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3화: 카페 구석의 거래
민준은 오전 9시 47분에 카페에 도착했다. 준호가 지정한 카페는 강남역 근처의 작은 곳이었다. 이전에 우리와 만났던 그 카페는 아니었다. 이곳은 더 어두웠고, 더 조용했고, 더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마치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는 곳처럼. 준호는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창가 쪽이 아닌 구석. 거울 앞이 아닌 뒤쪽. 누군가 들어올 때 보이지 않는 위치.
“밤 새웠어?”
준호가 물었다. 민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네.”
민준이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밤을 샜다. 새벽 3시 42분 이후로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다. 천장의 곰팡이를 봤고, 손가락의 떨림을 봤고, 알 수 없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 먹어?”
준호가 물었다. 메뉴판을 민준 앞으로 밀어냈다.
“괜찮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먹어. 뭐든지.”
준호의 톤이 다시 바뀌었다. 명령형이었다. 하지만 그 명령 속에는 걱정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아들을 보는 부모의 그것처럼.
민준은 메뉴판을 열었다. 글자들이 흐릿했다. 밤을 샌 눈으로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냥 첫 번째 항목을 가리켰다. 아메리카노.
준호는 웨이터를 손짓했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준호는 아메리카노 2잔과 크로아상 2개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떠났다.
“회의실 C는 뭐야?”
민준이 물었다.
“모르지.”
준호가 대답했다.
“형이?”
“응. 나도 몰라. 회사 내부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쓰는 방이야. 근데 정확하게 뭐 하는 곳인지는…”
준호가 말을 끝내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크린을 켰다. 화면에는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우리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회의실 C? 그곳은 이수진이가 중요한 계약이나 처벌이 필요한 직원들을 만나는 곳이야. 그냥 가지 마. 전에 거기서 나가는 배우들은 대부분 얼굴이 창백했어.”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뜨거웠다. 처벌. 창백한 얼굴. 그것들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었군요.”
민준이 중얼거렸다.
“응. 우리는 회사 구조를 잘 알아. 뮤지컬 배우들은 뭔가 다르거든. 정보 네트워크가 있어. 여배우들끼리 정보를 나눠.”
준호가 설명했다.
웨이터가 돌아왔다. 아메리카노 2잔과 크로아상 2개를 내려놨다.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따뜻한 냄새. 버터 냄새. 민준은 그것들을 봤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먹어.”
준호가 다시 말했다.
민준은 크로아상을 집었다. 한 입 깨물었다. 맛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든 맛이 사라진 것 같았다. 자신의 혀가 미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는 계속 씹었다. 씹고, 삼키고, 또 씹었다.
“민준아, 내가 너한테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아.”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입을 멈췄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넌 극도로 망가져 있었어. 기억해?”
준호가 물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는 극도로 망가져 있었다. 로프를 가지고 있었다. 계획이 있었다.
“그때 내가 왜 너를 도왔는지 아?”
“모릅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너를 보면서, 너를 봤거든. 다른 배우들이 안 보는 것을. 넌 망가져 있었지만, 망가진 것만 있는 게 아니었어. 뭔가… 깨끗한 것이 있었어. 극도로 진정한 무언가가. 그래서 나는 너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카페의 배경음악 아래에 숨겨진 목소리.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 보니까, 내가 너를 구한 게 아니라 더 깊은 함정으로 밀어 넣은 것 같아. 이수진이한테 너를 소개한 것도 나였고, 계약 제안을 받게 한 것도 나였고, 그리고 지금…”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는 커피잔을 집었다. 입술에 가져갔다. 하지만 마시지 않았다. 그냥 들고 있었다.
“형, 제 잘못이 아닙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뭔가 단호한 것이 들어갔다.
“뭐?”
준호가 물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형이 저를 함정으로 밀어 넣은 게 아니라, 저는 이미 함정 안에 있었습니다. 형은 그냥 제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도와줬을 뿐입니다.”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커피잔을 내려놨다. 민준을 봤다. 그의 눈 속에 뭔가 빛이 들어왔다. 마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그 빛처럼.
“그래. 넌 맞아. 근데…”
준호가 말했다.
“형, 저는 뭘 해야 합니까?”
민준이 물었다. 이것이 그가 정말로 알고 싶은 질문이었다.
준호는 다시 침묵했다. 이번 침묵은 길었다. 거의 1분. 그 동안 카페의 배경음악만 계속 흘렀다. 뭔가 재즈 음악이었다. 느리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음악.
“오후 2시에 가.”
준호가 마침내 말했다.
“형?”
“가고, 뭐든지 물어봐. 다 물어봐. 이수진이가 정확하게 뭘 원하는지, 왜 너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만약에 너가 거절하면 뭐가 되는지. 다 묻고 와.”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요?”
민준이 물었다.
“그리고 우리한테 연락해. 즉시. 뭐가 되든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생각할 거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이 말을 들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준호와 우리. 그리고 아마도 자신. 이전에는 없었던 그 ‘우리’라는 개념.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그 느낌.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런데 민준아.”
준호가 다시 말했다.
“네?”
“이수진이와 대화할 때, 가능하면 녹음해. 폰으로. 아무도 모르게. 알겠어?”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이 말을 들었다. 그것은 조언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지금 뭔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형.”
민준이 말했다.
“고마워하지 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준호가 대답했다.
민준은 크로아상을 계속 먹었다. 여전히 맛이 없었다. 하지만 먹었다. 자신의 몸이 영양분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배고픔보다 더 깊은 필요성.
오전 10시 14분. 두 사람은 카페를 나갔다. 준호는 계산을 하면서 웨이터에게 팁을 주었다. 민준은 뒷발을 따라갔다. 강남역 방향으로 나가면서, 민준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녹음 앱을 열었다. 빨간 버튼이 떠 있었다. 준비된 상태. 그는 아직 누르지 않았다.
오후 1시 50분. 민준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검은 유리 건물. 14층짜리 건물. 자신이 4년을 보낸 곳. 엑스트라로, 조연으로, 그리고 이제는… 뭐가 될 것인지 모르는 누군가로서.
그는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로비. 흰 대리석 바닥. 회사 로고. 그리고 엘리베이터. 자신이 수천 번 탔던 엘리베이터. 하지만 이번엔 다른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갈수록, 자신의 심장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6층. 회의실이 있는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회의실 C는 복도의 끝에 있었다. 유리 문. 투명한 방. 그 안에 한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이수진. 검은 정장. 금색 목걸이. 그리고 그 냉정한 표정. 그녀는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민준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세상은 끝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투명한 유리로 막혀 있지만, 동시에 완전히 고립된 공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안에만 머물렀다.
“Park Min-jun.”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는 민준의 이름을 부를 때 항상 영문으로 불렀다. 마치 그것이 더 전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네, CEO님.”
민준이 대답했다.
“앉아.”
이수진이 말했다. 테이블 반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민준은 앉았다. 테이블 사이의 거리는 약 1미터. 그 1미터가 세상만큼 느껴졌다.
이수진은 손을 테이블 위에 놨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지난 시간, 너는 나를 신뢰하지 않았어. 알아?”
“네.”
민준이 대답했다.
“왜 신뢰하지 않았어?”
“모르겠습니다.”
민준이 거짓으로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 너는 알아. 그 우리라는 배우 때문에. 그리고 그 준호 배우 때문에.”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그의 최고의 무기였다.
“나는 너를 도와주려고 했어. 정말로. 하지만 너는 계속 도움을 거절했어. 왜?”
이수진이 물었다.
“제가 거절한 것 같지 않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정확하게 말해봐. 넷플릭스 계약을 할 건가, 말 건가?”
이수진이 물었다. 그녀의 펜이 테이블 위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민준의 손가락이 주머니 속에서 움직였다. 스마트폰. 녹음 앱의 빨간 버튼. 그는 눌렀다. 무음 상태로.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대답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정확하게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오후 2시 47분. 강남역 지하철 출구. 민준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녹음 파일. 37분 37초. 그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호는 즉시 받았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떻게 됐어?”
준호가 물었다.
“형, 저는 뭐가 되고 있는 겁니까?”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조용했다.
“뭐가?”
“배우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
민준이 말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준호의 숨소리가 들렸다. 길고, 깊은 숨. 그것은 분노의 숨이었다.
“지금 어디야?”
“강남역이요.”
“카페 올래? 그 우리가 있는 카페.”
준호가 물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지하철을 탔다. 강남역에서 신사역으로. 3정거장. 약 10분. 그 10분 동안 민준은 자신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느꼈다. 그 안에는 이수진과의 37분 37초의 대화가 들어 있었다. 그 대화 속에는 뭔가 끔찍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민준은 아직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이 이 순간 또 다른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것도.
# 신뢰의 균열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은 금속의 차가운 광택을 반사했다. 그것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이수진의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민준은 그녀의 손가락이 펜을 집어 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네일아트로 완성된 손가락. 완벽하게 다듬어진 손톱. 모든 것이 계산된 이미지였다.
이수진은 천천히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딱, 하는 소리. 그 소리는 작았지만 방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의 눈은 민준을 향했다. 회색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 마치 겨울 하늘 같은 눈빛이었다.
“지난 시간, 너는 나를 신뢰하지 않았어. 알아?”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마치 빙산 아래의 흐름처럼 깊고 복잡했다. 민준은 그 목소리 속에서 무언가 위험한 것을 감지했다. 수십 년의 경험으로 다져진 협상가의 음성. 상대방을 천천히 옭아매는 목소리.
민준이 대답했다.
“네.”
그는 부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짓은 이미 너무 많이 쌓여 있었다. 추가로 거짓을 더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았다.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다.
이수진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 움직임은 미세했지만 민준의 눈에는 분명했다. 그녀는 민준이 그렇게 빨리 항복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왜 신뢰하지 않았어?”
이수진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더욱 가까워진 음성으로. 마치 친구에게 묻는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철강처럼 단단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민준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침묵. 그것이 최선이었다. 침묵은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했다. 침묵 속에서 상대방은 자신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민준이 배운 배우의 첫 번째 교훈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의 힘.
이수진이 기다렸다. 10초. 20초. 30초. 그녀의 손가락이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세게.
“거짓말하지 마. 너는 알아. 그 우리라는 배우 때문에. 그리고 그 준호 배우 때문에.”
이수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마침내 그녀의 진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직업적인 차분함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아래의 분노가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의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턱이 타이트해졌다. 입술이 얇아졌다.
“우리와 준호.”
민준은 그 두 이름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들은 왜 자꾸 튀어나왔을까? 이수진이 왜 계속해서 그들의 이름을 언급할까? 그것은 단순한 언급이 아니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위협이었다. 마치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닫혔다.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 이 침묵이 더 오래 지속될수록, 이수진의 불안감은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이 계획이었다.
“나는 너를 도와주려고 했어. 정말로.”
이수진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마치 상처받은 사람처럼. 피해자처럼. 하지만 민준은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도 계산된 것이었다. 감정적 조작. 그녀가 얼마나 능숙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
“하지만 너는 계속 도움을 거절했어. 왜?”
이수진의 질문은 순진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함정이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하든 그것은 그녀의 함정에 걸리게 될 것이었다. 만약 민준이 도움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면, 그것은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만약 도움을 거절했다고 말하면, 그것은 이수진의 좋은 의도를 무시한 것이 되는 것이다.
“제가 거절한 것 같지 않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각 단어가 발을 디디는 곳이 중요했다.
이수진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연극 무대 위에서의 웃음처럼 인위적이고 날카로웠다.
“정확하게 말해봐. 넷플릭스 계약을 할 건가, 말 건가?”
이수진이 묻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돌려말하지 않았다. 직접적이고 명확했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녀의 펜이 다시 테이블 위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딱, 딱, 딱. 규칙적인 리듬.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민준이 대답해야 하는 시간의 제한. 시간이 흘러갈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었다.
민준의 손가락이 주머니 속에서 움직였다. 스마트폰. 그것은 그의 주머니 속에서 따뜻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녹음 앱의 아이콘을 찾았다. 그 작고 빨간 원형 버튼. 녹음 시작 버튼.
민준은 처음에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이 그를 변화시켰다. 속임과 거짓이 일상이 되었다. 신뢰가 깨지고, 가면을 쓰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 되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빨간 버튼을 눌렀다. 무음 상태로. 아무도 모르게. 화면은 어두웠고, 진동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비밀스럽게, 녹음이 시작되었다.
민준은 순간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생존의 본능이 그 죄책감을 밀어냈다. 이것은 자기 방어였다. 증거 수집이었다. 미래를 위한 보험이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정확하게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가 방금 누군가의 말을 녹음하지 않은 것처럼.
이수진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민준의 변화를 감지했던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의 톤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뭐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그건…”
이수진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 그녀는 민준에게서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 순간의 분산은 민준에게 숨을 쉴 기회를 주었다.
이수진이 통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전문적으로 돌아갔다. 마치 방금 전의 감정적 변동이 없었던 것처럼.
“미안해.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야 할 것 같아.”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는 서둘러 핸드백을 들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말하자. 그때까지 충분히 생각해봐. 너의 선택이 너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거야.”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침묵.
민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은 여전히 녹음 중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심장처럼 뛰고 있는 것 같았다.
—
오후 2시 47분. 강남역 지하철 출구. 민준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녹음 파일. 37분 37초. 그 숫자는 그의 눈에 점점 커 보였다. 37분 37초.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준호가 받았다.
“어떻게 됐어?”
준호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민준의 예상을 정확히 맞추고 있었다.
민준은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 두 번.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형, 저는 뭐가 되고 있는 겁니까?”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조용했다. 마치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듣고 있을 것 같아서.
“뭐가?”
준호의 음성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배우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 도구? 말이야. 폰 속의 도구? 아니면… 뭔가 더 나쁜 것?”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이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준호의 숨소리가 들렸다. 길고, 깊은 숨. 마치 누군가 물에 빠진 사람이 물 위로 나올 때의 숨 같았다. 그것은 분노의 숨이었다. 또는 두려움의 숨이었다. 민준은 구분할 수 없었다.
“지금 어디야?”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 속의 긴장감은 여전했다.
“강남역이요.”
민준이 대답했다.
“카페 올래? 그 우리가 있는 카페.”
준호가 물었다. 그 카페. 민준은 그 장소를 알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카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곳. 지난 3개월 동안 가장 많은 만남과 이별의 현장이었던 곳. 그 카페는 민준에게 더 이상 편안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함정의 장소였다. 거짓의 장소였다.
하지만 민준은 거부할 수 없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통화가 끝났다. 민준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녹음 파일 37분 37초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마치 폭탄처럼. 마치 시한폭탄처럼.
그는 지하철을 탔다. 강남역에서 신사역으로. 3정거장. 약 10분. 지하철의 형광등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밖으로는 동굴 같은 터널이 지나갔다. 검은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그 10분 동안 민준은 자신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느꼈다. 그것은 따뜻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그 안에는 이수진과의 37분 37초의 대화가 들어 있었다. 그 대화 속에는 뭔가 끔찍한 것이 있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이수진이 말한 “준비”라는 단어. “조건”이라는 단어. 그리고 “대가”라는 단어. 그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선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지하철이 신사역에 도착했다. 민준은 일어났다. 사람들이 밀어냈다. 서울의 오후 2시 50분. 직장인들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가방이 부딪혔다. 발이 밟혔다.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민준의 인생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지하철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올라갔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쬐었다. 서울의 햇빛. 따뜻하지만 어떻게든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카페로 향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마치 자신이 자신의 무덤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을 걸으면서 민준은 자신의 지난 인생을 생각했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 그것은 단순했었다. 무대 위에 서고, 역할을 하고, 박수를 받는 것.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배우의 삶은 변했다.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 박수를 받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준호를 만나러 간다. 준호. 그는 민준의 선배였다. 멘토였다. 또는 그렇게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민준은 준호가 누구인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카페가 보였다. 그곳의 창문에는 따뜻한 불이 켜져 있었다. 아늑해 보였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거짓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미끼였다. 함정이었다.
그는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준호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의 세계가 붕괴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앉아.”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은 여전히 녹음 중이었다. 이 대화도 녹음될 것이었다. 그의 삶의 또 다른 부분이 영구적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뭘 마실래?”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준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서 그는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눈 속에서 그는 진실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반사만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형, 저는 누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요?”
민준이 다시 물었다.
준호가 커피를 마셨다. 길고 느린 동작. 마치 시간을 버는 것처럼.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야.”
준호가 말했다.
“선택을 하는 건 항상 너야. 누군가가 너를 강제할 수 없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어.”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