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3화: 침묵의 대가
민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우리의 마지막 문장이 공중에 떠 있었고, 그것은 마치 미완성의 악기 음처럼 울리고 있었다.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또 울었지만, 민준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듣기를 거부했다. 그의 뇌는 이미 우리가 던진 것들로 가득 찼다. 이수진, 기사, NDA, 그리고 지은이라는 이름.
지은이.
그 이름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자꾸만 반복되었다. 마치 누군가 계속 벽을 두드리는 것처럼. 그리고 그 벽 너머에는 무언가 끔찍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준은 그 벽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부수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은이는 나한테 ‘이수진이가 그런 사람이야. 이것도 이 업계의 일부야. 넌 견뎌야 해’라고 했어. 나는 지은이에게 그렇게 말했어. 내 친구한테.”
우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낮았다. 거의 속삭임. 마치 이 말 자체가 자신을 해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지은이는 연기를 그만뒀어. 이 업계를 떠났어. 그리고 나는 준호를 만났어.”
우리가 천천히 손을 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떨리던 손가락들이 하나씩 펴졌다. 마치 자신을 풀어주려는 움직임.
“준호는 나를 봤어. 정말로 봤어. 내가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것을 알았어. 내가 그 오디션에 떨어진 후에도, 내가 자책하고 있을 때도. 준호는 나한테 ‘넌 할 수 있어. 넌 충분해’라고 말해줬어. 그리고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일어나게 했어.”
민준은 우리의 얼굴을 봤다. 눈이 여전히 촉촉했지만, 얼굴 표정은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죄를 자백한 후의 그런 표정.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약간의 해방감이 섞여 있는.
“그래서 나는 준호한테 빚을 졌어. 깊은 빚. 그리고 그 빚은 내가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으로만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너를 봤어. 그리고 나는 알았어. 넌 지은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제 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민준이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거의 기계적이었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끄고, 오직 정보만을 수집하려고 하는 것처럼.
“넌 이수진이의 새로운 대상이야. 넌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넌 지금 그 덫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그리고 넌 그 덫이 뭔지도 모르고 있어.”
우리가 다시 창밖을 봤다. 5월의 햇빛이 여전히 서울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햇빛도 이제는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차갑게 변해버린 것처럼. 모든 색깔이 회색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이수진이가 널 보고 있는 것들을 알아? 넌 가능성이 있는 배우야. 넌 아직 이 업계에 물들지 않았어. 넌 아직도 순수해. 그리고 그런 너를 이수진이는 깨뜨리고 싶어. 왜냐하면 이수진이는 깨진 배우들을 더 잘 다룰 수 있거든. 깨진 배우들은 저항하지 않아. 깨진 배우들은 이수진이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이미 망했다고 생각하니까.”
민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내부는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자신의 모든 불안감과 맞아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진의 따뜻한 미소, 그 미소 속의 계산.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관심과 배려. 그것이 모두 덫이었다면?
“그래서 넌 지금 뭐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넌 도망쳐야 해.”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민준의 눈을 직접 봤다. 그 눈빛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 회사를 떠나. 이수진이한테서 멀어져. 그리고 절대 돌아오지 마. 내가 지은이한테 한 말을 반복하지 마. ‘견뎌야 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버리는 실수를 하지 마.”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몸이 거부했다. 마치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유일한 희망을 버리라고 하는 것처럼.
“근데 제 계약서는요? 위약금은요?”
민준이 물었다.
“무시해.”
우리가 말했다.
“뭐라고?”
“위약금을 무시해. 그게 뭐하는 거냐고. 넌 지금 자신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 네 영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 돈은 벌 수 있어. 하지만 넌 한 번 망가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어.”
카페의 소음이 갑자기 크게 들렸다.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민준의 귀에는 비명처럼 들렸다.
“이수진이가 널 어떻게 다룰 건지 알아?”
우리가 계속했다.
“먼저 넌 좋은 역할을 받을 거야. 정말 좋은 역할. 넌 그 역할에 모든 걸 쏟을 거야. 넌 그 역할을 통해 자신이 진짜 배우라고 느낄 거야. 그리고 그 느낌이 중독될 거야. 그 다음에는?”
우리가 멈췄다.
“그 다음에는 이수진이가 너한테 뭔가를 요구할 거야. 정확하지 않은 요구. 모호한 요구. 예를 들면, 촬영 현장에서 특별한 시간. 또는 개인적인 미팅. 또는 다른 프로듀서한테 소개. 그리고 넌 거절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그 역할 때문에 이수진이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그 빚은 점점 커질 거야.”
민준은 그 말들을 들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수진이 자신을 부를 때의 상황들. 항상 따뜻했지만, 항상 뭔가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 자신이 느꼈던 그 불편함. 자신이 무시하려고 했던 그 경고음.
“저 사람이 정말 그런 사람인가요?”
민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지은이가 있으면 물어봐.”
우리가 말했다.
“지은이를 찾을 수 있어요?”
“모르겠어. 내가 찾으려고 했지만, 지은이는 정말로 사라졌어. 어디로 간 건지, 무엇을 하는 건지, 아무도 모르겠어. 그냥 사라진 거야.”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민준의 희망, 그의 신뢰, 그의 미래. 모두가 한 번에 무너지고 있었다.
카페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민준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 사람은 지금도 자신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럼 준호는요?”
민준이 물었다.
우리의 얼굴이 굳었다.
“뭐?”
“준호도 알고 있어요? 이수진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아. 준호는 알고 있어.”
“그럼 왜 준호는 뭐라고 안 했어요? 왜 준호는 저한테 경고하지 않았어요?”
민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으로 감정이 터져 나왔다. 분노, 배신감, 그리고 깊은 혼란.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왔던 것처럼.
“준호는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준호도 이수진이의 덫 속에 있거든. 준호는 멘토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이수진이가 원하는 새로운 배우들을 찾는 역할을 하고 있어. 준호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어. 왜냐하면 준호도 이미 깨졌거든. 준호도 이미 이수진이의 손 안에 들어가 있어.”
“그럼 준호는 제 적이라는 거네요.”
민준이 말했다. 그 말이 나온 순간, 그것이 진실인 것 같았다. 준호도, 우리도, 모두가 자신을 배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우리가 강하게 말했다.
“준호는 너의 적이 아니야.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이수진이의 도구가 된 거야. 그리고 준호는 그걸 알고 있어. 준호는 자신이 뭐하는지 알고 있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준호는 더 깊게 망가지고 있어.”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고, 동시에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가 되었다. 준호의 불안한 눈빛. 준호가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 그것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럼 제가 뭐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용했다. 거의 죽음 같은 조용함.
우리는 대답을 꺼렸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여러 번.
“넌… 도망쳐야 해. 지금 당장.”
“어디로요?”
“어디든. 이수진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근데 제 부모님은요? 제 일상은요? 제 계약은요?”
민준이 물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울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다 버려야 해.”
우리가 말했다.
“지은이처럼요?”
“네.”
침묵이 내려앉았다. 깊은 침묵. 돌이킬 수 없는 침묵.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또 울었다. 매우 크게. 마치 비명처럼. 그 소리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신의 미래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지금 저한테 이 얘기를 해요?”
민준이 물었다.
우리의 눈이 흐릿해졌다. 이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여전히 흘러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지은이를 도울 수 없었거든. 나는 너는 도울 수 있기를 바라. 그리고 나는… 나는 준호를 도와야 해.”
“준호를 어떻게 도해요?”
“준호를 이수진이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해. 그리고 준호는… 준호는 너를 도와주면서 자신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민준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얽혀 있었다.
그의 휴대폰이 울었다.
민준은 화면을 봤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이었다.
우리와 민준의 눈이 만났다. 그 눈빛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경고, 공포, 그리고 일말의 희망.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끝을 눌렀다.
그 순간, 카페의 모든 소음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세상 자체가 일시정지된 것처럼. 그리고 그 정지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뒤돌아갈 수 없었다.
민준은 카페를 나왔다. 우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둘 다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남의 거리는 5월의 햇빛 속에서 여전히 밝았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었고,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자신의 길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걷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일 뿐,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었다. 이수진이였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또 울었다. 또 받지 않았다.
여섯 번째 울림에서, 민준은 휴대폰을 꺼버렸다.
검은 화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검은 화면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흐릿한 형상을 보았다. 배우 민준. 신인 배우.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그 모든 정체성이 이제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강남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휴대폰 대신,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치고 싶은데, 칠 수 없는 사람의 손처럼.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지은이라는 이름이 계속 울렸다. 마치 알람처럼. 마치 경고음처럼. 마치 죽음의 소리처럼.
민준은 그 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현재 상황:
– 민준은 우리로부터 이수진의 과거 성추행 혐의와 지은이(우리의 친구)라는 희생자의 존재를 알게 됨
– 민준은 자신도 같은 덫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음
– 민준은 이수진의 전화를 거부함 (도주 신호)
– 준호도 이수진의 통제 속에 있다는 것이 드러남
– 민준은 도망칠지, 버틸지의 갈림길에 서 있음
– 우리는 민준이 지은이처럼 사라지지 않기를 원함
다음 화를 위한 복선:
– 민준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준호? 집? 도망?)
– 이수진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준호는 이 상황을 알게 될 것인가?
– 민준의 “거절”이 초래할 결과는?
# 제3장: 거절의 무게
## 1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카페의 테이블 위에 놓인 아메리카노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검은 액체의 표면에 미세한 물결이 일렁거렸는데, 그것이 민준의 떨리는 손 때문인지, 아니면 옆 테이블에서 나오는 진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애매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민준은 우리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으려고 했다. 이수진의 이름, 지은이라는 여자의 이름, 그리고 ‘성추행’이라는 단어. 그 단어들이 자신의 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마치 떨어지는 빗방울이 물 위의 기름막을 뚫지 못하는 것처럼, 그 의미가 스며들지 않았다.
*이게 사실이야? 진짜 이게 사실인 거야?*
민준의 내면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우리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그의 감정은 저항하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지은이. 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었다. 완전히 낯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름 속에는 무언가 비극적인 것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검은 물 아래에 침몰한 돌처럼. 마치 무덤 속의 사람처럼.
우리가 말했다. 이수진이 지은이를 성추행했다고. 그리고 지은이가 사라졌다고. 그리고 이제 그 같은 일이 민준에게도 일어나려고 한다고.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목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목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마치 동상처럼.
카페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누군가의 보컬이 흘러나왔다. 영어 가사였다. 민준은 그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얽혀 있었다.
마치 실타래를 풀려고 했는데, 더 꽉 조여지는 것처럼.
—
그의 휴대폰이 울었다.
소리가 났다. 휴대폰의 진동음이었다. 꽤 큰 소리였다. 카페 내의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민준은 그 시선들을 느꼈다. 그 시선들이 자신의 피부를 헤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민준은 화면을 봤다.
화면 위에는 한 글자씩 떠올랐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민준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마치 감전된 것처럼.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근거림이 목까지 올라왔다. 그의 입 안이 말라갔다. 혀가 종이처럼 뻣뻣해졌다.
우리와 민준의 눈이 만났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이 응축되었다. 모든 감정이 한 점으로 수렴되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경고.** 이수진을 피하라는 경고. 이 전화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경고.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망쳐라는 경고.
**공포.** 지은이를 생각하는 공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 이수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
**그리고 일말의 희망.**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희망. 아직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지금 이 순간, 이 전화를 거부함으로써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눈 속에 담겨 있었다.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끝을 눌렀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의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였다. 그 떨리는 손가락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
—
그 순간, 카페의 모든 소음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배경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민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들은 마치 물 아래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먹먹하고 왜곡되어 들렸다. 카페 기계가 계속 울고 있었지만, 그 음향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세상 자체가 일시정지된 것처럼.
그리고 그 정지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갑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서서히 스며드는 감각이었다. 마치 독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처럼.
배우 민준. 그 정체성은 이제 무엇인가?
신인 배우. 그것도 이제는?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이수진의 배우.
그 모든 것들이, 이 순간, 다르게 보였다. 마치 새로운 렌즈로 보는 것처럼. 마치 진실이라는 렌즈로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 진실 속에서, 민준은 자신이 아주 위험한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뒤돌아갈 수 없었다.
—
## 2부: 거리의 유령
민준은 카페를 나왔다.
동작은 자동이었다. 몸이 일어나고, 다리가 움직였다. 하지만 정신은 어디론가 떠나가 있었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조종하는 꼭두각시 같았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팔을 움직이고, 누군가의 의지가 자신의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둘 다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은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의 말은 오직 상처를 깊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 무거운 침묵. 거의 질식할 지경의 침묵.
카페의 유리문이 닫혔다. 그 문 너머로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창가에 앉아서,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은 고개를 돌렸다.
—
강남의 거리는 5월의 햇빛 속에서 여전히 밝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밝았다. 태양은 여전히 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들은 여전히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새들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제 방식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모든 것이 변했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었다. 강남의 건물들이었다. 높고, 차갑고, 유리로 된. 그 건물들의 창문들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삶들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꿈들과 야망들이 있을 것이다.
민준도 그 중 하나였다. 아니, 그랬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 캐주얼한 옷을 입은 사람들. 가방을 들고 가는 사람들. 휴대폰을 들고 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자신의 길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그는 걷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강남역 방향인가? 아니면 신논현 방향인가? 아니면 그냥,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는 건가?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일 뿐,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마치 시체처럼 움직이는 다리. 마치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
사람들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민준을 보지 않았다. 또는 보더라도, 그를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민준이 아니라, 그저 거리의 유령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그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지은이도 경험했던 것일 것이다.
그 생각이 민준을 멈추게 했다. 아니, 멈추지는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그 생각에 붙들렸다.
지은이.
그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의 친구였다. 그것이 우리가 말한 것이었다. 지은이는 우리의 친구였다. 그리고 이수진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이었다.
사라졌다. 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사라졌다. 증발했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민준은 그 생각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 생각은 이제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마치 암세포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
휴대폰이 다시 울었다.
진동음이 민준의 주머니에서 울려 퍼졌다. 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민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그 진동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화면을 꺼내 봤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
다시였다.
민준의 심장이 또 다시 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의 놀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공포였다. 더 깊은, 더 본능적인 공포였다.
왜 이수진은 자신에게 전화를 했을까?
카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민준이 전화를 거절했으니, 이수진은 무언가를 감지했을 것이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이수진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떨렸다. 마치 추위에 떨리는 손처럼. 하지만 날씨는 따뜻했다. 5월의 햇빛은 따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추워서 떨고 있었다. 내부의 추위. 영혼의 추위.
—
그리고 또 울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
또 받지 않았다.
—
또 울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
또 받지 않았다.
—
또 울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
또 받지 않았다.
—
또 울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진**
또 받지 않았다.
—
또 울었다.
여섯 번째였다.
민준은 여섯 번 거절했다. 여섯 번 도망쳤다. 여섯 번 거부했다.
그리고 일곱 번째는 없었다.
대신, 민준은 휴대폰을 꺼버렸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검어졌다. 그 검은 화면은 마치 무한한 심연처럼 보였다. 마치 끝없는 어둠처럼 보였다.
검은 화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검은 화면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흐릿한 형상을 보았다.
**배우 민준.**
그 정체성이 맨 먼저 떠올랐다. 배우. 그것이 자신을 정의하는 단어였다. 그 단어 안에는 자신의 모든 꿈이 담겨 있었다. 그 단어 안에는 자신의 모든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단어는 다르게 들렸다.
**신인 배우.**
그것도 아주 최근에 붙은 수식어였다. 신인. 새로운 사람.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 아직 세상을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포식자의 손 안에 떨어졌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수식어였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이수진의 회사. 이수진의 영역. 이수진의 영토.
그 모든 정체성이 이제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미 감옥이었다.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
—
## 3부: 그림자 속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강남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그곳은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오후의 햇빛이 건물에 부딪혀, 그 뒤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낸 곳이었다. 그 그림자는 차갑고, 어두웠다.
민준은 그 그림자 속에 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아무도 민준을 보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멈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남의 거리는 그렇게 바빴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이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휴대폰 대신,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의 손처럼.
그 손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치 누군가를 치고 싶은데, 칠 수 없는 사람의 손처럼.**
그것이 정확한 묘사였다. 민준은 이 순간, 누군가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수진을. 그 여자를. 그 포식자를.
하지만 칠 수 없었다.
법적으로 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권력 관계상 칠 수 없었다. 이수진은 자신의 상사였다. 자신의 매니저였다.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손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지은이라는 이름이 계속 울렸다.
**지은이. 지은이. 지은이.**
마치 알람처럼 울렸다.
**위험. 위험. 위험.**
마치 경고음처럼 울렸다.
**죽음. 죽음. 죽음.**
마치 죽음의 소리처럼 울렸다.
민준은 그 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자신의 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