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화: 무너지는 경계선
밤 11시 52분. 민준의 휴대폰 화면은 계속 울고 있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지하 연습실. 그곳은 이제 그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연습용 거울, 낡은 나무 벤치, 형광등의 깜빡이는 빛. 모든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서 떨고 있었다. 화면에 떠있는 이름은 준호였다.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계속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시나리오는 이미 수백 번 읽은 것이었다. 종이가 낡았고, 여러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일부 장면은 형광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특히 “너는 누구야”라는 대사 주변은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휴대폰이 울음을 멈췄다. 몇 초 뒤, 카톡 메시지가 왔다.
민준아. 지금 어디야? 라커룸 가봤는데 없더라. 지하 연습실? 통화 좀 하자.
민준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화면을 어둡게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다시 들었다.
“너는 누구야?”
이번에는 목소리를 더 낮게 냈다. 마치 무언가를 깨닫고 있는 순간의 목소리처럼. 배신을 당한 사람이 범인을 대면했을 때의 그 음성. 얼굴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이수진이 말했던 것처럼 “감정의 깊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지난 4년간 엑스트라로 살았다. 그것은 자신의 약점이었다. 정확하지만 얕다. 이해하지만 소유하지 못한다. 그 말이 맞았다.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배우와 배역 사이에 어떤 거리가 있었다. 마치 유리벽 너머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은 항상 밖에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민준은 시나리오를 내려놓았다. 거울 앞의 공간을 더 넓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움직임으로 시작했다. 배신한 사람의 몸짓은 어떨까. 그들은 어떻게 서 있을까. 어떻게 걸을까. 어떻게 손을 움직일까.
그는 방을 배회했다. 앞으로 두 걸음, 뒤로 한 걸음, 옆으로 한 발. 마치 새처럼. 갇혀있는 새처럼. 창문이 없는 방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새처럼.
“미안해. 진짜 미안해.”
그 대사도 시나리오에 없었다. 하지만 배우는 때때로 그렇게 한다. 자신의 감정을 텍스트 너머로 밀어낸다.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연기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거짓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라 카톡. 여러 개.
형한테 전화 받아. 이게 뭐하는 거야?
민준이한테 뭐 있어? 형이 걱정한다고.
오빠. 제발. 회신 좀 해.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였다. 시간은 밤 12시 03분이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다시 어둡게 했다. 그리고 거울로 돌아갔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민준인가, 아니면 ‘준’인가.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다음 아침, 우리는 라커룸에서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있었고, 손가락으로 계속 탁탁 거리고 있었다. 신경증적인 습관. 민준이 하는 것과 같은 습관. 사람들은 오래 함께 있으면 서로의 습관을 따라한다. 특히 배우들은 더하다. 그들은 관찰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민준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즉시 일어섰다.
“오빠! 어제 왜 안 받았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 이런 대답이 있어.”
우리의 목소리는 높았다.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잠을 못 자본 것 같았다. 어제 밤에 이어 오늘도 눈 아래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더 진해진 자국.
“문제가 있습니까?”
“뭐 문제라는… 오빠 진짜.”
우리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울음은 아니었다. 그것은 좌절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가 주지 않을 때의 그 좌절.
“어제 너 지하 연습실에 있었지?”
“네.”
“혼자?”
“네.”
우리가 손을 내렸다. 그녀의 눈은 민준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화가 아니라 다른 감정. 마치 자신이 문을 두드렸는데 그 문이 열리지 않을 때의 그 절망감.
“나도 밤 1시까지 있었어. 지하 연습실에.”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해했다. 우리가 밤 1시까지 지하 연습실에 있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지였다. “나도 너와 함께 있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뮤지컬 배우들이 밤 1시까지 연습실에 있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내일 무용 리허설이 있는데?”
우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난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것이었다. 민준이 자신을 밀어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제가 혼자여야 했습니다.”
“왜? 왜 혼자여야 했어?”
민준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왜 자신은 자신의 불안감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왜 자신은 항상 거리를 두려고 하는가. 왜 누군가가 자신을 도우려고 할 때, 그것이 부담이 되는가.
그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망쳤다. 가족을 망쳤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망쳤다.
“내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지난밤에?”
우리가 계속 말했다.
“내가 너의 영상을 여섯 번 봤다고 했잖아. 그게 뭐라고 생각해? 그냥 좋은 영상이어서? 아니야. 너 때문이야. 너라는 배우 때문에 나는 밤을 새웠어. 그리고 나 자신의 연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
우리는 벤치에 다시 앉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쓸쓸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내가 왜 자꾸 떨어지는지. 나는 너무 많은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어. 마치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민준은 라커룸의 다른 벤치에 앉았다. 우리와 떨어진 거리에. 여전히 경계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넌 뭐야? 나는 너를 도우려고 했는데, 넌 나를 밀어낸 거야. 혼자만 준비하겠다고. 그게… 그게 너무 외로워.”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의 가슴에 뭔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외로웠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자신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거리를 둔 것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상처 주었다.
“죄송합니다.”
“또 죄송합니다? 진짜…”
우리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울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너는 왜 자꾸 그래? 그렇게 멀리만 있으려고?”
민준은 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내게 가까이 와. 제발. 나는 너를 보고 싶어. 정말로. 민준이라는 배우가 아니라, 민준이라는 사람이.”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은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세워놓은 모든 벽이, 모든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오후 2시. 준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민준이. 지금 카페 올 수 있어?”
목소리는 낮았지만, 뭔가 긴급한 톤이 섞여있었다. 민준은 즉시 나갔다.
카페는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빌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강남의 작은 골목에 숨겨진 카페. 배우들이 자주 가는 곳. 그곳은 조용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생활을 존중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준호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고, 아메리카노 앞에서 손가락으로 컵의 테두리를 계속 톡톡 거리고 있었다. 신경증적인 습관. 민준도, 우리도 같은 습관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불안했다.
“앉아.”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가 있었다. 민준은 앉았다.
“넷플릭스 캐스팅 결과가 나왔다.”
민준의 심장이 멈췄다.
“누가?”
“성준이.”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은 자신이 뭔가를 잃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느껴졌다. 경쟁이 끝났다. 자신의 길은 정해졌다. 이제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어느 역할로?”
“주인공의 형, ‘준호’ 역. 그리고 일부 피드백을 받았다.”
준호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메일 내용이 뜨고 있었다. 넷플릭스 프로덕션 팀으로부터의 메일.
“그들이 말한 건… 성준이는 기술적으로 완벽하다고. 정확하고, 깨끗하고, 전문적이라고. 하지만 그것뿐이라고. 감정의 깊이가 없다고.”
준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그의 눈은 민준을 봤다.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피드백이 있었어. 너는 최종 후보자였지만, 떨어졌다. 이유는… 너도 성준이처럼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만, 역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수진이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있어. 그들이 말한 건… 너에게는 가능성이 있다고. 성준이와는 다르게, 넌 성장할 수 있는 배우라고. 그래서 그들이 제안한 게 있어.”
“무엇입니까?”
“다음 프로젝트. 다음 시즌에 같은 세계관의 다른 드라마가 나온대. 거기에 주인공으로 시도해보라고. 그리고 이번 시즌이 끝나면, 그때 다시 캐스팅을 고려하겠다고.”
민준은 그 말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신은 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아주 작은 희망이지만, 희망이었다.
“고마워요, 형.”
“미안해. 너한테 미안해. 너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준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자신의 불안감도 있었다. 자신은 아직도 주연을 못 하고 있다. 자신은 아직도 2번 주인공으로만 살고 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형도 곧 주연을 하실 거예요.”
“…그럴까?”
준호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커피는 이미 식었을 것이다.
“이제 뭐 할 거야?”
“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그게 아니야. 너는 지금 무너질 준비를 해야 해. 정확한 연기를 벗어나고, 너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 약점으로 역할을 채워야 해. 그게 배우가 성장하는 방식이야.”
준호가 마지막 조언을 했다.
“너는 4년을 견뎠어. 그것만 해도 대단해. 하지만 이제는 견디는 것에서 벗어나야 해.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해.”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제 밤에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조금만 내게 가까이 와. 내가 너를 보고 싶어.”
카페를 나올 때, 민준은 자신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깨진 게 아니라 벽이 무너졌다. 그 벽은 자신이 4년을 들여 세운 것이었다. 정확한 배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배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배우. 그 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벽 너머에는 뭔가가 있었다. 자신이 4년간 감추고 있던 것. 두려움. 외로움. 원함. 그리고 아버지.
민준은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고열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 우리로부터.
오빠. 저녁에 만나자. 지하 연습실에서. 내가 도와줄게. 진짜로.
민준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답장했다.
이번에는 정중한 존댓말이 아니었다.
응. 고마워.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벽의 첫 번째 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지하 연습실. 밤 8시.
우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번에는 타올을 목에 걸지 않았다. 연습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러 온 것이었다.
민준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를 봤다. 그리고 그가 무너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이 빨갛고, 어깨가 축 처져있고, 움직임이 느렸다. 마치 누군가 그의 일부를 가져간 것처럼.
“오빠.”
우리가 말했다. 그 말은 질문이자 선언이었다.
민준은 우리를 봤다. 그리고 말했다.
“나… 연기를 못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 자신의 두려움을 말로 꺼내는 것. 자신의 벽을 부수는 것.
우리는 민준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그럼 함께 시작하자.”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눈물이었다. 4년간 감춰온 것들을 드디어 풀어놓는 그 순간의 눈물.
경계선은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
# 벽을 무너뜨리다
## 1부: 깨달음의 순간
카페의 창문을 통해 오후의 햇빛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민준은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너는 4년을 견뎠어.”
준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 남자는 카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법정의 판사처럼 보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거울처럼 보였다. 민준이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들을 비추는 거울.
“그것만 해도 대단해,” 준호가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견디는 것에서 벗어나야 해.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해.”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신 테이블 위의 나무 결을 바라봤다. 나무도 나이가 들면서 갈라지고 휘어진다. 그것도 일종의 성장일까?
“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차분하고 정중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 자신이 4년간 완벽하게 가꿔온 그 목소리.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마치 실망하는 아버지처럼.
“그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너는 지금 무너질 준비를 해야 해.”
민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내 신경을 건드린 것처럼.
“정확한 연기를 벗어나고,” 준호가 계속했다. “너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 약점으로 역할을 채워야 해. 그게 배우가 성장하는 방식이야.”
*무너진다.*
그 단어가 민준의 뇌를 관통했다. 벽을 세운다는 것과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정반대의 행위다. 민준은 4년간 벽을 세워왔다. 벽돌 하나, 벽돌 하나, 시멘트로 고정하며. 그 벽 너머에 있는 모든 것들 – 불안감, 약함, 필요함, 원함 – 을 가둬뒀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희미하게 들렸다. 누군가의 드럼음악. 일정한 박자. 기계적인 리듬. 마치 민준의 심장처럼.
“너는 지금 안전해,” 준호가 덧붙였다. “하지만 안전함이 너를 죽이고 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은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렸다. 마치 누군가 강철로 된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그 문 너머에서.
“어제 밤에,” 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당신이… 우리가 말했던 게 있어요.”
준호는 기다렸다.
“’조금만 내게 가까이 와. 내가 너를 보고 싶어.’”
민준이 그 말을 반복했을 때, 카페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민준이 귀를 닫은 것 같았다. 세상 전체가 그 한 문장으로 축소되었다.
“그게 맞아,” 준호가 조용히 말했다. “그게 너한테 필요한 거야.”
민준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추위에 떠는 것처럼. 하지만 카페는 따뜻했다. 에어컨이 약하게 돌고 있었지만, 여름의 햇빛이 충분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떨림은 무엇인가?
두려움이다. 그것을 민준은 안다.
## 2부: 벽의 균열
카페를 나올 때, 민준은 자신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깨진 게 아니라 벽이 무너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 벽은 자신이 4년을 들여 세운 것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매일 연습실에서, 매일 무대 위에서, 한 벽돌씩, 한 층씩 쌓아올린 것이었다.
정확한 배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배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배우. 그 벽.
카페 문을 나서면서 민준은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여름의 햇빛은 가혹했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드러낸다. 그림자도 없고, 숨을 곳도 없다.
거리를 걸으면서 민준은 자신의 신체 감각에 집중했다. 발의 아스팔트에 닿는 감촉. 햇빛이 목에 닿는 따뜻함. 셔츠가 피부에 스치는 마찰. 공기가 코를 지나가는 느낌.
모든 것이 너무 생생했다.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느끼는 것처럼.
그 벽 너머에는 뭔가가 있었다. 자신이 4년간 감추고 있던 것들. 그는 그 목록을 머릿속으로 정렬해봤다.
첫 번째: 두려움. 연기를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무대에서 넘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 가장 깊은 곳의 두려움 –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
두 번째: 외로움. 그는 항상 혼자였다. 팀 안에서도, 무대 위에서도, 누군가의 팔 안에서도. 무언가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처럼.
세 번째: 원함.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싶은 원함. 누군가의 팔에 안길 수 있는 원함. 그저 자신이 약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원함.
그리고 네 번째: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민준은 길을 멈췄다.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서울의 거리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젊은이는 흔했다.
자신의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고열에 걸린 사람의 손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몸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
민준은 화면을 켰다. 발신자: 우리.
메시지를 읽었다.
*오빠. 저녁에 만나자. 지하 연습실에서. 내가 도와줄게. 진짜로.*
민준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문장을 분석했다. 단어의 의도를 파악했다. 감정을 추출했다. 그 과정은 자동적이었다. 4년간 연습한 배우의 직업병.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는 답장했다.
이번에는 정중한 존댓말이 아니었다.
*응. 고마워.*
문장이 짧았다. 마침표가 없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자신의 벽의 첫 번째 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라 기대의 떨림인 것 같았다.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 3부: 만남
저녁 8시가 되었을 때, 민준은 지하 연습실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은 좁았다. 마치 자신의 감정 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 걸음씩, 어둠 속으로.
지하 연습실의 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민준은 우리의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놀람. 걱정. 그리고 결정.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민준이 무너졌다는 것을.
이번에 우리는 타올을 목에 걸지 않았다. 연습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러 온 것이었다.
“오빠.”
우리가 말했다. 그 말은 질문이자 선언이었다. 인사이자 확인이었다.
민준은 우리를 봤다. 우리의 눈. 우리의 입술. 우리의 서 있는 자세. 모든 것이 그를 향해 있었다. 마치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되는 것처럼.
“나…” 민준이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기를 못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 자신의 두려움을 말로 꺼내는 것. 자신의 벽을 공식적으로 부수는 것.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민준은 마치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유로움과 공포가 동시에.
우리는 민준에게 걸어갔다. 천천히. 마치 놀란 새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손을 잡았다.
우리의 손은 따뜻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의미했다. 살아있다는 것. 현재가 실제라는 것. 홀로가 아니라는 것.
“그럼 함께 시작하자.”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눈물이었다. 4년간 감춰온 것들을 드디어 풀어놓는 그 순간의 눈물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처럼.
연습실의 조명이 아래에서 위로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웃고 있었다. 작은 미소. 하지만 명확한 미소.
“처음부터 시작해,” 우리가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그의 가슴에서 울리고 있었다.
경계선은 무너졌다. 그 벽이, 그 높은 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 에필로그: 새로운 시작
그 밤, 그들은 연습실에서 밤새 있었다.
민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약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냈다. 우리 앞에서. 우리의 눈 앞에서.
처음엔 어색했다. 마치 맨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약함이 약함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그저 자신이었다.
우리는 말했다. “이게 진짜 연기야. 이게 진짜 배우의 모습이야. 이게 넌데.”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4년간 자신이 세운 그 벽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카페에서 준호가 했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안전함이 너를 죽이고 있어.”
그것이 진실이었다.
새벽 4시, 연습실을 나올 때, 민준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처음으로 자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연습실 밖에서 민준을 안았다. 말 없이. 그저 안았다.
그리고 그 포옹 속에서, 민준은 마침내 울 수 있었다.
4년을 견딘 배우의 눈물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 흘리는 눈물로.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벽은 필요 없었다.
—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