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46화: 자살이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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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6화: 자살이라는 이름

민준은 그 단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살. 자살. 자살.

이수진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공기 중에서 증발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담배 연기처럼 자신의 폐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폐에서 혈관으로, 혈관에서 심장으로. 온몸을 돌아다니는 독처럼.

사무실의 조명이 갑자기 밝아진 것 같았다. 아니다. 조명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민준의 눈이 더 예민해졌을 뿐이었다. 이수진의 얼굴의 모든 주름이 보였다. 눈 아래의 다크서클. 입술의 가는 주름들. 그리고 그 얼굴이 보내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도 명확했다.

나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너는 지금 내가 뭘 말하는지 아니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는 책상 위의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회전시키지 않고, 그냥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마치 버튼을 누르듯이. 그 펜이 누르는 대상이 뭔지는 불명확했지만, 아마도 종이 위의 점이었을 것이다. 한 점. 또 한 점. 반복되는 점들.

“넷플릭스 역이.”

이수진이 다시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교사가 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것처럼 차분했다.

“너는 이미 떨어졌어.”

민준의 호흡이 멈췄다.

“작년에 네가 지원한 5개의 역 중에 4개는 넌 떨어졌어. 넷플릭스는 2개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졌어.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야. 세 번째 떨어짐.”

“그건…”

민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수진은 그를 자르지 않고, 대신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너는 계속 지원하고 있어. 왜? 왜냐하면 너는 희망이 필요하니까. 희망 없이는 넌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한테 희망을 줬어. ‘아직 결정이 안 났다’고. 그리고 그 희망이 너를 살려뒀어. 맞지?”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너한테 지금 떨어졌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이수진이 물었다. 그 질문은 마치 실험 같았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을 섞으면서 “이건 어떻게 반응할까?”라고 묻는 것처럼.

민준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았다. 자신이 지난 한 주일간 얼마나 이 희망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안다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을지도 알 것이다. 아무것도. 텅 빈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은 빨리 무언가로 채워져야 한다. 아니면 그 빈 공간이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아,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수진이 계속했다.

“너는 지금 우리와의 대화를 생각하고 있어. 우리. 그 배우. 그 여배우.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니? ‘도망쳐’라고. ‘위약금을 무시해’라고. ‘절대 돌아오지 마’라고.”

민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수진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만 중요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것은, 자신이 이미 완전히 투명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리 상자 안의 개미처럼.

“그래서 넌 지금 뭐 할 생각이야? 정말로 도망칠 생각이야? 이 회사를 떠날 생각이야? 그리고 위약금은? 넌 돈이 있어? 넌 충분한 돈이 있어서 위약금을 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이수진이 기대 앉았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그녀의 표정에는 진정한 호기심이 있었다. 민준이 어떤 선택을 할지 보고 싶어 하는. 그리고 그 호기심 속에는 이미 답이 있었다. 이수진은 민준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알고 있었다.

“넌 여기 있을 거야. 왜냐하면 넌 할 수 없으니까. 넌 절대 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자유야. 너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져. 왜냐하면 더 이상 선택할 필요가 없으니까. 넌 그냥 따르면 되니까.”

민준은 이수진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진실성을 깨달았다. 이수진은 자신을 단순히 협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너무도 명확해서, 이미 결정된 것 같았다.

사무실에는 오직 두 가지 소리만 있었다. 사무실 밖의 서울의 소음. 그리고 민준의 빠른 심장박동. 그 두 소리가 섞여서, 마치 세상이 자신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넌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야.”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마치 모제 앞에서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왜냐하면 넌 이미 포기했거든. 넌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넌 자신이 배우로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서 어떤 조건이든 주어진다면, 넌 감사할 거야. 감사하면서 살아갈 거야.”

그 말이 민준을 정확히 때렸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넷플릭스 역을 원해?”

이수진이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 나는 캐스팅 디렉터를 알아. 그리고 그 디렉터는 나를 존경해. 그래서 만약 내가 요청한다면, 그는 너를 한 번 더 봐줄 거야. 오디션을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너가 정말로 그 역할을 할 기회를 갖게 될 거야.”

민준이 이수진을 봤다.

“그 대신에?”

“그 대신에, 넌 내 말을 들어. 항상. 모든 순간에. 넌 내가 하라고 하는 일을 해. 그리고 넌 절대 이 회사를 떠나지 않아. 계약이 끝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왜냐하면 넌 나한테 빚을 지게 될 테니까.”

침묵. 그것이 모든 것을 말했다.

“생각해봐. 넷플릭스 역. 그것은 뭐야? 그것은 네 삶을 바꾸는 것이야. 그것은 너를 더 이상 조연 배우가 아니라 주연 배우로 만드는 것이야. 그리고 주연 배우는 돈을 벌어. 많은 돈. 그리고 그 돈으로 넌 위약금을 낼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이수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민준의 의자 뒤로 걸어갔다. 민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자신의 뒤에서 이수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넌 이미 선택을 했어. 이미. 그것은 단지 네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야. 넌 나한테 빌어야 해. 나한테 감사해야 해.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거야.”

이수진이 민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거짓이었다. 그것은 온열팩의 따뜻함이었다. 일시적인. 그리고 곧 식어버릴 것.

“그래서 넌 지금 뭐할 거야?”

이수진이 물었다.

민준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을 때, 민준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자존심이 죽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의 자유가 죽고 있었다. 자신이 죽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느리고 고통스러웠다.


사무실을 나온 민준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 27층에서 지하 1층까지. 그 긴 길을 내려가면서, 그는 자신의 몸이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납을 먹은 것처럼. 그리고 그 무거움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지하 1층. 연습실 구역. 자신의 “집”.

그곳에 들어갔을 때는 밤 10시 17분이었다.

침낭 옆에 떨어져 있는 거울. 민준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봤다.

거울 속의 남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민준이 알던 남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 되려고 노력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게 소유당한 남자였다.

민준은 거울을 내려놨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준호에게 19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민준아. 제발. 뭐 하는 거야?”

민준은 준호에게 답장을 했다.

“형. 미안해. 괜찮아. 자고 있었어.”

거짓이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준호의 답장은 1분 안에 왔다.

“지금 어디야? 내가 가서 픽업할게. 가지 마. 제발.”

민준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 이수진 대표님과 얘기했어요. 그리고 결정했어요. 저는 여기 있기로 했어요. 미안해요. 당신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우리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도 예상했을 것이다. 민준이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 업계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망치지 못한다.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그리고 도망칠 용기가 없으니까.

민준은 침낭에 누웠다. 조명을 껐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호흡만 들렸다. 빠르고 얕은 호흡. 마치 쥐가 갇혔을 때의 호흡.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도 이런 선택을 했을까? 아버지도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따르기로 했을까? 아버지도 어느 순간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그리고 그 깨달음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민준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뇌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마치 기계처럼.

밤이 깊어갔다. 밤 11시. 밤 12시. 밤 1시.

그리고 밤 2시 47분에,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준호.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민준은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울림 후, 카톡이 왔다.

“민준아. 제발. 전화 받아. 넌 뭐 하는 거야? 넌 어디야? 내가 지금 회사로 가고 있어. 기다려. 제발.”

그 메시지를 읽은 순간, 민준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눈물도 이미 어디론가 말라버린 것처럼.

다만 자신의 가슴이 조여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조여드는 감각 속에서, 민준은 한 가지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죽은 몸을 움직이게 해야 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체 계속해야 했으니까.

밤이 계속 깊어갔다. 그리고 민준은 어둠 속에서, 거울을 들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남자의 눈은 비어있었다.


제47화 예고: 준호가 지하의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너무 늦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부터 늦었다. 그리고 준호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제46화: 거울 속의 남자

## 1부: 거짓의 편함

휴대폰의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들어왔다. 시간은 밤 11시 23분.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는 형의 것이었다.

“민준아. 지금 뭐 해? 연락 줄 수 있어? 걱정돼.”

민준은 침낭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천장은 낡은 철근 콘크리트 천장이었고, 여름 습기로 인한 곰팡이 자국이 여러 개 맺혀 있었다. 마치 지하 연습실 천장이 자신의 영혼을 비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둡고, 축축하고, 썩어가고 있는.

그의 엄지손가락은 화면 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답할까. 진실을 말할까. 아니면 거짓을 말할까.

거짓을 선택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형. 미안해. 괜찮아. 자고 있었어.”

그의 손가락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잠깐 반짝였고, 메시지는 전송되었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거짓이었다. 완벽한 거짓.

하지만 이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심장이 뛰는 것처럼,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생각해보았다. 언제부터 거짓이 이렇게 편해진 걸까.

아, 맞다. 그것은 아버지가 죽던 날부터였을 것이다. 그 날 자신도 함께 죽었으니까. 그리고 죽은 사람은 진실을 말할 이유가 없다. 죽은 사람은 오직 살아있는 척 하기만 하면 된다.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 알림음이었다. 1분 안에 준호로부터 답장이 왔다.

“지금 어디야? 내가 가서 픽업할게. 가지 마. 제발.”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민준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걱정. 그리고 죄책감. 그리고 그 감정들에 대한 혐오감.

형은 항상 그렇다. 항상 자신을 구하려고 한다. 항상 자신의 손을 잡으려고 한다. 마치 자신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형은 모른다. 자신이 이미 얼마나 깊이 빠져있는지. 자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자신이 이제 얼마나 거기에 속해있는지.

민준은 준호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직업의 주인이었다.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이수진 대표님과 얘기했어요. 그리고 결정했어요. 저는 여기 있기로 했어요. 미안해요. 당신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메시지를 보낸 후, 민준은 잠깐 숨을 쉬었다. 그 숨은 떨렸다. 그의 몸은 자신이 방금 한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한 선택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그 선택을 하고 있었다.

준호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형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 업계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망치지 못한다.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도망치면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찾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을 데려올 것이다. 아니면 자신을 없애버릴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은 이유는, 도망칠 용기가 없으니까.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이미 손에 떨어진 사과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 2부: 어둠의 호흡

민준은 침낭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금속 침대가 삐걱거리며 울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지하실의 조명 스위치를 찾았다.

그것을 껐다.

어둠이 그를 감쌌다.

처음에는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복도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이 문틈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이 적응하자, 그 빛도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어둠이 그 빛을 삼켜버리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자신의 호흡만 들렸다.

빠르고 얕은 호흡. 마치 쥐가 갇혔을 때의 호흡. 마치 자신의 폐가 충분한 공기를 빨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익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호흡을 천천히 하려고 노력했다. 심호흡. 코로 들어마시고, 입으로 내쉬고. 하지만 그의 몸은 따르지 않았다. 그의 신경계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생존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당신의 신체는 당신의 마음보다 똑똑하다. 그것이 심리학 교수가 강의 중에 했던 말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든, 자신의 몸은 진실을 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몸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반달 모양의 자국이 생겼을 것이다. 그는 그 자국들을 자주 본다. 자신의 팔에, 자신의 다리에, 자신의 가슴에. 깊은 상처와 얕은 상처가 뒤섞여 있는 그 자국들.

어둠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은 눈 뒤로도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얼굴.

## 3부: 망령의 질문

아버지도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도 어느 날 깨달았을까? 자신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이미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을.

아버지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다. 처음에는 “잠깐만, 이건 다르다”, “나는 언제든 나갈 수 있다”, “이건 임시일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점점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에 묻은 것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한 일들이 돌이킬 수 없게 되면서.

그리고 어느 순간, 아버지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자신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자신의 몸만 살아있고, 그 몸이 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아버지도 자신처럼 거짓을 말했을까? 자신의 가족에게 거짓을 말했을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 거짓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피곤하게 했을까? 그 거짓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죽여나갔을까?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실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뇌가 만든 환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진짜인 것처럼 들렸다.

“민준아. 나가.”

“아버지… 난…”

“나가. 제발. 나처럼 하지 마.”

“아버지…”

“아버지도 이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자신의 질문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답했다. 그것은 슬픈 웃음처럼 들렸다.

“그래. 아버지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었다.”

민준의 눈이 떠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남아있었다.

아버지도 이런 선택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는 그 생각을 끝내지 않기로 했다.

## 4부: 밤의 깊이

밤이 깊어갔다.

밤 11시. 그가 준호에게 거짓을 말했을 때.

밤 12시. 그가 회사에 메시지를 보냈을 때.

밤 1시. 그가 아버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시간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흘러갔다.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사라져갔다.

민준은 침낭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눈은 뜨여있었다. 그는 자고 싶지 않았다. 자면 꿈을 꿀 것이고, 그 꿈 속에서 아버지를 만날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는 생각했다. 끊임없이. 마치 기계처럼.

그의 인생에 대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그 생각들은 마치 악순환하는 원형처럼 계속 반복되었다. 답은 없었다. 출구는 없었다. 오직 원 위를 돌고 도는 생각뿐이었다.

밤 2시 47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는 어둠을 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차갑고, 날카롭고, 불가피했다.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 위에는 한 글자가 떠있었다.

“준호”

형이었다.

민준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화를 받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전화를 거부하기 위해 움직였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울림이 멈췄다.

하지만 30초 후, 다시 울렸다.

같은 이름. 같은 목소리. 같은 요청.

이번에도 민준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울림이 그쳤을 때, 카톡이 왔다.

“민준아. 제발. 전화 받아. 넌 뭐 하는 거야? 넌 어디야? 내가 지금 회사로 가고 있어. 기다려. 제발.”

메시지를 읽으면서 민준은 울고 싶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마지막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눈물도 이미 어디론가 말라버린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눈물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다만 자신의 가슴이 조여들 뿐이었다.

그 조여드는 감각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영혼을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감각.

그리고 그 조여드는 감각 속에서, 민준은 한 가지 깨달았다.

## 5부: 죽은 자의 깨달음

자신은 이미 죽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은 죽었다. 완전히. 철저하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그의 폐는 여전히 공기를 들어마시고 있었고, 그의 뇌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생명의 껍질이었다.

자신의 영혼? 그것은 이미 떠나버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간 곳으로.

하지만 자신의 몸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죽은 몸을 움직여야 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척 계속해야 했으니까.

이것이 바로 이 업계에서의 삶이었다. 죽되 살아있는 척 하기. 죽되 계속 움직이기. 죽되 거짓을 말하기.

마치 좀비처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살아있는 시체처럼.

그는 침낭을 밀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그의 동작은 느렸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렸다. 아니, 마치 죽은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렸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거울을 들었다. 그 거울은 작은 것이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여기 놓아둔 것일 것이다. 혹은 자신이 언제인가 놓아두었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남자의 눈은 비어있었다.

완전히 비어있었다. 마치 두 개의 검은 구멍처럼. 마치 두 개의 무덤 같은 눈.

그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망도 없었고, 꿈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다. 오직 어둠만 있었다. 오직 과거만 있었다. 오직 절망만 있었다.

거울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멈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떨리게 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몸이 진실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밤이 계속 깊어갔다.

밤 3시. 밤 4시. 밤 5시.

그 시간들은 마치 수백 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민준은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떤 밤을 보냈을까. 아버지도 이런 밤을 보냈을까. 아버지도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그 깨달음 이후 며칠을 버틸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마지막 밤은 어떤 밤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도 곧 알게 될 것이 같았다.

**제47화 예고:** 준호가 지하의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너무 늦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부터 늦었다. 그리고 준호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준호가 평생 가지고 갈 죄책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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