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0화: 함정 너머의 빛
벤치 위의 침묵은 5초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 5초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밤 12시 38분. 강남역 방향에서 또 다른 택시가 지나갔고, 그 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준호가 입을 열었다.
“뭐가 함정이야?”
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격렬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용암 아래의 지각처럼. 우리는 손을 들어 준호를 제지했다.
“이수진이가 민준이더러 ‘다른 회사에서 받아주면 협력하겠다’고 했다는 거지?”
우리의 질문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 명확함 속에는 뭔가 법적인 것, 거의 변호사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건 거짓이야. 그건 함정이야.”
우리가 다시 말했다. 그녀의 눈이 밝혀졌다. 마치 전등이 켜진 것처럼. 뮤지컬 배우가 역할을 이해하는 순간의 그 밝음이었다.
“왜요?”
민준이 물었다.
“이수진이는 민준이가 다른 회사로 가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이수진이는 민준이를 통제할 수 없거든. 그래서 이수진이는 민준이가 그 조건을 찾아가게 만들 거야. 계속 찾게 만들어. 그리고 찾지 못하게 만들어.”
우리의 분석은 정확했다. 마치 자신이 이 게임의 규칙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럼 뭐를 해야 합니까?”
민준이 물었다.
“계약 내용을 다시 읽어봐. 정확하게. 단어 하나하나.”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수진이가 준 계약서는 PDF 파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열었다. 날짜: 오늘. 시간: 오후 3시 17분. 파일 이름: “Min-jun_Agreement_Final.”
민준은 첫 번째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 글자들은 모두 같은 크기였고, 같은 색깔이었고, 모두 같은 법률 용어로 가득했다. 마치 자신을 질식시키려는 것처럼.
“뭐 읽어. 크게.”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기계적이었다.
“’계약자 Min-jun Park은 Destar Entertainment와의 독점 계약 기간 동안 회사의 배정 역할에만 집중하기로 동의한다. 회사가 배정한 모든 역할, 광고, 영상 콘텐츠, 라이브 공연에 참여할 의무가 있으며…’”
“잠깐. 잠깐.”
우리가 손을 들었다.
“’배정된 역할에만’이래? 다른 건 못 한다는 거야?”
“네. 그렇게 읽히네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게 뭐 하는 조건이야? 네가 다른 회사 오디션에 참가하면 위반이 되는 거야?”
우리의 질문은 명확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읽어. 계속.”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계속 읽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 세 번째 페이지. 그 과정에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계약 기간 종료 또는 합의 해지 시, 계약자는 회사의 허가 없이 산업 내 다른 엔터테인먼트 회사와의 계약을 6개월간 금지한다. 이는 회사의 지적 재산권 보호 및 계약자의 경력 관리를 위한 것이다.’”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숨을 쉬었다.
“6개월.”
우리가 중얼거렸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러면 뭐가 돼? 너는 위약금 4억을 내고 나갈 수 있는데, 나간 후 6개월 동안은 다른 회사와 계약할 수 없다는 거네? 그럼 6개월 동안 뭐 해? 일 없이?”
준호의 질문이 벤치 위의 공기를 갈라놨다.
“돈을 벌 수 없습니다. 6개월 동안.”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이수진이 그래서 ‘위약금을 내는 것이 가장 싼 선택’이라고 했어. 왜냐하면 너는 위약금을 내도 6개월 동안 벌 수가 없으니까. 결국 돈이 더 들어가는 거야.”
우리의 분석은 완벽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이 함정에 빠져본 사람처럼.
민준은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방금 깨달은 것이 너무 거대해서, 신체가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 나는 정말로…”
민준이 시작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갇혀 있는 거야. 완전히.”
우리가 말을 완성했다.
벤치 위의 4명이 아닌 3명이 앉아 있었다. 밤 12시 42분. 강남역 방향에서는 여전히 택시가 지나가고 있었고, 편의점에서는 여전히 형광등이 밝혀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벤치 위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수족관 속의 물고기처럼, 유리 너머의 세계를 보고만 있는 것처럼.
“그런데…”
준호가 입을 열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이수진이가 왜 그런 조건을 넣었을까?”
준호의 질문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어조였다.
“뭐가요?”
우리가 물었다.
“네가 다른 회사로 못 가게 막는 건 알겠어. 그건 통제야. 하지만 6개월이? 왜 정확히 6개월이야? 왜 3개월이나 1년이 아니라?”
준호의 질문은 점점 더 예리해지고 있었다.
“그건… 모르겠는데요?”
민준이 대답했다.
“생각해봐. 6개월 후에 뭐가 일어날 것 같아? 이수진이는 6개월 후를 계산하고 있는 거 아닐까?”
준호의 말은 맞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다음 수를 알고 있는 체스 플레이어처럼.
우리가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녀의 습관이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생각할 때.
“Netflix 드라마.”
우리가 갑자기 말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너 Netflix 드라마 오디션 했잖아. 그 결과가 나오는 게 언제야?”
우리의 질문은 정확했다.
민준은 생각했다. Netflix 드라마. 그 오디션. 그 장면. 아버지.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그 장면에서 자신이 한 것들. 그리고 그 후.
“4주.”
민준이 대답했다.
“4주?”
우리가 반복했다.
“네. 프로덕션 PD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4주 후에 최종 결과를 통보한다고.”
민준이 설명했다.
“그럼 그건 2주 안에 나올 거 같은데? 이미 거의 2주가 지나갔잖아.”
우리가 말했다.
“맞아.”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럼 2주 안에. Netflix에서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너는 만약 붙었으면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게 될 거야. 근데 너는 Destar와의 계약이 있으니까, Destar의 허가를 받아야 해. 다른 엔터 회사 배우들처럼.”
우리의 분석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수진이는 그 허가를 주지 않을 거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왜요?”
민준이 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너는 유명해져. Netflix 드라마에 나오면 너의 가치가 올라가. 그럼 이수진이는 너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돼. 그래서 이수진이는 그걸 못 하게 할 거야.”
우리의 말은 명확했다. 마치 자신이 이 업계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래서 6개월이야.”
준호가 덧붙였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6개월 후면 Netflix 드라마가 나온다. 방영된다. 그럼 너는 이미 유명해진 거야. 그리고 그 시점에서 너는 다른 회사로 갈 수 있게 되는 거지. 이수진이는 너를 6개월간 완전히 묶어두고, 그 사이에 너를 최대한 짜먹으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6개월 후, 너는 이미 유명하니까, 이수진이도 더 이상 너를 붙잡을 수 없게 되는 거고.”
준호의 분석은 완벽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이 게임을 여러 번 봐온 사람처럼.
민준은 이해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했다. 이수진이의 계획. 그 계획 속에서 자신의 위치. 그리고 자신의 미래.
“그럼 나는 6개월 동안…”
민준이 시작했다.
“완전히 일을 하게 될 거야. 광고도 하고, CF도 하고, 뮤지컬도 할 거야. 이수진이가 주는 대로. 그리고 그 돈은 모두 이수진이가 가져갈 거고.”
우리가 말을 완성했다.
“아니야.”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너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준호의 목소리는 이제 단호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무언가를 결정한 사람처럼.
“어떻게요?”
민준이 물었다.
“일단 이 계약서를 전문가한테 보여줘. 변호사. 이 조항들이 법적으로 유효한지 확인해봐. 왜냐하면 한국에는 근로자 보호법이 있거든. 그리고 6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은 근로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거야.”
준호의 말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준호가 계속했다.
“만약 Netflix에서 너를 붙인다면, 너는 그걸 해야 해. 그건 너의 인생을 바꿀 기회야. 이수진이의 허가 따위는 상관없이.”
“하지만 위약금…”
민준이 시작했지만, 준호가 손을 들었다.
“위약금은 내가 낼 거라고 했잖아. 그리고 만약 필요하면 우리도 도와줄 거야.”
준호가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들이 이미 그 결정을 한 사람처럼.
“나는 너한테 투자하는 거야. 이수진이처럼 너를 착취하는 게 아니라, 너한테 투자하는 거야. 왜냐하면 넌 그럴 가치가 있거든.”
준호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뭔가 거대한 것이 숨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민준은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이 밝혀졌다. 마치 자신이 처음으로 뭔가 빛을 본 사람처럼. 밤 12시 47분. 강남역 방향에서는 여전히 택시가 지나가고 있었고, 편의점에서는 여전히 형광등이 밝혀 있었으며,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벤치 위에서는 뭔가 다른 빛이 생기고 있었다. 마치 밤 속에서 자신들만의 별을 켜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가 입을 열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만약 너가 Netflix에 떨어지면?”
우리의 질문은 현실적이었다.
침묵.
그 침묵은 길었다. 마치 자신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다. 모두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말하지 않았을 뿐.
“그래도 괜찮아.”
민준이 말했다. 갑자기.
“뭐요?”
우리가 물었다.
“떨어지면… 떨어진 거겠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시도했을 거야. 이수진이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내 스스로 선택했을 거야.”
민준의 말은 약했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준호가 민준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정확해. 그게 전부야.”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밤 12시 49분. 전화 화면에는 이름이 떴다. “우리”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뭐가 뜬 거야?”
우리가 물었다.
“우리… 전화가 왔어요.”
민준이 중얼거렸다.
“아, 뭐야. 내가 방금 여기 있는데?”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감염되었다. 준호도 웃었고, 민준도 웃었다. 밤 12시 49분, 강남역 옆 편의점 벤치 위에서.
“아, 잠깐.”
우리가 갑자기 말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그 전화 받아.”
우리가 말했다.
“뭐요? 지금?”
“응. 받아. 봐 뭐라고 하는데.”
우리의 손이 민준의 손가락을 휴대폰 화면으로 밀었다.
민준은 받았다.
“여보세요?”
민준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약한 목소리였다.
“민준아! 뭐 했어? 진짜 뭐 한 거야? 내가 택시 탔는데, 나 지금 어디 와? 너 봤어?”
벤치 반대편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휴대폰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실시간으로.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벤치 반대편. 편의점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서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그리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따뜻했다. 마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여기야.”
민준이 말했다.
“어디 여기? 아, 잠깐. 보여. 불 켜.”
우리가 손전등을 켰다. 휴대폰의 손전등. 그것이 밤의 어둠을 갈라놨다.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우리는 벤치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 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니다. 우리는 벤치 반대편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뭐야. 나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휴대폰으로.
“우리…”
민준이 중얼거렸다.
“응?”
우리가 물었다.
“당신은… 애초에…”
민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애초에 뭐?”
우리가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애초에 나를 믿었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벤치 반대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밤 12시 51분. 강남역 옆 편의점 앞에서. 두 명의 배우가 한 명의 배우를 위해 밤을 새우고 있었다. 이것이 우정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민준이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준호가 말했다. 갑자기.
“뭐요?”
민준이 물었다.
“Netflix 결과가 나오기 전에, 변호사를 찾아.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이 업계 변호사. 이 계약서를 보여줘. 그리고 너의 옵션을 생각해봐. 나갈 수 있는 방법. 있을 거야. 반드시.”
준호의 말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벤치 반대편에서 말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넌 지금 집에 가. 자. 충분히 자.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생각해.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말은 따뜻했다. 마치 자신이 민준의 어머니인 것처럼.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 12시 53분. 강남역 옆 편의점 앞에서. 세 명의 배우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 속에는 뭔가 결정된 것이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함께 이 게임을 이겨내기로 다짐한 것처럼.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준호를 바라보고,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면서.
“뭐가 감사야. 우리 둘이 너 없으면 뭐하겠어. 넌 우리의 인생이야.”
우리가 벤치 반대편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자신을 구했다. 죽음보다도 더 강한 무언가로 자신을 구했다.
밤은 여전히 깊었지만, 이제 그 밤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새벽 너머에는 뭔가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민준의 휴대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벤치 반대편 우리의 전화. 하지만 이제 그것은 경보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호였다. 희망의 신호. 그리고 민준은 그 신호를 들었다. 처음으로.
[권 2 피날레 — 2권 끝, 다음 권 예고]
Netflix 결과는 2주 후에 나온다. 민준은 그동안 변호사를 찾는다. 준호의 소개로. 그리고 계약서를 분석받는다.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조항들을 발견한다. 특히 그 6개월 조항. 그리고 민준은 선택을 마주한다.
이수진이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민준이 더 이상 함정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Netflix의 결과가 나오는 밤, 민준의 휴대폰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