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9화: 카메라가 담는 것
두 번째 테이크의 끝에서, 민준은 이준혁의 손가락이 자신의 셔츠 소매를 스치는 것을 느낀다. 첫 번째와는 다른 위치. 첫 번째보다 더 깊숙한 접촉. 마치 배우가 의도적으로 변수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처럼. 또는 두 번째 시도에서는 더 담대해지는 것처럼.
민준의 목소리가 나온다. 대사는 없다. 박미라가 말했듯이, 이것은 거의 순수한 감정의 교환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민준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가. 아니면 그 손에서 물러나고 싶은 본능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좋아, 좋아.”
박미라가 다시 말한다. 모니터 앞에서 그녀의 얼굴은 빛난다. 창작자의 표정. 자신의 비전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 민준은 그 표정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박미라는 좋은 감독이기 때문이다. 좋은 감독은 배우의 진정한 감정을 추출하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영상에 담는다. 영원히.
“컷!”
박미라가 외친다. 이번에는 더 빨리. 마치 더 이상의 테이크가 필요 없다는 뜻처럼.
민준은 세트에서 내려온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준호가 다시 손을 뻗는다. 민준의 팔을 잡는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매니저가 배우를 도와주는 모습.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
하지만 민준은 준호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에 얼마나 강하게 눌러있는지 느낀다. 그것은 도움이 아니다. 그것은 신호다. 견뎌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감독님.”
민준이 박미라에게 다가간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 거의. 거의 정상처럼 들린다.
“뭐가?”
박미라가 묻는다. 그녀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촬영본을 다시 보고 있다.
“제가 흔들렸어요. 감정이 튀어나왔어요. 제어 못 했어요.”
민준이 말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거짓이고, 부분적으로는 진실이다. 그것이 배우의 언어다.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것.
박미라가 비로소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민준을 본다. 그녀의 눈은 예리하다. 감독의 눈. 모든 것을 보는 눈.
“그게 좋은 거야. 그게 바로 이 장면에 필요한 거야. 통제 불능의 감정. 아버지의 손길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약함. 그게 이 캐릭터의 핵심이야.”
박미라가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민준을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그녀가 정확히 맞히고 있기 때문이다. 민준은 정말로 거부할 수 없는 약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배역의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의 약함이었다.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민준이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다.
“왜?”
박미라가 묻는다. 그것은 순진한 질문이 아니다. 감독의 질문. 배우의 동기를 파악하려는 질문.
민준은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진실의 일부를 말한다.
“제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미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더 개선하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신호다.
“좋아. 한 번 더 해보자.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게 해봐. 민준이, 이 장면을 다시 읽어봤어?”
민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자신의 약함을 숨겨왔어. 하지만 이 순간, 그는 그것을 아들에게 드러내려고 해. 손이 나가는 것도 그 때문이야. 하지만 아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해.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가 약한 모습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 둘 사이의 간격. 그것이 이 장면의 비극이야. 한쪽은 연결을 원하고, 다른 한쪽은 거리를 원하고 있는 거야.”
박미라가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민준을 찢어놓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확히 지금 민준과 준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준호는 연결을 원한다. 아, 아니다. 준호는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민준은 알 수 없다.
“알겠어요, 감독님.”
민준이 말한다.
“좋아. 그럼 포지션으로 돌아가.”
박미라가 말한다.
민준은 다시 세트의 반대편으로 간다. 이준혁을 마주본다. 이준혁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하다. 하지만 지금 민준은 그 차분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통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배우의 능력. 그리고 그 통제는 민준에게 향해 있다.
“카메라 롤.”
박미라가 말한다.
“롤링.”
카메라맨이 대답한다.
“액션.”
박미라가 외친다.
이준혁이 움직인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마치 매 걸음이 하나의 의사결정인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슬픔이 있다. 진정한 슬픔인지 연기인지 민준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다. 만약 그것이 진정한 슬픔이라면, 이준혁은 민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만약 그것이 연기라면, 이준혁은 얼마나 정교한 거짓말쟁이인가. 둘 다 위험하다.
이준혁이 민준에게 더 가까워진다. 같은 거리.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이번에는 이준혁의 손이 민준의 어깨가 아니라, 민준의 얼굴을 향한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마치 세상의 모든 시간을 이 한 동작에 쏟아붓는 것처럼.
민준은 그것을 본다. 손가락이 자신의 뺨을 향해 온다. 아버지의 손. 아니, 이준혁의 손. 아니, 정확히는 어떤 배우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고 한다는 것.
민준의 신체가 반응한다. 그의 숨이 얕아진다. 그의 눈빛이 변한다. 그것은 전부 카메라에 담긴다.
“좋아, 좋아. 그 두려움. 그게 정확해.”
박미라가 말한다. 모니터 너머에서. 현실에서.
이준혁의 손가락이 민준의 뺨에 닿는다. 온기가 전달된다. 손가락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다. 또는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라는 것이다. 이 촬영장도 연기다. 박미라도 연기다. 카메라도 연기다. 그리고 자신도 연기다. 그러면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현실은 이미 사라졌는가. 아니면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민준의 눈에서 무언가가 흐른다. 눈물인가. 아니면 그냥 눈물처럼 보이는 연기인가. 이제 그것도 구분할 수 없다.
“컷!”
박미라가 외친다. 이번에는 매우 빠르게. 마치 이 이상 더 진행되면 뭔가 깨질까봐 두려운 것처럼.
민준은 세트에서 내려온다. 그의 얼굴은 축축하다. 진짜 눈물인지 가짜 눈물인지 그도 모른다.
준호가 재빨리 다가온다. 이번에는 공식적인 거리를 무시하고. 그의 손이 민준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민준을 세트 밖으로 끌어낸다.
“잠깐만, 민준이.”
박미라가 말한다. 하지만 준호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를 보호하는 매니저의 일. 또는 뭔가 다른 것.
준호는 민준을 복도로 데려간다. 스튜디오 밖으로. 그리고 야외로.
야외의 공기는 차갑다. 3월의 초봄이지만, 여전히 겨울의 기운이 남아 있다. 민준은 그 공기를 들이마신다. 깊게. 정말 깊게. 마치 자신의 폐를 완전히 비우려고 하는 것처럼.
“뭐 하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르겠어요.”
민준이 대답한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안에서 뭐가 일어난 거야?”
준호가 다시 묻는다.
“연기했어요.”
민준이 말한다.
“거짓말하지 마.”
준호가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있다. 아니, 공포가 있다. 공포를 분노로 감추고 있는 것.
민준은 준호를 본다. 진짜로. 처음으로. 마치 준호가 또 다른 배역인 것처럼.
“형… 그 배우가 저한테 뭘 원하는 거 같아요?”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턱이 조여진다. 마치 답변이 입 안에서 누군가를 상하게 할 것처럼.
“말해줄래요? 제발.”
민준이 다시 물었다.
준호는 한숨을 쉰다. 깊은 한숨. 마치 자신의 폐에 갇혀 있던 무언가를 내보내는 것처럼.
“그 배우는… 그냥 좋은 배우야. 정말 좋은 배우야. 그리고 정말 좋은 배우들은 때때로 자신의 파트너를 미묘하게 조정해. 그 배우의 연기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그것이 전부야.”
준호가 말한다.
“그게 거짓말 같아요.”
민준이 말한다.
“그래. 거짓말이 맞아.”
준호가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인정 속에서, 민준은 뭔가 깨진다. 준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준호 자신도 그것을 안다. 그리고 준호는 그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민준이 안다는 것도 안다.
“이준혁이가 뭘… 원하는 거면서 형은 그걸 허용하는 건데요? 왜?”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민준의 눈을 직시한다. 그리고 민준은 그 눈에서 뭔가를 본다. 공포. 죄책감. 그리고 무력함. 한 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력함.
“왜냐하면… 그 배우는 정말 좋은 배우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배우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가 뭔가를 말하면, 우리도 끝난다.”
준호가 말한다.
그 말이 민준을 찢어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불편한, 피할 수 없는 진실. 연예계는 힘의 위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민준은 그 계층의 맨 아래에 있다.
“그럼 저는… 계속 이렇게 있는 거네요.”
민준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넌 강해질 거야.”
준호가 말했다.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강해지는 방법은 없다. 또는 강해지는 방법은 타인을 약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리고 민준은 그것을 할 수 없다.
“가자. 다시 들어가자.”
준호가 말했다.
“왜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생존하기 때문이야.”
준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민준은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안다. 생존. 그것이 이 산업의 모든 것이다. 성공이 아니라, 생존. 행복이 아니라, 생존. 자존감이 아니라, 생존.
민준과 준호는 스튜디오로 돌아간다. 복도를 지난다. 야외를 지난다. 그리고 다시 세트 안으로.
박미라는 여전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이준혁은 여전히 세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여전히 거기 있다. 모든 것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민준이 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준비됐어?”
박미라가 묻는다. 민준을 본다. 그녀의 눈은 예리하다. 뭔가를 감지하고 있다.
“네. 감독님.”
민준이 대답한다.
그리고 민준은 다시 포지션으로 간다. 세트의 반대편. 3미터의 거리. 그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 것을 알면서.
이준혁이 웃는다. 아주 작은 웃음. 거의 들리지 않는 웃음.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본다. 그것은 승리의 웃음이다.
“카메라 롤.”
박미라가 말한다.
“롤링.”
카메라맨이 대답한다.
그리고 민준은 안다. 이것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기록이다. 영원한 기록. 그리고 그 기록 안에는 이준혁이 민준을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모두 담긴다.
“액션.”
박미라가 외친다.
그리고 민준은 연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다. 이번엔 그냥 항복이다.
제89화 끝
# 제89화: 생존의 논리
## 1부: 결렬
복도의 형광등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민준은 준호와 함께 촬영장을 벗어나 건물의 뒤편으로 나왔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콘크리트 벽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 그림자들이 마치 감옥의 철장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배우는 정말 좋은 배우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배우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가 뭔가를 말하면, 우리도 끝난다.”
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들은 수십 번의 경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깊게 패여 있었다. 눈가의 주름, 입가의 팽팽한 긴장. 이것이 연예계에서 3년을 생존한 대가였다.
민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호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현실의 선언. 이 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냉정한 설명.
“그럼 저는… 계속 이렇게 있는 거네요.”
민준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낯설게 들렸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는 절망이 묻어났다. 깊고, 검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
준호가 민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은 차갑고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넌 강해질 거야.”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들렸다. 준호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주문. 하지만 민준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불가능했을 뿐이다.
민준이 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눈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봤다. 준호처럼 될 자신의 모습. 타협하고, 침묵하고, 생존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자신의 모습.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그것은 진정한 질문이었다.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있는지 알고 싶었다.
준호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그들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멀리서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다. 자동차 경적음, 누군가의 웃음소리, 일상의 계속되는 움직임. 하지만 이곳, 이 좁은 복도 같은 공간에서는 오직 침묵만이 있었다.
“대답이 없기 때문이야.”
준호가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강해지는 방법은… 없어. 또는 있다면, 타인을 약하게 만드는 것뿐이야. 그리고 넌 그걸 할 수 없지.”
그 말은 마치 칼날처럼 민준의 가슴을 헤집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불편한, 피할 수 없는 진실. 연예계는 힘의 위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계는 절대적이다. 누군가가 올라가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 그것은 수학이었다. 도덕이 아니라, 수학.
민준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졌을까? 언제부터 자신의 몸이 자신을 배반하기 시작했을까?
“가자. 다시 들어가자.”
준호가 말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친절한 명령이지만, 그래도 명령이었다.
민준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이미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 있었다. 그 세계의 규칙들이 그의 눈 속에 반영되어 있었다.
“왜요?”
민준이 물었다. 마지막 저항. 마지막 질문.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생존하기 때문이야.”
준호의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대답이라는 것을 민준은 알았다.
## 2부: 깨달음
생존. 그 단어가 민준의 뇌 속에서 반복되었다. 생존. 성공이 아니라, 생존. 행복이 아니라, 생존. 자존감이 아니라, 생존.
이 산업에서 성공은 사치였다. 행복은 꿈이었다. 자존감은 역할극이었다. 남겨지는 것은 오직 생존의 본능뿐이었다. 마치 원시적인 동물처럼. 먹거나, 먹히거나. 그것이 전부였다.
민준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봤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배우 학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속의 그 배우들처럼, 자신도 스크린 위에서 빛날 거라는 꿈. 하지만 3년이 지나면서 그 꿈은 점점 작아졌다. 처음에는 ‘최우수상을 받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 다음에는 ‘조연으로라도 나오고 싶다’는 꿈이 되었다. 지금은? 지금은 단지 ‘계속 일이 들어오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위협받고 있었다.
민준과 준호는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복도를 지났다. 그들의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야외 계단을 지났다.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계단. 그리고 다시 세트 안으로.
세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치 그들이 나간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해 있었다.
박미라는 여전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실루엣이 파란 화면의 빛에 비추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모니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손가락. 통제하는 손가락.
이준혁은 여전히 세트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마치 조각상처럼. 하지만 민준은 이제 알았다. 그것이 완벽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포식자의 자세였다.
카메라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눈처럼,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록했다.
“준비됐어?”
박미라가 물었다. 민준을 본다. 그녀의 눈은 예리했다. 마치 전자현미경처럼 세밀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민준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공포? 절망? 항복?
민준의 입이 건조했다. 마치 사막을 걷는 것처럼. 침을 삼키는 것도 고통이었다.
“네. 감독님.”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안정적이었다. 거짓 안정성. 연기.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연기가 되었다. 실제와 연기의 경계선이 사라졌다.
민준은 세트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의 다리가 무거웠다. 마치 물 속을 걷는 것처럼. 3미터의 거리. 그 거리는 짧았다. 하지만 그 거리가 그를 보호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 순간, 민준은 뭔가를 느꼈다. 공기의 변화. 온도의 변화. 마치 포식자가 먹이를 감지하는 순간처럼.
이준혁이 웃었다. 아주 작은 웃음. 거의 들리지 않는 웃음.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들었다. 그것은 승리의 웃음이었다. 사냥에 성공한 포식자의 웃음.
민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치심과 분노가 동시에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삼켰다. 생존하려면 감정도 삼켜야 한다.
“카메라 롤.”
박미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명령조였다. 이것은 더 이상 요청이 아니었다.
“롤링.”
카메라맨이 대답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기계의 심장박동처럼 들렸다.
그리고 민준은 알았다. 이것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기록이었다. 영원한 기록. 디지털 매체에 저장되는 기록. 언젠가 이 영상은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 영상 안에는 이준혁이 민준을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모두 담긴다. 민준의 눈빛이 꺼지는 과정. 민준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과정. 민준의 항복.
## 3부: 항복
“액션.”
박미라가 외쳤다. 그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시작했다.
민준은 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다.
이준혁을 향해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다. 마치 자신의 몸무게가 갑자기 두 배가 된 것처럼. 공기의 저항도 느껴진다. 마치 진공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이준혁이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다. 연기도 없고, 감정도 없다. 오직 소유욕만이 있다. 자신의 것을 보는 눈빛.
민준의 입술이 움직인다. 대사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대사 뒤에 있는 것이다. 항복. 침묵. 죽음.
카메라가 계속 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기록한다. 민준의 떨리는 손. 민준의 변색되는 입술. 민준의 사라지는 눈빛.
박미라는 모니터를 본다. 그녀의 표정에는 만족이 있다. 이것이 그녀가 원하던 것이다. 진정한 감정. 거짓이 아닌 진정한 절망. 연기가 아닌 현실.
그리고 민준은 계속 연기한다. 하지만 이제는 연기가 아니다. 이제는 그냥 항복이다.
순간, 민준은 자신의 과거를 본다. 고등학교 때 자신. 연기학원에 들어가던 날의 자신. 첫 오디션을 보던 날의 자신. 모두가 멀리 있다. 마치 다른 세상의 다른 사람처럼.
그 사람은 이런 것을 알았을까?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이 길을 걷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 순수했기 때문이다.
민준은 이준혁에게 다가간다. 각 발걸음이 자신의 과거를 밟고 지나간다. 자신의 꿈을 밟고 지나간다. 자신의 자존감을 밟고 지나간다.
이준혁이 그를 맞이한다. 그의 손이 민준의 얼굴을 만진다. 그 손은 부드럽지만 차갑다. 마치 뱀의 피부처럼.
그리고 민준은 웃는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의 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포기의 웃음이다. 절망의 웃음이다. 죽음 앞의 웃음이다.
카메라가 계속 돈다. 그리고 민준은 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자신이 아는 민준의 끝이.
“컷!”
박미라가 외친다.
민준은 멈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어딘가 멀리 있다.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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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밤
촬영이 끝나고, 민준은 혼자 탈의실에 앉아 있었다. 거울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민준의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낯선 얼굴. 고통받는 얼굴. 죽은 얼굴.
민준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어머니는 아직 민준이 촬영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성공할 거라는 꿈.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자신의 꿈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자신이 이 산업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포기했다는 것을?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민준은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안녕, 낯선 사람.”
그것이 새로운 민준의 인사였다. 자신과의 작별 인사.
창밖으로는 밤이 내려와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은 민준을 밝혀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 뿐이었다.
민준은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갔다. 생존하기 위해. 항복하기 위해. 계속되는 그 삶 속으로.
**제8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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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확장된 이야기는 연예계의 현실을 탐구하며, 개인의 꿈과 산업의 논리 사이의 갈등을 깊이 있게 표현했습니다. 민준의 내면 변화를 통해 생존과 자아 상실의 극단적 대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