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5화: 침묵의 무게
민준의 눈이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페이지 7. 그 섹션.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먹어 치웠다. 법률 용어들이 벽을 이루었고, 그 벽 뒤에는 자신의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 있었다. 진짜로 조여오는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에 무언가를 단단히 묶어놓은 것처럼. 그것을 풀 수 없는 매듭으로.
“The Performer agrees to maintain strict confidentiality regarding any and all matters related to the production,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단어가 단어를 꺼내먹었다. 그는 스크롤을 계속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뇌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personnel matters, internal disputes, allegations of misconduct, and any information disclosed by production members in confidence.”
손가락이 멈췄다. 그 문장에서.
“Allegations of misconduct.”
민준이 소리 내어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막처럼 건조했다. 마치 수천 개의 모래 입자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처럼.
준호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더 가까이. 민준의 옆에 앉았다. 정말로 앉아서, 어깨가 거의 닿을 정도로. 화면을 함께 보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동참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거였다. 나도 여기 있다. 혼자가 아니다. 하는 신체의 언어.
우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미 말했던 것들이 공기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 준호. 스물여덟. 베란다. 침묵.
민준은 계속 읽었다.
“The Performer acknowledges that violation of this confidentiality clause will result in immediate termination of contract and potential legal action,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damages, injunctions, and recovery of all payments received.”
“모든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거네요.”
민준이 말했다. 여전히 화면을 보면서.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말을 이었다.
“법적 소송. 그리고 명예훼손 고소. 이수진이가 당신을 지옥으로 보낼 거야. 당신이 이걸 깨뜨리려고 하면.”
침묵.
카페의 조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따뜻하고, 부적절하고, 무심한. 마치 이곳이 평온한 장소라고 계속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배경음악은 여전히 재즈였다. 피아노 건반이 차갑게 울렸다.
민준은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마치 그것이 뜨거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하지만 따뜻했다. 손에서 나오는 자신의 체온 때문에.
“제가 이미 이걸 동의했다는 거예요?”
민준이 물었다.
“당신이 계약서에 서명했어.”
우리가 대답했다.
“언제?”
“당신이 넷플릭스 역할을 받은 그날. 아침. 이수진이의 사무실에서.”
민준은 그 날을 생각해봤다. 아침이었나? 정말로 아침이었나? 모든 것이 흐릿했다.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깨어나는 중이었던 것처럼. 그 날, 그 시간. 자신은 무엇을 느꼈는가? 기쁨? 안도? 아니면 이미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저는… 그걸 읽지 않았어요.”
민준이 말했다.
“읽으셨을 거예요. 변호사가 설명해줬을 테니.”
우리가 말했다.
“아니. 저는…”
민준이 멈췄다. 기억을 더듬으려고 했다. 그 아침. 그 사무실. 이수진의 얼굴. 변호사의 얼굴. 그리고 그의 손. 펜을 들고 있는 손.
“저는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어요.”
민준이 마침내 말했다.
“아니다.”
준호가 처음으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뭐?”
민준이 준호를 봤다.
“당신은 이해했어. 당신은 항상 이해해. 당신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래야 자신을 속일 수 있으니까.”
준호의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잔인함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깨끗이 소독하려고 고름을 짜내는 것처럼.
민준은 준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이해했었다. 그 변호사가 “비밀유지 조항”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썼다.
왜?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유명해질 유일한 길. 자신이 원했던 것. 아니, 자신이 필요했던 것.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싶다는 욕망. 그것을 위해서라면, 침묵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 침묵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모(共謀)였다.
“제가 그 친구분의 죽음을 알고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거예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이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탁탁. 테이블에. 리듬 있게. 마치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의사소통 방식이 된 것처럼.
“그 친구분은… 왜 그랬어요? 왜 베란다에서?”
민준이 물었다.
우리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수진이가 그랬어. 당신이 모르는 다른 배우가 하나 더 있었어. 그 친구가 이수진이한테 당한 것과 같은 일을. 그리고 그 배우는 이미 죽었어. 자살로. 그리고 그 친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당신이 다음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또는 당신이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베란다에서.”
우리가 말했다. 각 문장이 마치 별개의 무언가를 운반하는 것처럼. 각각이 자신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민준은 그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뇌는 거부했다. 마치 컴퓨터가 너무 많은 정보를 한 번에 처리하려고 할 때처럼, 그냥 멈춰버렸다.
“당신이 그 친구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물었다.
“뭐?”
민준이 물었다. 마치 자신이 다른 언어로 말해지는 것을 듣는 것처럼.
“당신이 그 역할을 하면, 당신은 이수진이의 것이 돼. 영원히. 당신의 입은 봉해져. 당신의 행동은 통제돼. 당신의 인생은 그 침묵을 위해 살아가야 돼. 그리고 언젠가, 언젠가 당신이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야. 당신이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져서, 당신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 순간이 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베란다로?”
우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각 단어가 칼처럼 예리했다.
민준은 그 질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미래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형이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테이블에서. 천천히.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항복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손가락에 닿았다. 처음으로. 진짜로.
손가락이 손가락을 만났다. 매우 가벼운 접촉. 마치 자신들이 부서질 수 있는 무언가를 만지려고 하는 것처럼.
“저는 뭐예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뭐긴 뭐예요?”
우리가 물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뭐예요?”
민준이 다시 물었다.
준호가 답했다.
“당신은 함정에 걸린 사람이야. 그런데 아직도 탈출할 수 있어.”
“어떻게?”
민준이 물었다.
“그 역할을 거절하면 돼.”
우리가 말했다.
“그럼 저는 유명해질 수 없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진술이었다.
“아니. 못 해.”
우리가 확인했다.
“그럼 저는 계속 아무도 아니에요.”
민준이 말했다.
“아니.”
준호가 말했다. 그의 손이 민준의 손 위에 올라왔다. 손가락들 위에. 가볍게.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은 당신이 돼. 그게 바로 그거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었다. 당신이 당신이 돼.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은 이미 자신이 아닌가? 아니면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아니었나?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계약서를 다시 봤다. 페이지 7. 그 섹션. 그리고 맨 아래. 서명 칸. 자신의 이름. 자신의 손글씨. 자신의 결정.
“저는 이미 서명했어요.”
민준이 말했다.
“응. 했어.”
우리가 대답했다.
“그럼 나갈 수 없어요. 법적으로.”
민준이 말했다.
“맞아.”
우리가 확인했다.
“그럼 저는 뭘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페의 조명이 깜빡였다. 매우 짧게. 1초도 채 안 되게. 마치 우주가 자신의 질문에 응답하려고 했던 것처럼. 하지만 다시 돌아왔다. 따뜻한 조명. 무심한 배경음악. 모든 것이 제자리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민준의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이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이수진.
세 사람이 모두 그 화면을 봤다. 마치 그것이 죽음의 소환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울리도록 놨다. 울림이 카페를 채웠다. 다른 손님들이 민준을 봤다. 이어폰을 끼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까.
네 번째 울림. 다섯 번째 울림. 여섯 번째 울림.
민준은 여전히 화면을 봤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일곱 번째 울림. 여덟 번째 울림.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화면에 미시지가 떴다. 이수진으로부터.
“넷플릭스 역할 최종 확정 미팅. 내일 오전 10시. 내 사무실에서. 절대 늦지 말 것. — LS”
민준이 그 메시지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내일?”
민준이 말했다.
“응.”
우리가 대답했다.
“그럼 저는…”
민준이 말을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준호가 일어섰다. 의자를 뒤로 밀면서. 그리고 민준의 팔을 들었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로부터 민준을 구출하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 나가자.”
준호가 말했다.
“어디로?”
민준이 물었다.
“아무 데나. 여기가 아닌 곳으로.”
준호가 말했다.
우리도 일어섰다.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지금 이 순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 사람이 카페를 나갔다. 문을 열었다. 밤의 공기가 들어왔다. 한겨울의 공기. 차갑고, 선명하고, 모든 것을 깨우는 그런 공기.
거리는 조용했다. 강남역 근처였지만, 이 시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거나, 더 깊은 밤의 장소로 이동해 있었다.
준호가 먼저 걸었다. 민준과 우리를 이끌면서. 어디로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자신이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디예요?”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걸었다.
그들은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또 다른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편의점이 보였다. 24시간 편의점.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준호가 들어갔다. 민준과 우리도 따라갔다.
편의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점원과 자신들뿐. 점원은 자신들을 보지 않았다. 그냥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준호가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민준에게 건넸다.
“먹어.”
준호가 말했다.
“지금요?”
민준이 물었다.
“응. 지금.”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컵라면을 들었다. 마치 그것이 어떤 의식의 일부인 것처럼. 준호도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우리도.
그들은 편의점의 카운터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작은 테이블.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끓는 물.
준호가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민준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도.
라면이 물에 잠겼다. 국물이 변했다. 투명에서 노란색으로. 마치 마법처럼.
“이거 먹고 생각하자.”
준호가 말했다.
그들은 라면을 먹었다. 말 없이. 단지 숟가락이 국물을 긁는 소리만 있었다. 그리고 입이 뜨거운 국물을 받아들이는 소리. 그리고 침을 삼키는 소리.
민준은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내일 오전 10시. 이수진의 사무실. 자신은 거기 가야 하나?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나?
만약 간다면?
만약 가지 않는다면?
“민준.”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라면에서 입을 떼었다.
“응?”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 아직도.”
우리가 말했다.
“어떻게?”
민준이 물었다.
“내일 가지 말고, 우리에게 말해. 당신이 뭐가 필요한지. 정말로.”
우리가 말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도와줄 거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이 유명해지지 않는다면? 자신이 아무도 아니게 남는다면? 그래도 그들이 옆에 있을까?
그는 자신의 라면에 숟가락을 담갔다. 한 입 더 집어 들었다. 뜨거운 국물이 자신의 입을 태웠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명인 것처럼.
“내일 가기 전에…”
민준이 말했다.
“응?”
준호가 물었다.
“저한테 시간을 줄래요? 생각할 시간.”
민준이 말했다.
“당연하지.”
준호가 말했다.
그들은 계속 라면을 먹었다.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에서.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입에 들어오는 뜨거운 국물과 함께,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았다.
선택은 아직 자신의 것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12,847자
# 선택의 무게
편의점의 자동문이 열리면서 찬바람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늦은 밤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고, 그 속에서 민준은 마치 얼음처럼 경직된 자신의 몸을 느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결정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요?”
민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마치 큰 소리를 내면 이 모든 것이 깨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준호는 민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준호의 눈빛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의 눈빛. 민준은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준호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대답했다.
“응. 지금.”
준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마치 그동안 오래 생각해온 것을 이제 말하는 것처럼. 그 목소리 속에는 옛날 준호가 있었다. 대학교 때,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행동했던 그 준호. 민준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감 있게 손을 내밀었던 그 준호 말이다.
편의점 입구의 편의점 냄새—라면의 국물 냄새, 튀김 냄새, 그리고 세제의 화학적인 냄새가 섞여 있었다—가 민준의 코를 자극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이 냄새를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거 봤어?”
우리가 가리켰다. 편의점 선반 위의 컵라면들. 다양한 색깔의 라벨들이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였다. 빨강, 노랑, 파랑. 각각 다른 맛을 약속하는 색깔들. 하지만 모두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 끓는 물만 붓으면 되는 간단한 것들.
민준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그는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종이컵의 질감을 느꼈다. 딱딱한 표면. 그 위에 인쇄된 글씨들. 조리 시간 3분. 3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3분이면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뭘 할 거야?”
우리가 물었다. 우리의 목소리도 조용했다. 마치 도서관에서 속삭이듯.
“모르겠어.”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민준은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내일 아침 10시가 되었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 이수진의 사무실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을지, 아니면 집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지. 그 둘 중 어느 쪽도 끔찍했다.
준호와 우리는 각각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마치 그것이 어떤 의식의 일부인 것처럼. 종교의식처럼. 선택을 앞둔 사람들이 하는 의식처럼. 준호가 먼저 움직였고, 우리가 따랐다. 그리고 민준도 결국 따랐다. 세 개의 컵라면. 세 개의 운명.
편의점의 카운터 옆에는 항상 그 테이블이 있었다. 작은 테이블. 지저분했지만 정겨웠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의자들. 그 위에 앉으면 바닥까지 거리가 가까워서,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옆에는 항상 끓는 물이 있었다. 작은 냄비에서 계속 김을 피우고 있는 끓는 물.
민준은 앉았다. 준호가 마주 보는 쪽에 앉았다. 우리는 옆에 앉았다. 삼각형의 구조. 안정적이지만 불완전한 구조.
“그래, 이제 해보자.”
준호가 말했다. 그의 손이 끓는 물로 향했다.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는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움찔하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익숙해진 것 같았다. 준호의 얼굴에는 이미 아픔이 새겨져 있었다. 수년의 아픔이. 수년의 기다림이.
준호가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물이 흰 라면 위로 쏟아졌다. 끓는 물의 열기가 위로 올라왔다.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 속에서 라면은 변하기 시작했다. 딱딱한 것에서 부드러운 것으로. 고정된 것에서 유동적인 것으로.
민준도 물을 부었다. 우리도 물을 부었다.
세 개의 컵라면이 동시에 변했다. 투명한 물이 노란색으로 변했다. 마치 마법처럼. 하지만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과학이었다. 단순한 화학 반응이었다. 열과 시간의 조합.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이거 먹고 생각하자.”
준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마치 누군가에게 설복하듯. 아니면 자신을 설복하듯.
그들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말 없이. 침묵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깊고 무거운 침묵. 그 침묵 속에서는 다른 소리들이 더욱 크게 들렸다.
숟가락이 국물을 긁는 소리. 칙칙칙. 그 소리가 반복되었다. 마치 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마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입이 뜨거운 국물을 받아들이는 소리. 후르르르. 그리고 그 뜨거움에 입안이 화끈거리는 느낌. 입의 안쪽이 화상을 입는 느낌. 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명이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 꿀떡. 그리고 또 꿀떡. 목으로 무언가가 내려가는 느낌.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통해 내려가는 느낌. 그것은 신체의 일부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위에서 내려다봤다. 하얀 빛. 너무 밝아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빛. 그 빛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노출되었다. 숨길 수 없었다. 모든 감정이, 모든 두려움이, 모든 희망이 드러났다.
민준은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머리 속으로. 심지어 씹고 있는 와중에도.
내일 오전 10시. 이수진의 사무실. 28층짜리 빌딩의 최상층 근처. 창문으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 그곳에서 이수진은 자신에게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계약서? 돈? 명예?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것?
자신은 거기 가야 하나?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나?
그 질문이 민준의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마치 라면의 국물처럼. 점점 더 진해지면서. 점점 더 자신을 감싸면서.
만약 간다면?
민준은 상상해봤다. 자신이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장면을. 그리고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장면을. 누구인지 모를 사람의 얼굴처럼.
그리고 그 사람이 택시를 타고, 그 빌딩으로 향하는 장면을. 로비에 들어서는 장면을.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을. 그 엘리베이터가 올라올라 올라가면서, 자신의 심장도 함께 올라가는 장면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문을 열고, 이수진을 만나는 장면을. 이수진의 미소. 그 미소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그 미소.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민준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집에서?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 때 자신은 어떤 기분일 것인가? 후회? 안도감? 아니면 그 둘이 섞인 기묘한 감정?
그리고 그 이후는? 그 이후에 자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수진의 기회를 잃은 후에? 다시 처음부터? 아니면 어딘가 다른 곳으로?
“민준.”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라면에서 입을 떼었다. 국물이 입가에 묻어있었다. 뜨거운 국물. 그것은 마치 자신의 두려움을 물리적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응?”
민준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약했다. 마치 먼 곳에서 오는 목소리처럼.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 아직도.”
우리가 말했다. 그 말은 선언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선언. 확정된 사실로서의 선언.
“어떻게?”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를 요구하는 의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내일 가지 말고, 우리에게 말해. 당신이 뭐가 필요한지. 정말로.”
우리가 말했다. 우리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민준의 손에 가까워졌다. 닿지는 않았지만, 그 근처였다. 마치 그것이 최대한의 친밀함인 것처럼. 마치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인 것처럼.
“우리가 찾아주겠어.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돈이 아니라. 명예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우리가 계속했다. 그 말들은 마치 약속처럼 들렸다. 아니, 그것은 실제로 약속이었다. 절실한 약속. 간절한 약속.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마치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거운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다. 오래된 피로. 그리고 그 피로 속에는 결의가 있었다.
“우리가 도와줄 거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깊었다. 마치 지하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처럼. 마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처럼.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들었다. 피부로, 뼈로, 심장으로. 그 말들이 자신 안에 침투했다.
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민준은 자문했다. 자신이 유명해지지 않는다면? 자신이 아무도 아니게 남는다면? 그래도 그들이 옆에 있을까? 그들이 계속 도와줄까? 아니면 그들도 결국 떠나갈까? 다른 더 유명한 누군가를 찾아서?
민준은 그 의심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무겁고 차가웠다. 마치 돌 같았다. 가슴 속에 놓인 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민준은 다른 것도 느꼈다. 그것은 따뜻했다. 준호의 말 속에 있는 따뜻함. 우리의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따뜻함. 그것은 그 차가운 돌을 천천히 녹이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라면에 숟가락을 담갔다. 한 입 더 집어 들었다. 뜨거운 국물이 숟가락 위에 담겼다. 그것을 입에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자신의 입을 태웠다. 혀가 화끈거렸다. 입의 안쪽이 진홍색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은 움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느낌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좋은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명인 것처럼. 마치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증명인 것처럼.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명인 것처럼.
“내일 가기 전에…”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조금 더 분명해졌다.
“응?”
준호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민준에게 집중되었다. 마치 민준이 지금 하려는 말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저한테 시간을 줄래요? 생각할 시간.”
민준이 말했다. 그 요청은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그것은 비굴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중함이었다.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려는 신중함이었다.
“당연하지.”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은 즉각적이었다. 마치 이미 준비되어 있던 대답처럼. 마치 준호가 이 요청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아. 오늘 밤. 우리와 함께. 생각해보자. 함께.”
우리가 덧붙였다.
그들은 계속 라면을 먹었다.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에서. 밤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시계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전사가 전투를 앞두고 무기를 점검하는 것처럼.
민준의 숟가락이 계속 움직였다. 국물을 떠서, 입에 넣고, 삼키고, 다시 떠서. 그 반복. 단순하지만 필요한 반복. 생명을 유지하는 반복.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입에 들어오는 뜨거운 국물과 함께,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았다.
선택은 아직 자신의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수진도, 준호도, 우리도 민준의 선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제안할 수 있었다. 조언할 수 있었다. 손을 내밀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민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민준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민준은 국물을 마셨다. 마지막 한 입. 국물이 따뜻하게 내려갔다. 마치 위로하는 손길처럼. 마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손길처럼.
“고마워.”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준호와 우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아직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
준호와 우리는 웃었다. 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웃음 속에는 오래된 우정이 있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편의점은 여전히 밝았다. 그 밝은 공간 속에서, 세 사람은 컵라면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때 민준은 알았다.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삶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