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52화: 침묵하는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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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2화: 침묵하는 손가락

민준은 준호의 마지막 문장을 듣지 못했다. 전화가 끊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귀가 그 이상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 3시 42분. 스마트폰의 화면이 어두워졌고, 그 검은 화면에는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어 있었다. 극도로 창백한 얼굴. 눈 아래의 검은 자국이 깊은 얼굴. 자신을 인식하기 어려운 얼굴.

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반지하 방의 온도는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갑지만, 이 떨림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신체가 정신의 혼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천장의 곰팡이가 보였다. 그가 몇 달 전부터 관찰해온 그 곰팡이. 처음에는 작은 검은 점이었고, 그것이 점점 자라서 지금은 손가락 크기의 얼룩이 되었다. 마치 자신의 상황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처럼.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배우들이야.”

준호의 마지막 말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 문장은 단순했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깊었다. 우리는 배우들이니까, 우리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무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배역을 받고, 역할을 하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민준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정상인 척하는 배우?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진정한 사람?

그가 스마트폰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카톡을 열었다. 채팅 목록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준호. 우리. 그리고 아래로 스크롤하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타났다. 신입 배우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다른 직원들. 그 중 누군가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감사합니다’? 그건 너무 형식적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해줘서?

결국 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화면을 켜고, 꺼고, 다시 켜고, 다시 껐다. 반복.

새벽 4시. 민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지하 방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창문 위의 거리에서 택시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택시들. 밤을 샌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택시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민준은 작은 거울을 들었다. 그 거울은 손가락 길이의 것이었다. 자신의 얼굴 전체를 볼 수 없는 작은 거울.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의 왼쪽 눈 아래의 주머니 같은 살, 콧대의 작은 여드름 흉터, 턱 아래의 수염이 1mm 자란 것. 모든 것이 보였다.

그는 거울을 내려놨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10초, 20초, 30초.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아니라 소리였다. 콜.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지역번호 02. 서울. 하지만 연락처에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민준은 콜을 받지 않았다. 그냥 봤다.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기계적인 벨소리가 반지하 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멈췄다.

3초 후. 문자가 들어왔다.

“Park Min-jun. 이것은 Destar Entertainment의 인사팀입니다. 오늘 오후 2시에 회의실 C에서 계약 관련 최종 미팅을 요청합니다. 회신 바랍니다.”

민준은 문자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 문장이 계속 떠올랐다. ‘회신 바랍니다.’ 이것은 요청이 아니었다. 이것은 명령이었다.

그는 회신하지 않았다. 대신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준호는 받지 않았다. 아마 이제 일어났을 시간이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준은 메시지를 남겼다.

“형, 회사에서 오후 2시에 회의실 C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뭐 해야 합니까?”

그리고 기다렸다.

오전 8시.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준호였다.

“민준아.”

“형?”

“지금 어디야?”

“집이요. 왜요?”

“밖으로 나와. 카페 가자.”

민준은 준호의 톤에서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의 준호는 항상 차분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지금의 준호는…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그 차분함이 깨져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민준은 씻고 옷을 입었다. 반지하 방을 나가기 전에, 그는 거울을 다시 봤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강남역 근처의 카페. 준호는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따뜻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민준은 앉았다. 준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었다. 단지 보고만 있었다.

“계약서를 다시 읽어봤어?”

“네. 아홉 번이요.”

“더 있어?”

민준은 이미 찾은 세 번째 페이지의 조항을 설명했다. 정신 건강 상태 검사. 직업 적성 검사. 추가 조건.

준호는 계속 커피를 보고만 있었다.

“형?”

“응. 들었어.”

침묵이 흘렀다. 카페의 배경음악은 어떤 인디 가수의 노래였다. 가사는 들리지 않고, 오직 멜로디만 들렸다. 슬픈 멜로디.

“우리와 내가 얘기했어.”

준호가 말했다.

“뭐요?”

“새벽 4시에.”

“…아.”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얘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뭐라고 했는데요?”

“우리는 너한테 더 이상 말하지 말기로 했어. 위험하니까.”

준호가 마침내 커피를 집었다.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워져 있었던 커피.

“위험하다고요?”

“응. 넌 지금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 이수진이의 함정, 계약서의 조항들, 모든 것. 그리고 그 정보는 위험해.”

준호가 천천히 설명했다.

“왜 위험한데요?”

“왜냐하면 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넌 무언가를 한다면, 이수진이는 너한테 더 강하게 출격할 거야.”

준호의 눈이 민준의 눈을 마주쳤다.

“난 너를 지킬 수 없어, 민준아. 그게 현실이야. 난 너의 매니저이지만, 난 법률가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고. 난 단지 배우일 뿐이야.”

준호의 말은 새벽에 민준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그럼 저는 오후 2시에 회의실 C로 가야 합니까? 아니면 안 가야 합니까?”

민준이 물었다.

“가. 가야 해.”

준호가 대답했다.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듣기만 해. 그리고 하나하나를 기억해. 모든 말을 .”

준호가 말했다.

“형, 저는 무섭습니다.”

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마치 자신이 이 말을 입밖으로 꺼내면 무언가가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민준의 손에 가까워졌다. 손가락이 거의 닿을 정도로.

“넌 해낼 수 있어. 넌 배우잖아.”

준호가 말했다. 그 문장은 위로 같았지만, 동시에 운명 같았다.

오후 1시 50분. 민준은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카페에서의 커피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 회의실 C. 그 문을 열었을 때, 이수진이 이미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회사의 법무팀장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변호였다. 50대의 남자. 차갑고 정확한 표정.

“민 배우, 앉으세요.”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더 차갑고, 더 정확했다. 마치 연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민준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같은 파일. 같은 문장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것들은 올무였다.

“우리가 당신의 계약서를 다시 검토했습니다.”

강변호가 말했다.

“네?”

민준이 물었다.

“당신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강변호가 계속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특히, 당신이 관심 가질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수진이 개입했다. 그녀의 펜이 문서 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 부분입니다. ‘계약자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역할 수행에 부적절하다고 판단될 경우, 회사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정신 건강 검사를 요구할 수 있다.’”

이수진이 읽었다.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는 손을 탁 위에 놓으려고 했지만, 떨림이 너무 심해서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당신은 최근에 매우 불안정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회사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강변호가 말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의 말을 기억했다. 듣기만 해.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따라서 우리는 당신이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받을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회사가 추천하는 의사입니다.”

이수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하얀 명함. 그 위에는 “정신과 의사 박준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주소. 강남의 어딘가.

민준은 명함을 받았다. 그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이 상담을 받고 나면, 우리는 당신의 상태를 재평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당신의 계약 조건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강변호가 말했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상담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계약이 조정될 것이다. 그리고 ‘조정’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쁜 방향을 의미했다.

“알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이었다.

“좋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최선을 다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당신은 좋은 배우입니다, 민 배우. 우리는 당신이 성공하길 원합니다.”

이수진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우의 웃음이었다. 역할을 하는 사람의 웃음.

미팅이 끝났다. 민준은 회의실을 나갔다. 손에는 정신과 의사의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건물을 나갔다. 거리는 여전히 강남의 거리였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각자의 일을 하는 사람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함정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

민준은 카페로 향했다. 준호가 기다리고 있을 카페로.

도착했을 때, 준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그리고 준호의 얼굴은 민준을 본 순간 뭔가를 알아챘다. 그 미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준호는 명함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의사군.”

준호가 중얼거렸다.

“형, 이건 뭘까요?”

민준이 물었다.

“이건… 이건 최후통첩이야.”

준호가 대답했다.

그 말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깊은, 무거운 침묵. 마치 둘 다 무언가를 잃은 것 같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민준의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멈추지 않고.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이.

# 최후통첩

## 1부: 회의실

회의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감옥의 쇠문이 잠기는 것 같았다. 민준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심장이 가슴팍 어딘가 깊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회의실은 생각보다 차갑고 삭막했다. 흰 벽, 검은 테이블, 그리고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형광등 불빛. 이곳은 마치 판결을 내리는 법정 같았다.

강변호 이사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회사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런 표정. 이수진 매니저는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손에는 파일 폴더가 들려 있었다. 민준의 파일. 그 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의 모든 행동, 모든 실수, 모든 약점이.

“안녕하세요, 민 배우.”

강변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공식적이었다. 마치 자동응답기에서 나오는 목소리처럼 감정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약해 보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무릎 아래 숨겼다. 손가락이 떨렸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이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밤새 떨렸고, 아침에도 떨렸다. 커피를 마셔도, 명상을 해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최근에 매우 불안정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회사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강변호가 말했다. 마치 뉴스 앵커처럼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었다. 불안정한 행동. 그 말이 민준의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의 말을 기억했다. 어제 밤, 카페에서 준호는 민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었다. “형이 실수하면 안 돼. 그들 앞에서는 절대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 듣기만 해.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네 대답이 아니라 네 굴복이야.”

그래서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변호할 수도,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침묵이 방어막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이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받을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이수진이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강변호보다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은 더욱 위험했다. 칼을 벨벳으로 싸서 보내는 것처럼. “강력히 권장합니다”라는 말의 뒤에는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위협이 숨어 있었다.

“회사가 추천하는 의사입니다.”

이수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그 순간, 민준의 시야는 마치 터널 비전처럼 좁혀졌다. 흰색 명함만 보였다. 그것이 마치 판결문처럼 보였다.

명함 위에는 “정신과 의사 박준영”이라고 깔끔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소. 강남의 어딘가. 고급스러운 빌딩. 아마도 비용도 만만치 않을 곳. 회사가 비용을 낼 테니까 상관없겠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곳에 가야 한다는 것.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 자신이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준은 명함을 받았다. 그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명함을 받는 순간, 그것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명함이 약간 흔들렸다. 강변호와 이수진은 그것을 봤을 것이다. 그들은 민준의 약함을 보고 있었다.

“당신이 이 상담을 받고 나면, 우리는 당신의 상태를 재평가할 것입니다.”

강변호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당신의 계약 조건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알았다. 상담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계약이 조정될 것이다. 그리고 ‘조정’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쁜 방향을 의미했다. 조정은 감봉을 의미할 수도 있었고, 역할 축소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계약 해지까지 의미할 수도 있었다.

민준의 입은 마르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심호흡을 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약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숨을 쉬었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알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이었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자신이 영화 속의 배우처럼, 정해진 대사를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2부: 동정의 얼굴

“좋습니다.”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당신이 최선을 다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당신은 좋은 배우입니다, 민 배우. 우리는 당신이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 웃음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민준은 배우였으므로 진정한 웃음과 거짓 웃음을 구분할 수 있었다. 이 웃음은 배우의 웃음이었다. 역할을 하는 사람의 웃음. 마치 무대에 서서 관객을 위해 연기하는 배우의 웃음처럼.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감정이 없었다. 다만 계산만 있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것도 정해진 대사처럼. 마치 자신이 로봇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 없는 응답. 생각 없는 답변.

“미팅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강변호가 말했다. 그는 이미 다른 문서에 눈을 돌렸다. 민준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치 처리한 파일처럼 치워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떨렸다. 혹은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명함을 손에 들었다. 명함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담은 물건처럼.

“안녕하세요.”

민준이 인사했다. 그리고 회의실을 나갔다.

## 3부: 거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민준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봤다.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이었다. 눈 밑에는 검은 자국이 있었고, 피부는 창백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몇 주 전부터인 것 같았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 그때부터 뭔가가 자신의 안에서 깨어났다. 혹은 자신의 안에 있던 뭔가가 깨져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왔다. 문이 열렸을 때, 민준은 순간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건물에 계속 갇혀 있고 싶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강남의 거리가 그를 맞이했다. 회색과 검은색의 빌딩들. 그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 각자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각자의 꿈을 따라가는 사람들.

민준은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배우 민준이 아니었다. 그냥 거리를 걷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손에는 여전히 명함이 들려 있었다. 명함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그것이 실제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마치 그것이 꿈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따뜻한 종이의 질감이 그것을 증명했다. 차가운 인쇄 글씨가 그것을 증명했다.

강남의 거리는 여전히 바빴다. 점심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카페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각자의 일을 하는 사람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함정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

혹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들 중 누군가도 자신처럼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도 자신처럼 불안정한 손가락을 주머니에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도 자신처럼 미래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준호를 만나는 것이었다.

## 4부: 카페

민준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 거리를 바라보는 자리. 그곳은 두 사람이 자주 만나는 자리였다. 이 카페는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는 곳이었다. 어두운 조명, 조용한 음악,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

준호는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준호의 얼굴은 처음부터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민준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그 미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한눈에 알아차린 것처럼.

민준이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민준의 손이 떨렸다.

준호가 민준의 손을 봤다. 그리고 느려진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분노가 숨어 있었다. 차분하지만 깊은 분노. 마치 활화산처럼.

민준은 명함을 꺼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명함이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불안정한 손가락. 불안정한 미래.

명함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흰 명함. 검은 글씨. “정신과 의사 박준영”

준호는 명함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신과 의사군.”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 속의 분노를 느꼈다.

“형, 이건 뭘까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처럼 들렸다. 아니, 실제로 울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울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준호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이건 최후통첩이야.”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 5부: 침묵

그 말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깊은, 무거운 침묵. 마치 둘 다 무언가를 잃은 것 같은 침묵.

카페의 다른 손님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아무도 이 두 사람의 침묵에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매우 크게 들렸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그런 침묵. 마치 폭탄이 터진 후의 침묵처럼.

민준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그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더 떨렸다. 마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몸이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준호는 명함을 들었다. 그리고 명함을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명함이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의사에게 가야 해.”

준호가 말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조언이 아니라 명령.

“알아.”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의사에게 가서는… 뭐라고 말할 거야?”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의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자신이 불안정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완전히 정상이라고 말해야 할지.

“뭐라고 말할 거야?”

준호가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모르겠어…”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럼 생각해봐.”

준호가 말했다.

“이 회사가 너한테 무엇을 원하는 걸 생각해봐. 정신 상담이 아니라, 너의 굴복이 필요한 거야. 의사한테 가서 약을 받으라는 건, 네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라는 뜻이야. 그럼 회사는 편할 거야. 넌 아프고, 넌 약을 먹고, 넌 회사의 말을 들을 거야. 왜냐하면 넌 아프니까.”

준호의 말은 마치 검처럼 민준을 찌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약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럼 뭘… 뭘 해야 하는데?”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아이처럼 들렸다. 마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처럼.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명함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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