했으면 취한 발목이고, 연인이 있으면 그 두 쌍의 발목이 가끔 잠깐 멈추는 게 창문에 보였다. 세아는 발목을 보면서 멜로디를 만들었다. 급박한 것, 흔들리는 것, 잠깐 멈추는 것.
지금도 같은 고시원이다. 같은 방은 아니다 — 이 년 전에 같은 건물의 2호로 옮겼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는데 월 이만 원이 더 쌌다. 창문을 포기하고 이만 원을 아꼈다. 그 이만 원으로 제주에 있는 남동생 도현이의 학원비를 보탰다.
이게 세아의 계산법이다. 창문 하나 = 이만 원 = 도현이 수학 학원 한 달치의 절반.
계산을 자꾸 이렇게 하게 됐다. 밥 한 끼를 안 먹으면 편의점 도시락 값 사천오백 원. 사천오백 원이 두 번이면 구천 원. 구천 원이면 어머니 약값 일부. 어머니 약값이 한 달에 십이만 원이다. 그러니까 밥을 하루에 한 번 안 먹으면 한 달에 열여덟 번, 약값의 절반 가까이를 아낄 수 있다.
세아는 이 계산이 잘못됐다는 걸 안다. 그냥 멈추지 못할 뿐이다.
알바가 끝나는 건 아침 여섯 시였다. 세아는 편의점 앞에서 오 분쯤 서 있었다. 하늘이 아직 다 밝지 않은 색 — 짙은 회색과 연한 파랑 사이 어딘가. 합정동의 새벽은 조용했다. 홍대에서 새어나오는 마지막 음악 소리가 한 블록 너머에서 들렸다. 어떤 밴드가 막바지 세트를 하고 있는 건지, 일렉 기타의 잔향이 담벼락에 부딪혀서 왔다.
세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걸었다.
고시원까지는 걸어서 십 분. 택시를 타면 이 분인데 기본요금이 사천팔백 원이니까 걷는다. 이 정도 계산은 이제 자동이다. 의식도 안 하고 한다.
골목을 꺾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카카오톡. 도현이었다.
— 누나 아직 살아있어? (새벽 6:03)
세아는 엄지로 답장을 쳤다.
— ㅇㅇ
— 학교 가야 해서 깼는데 오늘 아침에 라디오 틀었거든
— 거기서 좋은 노래 나왔어
— 박소진인가 뭔가 노래인데
— 근데 이상하게 누나 생각났음
— 뭔가 누나가 흥얼거리던 거랑 비슷한 느낌?
— 아 그냥 그럼ㅋㅋ 이따 전화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골목 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회색 줄무늬, 귀 끝이 조금 찢어진 것. 세아가 매일 보는 고양이였다. 이름은 모른다. 붙여주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면 신경을 더 쓰게 되니까.
고양이는 세아를 봤다. 세아도 고양이를 봤다.
“나도 방금 들었어.”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세아도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잠은 두 시간밖에 못 잤다.
누웠는데 천장이 보였다. 창문이 없는 방이라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세아는 그 어둠을 보면서 〈창가에서〉의 코드 진행을 머릿속으로 다시 짚었다. Am – F – C – G. 후렴에서 Em으로 전조. 자신이 선택한 진행이었다. 처음엔 G로 가려고 했는데 Em이 더 아팠다. Em이 더 정직했다.
그 곡을 처음 가져간 건 홍대 클럽에서 알게 된 A&R 중개인 최진혁이었다. 세아가 세션 보컬로 일하는 〈블루 노이즈〉 클럽에 가끔 오는 사람. 언제나 검은 패딩에 AirPods을 한쪽만 꽂고, 명함을 뿌리고 다니는 타입. 어느 날 세아가 세션 끝나고 혼자 연습실 구석에서 코드를 짚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왔다.
“그거 당신이 쓴 거예요?”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가져가도 돼요? 제가 아는 신인 아티스트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때 세아는 뭔가를 물었어야 했다. 크레딧은요, 계약서는요, 저작권은요. 그런 것들을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좋은데”라고 했을 때 — 그 두 글자가 세아의 가슴 안쪽에 있는 돌멩이에 부딪혀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세아는 그 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써가세요.”
그게 다였다.
그 후로 두 달 만에 박소진의 〈창가에서〉가 나왔다. 작곡: 이채린 (사내 작곡팀). 그게 세아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들어간 이름이었다. 세아는 그 크레딧을 보고 최진혁에게 카톡을 보냈다.
— 저 크레딧이 이상한 것 같아서요
최진혁은 하루 뒤에 답장했다.
— 아 그거요 원래 사내 작곡팀으로 올라가요 외부 작곡가 크레딧은 JYA 방식이 그렇거든요 대신 곡비는 계좌로 들어갔잖아요 확인해보세요
계좌를 확인했다. 사십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세아는 그 사십만 원을 어머니 병원비로 보냈다. 그리고 최진혁에게 아무것도 더 보내지 않았다.
그게 여섯 달 전 일이었다. 그사이에 최진혁은 두 번 더 왔다. 두 번 더 세아의 곡을 가져갔다. 세아는 두 번 모두 줬다. 크레딧을 묻지 않고. 이번엔 각각 오십만 원과 오십오만 원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도현이 학교 수학여행 비용을 냈다. 어머니 무릎 수술 예약금을 넣었다. 고시원 밀린 월세를 냈다.
세아는 천장을 보면서 이 계산을 다시 했다. 세 곡 = 백사십오만 원 = 이름 없음. 이 공식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판단하기 전에 잠이 왔다.
오후 다섯 시에 알람이 울렸다.
〈블루 노이즈〉 클럽 세션이 저녁 일곱 시부터였다. 세아는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지 않고, 머리를 묶고, 가방을 들고 나왔다.
클럽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합정에서 홍대 방향으로, 상수역을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블루 노이즈〉가 나왔다. 간판이 낡아서 ‘블’자의 네온이 반만 켜졌다. 루 노이즈. 세아는 그게 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루 노이즈. 뭔가 더 솔직한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면 맥주 냄새와 담배 냄새와 낡은 앰프 냄새가 한꺼번에 왔다. 그리고 저음역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베이스의 진동 — 음악이 귀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먼저 들어오는 느낌. 세아는 이 냄새와 이 진동이 좋았다. 고시원보다 여기가 더 집 같았다. 그게 좀 슬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왔어?”
무대 옆 통로에서 오하늘이 나타났다. 오버사이즈 후드에 왼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 새 타투 작업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팔목 안쪽에 아직 랩이 감겨 있었다.
“응.”
“밥은?”
“먹었어.”
하늘이 세아를 위아래로 봤다. “어디서.”
“…편의점에서.”
“뭐.”
“…삼각김밥.”
“몇 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한숨을 쉬고 자기 가방을 뒤졌다. 편의점 비닐봉지가 나왔다. 참치마요 삼각김밥 두 개와 두부 바 하나.
“먹어. 지금 당장.”
“나중에—”
“야 나세아, 세션 전에 뭔가를 먹어야 목소리가 나온다고. 너 지난주에 마지막 세트에서 소리 갈라진 거 기억 안 해? 그때 밥 안 먹었잖아.”
세아는 삼각김밥을 받아서 뜯었다. 먹으면서 무대 쪽을 봤다. 사운드 체크를 하는 기타리스트가 줄을 조율하고 있었다. D현이 조금 낮았다. 세아는 그걸 귀로 잡아냈다.
하늘이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 박소진 곡 라디오에서 들었어.”
삼각김밥 먹는 속도가 잠깐 느려졌다.
“응.”
“나도 들었어. 좋더라.” 하늘이 세아를 봤다. “그 곡 너 아니야?”
세아는 삼각김밥을 다 먹고 비닐을 접었다. “왜 그런 생각 해.”
“왜냐면 나는 네 멜로디 다 알거든. 10년째.” 하늘이 팔짱을 꼈다. “그 Em 전조. 너 버릇이야. 뭔가 아플 때 Em으로 가잖아.”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레딧은?”
“…사내 작곡팀으로 올라갔어.”
“야.” 하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야, 나세아. 그게 말이 돼?”
“돼.”
“어떻게 돼.”
“곡비 받았어. 사십만 원.”
“사십만 원?!” 하늘이 목소리를 낮추려다 실패했다. 옆에 있던 드러머가 돌아봤다. 하늘이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말했다. “야, 그 곡 지금 스트리밍 차트 4위야. 스트리밍 수익이 얼마가 될 것 같아. 사십만 원이라고?”
“계약서에 사인했어.”
“무슨 계약서를.”
“…최진혁이 보내준 거. 곡 사용 허가 동의서 같은 거.”
“저작권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이마를 짚었다.
“세아야. 저작권 귀속 조항 읽었어?”
“…읽었어.”
“어떻게 돼 있어.”
“JYA 측에 귀속.”
하늘이 한참 세아를 봤다. 세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 시선을 피하면 더 아픈 것 같아서.
“…왜,” 하늘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사인했어.”
“돈이 필요했어.”
그게 전부였다. 세아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두 번째 삼각김밥을 뜯었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하늘은 알고 있었다.
세션은 세 세트였다. 오후 일곱 시, 아홉 시, 열한 시.
〈블루 노이즈〉의 하우스 밴드는 다섯 명이었다. 기타 두 명, 베이스, 드럼, 그리고 세아 — 보컬. 정식 멤버는 아니다. 세션 보컬, 즉 필요할 때 부르는 사람. 메인 보컬이 컨디션이 안 좋거나 더 좋은 공연이 생기면 세아가 들어갔다. 한 달에 열두 번에서 열다섯 번 정도.
오늘은 메인 보컬 준혁이 목이 쉬어서 세아가 전 세트를 맡았다. 세트리스트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커버 여섯 곡, 오리지널 두 곡. 커버는 다 아는 곡들이라 상관없었다. 오리지널은 기타리스트 종수가 쓴 것들.
첫 세트가 시작될 때 세아는 머리를 풀었다.
이것만 한다. 노래할 때만. 이 하나가 세아가 자신에게 허락한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스탠드 앞에 섰을 때 세아의 얼굴이 달라지는 걸 하늘은 안다. 무대 오른쪽 구석 자리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면서 매번 봤기 때문이다. 무표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 표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뭔가 다른 게 들어온다. 마치 평소에는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빛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빛이 나오는 것 같은.
세아는 첫 소절을 불렀다.
홀 안의 대화 소리가 낮아졌다. 모두가 의식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맥주잔을 들다 멈추는 사람, 고개를 드는 사람, 핸드폰을 내려놓는 사람. 세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홀을 압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스며드는 타입이었다. 공기 사이로, 잡담 사이로, 술잔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 어느 순간 거기 있다.
세아는 노래하면서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마이크 너머 어딘가 — 홀의 뒤쪽 벽, 불빛이 닿지 않는 지점을 봤다. 그 어두운 점을 보면서 불렀다. 노래는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오는 것 같았다. 세아가 부르는 게 아니라 세아가 받아쓰는 것 같은.
두 번째 세트가 끝날 무렵이었다.
홀 뒤쪽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세아는 노래 중에는 사람을 잘 안 보는데, 그 얼굴이 눈에 걸렸다. 보면 볼수록 걸리는 타입의 얼굴. 비싼 옷인데 구겨져 있고,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 있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는 남자. 서른 안쪽으로 보였다. 혼자였다.
세아는 그를 보다가 다시 뒤쪽 벽의 어두운 점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래에 집중했다.
세 번째 세트가 끝나고 세아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진짜 좋았어.” 하늘이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마지막 곡에서 고음 처리하는 거, 진짜 소름이었어. 종수 오빠 곡인데 네가 부르니까 다른 노래 같더라.”
“…종수 씨 버전이 더 좋아.”
“아니거든.” 하늘이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로 아니거든. 너는 왜 맨날 남 버전이 더 좋다고 해.”
세아는 머리를 다시 묶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클럽 사장 박민수 씨가 손을 흔들었다. “나세아 씨, 오늘도 수고했어요. 음료수 하나 가져가요.”
“감사합니다.”
냉장고에서 포도 주스를 꺼내면서 돌아서는데 — 누군가 옆에 있었다.
아까 홀 뒤쪽에서 봤던 얼굴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생각보다 컸다. 세아는 162센티미터인데 이 사람은 한 뼘은 더 됐다. 손이 길었다 —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은 손이 재킷 밖으로 살짝 보였는데, 피아니스트 손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마디가 굵고 길쭉한 손가락.
남자가 말했다.
“마지막 곡에서 전조 안 했잖아요.”
세아는 포도 주스를 들고 그를 봤다. 인사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노래 잘 들었어요도 아니었다. 그냥 저게 첫마디였다.
“…네.”
“원곡은 거기서 반음 올라가잖아요. 일부러 안 한 거예요?”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올라가면 너무 화려해져서요.”
“화려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이 곡은 화려하면 안 돼요.”
남자가 세아를 봤다. 판단하는 눈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는 눈 같았다. 수학 문제를 풀고 답을 검토하는 것처럼.
“왜요.”
“이 곡은 결국 포기에 대한 거거든요.” 세아는 포도 주스 뚜껑을 돌렸다. “포기하는 순간이 화려하면 거짓말이잖아요. 포기는 그냥 조용히 해요. 반음 안 올리고,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내는 거예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말한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하늘이 세아의 팔꿈치를 쿡 찔렀다. 세아는 못 본 척했다.
남자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 심플했다.
강리우. A&R — JYA Entertainment.
세아는 명함을 받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 명함을 받으려다가 ‘JYA’ 세 글자를 보고 손이 멈췄다. JYA. 박소진의 소속사. 〈창가에서〉가 나온 회사. 최진혁이 연결해준 곳.
손이 공중에서 잠깐 정지했다가 내려왔다.
“…됐어요.”
남자가 눈을 약간 좁혔다. “명함 거절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그럼 둘째로 보시는 거네요.”
하늘이 옆에서 포도 주스를 들이켰다. 자기 것도 아닌데.
남자는 명함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더 흥미로워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정확하게는 표정이 없는데 눈에 뭔가가 생긴 것 같았다.
“오늘 세 세트 다 봤어요.” 그가 말했다.
“알아요.”
“눈치챘군요.”
“두 번째 세트부터요.”
“…꽤 날카롭네요.”
“세션 보컬이 날카롭지 않으면 무대에서 못 버텨요.” 세아는 그를 봤다. “볼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아니면 저 가야 해서.”
남자가 잠깐 세아를 봤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쓴 곡이 하나 있어요. 〈창가에서〉.”
세아의 포도 주스 쥔 손이 조금 더 세게 쥐어졌다.
“모르는 곡인데요.”
“그래요?” 남자는 세아를 봤다. “그 곡 Em 전조 있잖아요. 후렴에서요. 그게 당신 버릇이에요. 오늘 세 세트 동안 네 번 나왔어요. 같은 패턴.”
세아는 포도 주스를 내려봤다.
포도색이었다. 당연히 포도색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이상하게 선명해 보였다.
“…”
“저는 JYA A&R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그 곡이 어떻게 크레딧이 그렇게 올라갔는지 저도 정확히는 모르는 상황이에요. 알고 싶고요.”
“왜요.”
“왜냐면,” 그가 말했다. “그 곡 같은 걸 쓰는 사람이 세션 보컬로 홍대 클럽에 있으면 안 되거든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아무렇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았는데 — 가슴 안쪽에 있는 돌멩이가 또 그 이상한 소리를 냈다. 누군가 돌멩이를 건드린 것 같은.
“나세아 씨 맞죠?” 그가 물었다. “클럽 사장한테 들었어요.”
“…맞아요.”
“강리우예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 명함은 이미 거절당했으니까. “한 번 얘기할 수 있어요? 지금 말고, 편한 시간에.”
세아는 그 손을 봤다. 피아니스트 손.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손. 이 손이 언제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쳤는지, 그리고 왜 지금은 주머니에 있는지 — 그것이 이상하게 궁금했다.
옆에서 하늘이 작게 속삭였다. “야. 눈 좋다고 했잖아.”
세아는 악수를 했다.
손이 차가웠다 — 세아 손이. 강리우의 손은 따뜻했다. 세아는 그 온도차가 불편했다. 자신의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운지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것 같아서.
“연락처 알려주세요.” 그가 말했다.
“…클럽 사장한테 물어보세요.”
“직접 받고 싶어서요.”
“왜요.”
“직접 받은 연락처로 연락해야 답장을 받을 것 같아서.”
세아는 그를 봤다. 그가 세아를 봤다. 잠깐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는 핸드폰을 꺼내서 번호를 입력하고 저장 없이 그에게 보여줬다.
“저장하세요.”
그가 번호를 자기 핸드폰에 쳤다. “고마워요.”
“…뭘요.”
세아는 포도 주스를 들고 돌아섰다. 하늘이 바로 따라붙었다. 클럽 출구 쪽으로 걸으면서 하늘이 세아 귀에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야. 야야야. 강리우. 강리우잖아.”
“알아.”
“JYA 대표 아들이야. 강민준 대표 아들.”
“알아.”
“너 지금 번호 줬어.”
“알아.”
“왜.”
세아는 클럽 문을 밀면서 말했다. “〈창가에서〉 크레딧 얘기 한다고 했잖아.”
밖은 차가웠다. 합정동의 새벽 한 시. 가로등 불빛이 골목에 길게 누워 있었다.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났다 — 아까 그 회색 줄무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아야.” 하늘이 뒤에서 불렀다. “크레딧 때문이 아니면?”
세아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크레딧 때문이야.”
골목 끝에서 바람이 왔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 다시 묶어야 했는데, 잠깐 그냥 뒀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는 게 이상하게 좋았다. 살아있는 것 같아서. 추운 걸 느끼는 것 같아서.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 방금 입력한 번호였다.
문자였다.
— 강리우입니다. 저장해두세요.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이 초 뒤에 한 개가 더 왔다.
— 좋은 음악이에요. 당신 거.
세아는 그 문자를 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걸었다. 고시원 쪽으로, 가로등 불빛 사이로, 차가운 바람 속으로.
가슴 안쪽에서 돌멩이가 또 그 소리를 냈다.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아까보다 조금 더 컸다.
세아는 그 소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고시원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누웠다. 창문이 없는 방. 어둠이 완벽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스트리밍 앱을 열었다. 검색창에 ‘박소진 창가에서’를 쳤다.
재생 수: 2,847,391.
세아는 숫자를 봤다. 이백팔십사만 칠천삼백구십일. 이 숫자만큼 누군가 이 멜로디를 들었다는 것. 이 숫자만큼 이 Em 전조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
세아는 이어폰을 꽂고 재생을 눌렀다.
피아노 인트로. 박소진의 목소리. 가사는 겨울과 창문과 누군가의 이름에 대한 것. 후렴에서 Em으로 전조.
세아는 천장을 봤다. 천장이 안 보이는 어둠을 봤다.
어머니가 해녀복을 입고 물속으로 들어갈 때, 세아는 항상 숨을 참았다. 어머니가 잠수하는 동안 같이 숨을 참았다. 어머니가 물 위로 올라오면 그때 같이 숨을 내뱉었다. 그게 세아가 어릴 때부터 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숨을 참는 것.
어머니가 물 위로 올라올 때 소리를 질렀다. 숨비소리. 폐 안에 가득 찬 걸 다 내보내는 소리. 살아있다는 소리.
세아는 그 소리를 한 번도 제대로 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창가에서〉의 마지막 소절이 끝났다. 세아는 이어폰을 뺐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을 봤다. 강리우의 문자가 아직 화면에 있었다.
좋은 음악이에요. 당신 거.
세아는 저장 버튼을 눌렀다. 이름을 입력했다.
‘강리우 (JYA — 조심)’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에 딱 한 가지를 생각했다. 그 사람이 — 피아니스트 손을 가진 그 사람이 — Em 전조를 알아챘다는 것. 세 세트 동안 네 번 다. 세아가 의식도 못 하고 하는 버릇을, 처음 본 사람이 세 시간 만에 잡아냈다는 것.
그게 왜 이렇게 무서운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무서운 건지 다른 뭔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 누군가 숨비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아가 물 위로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처음으로 생긴 것 같은.
세아는 그 느낌을 모른 척하고 잠을 청했다.
잘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