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74화: 촬영장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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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4화: 촬영장의 가면

촬영장은 새벽 5시에 이미 들썩거리고 있었다.

민준이 도착했을 때, 조명팀은 거대한 조명기구들을 삼각대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케이블이 검은 뱀처럼 땅 위를 헤쳐나갔다. 미술팀은 세트를 다시 조정했다. 소품팀은 체크리스트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신중하고 체계적이었다. 마치 정밀한 기계의 부품들이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처럼.

민준은 자신이 그 기계의 어느 부분인지 몰랐다.

서울 북쪽의 옛 아파트 단지였다. 1970년대 재건축 전의 건물들. 회색 벽, 녹슨 밸콘니, 빨래가 널려있는 베란다들. 이곳이 “그의” 집이 될 곳이었다. 드라마 속의 가난한 청년. 이수진의 전략이 명확했다. 민준의 실제 삶과 드라마 속 캐릭터를 최대한 겹쳐놓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관객들이 민준을 보면 그 캐릭터를 보도록. 그 캐릭터를 보면 민준을 보도록.

거울의 또 다른 쪽.

“민 배우?”

PD가 민준을 발견했다. 40대 초반의 여성. 이름은 박미라. 신넷플릭스 드라마의 PD.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경력이 있었다. 즉, 타협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안녕하세요.”

민준이 인사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이수진의 영향이었다. 또는 자신의 적응 능력이었다. 4년 동안 무작정 버티며 배운 것 중 하나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촬영 시작하기 전에 스크립트 리딩이 있어. 주요 배우들 다 모여서. 30분 뒤에 시작할 거니까, 분장실로 가서 준비해.”

박미라가 말했다.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있었다. 그 위에 촬영 일정이 떴다. 시간, 장소, 배우 이름들. 민준도 그 리스트에 있었다. “Min-jun, male lead’s friend” — 그렇게 적혀있었다. 이름도 없는 역할.

분장실로 가는 길에, 민준은 준호를 찾았다.

그는 복도의 구석에 서 있었다. 다른 배우들이 지나가도 반응하지 않으면서. 마치 그곳이 자신만의 세계인 것처럼. 또는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민준이 다가갔을 때, 준호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손에 들고만 있었다. 마치 그것이 부적처럼.

“형.”

민준이 말했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했다. 새벽 내내 깨어있던 사람의 얼굴. 또는 결정을 내린 후의 얼굴.

“왔네.”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제밤과 다르지 않았다. 낮고, 조심스럽고, 깨어진 얼음의 목소리.

“형이 만나자던데요.”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복도를 내려다봤다. 아무도 오지 않는 길.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곳에 있는 길.

“내가 너한테 뭘 말할 건지 생각했어?”

준호가 물었다.

“아니요.”

“그래. 그게 맞아. 예상하지 말고, 그냥 들어야 해.”

준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이 민준의 눈을 찾았다. 정확하게.

“너는 날 구원해야 할 사람이 아니야. 이수진이 뭐라고 말했든지 상관없어. 그건 그녀의 해석이고, 그녀의 욕망이고, 그녀의 두려움이야. 넌 그걸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너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야.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한테는 안 맞아. 넌 내가 구원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함께 있을 사람이야. 그게 다야. 단순해. 함께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준호가 손을 들었다. 민준의 어깨에 얹었다. 가볍지만 단단한 압력.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압력.

“촬영 중에 뭔가 이상한 것 같으면, 카메라 밖에서 손을 올려. 아무도 안 봐도 돼. 그냥 난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우리가 다시 얘기하자.”

“형이 어디 있을 건데요?”

“세트 옆. 항상 옆에 있을 거야. 멀지 않은 곳에.”

민준은 준호의 손을 느꼈다. 그 손의 무게. 그 손이 의미하는 것. 구원이 아닌 동반(同伴). 함께함. 그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민준은 이제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손을 내렸다.

“가. 분장실로. 시간 없어.”

민준은 돌아서서 걸었다. 그의 다리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뼈 안에 강철을 부어넣은 것처럼.

분장실은 거울과 조명으로 가득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40대 여성이었다. 이름은 김선희. 그녀는 민준을 보자마자 웃었다.

“오, 넌 준비가 덜 됐네. 얼굴 상태가 별로야. 얼마나 잘 자지 않았어? 눈 밑이 저렇게까지 까맣다니.”

김선희가 말했다.

“어제는 거의 못 잤어요.”

민준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게 보여. 근데 다행이지. 오늘 역할이 그런 거야. 밤샜던 청년. 뭔가에 쫓기는 청년. 그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와야 해.”

김선희가 파운데이션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은 빠르고 정확했다.

“너 이 드라마에 캐스팅 어떻게 됐어? 오디션 봤어?”

“오디션을 봤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뭔 소리야. 넷플릭스 드라마인데 자세한 걸 모르다니. 너 대사 다 외웠어?”

“네, 메일로 받은 스크립트는 다 외웠어요.”

“그럼 됐다. 우린 그걸로 충분해.”

김선희가 콘투어를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민준의 얼굴 위를 움직였다. 마치 그가 캔버스인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지금 그 감각이 들었다. 자신이 캔버스라는 느낌. 자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그려지고 칠해지고 가공되는 무언가라는 느낌.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김선희가 칠한 부분이 늘어날수록,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어졌다. 이것이 자신의 얼굴인가? 아니면 캐릭터의 얼굴인가? 그 경계가 점점 흐려졌다.

“됐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어. 저기 의상실에서 너 사이즈 옷이 있을 거야. 제작진 한테 물어봐.”

민준이 의상실로 갔다. 거기서 주어진 옷은 낡은 트레이닝복이었다. 구멍이 나 있었다. 실제 구멍. 이 옷도 소품이 아니라, 실제 누군가의 낡은 옷인 것 같았다. 또는 의상팀이 일부러 손상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진정성을 위해. 관객들이 믿을 수 있도록.

스크립트 리딩이 시작되었을 때는 오전 6시 30분이었다.

회의실 같은 곳에 모여앉았다. 주연 배우, 조연 배우들, 감독, PD, 촬영 감독, 조명 감독, 음향 감독. 거대한 크루. 그 중 절반은 민준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박미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첫 날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읽어주시면 돼요. 이건 배우들이 서로 숨을 맞추는 과정이고, 감독이 톤을 체크하는 과정입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요.”

완벽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노트를 하고 있었다. 감독은 박미라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촬영 감독은 광선을 체크하고 있었다. 음향 감독은 음성 레벨을 조정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첫 장면은 민준의 장면이 아니었다. 주연 배우(남자, 30대)와 여배우(20대)의 대면이었다. 엄마와 아들. 또는 형과 누나. 드라마의 설정이 복잡했다. 민준은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대사를 읽기 시작했을 때, 민준은 그들의 얼굴을 봤다. 주연 배우의 목소리는 낮고 감정이 깊었다. 여배우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마치 그들이 정말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처럼. 정말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리딩이 끝난 후, 박미라가 말했다.

“좋아요. 근데 여기서 감정이 더 터져야 해. 너희가 지금 너무 통제하고 있어.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폭발의 대상이야. 다시 한 번 해봐. 이번엔 더 터져줘.”

그들은 다시 읽었다. 이번엔 더 크고, 더 날카로웠다. 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진짜로 싸우는 것처럼. 관객들이 봤을 때, 그들의 분노는 진짜일 것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안다. 이것도 연기다. 잘 짜여진 연기다. 통제된 폭발이다.

그 다음은 민준의 차례였다.

그의 장면은 주연 배우(아버지)와의 대면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또는 과거와 현재. 민준은 정확한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스크립트를 읽었지만,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민 배우, 시작해봐.”

박미라가 말했다.

민준이 입을 열었다. 첫 대사는 짧은 것이었다.

“아버지.”

단 두 글자. 하지만 그것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어야 했다. 그리움, 분노, 원망, 그리고 사랑. 아버지를 향한 모든 감정이.

주연 배우가 응답했다.

“너… 왔구나.”

그들의 대사가 이어졌다. 대사 자체는 평범했다. 일상적인 언어였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오랫동안 쌓여있던 것들.

민준은 자신의 대사를 읽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 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거울처럼.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자신의 얼굴 표정이 어떻게 보이는지. 자신이 어떤 배우인지.

리딩이 끝났을 때, 침묵이 흘렀다.

박미라가 태블릿을 봤다.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중립적이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 다 했어. 이제 첫 씬을 찍어보자. 민 배우, 너는 다음 씬에서 바로 나와. 준비돼?”

“네, 준비됐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들은 세트로 나갔다. 첫 장면이 세트되었다. 낡은 원룸. 벽에는 습기 자국이 있었다. 천장에는 곰팡이 흔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민준의 자신의 집처럼.

아니, 이 세트가 민준의 집을 본뜬 것이었다. 이수진의 지시였을 것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준이 그 방 안에서 배우하면, 관객들은 그것이 연기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민준 자신이 그 경계를 모르는 것처럼.

박미라가 손을 올렸다.

“자, 조용히. 첫 테이크 시작하자. 민 배우, 너는 그 침대 옆에 앉아있어. 생각에 잠겨있는 상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알겠지?”

“네.”

민준이 침대 옆에 앉았다. 이 침대는 진짜 침대가 아니었다. 세트 제작팀이 만든 침대였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위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였다.

“롤 카메라.”

카메라가 켜졌다. 카메라 음성이 들렸다. 마치 뭔가가 깨어나는 소리처럼.

“큐.”

민준은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는 척했다. 그의 얼굴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또는 과거를 보는 것처럼.

바깥에서 음향 효과음이 들렸다. 발소리.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민준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그 발소리를 인식한 것처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컷. 다시. 더 자연스럽게 반응해. 지금은 너무 과했어.”

박미라가 말했다.

그들은 다시 했다. 이번엔 민준의 반응이 더 미세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정도. 하지만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했다. 카메라는 모든 것을 본다. 거짓도, 진실도, 그 경계도.

“컷. 좋아. 근데 이제 문을 열어야 해. 일어나. 천천히.”

민준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동작은 자연스러웠다. 마치 매일 이렇게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침낭에서 일어나고, 곰팡이 천장을 보고, 또 다른 날을 시작하는.

문을 열었다.

주연 배우가 문 너머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마치 자신도 진짜로 뭔가를 안고 온 것처럼.

“들어와.”

주연 배우가 말했다.

민준은 한 발 물러섰다. 주연 배우는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우리… 얘기해야 할 게 있어.”

주연 배우가 말했다.

“뭔데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조심스러웠다.

“너… 여기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뭔가를 해야 해. 뭔가를 바꿔야 해. 넌… 이 정도 아니야.”

주연 배우가 말했다.

“컷. 오케이. 이건 좋아. 다음 테이크 가자.”

박미라가 말했다.

그들은 계속했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부터. 다시 일어나고, 다시 문을 열고, 다시 대사를 나누었다. 각 테이크마다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때로는 주연 배우의 톤이 다르고, 때로는 민준의 표정이 다르고, 때로는 둘의 거리가 다르고, 때로는 침묵의 길이가 다르고.

각 테이크마다, 박미라는 뭔가를 기록했다. 아마도 어떤 테이크가 가장 “진실”에 가까운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어떤 테이크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이 연기였다. 모든 것이 통제된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감정은 통제될 때 가장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오전 11시 30분쯤, 박미라가 “점심 시간” 을 선언했다.

민준은 세트를 나갔다. 그의 몸은 피곤했다. 아니, 피곤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존재했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그 방에서 오래 살아온 것처럼.

준호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세트 옆에 있었다. 정확하게 자신이 약속한 위치에. 민준이 손을 올리지 않았지만,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냥 있었다. 함께 있었다.

“어땠어?”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대답이었다.

“그게 정상이야. 첫 촬영은 항상 그래.”

준호가 말했다.

그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촬영장 근처 카페였다. 민준은 따뜻한 국수를 먹었다. 준호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둘 다 거의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점심이 끝나고 세트로 돌아왔을 때,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우리로부터의 문자가 5개나 있었다.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촬영 잘하고 있어? 괜찮아? 밥은 먹었어? 연락해.”

민준은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생각했다. 우리가 왜 자신을 이렇게 집요하게 추적하는지. 왜 자신의 안전을 이렇게 집요하게 확인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답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수진에 의해. 또는 이수진을 포함한 이 시스템에 의해. 그리고 이제 우리는 민준이 같은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이미 그 길 위에 있었다. 오늘 촬영장에서, 그는 이미 무언가를 잃었다. 자신의 경계. 자신의 현실. 자신과 캐릭터 사이의 구분선.

오후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민준은 자신이 아니었다.

또는 너무 자신이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밤 10시 30분, 촬영이 끝났다.

박미라가 모든 배우를 모았다.

“첫 날 치고는 잘했어. 너희가 가져온 에너지가 좋았어. 내일도 이 정도로 와. 같은 시간에. 우리 촬영 스케줄이 촉박하니까, 완벽함을 원하지 말고 솔직함을 원해. 솔직한 배우들만 살아남는다. 알겠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켰다.

우리로부터의 문자 10개가 더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전화 기록. 1시간 전. 받지 않은 전화.

그 전화의 발신자 이름을 봤을 때, 민준의 손이 떨렸다.

“우리”

아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


민준은 화면을 다시 봤다. 확인했다. 정말로 엄마였다. 10년 동안 받지 않은 엄마로부터의 전화. 10년 동안 피했던 목소리. 10년 동안 잊으려고 했던 사람.

그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민준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이수진이 말한 것이 맞다는 것을. 자신은 정말로 죽어있다는 것을. 아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한 번에 여러 겹의 죽음으로. 배우로서의 죽음, 인간으로서의 죽음, 아들로서의 죽음.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죽음 속에서도 자신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울처럼.

영원히 반사되고, 영원히 거짓이고, 영원히 혼자인.

# 첫 촬영

## 1부: 안심

“그게 정상이야. 첫 촬영은 항상 그래.”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수백 번은 이 말을 다른 신인 배우들에게 해온 것처럼 들렸다.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중년 남자의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다. 특히 눈 주변에. 그 주름들이 웃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세트장을 나올 때 민준의 손가락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이 냉기를 띠고 있었다. 신경성 반응이었다. 심리학 책에서 읽은 용어였다. 신체가 정신의 혼란을 외부로 표현하는 방식.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손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내가 너무 어색했나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호는 웃었다. 그것은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눈이 함께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준호의 주름들이 선한 깊이를 가지고 있어 보였다.

“어색한 게 당연하지. 니가 누군데 첫 날부터 완벽하게 나와? 이수진이도 첫 촬영에서 대사를 자꾸 까먹었어. 감독이 한 번 웃었다. 그 이후론 더 떨렸고. 하지만 그게 좋았어. 그 떨림이 화면에 나왔거든.”

이수진의 이름이 나왔을 때, 민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준호가 그것을 눈치챘는지 못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계속 말했다.

“지금 너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야. 그 과정에서 떨리고, 실수하고,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정상이야. 정상이 맞아.”

그의 말은 위로였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다시 봤다. 준호는 이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처럼.

## 2부: 점심

촬영장 근처 카페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벽돌이 바래 있었고, 간판의 글씨가 일부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따뜻한 향기가 맞아주었다. 커피와 그 무엇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향기. 민준은 그곳이 이 동네에서 오래전부터 있던 장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수십 년 전의 흑백사진부터 최근의 컬러사진까지. 모두 같은 카페, 다른 세월.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최고야. 촬영 날씨에는.”

민준이 점원에게 말했다. 준호는 웃으며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나는 이게 좋아. 빨리 먹을 수 있거든.”

그들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거리가 보였다. 오후 2시쯤의 거리는 한가로웠다. 몇몇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보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각자의 삶이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민준의 국수가 도착했을 때, 그 국물에서 나오는 증기가 얼굴을 감쌌다. 따뜻함이었다. 오랜만의 따뜻함이었다. 아침부터 받아온 조명의 뜨거움, 감독의 차가운 목소리, 준호의 낯선 친절함. 모든 것이 차갑거나 뜨거웠다. 하지만 이 국수의 따뜻함은 달랐다. 그것은 편안함이었다.

민준은 천천히 먹었다. 국물이 입안에 들어올 때마다 혀가 반응했다. 짭짤하고, 깊은 맛. 아마도 오래 우린 육수였을 것이다. 시간이 들어간 음식. 성의가 들어간 음식.

준호는 샌드위치를 빠르게 먹었다. 그의 손가락이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렸고, 그것을 냅킨으로 닦았다. 그의 동작은 기계적이었다. 마치 몸이 자동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좋아?”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맛있어요.”

그 이후로 둘 다 거의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배우들은 이런 침묵을 잘 안다. 그것은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유된 침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어떤 무게를 들고 있는 침묵. 민준은 준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무거운 생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그것이 드러났다. 준호는 자신의 샌드위치를 보면서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자동차가 지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자동차가 지나갔다. 거리는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이 카페 안에서는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바깥의 시간보다 더 천천히. 더 깊게. 더 무겁게.

“잘 먹었어.”

준호가 일어서며 말했다. 민준도 뒤따랐다. 준호가 계산을 하는 동안, 민준은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다시 봤다. 그 중 하나에는 젊은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민준은 그 사진들 중에서 이수진의 얼굴을 찾으려고 했지만, 해상도가 낮아서 구분하기 어려웠다.

## 3부: 귀환

세트로 돌아올 때 오후 햇빛이 더욱 강렬했다. 촬영장의 조명과 섞여서, 마치 현실이 두 겹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는 카메라가 보는 현실이고, 하나는 민준이 사는 현실. 그 두 현실이 겹쳐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을 켰을 때의 불빛이 눈을 자극했다.

메시지 5개. 모두 “우리”라는 연락처에서 온 것이었다.

“촬영 잘하고 있어?”

“괜찮아?”

“밥은 먹었어?”

“연락해.”

“민준아, 진짜 연락 좀 해.”

그 마지막 메시지에는 불안함이 묻어났다. 민준은 이를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는 민준의 엄마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민준의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민준이 10년 전에 엄마를 떠난 이후,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했던 사람.

민준은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그 길을 걸으면서, 민준은 우리를 생각했다. 왜 우리가 자신을 이렇게 집요하게 추적하는지. 왜 자신의 안전을 이렇게 집요하게 확인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답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수진에 의해. 또는 이수진을 포함한 이 시스템에 의해. 그리고 이제 우리는 민준이 같은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수진의 죽음은 뉴스였다. 신문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기사였다. “신인 배우 이수진, 극단적 선택… 우울증 의심”. 그 기사를 읽을 때 민준의 눈은 흐려졌다.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수진이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이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우리는 그 이후로 민준을 놓지 않았다. 매일 연락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밥을 먹었는지 물었다. 자신을 돌보고 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과보호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그것은 과보호가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의 절박함.

*하지만 민준은 이미 그 길 위에 있었다.*

오늘 촬영장에서, 그는 이미 무언가를 잃었다. 자신의 경계. 자신의 현실. 자신과 캐릭터 사이의 구분선.

## 4부: 오후의 변신

오후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민준은 자신이 아니었다.

또는 너무 자신이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감독 박미라는 다시 “액션”을 외쳤다. 그리고 민준의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민준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캐릭터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아니, 둘의 의지가 완전히 겹쳐져 있었다. 민준이 하고 싶은 말과 캐릭터가 해야 할 말이 같아졌다. 민준이 느끼고 싶은 감정과 캐릭터가 느껴야 할 감정이 같아졌다.

“더 좋아. 더 진짜 같아. 그렇게 해.”

박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마치 수심이 깊은 물 속에 있으면서 수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민준의 손이 움직였다. 그것은 씬에서 필요한 손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 손이 자신의 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이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 몸 안에 갇혀있었다. 마치 투명한 상자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그 검은 렌즈가 민준을 향해 열려있었다. 그 렌즈를 통해 민준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민준이 아니다. 그것은 캐릭터다. 그리고 민준은 그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씬이 끝나고, 다른 씬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씬.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몇 시간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그의 의식은 흐릿했다. 그의 몸은 자동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컷!”

박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민준의 몸이 멈췄다. 그 순간, 민준은 깨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혼돈에서 깨어난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깨어남인지, 아니면 더 깊은 혼돈으로의 빠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혼돈에서 깨어난 것의 떨림이었을까, 아니면 카메라 앞에서의 긴장이 풀린 것의 떨림이었을까?

## 5부: 밤

밤 10시 30분, 촬영이 끝났다.

박미라가 모든 배우를 모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하지만 그 피로 위에는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창작자의 흥분. 뭔가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때의 그 느낌.

“첫 날 치고는 잘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들었다.

“너희가 가져온 에너지가 좋았어. 특히 너.”

그녀는 민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민준의 몸이 긴장했다.

“자신을 정말 잘 잃어버렸어. 그게 좋아. 계속 그렇게 해. 내일도 이 정도로 와. 같은 시간에.”

그녀가 시계를 봤다.

“우리 촬영 스케줄이 촉박하니까, 완벽함을 원하지 말고 솔직함을 원해. 솔직한 배우들만 살아남는다. 알겠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도. 하지만 그 끄덕임이 자신의 의지인지, 캐릭터의 의지인지, 아니면 그 둘이 겹쳐있는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배우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친구와 함께 나가고, 누군가는 혼자 짐을 챙기고 있었다. 민준은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준호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했어. 정말로.”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이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준호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가버렸다. 자신도 피로했기 때문이었을까.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켰다.

화면이 밝아졌을 때, 그 불빛이 어두운 세트장을 잠깐 비추었다. 그 빛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화면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 맞을까?

메시지 10개가 더 들어와 있었다. 모두 “우리”에서 온 것이었다.

“민준아 뭐해?”

“제발 연락해.”

“혹시 뭐 생겼어?”

“휴대폰 봐.”

“나 진짜 불안해.”

“제발.”

그리고 하나의 전화 기록. 화면에 표시된 시간은 1시간 전. 받지 않은 전화. 그 전화의 발신자 이름은 “우리”였다.

하지만 민준이 화면을 더 자세히 봤을 때, 그것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화면이 흐려졌다. 민준의 눈에 눈물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엄마”였다.

10년 동안 받지 않은 엄마로부터의 전화.

10년 동안 피했던 목소리.

10년 동안 잊으려고 했던 사람.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에 표시된 발신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1시간 전. 정확히 민준이 가장 깊게 캐릭터에 몰입했을 시간이었다. 민준이 자신과 캐릭터의 경계선을 완전히 잃었을 시간이었다.

그 순간, 민준은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알 수 없는 다른 것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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