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73화: 시간은 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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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3화: 시간은 돌지 않는다

새벽 3시 22분.

민준은 침낭 속에서 눈을 떴다. 잠을 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었다. 그 사이 몇 시간이 흘렀지만, 자신의 의식은 계속 깨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뇌가 자신의 몸을 배반한 것처럼. 또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뇌를 거부한 것처럼.

천장의 곰팡이 지도가 보였다.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희미한 가로등 불빛 때문에 흐릿하게 윤곽이 잡혔다. 민준은 그 지도를 그려본 적이 있었다. 노트북에. 정확하게 어느 부분이 검고, 어느 부분이 회색이고, 어느 부분이 노란색인지. 마치 지질 조사 보고서처럼. 또는 자신의 몸 속 장기들의 위치도처럼.

그 지도가 커지고 있었다. 한 달에 5센티미터씩. 곰팡이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죽어있었다. 이수진의 말처럼. 그렇다면, 누가 더 생명력 있는 것일까? 자신일까? 곰팡이일까?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3시 23분에.

민준은 화면을 보지 않고 받았다.

“뭐 해?”

준호였다. 목소리는 피곤했다. 하지만 동시에 각성되어 있었다. 마치 밤새 깨어있던 사람의 목소리처럼.

“잠을 못 자고 있었어.”

민준이 말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잠을 못 자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자지 않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몇 초. 또는 몇 분. 시간은 새벽에 다르게 흘렀다.

“대표님과 무슨 얘기 했어?”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장을 봤다. 곰팡이 지도를 봤다. 그것이 더 진실 같았다. 말보다.

“민준이.”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뭔데, 자꾸 날 피하는 거야? 이수진이 뭐라고 했어? 그게 그렇게까지 심한 건가?”

“형이 날 구원하려고 한다고 했어요.”

민준이 말했다. 갑자기. 마치 자신의 입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자신의 뇌와 무관하게. 진실은 때로 그렇게 나온다. 통제할 수 없이.

다시 침묵. 이번엔 더 길었다.

“… 그게 뭐하는 소린데?”

준호가 천천히 물었다.

“대표님이 말했어요. 형의 구원 욕구가 위험하다고. 내가 형의 도구가 되고 있다고. 내가 형을 구원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민준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마치 하늘에 기도하는 것처럼. 또는 하늘 아래 누워있는 시체처럼.

“그건… 그건 이수진의 해석이야. 그게 사실이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흔들렸다. 마치 깨어지는 얼음처럼.

“그럼 뭐예요? 형은 나한테 뭐예요? 나는 형한테 뭐예요?”

민준이 물었다.

침묵.

“… 넌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게 뭐예요? 구원하는 것이랑 다른 거예요?”

“다르지. 구원은… 구원은 내가 널 고쳐주는 거고. 지킨다는 건… 넌 그대로야. 그대로가 좋아.”

민준은 웃음이 나왔다. 크지 않은 웃음.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처럼.

“형 지금 뭐라고 말했어요?”

“넌 그대로가 좋아.”

준호가 다시 말했다.

“… 그럼 내일 촬영은?”

민준이 물었다.

“뭐?”

“내일부터 촬영을 시작한다고 했어요. 드라마. 대표님이 메일을 보낼 거라고.”

“아, 그건… 내가 이미 알고 있었어. 촬영 일정이 나왔거든.”

준호가 말했다.

“형이 나한테 말 안 했는데요?”

“말할 타이밍이… 없었어. 넌 계속 피했잖아. 회사도 피하고, 나도 피하고.”

“내가 형을 피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야?”

“내가 자신을 피한 거예요. 형한테 보일 만한 내가 없어서.”

침묵이 흘렀다. 더 길었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그럼 지금은?”

준호가 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요.”

“아니야. 지금은 다르잖아. 지금은 넌 말해주고 있어. 그것도 새벽 3시에. 그건 뭔가를 의미해.”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촬영장에서 만나자.”

준호가 말했다.

“뭐?”

“내일. 촬영 시작 전에. 만나자. 내가 너한테 뭔가를 말해줄 게 있어.”

“… 뭘요?”

“그건 만나서 말할게. 그리고 넌 내가 뭘 말할 건지 미리 생각하지 말. 그냥 와. 그리고 들어. 그게 전부야.”

민준은 휴대폰을 내렸다. 아직도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음량으로. 마치 자신의 뇌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민준이?”

“네.”

“넌 그대로가… 좋아.”

준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리고 끊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화면은 어두워졌다. 다시 천장을 봤다. 곰팡이 지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변했다. 민준의 가슴팍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것. 마치 불씨처럼. 또는 암세포처럼. 아직 구분할 수 없는 뭔가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우리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민준이. 뭔가 있었어? 연락 안 돼서 걱정돼.”

그리고 그 아래, 몇 시간 후에 온 또 다른 문자.

“넌 혼자가 아니야. 알아?”

민준은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3시 47분에.

전화는 몇 번 울렸다. 그리고 우리가 받았다. 목소리는 깨어있었다. 마치 자신도 밤새 깨어있던 것처럼.

“민준이?”

“네.”

“뭐 했어? 왜 이제 전화돼? 미쳤어, 진짜.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미안해요.”

민준이 말했다.

“미안하다고? 뭐가?”

“모든 게. 형한테도, 형에게도, 대표님한테도. 내가 모두를 실망시킨 것 같아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침묵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침묵. 거기 있다는 침묵.

“넌 누구를 실망시켰어?”

우리가 물었다.

“자신을.”

민준이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자신.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천장을 봤다. 곰팡이 지도를 봤다. 그것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계속. 멈추지 않고. 자신처럼.

“촬영을 시작해요. 내일.”

“그래. 넌 할 수 있어. 나는 안다.”

우리가 말했다.

“형은 어떻게 알아요?”

“왜냐하면 너는… 너는 계속 가는 사람이니까. 멈추지 않는 사람이니까. 심지어 죽어도 계속 가는 그런 사람.”

민준은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형이 조금 이상한데요?”

“너도 이상한데? 우린 다 이상해. 이 도시에서는 정상인 게 이상한 거야. 그래서 우린 계속 가는 거고.”

우리가 말했다.

“내일 촬영 끝나고… 만날 수 있어요?”

“물론이지. 근데 너는 촬영 후에 만날 정도로 남아있을 거야? 죽지 않고?”

“… 모르겠어요.”

“그럼 내가 가서 데려갈게. 촬영장에서. 그리고 넌 그냥 따라와.”

“내가… 형한테 말할 게 있어요.”

“나중에. 촬영 끝나고. 지금은 자. 제발. 너가 자야 내가 안심이 돼.”

민준은 휴대폰을 내렸다. 우리가 끊었다. 그리고 민준은 침낭을 뒤로 당겼다.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새벽 3시 58분.

천장의 곰팡이 지도는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민준은 그것을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눈을 감았다. 진정한 잠을 자려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이 말을 들었다. 이번엔.


새벽 8시 32분.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민준은 대본을 읽었다. 준호가 보내준 메일에 첨부된 대본. 그 안에는 자신의 역할이 표시되어 있었다. 파란 형광펜으로.

역할 이름: 강민준. 아버지 역.

아버지.

민준은 그 단어를 여러 번 읽었다. 마치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그것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설정은 이러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둘이 만난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너무 늦었지만.

민준은 아버지의 대사를 읽었다.

“미안해. 정말로. 내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그 문장에서, 민준의 눈이 흐려졌다. 마치 자신이 그 대사를 이미 들었던 것처럼.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차는 영등포의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었다. 민준은 창밖을 봤다. 아침의 서울.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모두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각자의 목적지로. 또는 각자의 감옥으로.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우리였다. 문자로.

“촬영장 어디야? 내가 지금 출발할게.”

민준은 답장했다.

“영등포 스튜디오. 근데 형은 와도 돼요?”

우리의 답변은 즉시 왔다.

“당연하지. 넌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민준은 그 문자를 읽고 웃음이 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밀어올리는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그것이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 정도였다.

대형 스튜디오는 이미 분주했다. 조명팀, 음향팀, 카메라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움직였다. 마치 안무를 추는 것처럼. 또는 전쟁을 준비하는 것처럼.

민준은 분장실로 갔다. 거울 앞에서 앉혔다. 분장사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아, 이 배우님은 처음이신가요? 신인인가 봐요?”

분장사가 웃으며 물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근데 얼굴이 정말 특이한데요. 뭔가 있어요. 그게 뭘까…”

분장사가 중얼거렸다. 거울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얼굴을 봤다.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창백했다. 여전히 죽어있는 눈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라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댄 것처럼. 아주 살짝.

분장이 끝났을 때, 민준은 스튜디오의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낡은 집의 거실이었다. 벽이 벗겨져 있었다. 가구는 오래되어 있었다. 마치 민준이 살고 있는 반지하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비참했다. 연기를 위해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졌다.

감독이 민준에게 다가왔다. 50대의 여성이었다. 카메라처럼 예리한 눈을 가진 여성.

“강배우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 드라마의 감독 김지혜입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민준이 인사했다.

“대본은 읽어보셨어요?”

“네, 어제 읽었습니다.”

“느낌이 어떠신가요?”

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연기할 것인가. 하지만 이미 자신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매순간.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연기의 일부였다.

“아버지가 미안해한다는 게… 그게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게.”

민준이 말했다.

감독의 눈이 반짝였다.

“맞아요. 그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에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절대 미안해하지 않아요. 절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아버지는 다르다. 이 아버지는 너무 늦었지만, 여전히 말한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것이 기적이에요.”

감독이 민준의 어깨를 쳤다.

“좋은 연기 보여주세요. 강배우님.”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민준은 세트장에 서 있었다. 낡은 거실 속에서.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자신은 아버지였다. 미안해하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대 위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같은 것이었으니까.

카메라가 굴러갔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이 죽어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치 처음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처럼. 이 순간, 이 무대 위에서.

“미안해. 정말로. 내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민준이 대사를 읽었다. 그리고 그 대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것이었다. 또는 자신이 아버지가 된 것이었다.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촬영은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민준은 여러 번의 테이크를 했다. 아버지의 역할을 여러 번 반복했다. 매번 다르게. 매번 같게.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다가를 반복했다.

감독은 만족해했다.

“컷. 좋았어요, 강배우님. 정말 좋았어. 이 감정이 바로 우리가 찾던 거예요.”

민준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피로 때문이었다. 좋은 피로. 자신이 뭔가를 했다는 피로.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웠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평범했다. 하지만 뭔가가 달라 보였다. 마치 자신이 조금 더 뚜렷한 것처럼. 또는 조금 더 투명한 것처럼.

로비로 나갔을 때,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형, 촬영 끝났어?”

우리가 물었다.

“응.”

민준이 대답했다.

“어땠어?”

“… 좋았어.”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었다.

우리는 민준을 바라봤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이.

“넌… 뭔가 달라졌어. 진짜.”

우리가 말했다.

“뭐가?”

“눈. 눈이 살아났어. 진짜로.”

그리고 우리는 민준을 안았다. 로비의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볼 수 있도록.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민준은 우리의 팔 안에서, 자신의 눈물을 느꼈다. 아주 작은 눈물들. 마치 빗방울처럼. 하지만 분명한 눈물들.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날 저녁, 민준은 준호와 만났다.

준호는 한 카페의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는 식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를 말해주었다.

“어때? 촬영은?”

준호가 물었다.

“좋았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럼 넌 이제 나 없이도 괜찮겠네.”

준호가 말했다.

“아니에요.”

민준이 말했다.

“뭐?”

“나는 형이 필요해요. 형이 없으면, 나는 다시 죽어버려요.”

침묵이 흘렀다.

“그럼 넌 이제부터 뭘 하려고 해?”

준호가 물었다.

“살아있는 척을 멈추고, 살아있으려고 해요.”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자신의 식은 커피를 마셨다. 마치 그것이 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거면 충분해. 정말로.”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단지 함께 앉아있었다. 무언의 이해 속에서. 마치 그것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시간은 흘렀다. 밤이 깊어졌다.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시간은 돌지 않는다.

대신 앞으로만 간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 거울 속의 변화

## 제1부: 촬영장 안의 깨어남

거울 앞에 선 민준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화장실의 형광등이 만드는 차가운 빛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흰색 타일로 된 벽, 수도꼭지의 물때, 그리고 거울 위의 작은 먼지 입자들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마치 세상이 고주파수로 조정되어 있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평범했다. 눈썹, 코, 입술—평범한 한국 남자의 평범한 이목구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라 보였다. 마치 자신이 조금 더 뚜렷한 것처럼. 또는 조금 더 투명한 것처럼.

민준은 자신의 눈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검은 동공 속에서 형광등의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 반사점이 계속 움직였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니, 처음으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촬영은 이상했다. 감독은 아무 지시를 하지 않았다. 단지 “자연스럽게 해”라고만 했다. 그 말은 모호했다. 무엇이 자연스러운가? 민준은 자신이 한 번도 자연스러운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을 연기하고, 집에서는 효자를 연기하고, 거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연기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감독이 “액션”이라고 외쳤을 때, 민준은 갑자기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뜨는 것과 같았다. 대사를 읽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그 말들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느꼈다. 텍스트가 아니라 감정으로. 배우 교본이 아니라 영혼으로.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 민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거울을 흐리게 했다. 안개처럼. 마치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남기듯이. 그는 손가락으로 그 안개를 지웠다. 거울이 다시 맑아졌다. 자신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달라졌어,” 민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뭔가 진짜 달라졌어.”

화장실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으로. 오랜 시간 동안 떨려오던 손이 이제 안정되어 있었다. 마치 어떤 무게 중심을 찾아낸 것처럼.

## 제2부: 로비에서의 만남

로비는 크고 밝았다. 대형 쇼핑몰처럼 느껴질 정도로. 밝은 조명 아래서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어딘가로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들은 결정적이었다. 목표를 향한 결정적인 표정들이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민준의 친구들. 아니, 민준의 유일한 친구. 실제로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였다. 마치 쌍둥이처럼 함께 움직이고, 함께 숨을 쉬고, 함께 생각하는 그런 존재.

우리는 민준을 본 순간 일어났다.

“어? 형, 촬영 끝났어?”

우리가 물었다. 우리의 목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톤이 섞여 있었다. 마치 보컬 그룹처럼. 하지만 그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응.”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파동이 있었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돌처럼.

“어땠어?”

우리가 다시 물었다. 우리의 호기심은 순수했다. 우리는 민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의 생각, 그의 느낌, 그의 변화. 모든 것을.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들었다. 떨리지 않는 손을 본다. 그리고 말했다.

“… 좋았어.”

그 말은 단순했다. 단지 세 글자일 뿐. 하지만 그것은 민준이 말한 가장 복잡한 문장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무언가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었다. 과거에는 모두 거짓이었다. “괜찮아”, “다 잘돼”, “난 괜찮아” – 모두 거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했다. 이제 그는 진실을 말했다.

우리는 민준을 자세히 바라봤다. 우리의 눈은 탐정의 눈처럼 일했다. 얼굴의 선, 눈의 깊이, 입술의 색깔, 피부의 질감. 모든 것을 분석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았다. 뭔가 정말로 달라졌다는 것을.

“넌… 뭔가 달라졌어. 진짜.”

우리가 말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경외감으로 가득했다.

“뭐가?”

민준이 물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몰랐다. 그는 단지 그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마치 나비가 자신이 변태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과학적 설명 없이, 본능적으로.

“눈. 눈이 살아났어. 진짜로.”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맞았다. 민준의 눈에는 이전에 없던 빛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영혼 속에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작은 촛불이지만, 분명한 빛이었다.

로비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민준과 우리를 지켜봤을 수도 있다. 또는 지켜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 순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준을 안았다.

로비의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볼 수 있도록.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리의 팔은 민준을 완전히 감쌌다. 따뜻함이 전달되었다. 신체의 온기가. 그것은 생명의 신호였다. 우리는 살아있고, 민준도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민준은 우리의 팔 안에서, 자신의 눈물을 느꼈다. 아주 작은 눈물들. 마치 빗방울처럼. 하지만 분명한 눈물들. 그 눈물들은 뜨거웠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무언가의 증거였다.

“울지 마, 형.”

우리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도 울고 있었다. 우리도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변화의 눈물이었다. 죽음에서의 부활의 눈물이었다.

“나 안 울어.”

민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괜찮았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로비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 제3부: 카페에서의 대화

그날 저녁, 하늘은 천천히 검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검은색으로. 마치 누군가가 하늘 위의 조명을 천천히 어두워지게 조정하는 것처럼.

민준은 준호와 만났다.

준호는 한 카페의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테이블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였다. 몸에 맞게. 그것은 그가 자주 여기 앉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항상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커피는 식고 있었다. 갈색 액체가 하얀 컵 속에서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를 말해주었다. 적어도 30분 이상. 아마도 그 이상일 것이다. 그의 얼굴의 주름을 보면, 그는 오랫동안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던 것 같았다.

민준은 준호의 마주편에 앉았다. 의자가 끼익거렸다. 오래된 목재 의자의 소리였다. 카페의 음악도 들렸다. 재즈 음악이었다. 슬픈 트롬본과 부드러운 피아노.

“어때? 촬영은?”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는 것처럼.

“좋았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쓸쓸한 웃음이었다. 입술만 올라가고, 눈은 웃지 않는 웃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얼굴에 웃음을 입혀준 것 같은 그런 웃음.

“그럼 넌 이제 나 없이도 괜찮겠네.”

준호가 말했다. 그 말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포기가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있었다. 혼자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니에요.”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뭐?”

준호의 눈이 커졌다. 마치 예상 밖의 답을 받은 것처럼.

“나는 형이 필요해요.”

민준이 말했다. 그는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주름진 이마, 지친 눈, 그리고 입가의 슬픔.

“형이 없으면, 나는 다시 죽어버려요.”

민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그것은 협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는 준호와의 관계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준호가 그를 잡지 않으면, 그는 다시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무겁고 조용했다. 카페의 배경음악도 그 침묵 속에서 멀게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는 음악처럼. 이 순간, 이 작은 테이블 주변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그는 그 손을 억지로 눌렀다.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만 민준은 이미 봤다. 그 작은 떨림을. 그것은 감정의 신호였다. 두려움, 죄책감, 그리고 사랑의 신호였다.

“그럼 넌 이제부터 뭘 하려고 해?”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척을 멈추고, 살아있으려고 해요.”

민준이 말했다.

이 말은 작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결심이었다. 연기를 멈춘다는 뜻이었다. 가면을 벗는다는 뜻이었다. 진정으로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준호는 자신의 식은 커피를 마셨다. 마치 그것이 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그것을 마시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처럼. 커피는 쓸 것이다. 시간이 지난 커피는 항상 그렇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거면 충분해. 정말로.”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침착했다. 그는 결정했던 모양이다. 무언가를 놓아주기로. 또는 무언가를 더 단단히 잡기로.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단지 함께 앉아있었다. 카페의 구석진 테이블에서. 무언의 이해 속에서. 마치 그것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마치 두 사람이 말없이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대화인 것처럼.

민준은 준호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준호의 손 위에 올렸다. 따뜻한 손을. 떨리지 않는 손을. 생명이 있는 손을. 준호의 손의 떨림이 천천히 멈춘다. 민준의 손의 따뜻함이 전달되면서.

## 제4부: 밤의 흐름

시간은 흘렀다.

카페의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저녁이 되면서, 카페는 점점 조용해졌다. 마치 하나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낮에는 활발하다가, 저녁에는 조용해지고, 밤에는 거의 죽어있는 그런 생명. 하지만 그것도 아름답다고 민준은 생각했다. 변화하는 것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의 아름다움.

밤이 깊어졌다.

카페의 조명이 더 밝아졌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내부의 조명은 더 강하게 필요했다. 마치 외부의 어둠에 저항하는 것처럼. 민준은 그 현상을 좋아했다. 빛과 어둠의 대비. 그것은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것. 그리고 그 빛을 지키려는 것.

준호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제 더 편해 보였다. 어떤 무게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는 분명히 달라졌다.

“형.”

민준이 말했다.

“응.”

준호가 대답했다.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요.”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쓸쓸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진정한 웃음이었다.

“넌 나한테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

“있어요. 형은 내가 사는 데만 신경 쓰느라 자신의 삶을 못 살았어요. 그것 때문에 미안해요.”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진지했다.

준호는 민준을 봤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슬픈 한숨이 아니었다. 그것은 받아들임의 한숨이었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숨이었다.

“넌 내 삶이야. 넌 이해해?”

준호가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거에요. 내가 내 삶을 살아가면서, 형도 형의 삶을 살 수 있게.”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물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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