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3화: 우리가 남긴 것들
베란다는 매우 높았다.
그것은 민준이 처음으로 떠올린 이미지였다. 우리가 “베란다에서”라고 말했을 때, 그의 뇌 속에서 생성된 것은 높이였다. 정확한 층수는 아니었지만, 매우 높은 곳이라는 이미지. 마치 그 높이가 중요한 것처럼. 마치 높을수록 더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우리의 손가락을 향해. 하지만 닿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닿아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아니면 닿으면 모든 것이 더 현실적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준호는 여전히 민준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민준을 놓으면 민준이 흩어져버릴 것 같은 그런 방식으로. 그의 얼굴은 완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석고를 붓고 굳혀버린 것처럼.
“이름이 뭐였어요?”
민준이 물었다. 여전히 그 먼 목소리로. 마치 자신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것처럼.
우리의 손가락이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탁탁. 하지만 이번에는 리듬이 있었다. 일정한 리듬. 마치 자신의 심장박동을 외부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준호.”
우리가 말했다.
카페가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배경음악은 여전히 흘러나왔을 것이고, 다른 손님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 이름 때문에. 준호와 같은 이름.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정확히 같은 이름.
“아, 제 이름이…”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손을 들어올렸다. 멈추라는 신호로. 그의 목소리는 민준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준호였어. 스물여덟이었어. 배우였어.”
우리가 계속했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부고를 읽고 있는 것처럼.
민준의 눈이 준호를 향했다. 매우 천천히. 마치 목을 굽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부인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처럼.
“내 친구는 그 준호였어. 그리고 너는 이 준호야.”
우리가 말했다. 마치 자신이 두 세계를 중재하고 있는 것처럼.
“저…”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중간에 멈췄다.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이 죽은 사람의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그 준호가 이수진이한테 뭘 당했는지 아세요?”
민준이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어떤 감정이 자신의 내부에서 결정화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쉬었다. 깊게. 마치 자신이 물 속에서 막 올라온 것처럼.
“추행이었어요. 그리고 협박이었어. 그리고 강압이었어.”
우리가 마침내 말했다. 각 단어 사이에 공백을 두면서. 마치 각 단어가 분리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민준은 그 단어들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몸 속으로. 마치 독을 마시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내부에서 바뀌었다. 그의 눈이 다시 초점을 맞췄다. 이번에는 멀리서가 아니라, 현재를 향해.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에요?”
민준이 물었다.
“공식적으로? 이수진이와 그 준호의 부모님. 그리고 변호사.”
우리가 대답했다.
“비공식적으로?”
민준이 다시 물었다.
“나. 그리고 당신이 이제 알았으니까 당신.”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그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몇 초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몇 초 동안, 준호는 자신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마치 민준이 탈출하려고 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친구분의 부모님은… 뭐라고 했어요?”
민준이 물었다.
우리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두드림이 멈추었다.
“돈을 받으면 괜찮아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우리가 속았어. 돈이 치료제라고. 돈이 시간을 되돌린다고. 돈이 모든 걸 낫게 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마치 자신이 뭔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민준이 촉구했다.
“그리고 합의금 계약서에 침묵 조항이 있었어. 그걸 위반하면 모든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조항. 그래서 그 친구의 부모님은 침묵했어. 그들은 돈이 필요했거든. 생활비도 필요했고, 치료비도 필요했고, 뭔가… 뭔가 자신들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어. 그래서 침묵했어.”
우리가 계속했다.
“근데 침묵이 치료가 되지는 않았어. 준호는 계속 망가져갔어. 심리상담도 받았고, 약도 먹었고, 모든 걸 해봤어. 하지만 돈이 깊은 상처를 채울 수는 없었어. 그리고 그 친구는…”
우리가 멈췄다.
“그 친구는 어느 날 깨어났어요. 아침이 아니라 밤에. 그리고 자신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우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이 들렸다. 매우 크게. 마치 침묵이 음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그 침묵을 채웠다. 자신의 상상으로. 높은 베란다. 밤. 그리고 어떤 결정. 그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마치 자신이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그 이후에는?”
민준이 물었다.
“그 이후에는 내가 이수진이의 사무실에 들어갔어. 혼자. 그리고 자신이 뭘 했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어. 그리고 내 친구를 돌아달라고 말했어. 물론 이미 늦었지만, 적어도 진실을 인정해달라고. 그 친구의 부모님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말했다.
“그럼 이수진이가 뭐라고 했어요?”
민준이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척했어. 모르는 척했어. 하지만 내가 준호의 일기장을 꺼냈을 때… 그때 그 여자의 얼굴이 바뀌었어. 진짜로 색이 빠졌어. 마치 자신이 영원히 묻힐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우리가 계속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말했어. ‘당신이 뭘 하려고 해?’ 그렇게. 그리고 난 대답했어. ‘진실이 알려져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 여자가 웃었어. 정말로. 그리고 말했어. ‘진실? 진실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누구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라고.”
우리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말했어. 그 친구가 이미 죽었으니까, 이제 뭘 해도 그 친구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고통만 가져올 것이라고. 그 친구의 부모님을 더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침묵하는 게 자비라고. 침묵하는 게 모두를 위한 거라고.”
카페의 온도가 떨어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에어컨을 최고로 틀어버린 것처럼. 민준의 팔에는 오돌도돌한 살갗이 돋아났다. 하지만 그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민준이 물었다.
“그래서 난 침묵했어. 왜냐하면 그 여자가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 진실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난 혼자였으니까. 그 친구의 부모님도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난 혼자 이 짐을 들었어. 그리고 계속 들고 있었어. 몇 년 동안. 매일 매일.”
우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 정도였다.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을 왜 제시했어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이수진이가 내가 계속 침묵할 거라는 걸 보장받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 당신을 제시했어. ‘이 사람을 도와줘. 이 사람을 성공시켜줘. 그럼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친구에 대한 모든 기록을 없애겠어’라고. 그래서 난…”
우리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나한테 이 역할을 주려고 했어요?”
민준이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응.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당신이 유명해지면, 언젠가 이 모든 게 밝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당신이 충분히 강해지면, 혹시 모르니까 그때는 당신이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침묵할지, 말할지. 그런데…”
우리가 멈췄다.
“그런데?”
민준이 물었다.
“그런데 이수진이가 당신한테 직접 말을 꺼낸 거야. 나한테는 하지 않은 방식으로. 당신의 위약금을 내 친구의 합의금과 같은 금액으로 설정했어. 그건 협박이야. 문명화된 협박이지만, 협박이야. 당신은 이제 그 금액이 뭔지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성공의 대가가 뭔지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우리의 손을 향해. 그리고 이번에는 닿았다. 손가락이 손가락과 만났다. 매우 가볍게. 마치 서로 확인하는 것처럼. 서로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준호는 자신의 손을 빼지 않았다. 민준의 팔 위에서. 마치 자신이 그것을 놓으면 민준이 사라질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친구의 부모님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민준이 물었다.
우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카페의 창문에는 거리의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강남역 주변의 불빛. 그것은 매우 밝았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차가웠다.
“지금도 침묵하고 있어요.”
우리가 마침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민준이 물었다.
“나도.”
우리가 대답했다. 그 답변은 매우 단순했지만, 매우 무거웠다.
민준은 그 무게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몸에.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부터는 영원히 그 무게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럼 내가 뭘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그건 당신이 정해야 해.”
우리가 말했다.
“나는?”
준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마치 자신이 이제까지 숨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준호를 봤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바뀌었다. 마치 우리가 이제까지 준호를 다른 준호로 보고 있었는데, 이제 그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 것처럼.
“너는… 괜찮아?”
우리가 물었다.
준호의 얼굴이 찢어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이 눈물이 뭔지 모르는 것처럼.
“난… 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페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바람이었다. 밤거리의 바람. 그것은 매우 차갑고, 매우 신선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민준은 그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그의 손이 우리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준호를 봤다. 그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봤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함께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나가.”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요구였다.
“어디로?”
우리가 물었다.
“모르겠어. 어디든.”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빼지 않으려고 했지만, 민준이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도 일어섰다. 그들은 테이블을 떠났다. 카페를 떠났다. 밤거리로 나갔다.
강남역 주변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이제 그 불빛은 다르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그 불빛 뒤에 숨어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민준의 발걸음은 불확실했지만, 여전히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손을 잡고. 그리고 준호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뭔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
하지만 그들은 계속 걸었다. 밤거리를 통해. 그리고 그 걸음 위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진실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절망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카페 뒤에는 여전히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위에는 우리의 손가락이 두드렸던 자국이 남아있었다. 탁탁탁.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제63화 끝]
# 제63화 – 선택의 무게
## 1부: 카페의 침묵
카페 구석의 테이블 위에는 세 잔의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키아토, 그리고 따뜻한 우유. 각각의 음료는 세 사람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민준은 쓸 것을 마신다. 우리는 단맛을 원한다. 그리고 준호는… 준호는 뭘 원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에는 결연함이 묻어났다.
“결정해야 해.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마치 시간의 박자를 세는 것처럼. 타닥. 타닥. 타닥. 그 소리는 카페의 배경음악—어떤 재즈 피아노—과 어색하게 섞여 들렸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불안감의 리듬. 초조함의 박자.
“뭘 결정해?”
민준이 물었다. 그의 얼굴은 창밖의 강남역 야경에 비추어 창백해 보였다. 밤 11시.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깜박였다. 빨강, 파랑, 노랑. 그 빛들이 민준의 얼굴을 계속 바꾸었다. 마치 그의 감정처럼.
“그건 당신이 정해야 해.”
우리가 말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손은 커피잔을 쥐고 있는 힘이 점점 세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세라믹 잔이 손가락을 태우는 느낌. 그것은 마치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신호였다. 아직도 살아있다는 신호.
“나는?”
준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마치 수심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포 같았다. 길고, 무거운 침묵을 깨는 소리. 준호는 이제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마치 자신이 투명한 존재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 그가 말했다. 마치 자신이 이제까지 숨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한 번에 모든 공기를 내뿜으며.
우리는 준호를 봤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로 뭔가가 바뀌었다.
카페의 조명이 준호의 얼굴을 맞춰주었다. 그 전까지 우리는 준호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반사광 속에 있었다.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마치 우리가 이제까지 준호를 다른 준호로 보고 있었는데, 이제 그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 것처럼.
그의 얼굴은 너무 젊었다. 하지만 눈은 늙어 보였다. 그의 눈은 무언가를 봤다. 뭔가를 알았다. 하지만 그 뭔가가 뭔지는 말하지 못했다.
“너는… 괜찮아?”
우리가 물었다. 그것은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천 개의 다른 질문들이 들어있었다. 너는 정말 괜찮아? 너는 고통받고 있지 않아? 우리가 너를 도울 수 있어?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준호의 얼굴이 찢어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그의 피부가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투명함 속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중력이 준호에게는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면 준호 자신이 그 눈물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도 이 눈물이 뭔지 모르는 것처럼. 기쁨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난… 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 깨진 유리처럼. 흔들리는 촛불처럼. 그것은 마치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내뱉는 것 같았다. 이전의 모든 말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한 것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뭐가 맞는 건지…”
그의 손이 떨렸다. 커피를 마시려다 컵을 놨다. 그 손이 테이블 위에서 마치 물 위의 종이배처럼 떠 있었다. 매우 약하고, 매우 외로워 보였다.
민준은 그 손을 봤다. 그리고 그의 손이 천천히 준호의 손 위로 움직였다. 따뜻한 손. 살아있는 손. 다른 누군가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손.
그 순간이었다.
## 2부: 바람의 진입
카페의 문이 열렸다.
그것은 갑작스러웠다. 마치 무언가가 이 밀실 같은 순간을 깨뜨리려고 온 것처럼.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람이었다.
밤거리의 바람. 그것은 매우 차갑고, 매우 신선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그 바람은 카페의 따뜻함을 헤쳐나왔다. 사람들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테이블 위의 냅킨을 날렸다. 그리고 세 사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민준은 그 바람을 느꼈다. 피부 위에 닿는 차가운 감각. 그것은 마치 깨어남의 신호였다. 마치 자신이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심장이 뛰고 있다. 폐가 움직이고 있다. 손가락의 끝에서 맥박이 느껴진다.
그의 손이 우리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아까 준호의 손을 잡던 손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그것은 마치 자신이 추락하고 있는데 누군가를 붙잡는 것 같았다.
“우리… 우리 무언가를 해야 해.”
그가 중얼거렸다. 바람의 소리에 거의 묻혀갈 정도의 목소리로.
“뭘?”
우리가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앉아만 있을 수 없어. 이 대화를 이대로 끝낼 수 없어.”
민준의 눈이 준호를 봤다. 그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봤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함께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준호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더 이상 공중에 떠 있지 않았다. 민준의 손이 그것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의 손도 그것을 덮었다. 두 개의 손이 한 개의 떨리는 손을 감싸고 있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우리가 있어.”
우리도 더했다.
## 3부: 출발
“우리 나가.”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요구였다. 명령이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혹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있던 지갑을 집었다. 동전 몇 개가 테이블 위에 남겨졌다. 커피값보다 많았다. 보상일까? 사죄일까? 아니면 그냥 서둘러서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어디로?”
우리가 물었다. 그 질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자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어디든.”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확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어디든?”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지만, 이제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진전이었다. 작은 진전이지만, 진전이었다.
“어디든.”
민준이 반복했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빼지 않으려고 했다. 마치 그 손이 물에 빠지려는 누군가에게 매달린 밧줄인 것처럼. 하지만 민준이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도 일어섰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테이블이 의자와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우는 소리였다. 마치 카페가 그들의 떠남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미안해.”
우리가 카페 직원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테이블의 소음에 대한 사과였을까? 아니면 삶에 대한 사과였을까?
그들은 테이블을 떠났다. 카페를 떠났다. 밤거리로 나갔다.
## 4부: 강남역의 밤
밤 11시 15분. 강남역 주변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네온사인들이 빛나고 있었다. 편의점의 파란 불빛. 음식점의 빨간 불빛. 술집의 보라색 불빛. 이 모든 빛들이 한 번에 들어왔다. 마치 무지개가 폭발한 것처럼. 마치 도시 자체가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그 불빛은 다르게 보였다. 이전의 희망적인 빛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그 불빛 뒤에 숨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검은 것이. 뭔가 조용한 것이. 뭔가 이 모든 밝음을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것이.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것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민준의 발걸음은 불확실했다. 마치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손을 잡고. 그 손은 따뜻했다. 살아있었다. 현실이었다.
준호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뭔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 하지만 따랐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강남역의 지하철 입구가 보였다. 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을 내려가면, 또 다른 세계가 나올 것이다. 지하철의 냉한 바람. 사람들의 소음. 광고판들의 깜박임. 그 모든 것들.
하지만 민준은 지하철로 내려가지 않았다.
대신, 강남역 사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자동차들이 지나갔다. 빨간 불빛. 녹색 불빛. 노란 불빛. 신호등의 색깔이 계속 바뀌었다. 마치 신호등이 그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 앉자.”
민준이 한 벤치 앞에 멈췄다. 공원의 벤치였다. 이 도시 한가운데, 신기하게도 작은 공원이 있었다. 나무들이 있었다. 풀이 있었다. 어둠이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이 작은 공간을 완전히 밝혀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여기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진짜 그림자.
그들은 벤치에 앉았다. 민준, 우리, 그리고 준호. 그 순서로.
“이제 뭘 할 거야?”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봤다. 밤하늘. 별들은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여전히 있었다. 우리가 보지 못해도, 그것들은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준호가 중얼거렸다.
“알아. 나도.”
민준이 대답했다.
“우리도.”
우리도 더했다.
그리고 그들은 밤하늘을 봤다. 함께.
## 5부: 흔적
카페 뒤에는 여전히 테이블이 있었다.
카페 직원이 그것을 정리했을 것이다. 커피잔을 걷었을 것이다. 냅킨을 버렸을 것이다. 의자를 정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워지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는 우리의 손가락이 두드렸던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주 미세한 흠집들. 타닥. 타닥. 타닥.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영원히 남는 것처럼.
테이블은 목재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에 의해 만들어진 흠집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손가락도 그것에 합쳐졌다. 우리는 그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강남역의 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차들이 지나갔다. 광고판이 깜박였다. 모든 것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멈춘 적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적어도 세 사람의 세상은 변했다.
민준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우리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준호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뭔가가 변했다.
밤은 계속될 것이다. 아침까지. 그리고 아침도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올 것이다.
그들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고. 단지 함께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밤거리의 불빛이 그들을 비췄다. 빨강, 파랑, 노랑. 그 색깔들이 계속 그들을 칠했다. 마치 그들이 예술작품인 것처럼.
카페의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타닥. 타닥. 타닥.
시간의 박자. 존재의 증거. 살아있음의 기록.
그것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제6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