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화: 연기와 자살 사이
“’나는 죽고 싶어.’”
우리가 마지막 말을 끝냈다. 카페 안의 모든 소리가 순간적으로 멀어진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쉿 소리도, 누군가의 웃음도, 배경음악도. 민준의 귀에는 오직 우리의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뭐라고 했어?”
민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는 웃음을 멈췄다. 광기 어린 표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극도의 피로가 남았다. 마치 전력을 모두 소진한 사람의 얼굴. 얼굴 전체가 회색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수진이한테 ‘나는 죽고 싶어’라고 말했어. 그 뮤지컬을 하면서, 나는 죽고 있다고. 매일 밤 죽으면서 살고 있다고. 그래서 이 역할을 하지 않는 게 내가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우리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손가락 사이로 목소리가 나왔다. 마치 우물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처럼.
“그리고 이수진이가 뭐라고 했냐면…”
우리가 손을 내렸다. 눈빛이 변했다. 분노와 무언가 깨진 것의 조합.
“’그럼 죽어. 하지만 이 업계에서만.’ 이렇게 말했어. 그리고 전화를 끊었어.”
민준은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돌로 변한 것처럼.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또 다른 연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나는 지금 죽어 있는 거야. 이 업계에서. 내일이면 이 뮤지컬을 거절한 배우라는 기사가 나올 거고, 팬들은 나를 욕할 거고, 회사는 나를 버릴 거야. 그리고 나는 다시 엑스트라 현장으로 돌아갈 거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알지? 그 현장들이 뭔지.”
우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치 물 속에 잠기는 사람처럼.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이 카페에 온 우리가 아니라, 어떤 미지의 장소에 있는 우리를 본 것 같았다. 무대 위의 우리. 극도의 외로움 속에 있는 우리. 그 외로움이 우리를 집어삼키는 순간의 우리.
“왜 나한테 이 얘기를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을 켰다. 메모 앱을 다시 열었다. 그 길게 적혀 있는 텍스트를 다시 보았다.
“왜냐하면 넌 지금 나와 같은 기로에 서 있거든. 이수진이가 너한테 준 그 새로운 역할. 그것도 똑같은 덫이야. 너는 그것을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안다. 이수진이의 방식을. 그녀는 배우들에게 꿈을 주고, 그 꿈이 배우들을 죽인다. 그리고 죽은 배우들을 다시 깨운다. 그리고 또 죽인다. 그것을 반복한다. 왜냐하면 그게 비즈니스이기 때문이야.”
민준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공포를 정확하게 언어화하고 있었다. 어제 이수진이와의 대화.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무언가 끌어당기는 힘. 그리고 동시에 밀어내는 힘.
“근데 넌 아직도 선택할 수 있어. 나처럼 잃기 전에. 너는 지금 누구인지 정의되지 않았잖아. 기사가 난 지 며칠도 안 됐어. 사람들은 아직도 너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 그 기간 동안 넌 빠져나갈 수 있어. 이수진이로부터, 이 업계로부터, 그리고 연기로부터.”
우리가 휴대폰을 민준 쪽으로 밀었다. 메모 앱의 화면이 보였다. 몇 장에 걸친 텍스트. 첫 줄을 읽을 수 있었다.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
그것이 제목이었다.
민준은 그 제목을 바라봤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선택지를 보여주는 거울처럼. 자신도 이 글을 읽고 싶었다. 자신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읽어봐. 그리고 생각해봐. 너는 정말로 배우가 되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냥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싶은 건가?”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광기 어린 웃음이 아니었다. 극도의 슬픔의 웃음.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잃은 사람의 웃음.
“그리고 만약 넌 배우가 되고 싶다면, 넌 알아야 해. 이 길이 뭐라는 걸. 그리고 이 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넌 뭘 포기해야 하는지를.”
카페의 시간이 흘렀다. 민준과 우리가 앉아 있고, 우리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 화면에는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이라는 제목이 여전히 보이고 있었다.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 화면을 터치하고 싶었지만, 터치할 수 없었다. 마치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인 것처럼.
그 순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톤이 울렸다. 카톡 알림이 아닌, 전화. 누군가의 전화가 민준의 휴대폰에 들어오고 있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봤다. 이름이 떠 있었다.
“준호”
화면에 준호의 이름이 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통지가 떴다. 카톡 메시지. 여러 개.
첫 번째 메시지: “민준아, 뉴스 봤냐?”
두 번째 메시지: “우리 얘기 나왔어. 뮤지컬 거절한 거.”
세 번째 메시지: “그리고 넌 그 역할 받은 거 맞지? 이수진이가 말했어.”
네 번째 메시지: “지금 어디야? 만나자. 이거 심각한 거 같아.”
그리고 다섯 번째 메시지: “너 혼자 그런 거 결정하지 말고. 나랑 먼저 얘기해.”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을 내렸다. 우리를 바라봤다.
“뮤지컬 거절한 거 기사가 났어요.”
“그래. 예상했어.”
“그리고 준호가 말했어. 내가 그 역할 받은 거. 이수진이가 준호한테 말했대요. 내가 이수진이한테 준 새 역할.”
우리의 얼굴이 변했다. 놀라움. 아니면 분노.
“이수진이가 준호한테 말했어?”
“네.”
“그럼 준호는 이미 알고 있다는 거네. 너한테 주려고 한 그 역할이 뭔지. 그리고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민준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수진이로부터 받은 역할이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수진이는 세부사항을 말해주지 않았었다. 단지 “새로운 기회”, “다음 단계”라고만 말했었다.
“뭐예요? 그 역할이 뭐예요?”
민준이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휴대폰을 집었다. 네이버를 열었다. 뉴스 검색창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검색어: “우리 배우 뮤지컬 거절”
검색 결과가 떴다. 여러 기사들. 모두 우리에 관한 기사였다. 그리고 그 기사들 중에는 또 다른 것들도 있었다.
기사 제목: “더스타 엔터 CEO 이수진, 신인 배우 민준에게 드라마 주연 제의… 극도의 논란”
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드라마 주연. 그것이 자신이 받은 역할이었단 말인가.
“주연?”
민준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화면을 민준에게 보였다. 기사의 내용이 보였다.
“더스타 엔터의 CEO 이수진이 4년간 엑스트라로만 활동해온 신인 배우 민준에게 드라마 주연 제의를 했다. 이는 연예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일부는 이를 신인 발굴의 기회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다른 일부는 이수진의 ‘기사 조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민준 배우의 기사가 나간 지 며칠 만에 주연 제의가 나온 점에서,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전략적 마케팅’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민준은 그 기사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글자가 흐릿해 보였다. 마치 자신의 눈이 그 현실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기사가 났어. 그럼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모두가 너를 보고 있다는 거야. 그 기사를 통해서. 그 기사 속에서. 넌 더 이상 이 선택을 뒤로 미룰 수 없어. 넌 지금 선택해야 해. 이 순간에.”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이 민준의 손을 잡았다. 테이블 위에서. 처음으로. 그 거리를 넘어서.
“넌 이 역할을 받을 건가? 아니면 거절할 건가? 그리고 만약 받는다면, 너는 무엇이 될 건가? 배우? 아니면 기사의 대상? 아니면 이수진이의 도구?”
민준은 우리의 손을 느꼈다. 따뜻했다. 하지만 동시에 떨리고 있었다. 우리도 두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어. 난 이미 선택해버렸으니까. 너는 아직도 선택할 수 있어. 그것이 우리의 차이야.”
우리가 손을 놨다. 그리고 우리는 일어섰다. 카페를 나가려고.
“잠깐, 우리!”
민준이 부르짖었다.
“뭐?”
“당신이 거절한 거… 정말 잘한 거 같아요. 그 뮤지컬을 하면서 죽는 것보다는.”
우리는 멈췄다. 카페의 입구에서.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 깨진 것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살아있는 것도 있었다.
“근데 나는 어차피 죽는 거야. 여기서든, 저기서든. 적어도 내 영혼은. 너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이 모든 걸 너한테 말한 거야. 너는 아직도 도망칠 수 있으니까. 나처럼 늦기 전에.”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카페를 나갔다.
민준은 혼자 남았다. 우리가 앉았던 의자가 비어있었다. 우리의 커피잔이 테이블 위에 남겨져 있었다.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 그 위에는 먼지가 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휴대폰도 남겨져 있었다.
민준은 그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메모 앱.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이라는 제목.
민준의 손가락이 그 제목을 터치했다. 화면이 넘어갔다. 글이 보였다.
첫 번째 문단: “연기를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연기는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인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연기를 하면서 살아가고, 연기를 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연기를 하면서 다시 살아난다. 이 반복 속에서,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다.”
민준은 계속 읽었다. 각 문단마다 우리의 경험이 담겨 있었다. 무대 위에서의 극도의 외로움. 박수를 받는 순간의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이 거짓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그 거짓 속에 자신을 계속 던지고 싶은 욕망.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중독적이고, 얼마나 파괴적인지.
민준은 읽으면서 울었다. 작은 울음. 카페의 주변 소음에 섞여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울음. 하지만 극도의 슬픔. 극도의 공포.
그 울음 속에서, 민준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준호가 아니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 “이수진”
CEO 이수진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을 내렸다. 그리고 준호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너 혼자 그런 거 결정하지 말고. 나랑 먼저 얘기해.”
민준은 준호에게 전화를 했다.
“준호 형?”
“민준아, 넌 뭐하고 있어? 지금 당장 나한테 와. 우리 집이야.”
“네, 형. 지금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우리가 남겨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우리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민준은 지금 자신이 현실에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연기 무대 위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카페를 나왔다. 서울의 거리. 5월의 햇빛. 수천 개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거리.
민준은 택시를 탔다. 준호의 집으로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민준은 생각했다.
우리가 남겨둔 그 글.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
그 글이 정말로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연기의 더 깊은 덫으로 빠져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건지.
그리고 자신이 지금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의 선택인지, 아니면 이수진이나 준호나 우리가 만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인지.
그 질문들이 택시 안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마치 에코처럼.
택시가 강남의 거리를 지나갔다. 강남역, 신논현역, 강남대로. 모두가 익숙한 거리. 하지만 오늘은 낯설었다. 마치 처음 보는 거리처럼.
그리고 민준의 휴대폰에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 “알 수 없음”
메시지: “민준아. 난 네 엄마야. 오랜만이지. 기사 봤어. 잘하고 있는 것 같네. 한 번 만나자. 우리 집에서. 주소는 따로 보낼게. 못 거절해. 이건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야.”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 읽었다.
엄마. 10년 만에 들어온 엄마의 목소리. 아니, 문자. 그것도 메시지로.
민준은 화면을 내렸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서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끝없이.
[다음 화 예고]
준호의 집. 민준이 도착했을 때, 준호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신문과 잡지가 펼쳐져 있었다. 모두 민준에 관한 기사들. 그리고 준호의 표정은 극도로 진지했다.
“민준아, 넌 이수진이가 뭘 노리고 있는지 아나?”
준호가 물었다.
“아니요.”
“그럼 내가 말해주겠어. 이수진이는 너를 이용해서, 우리 업계의 권력 구조를 바꾸려고 하고 있어. 그리고 너는 그 중심에 있어. 너는 도구가 돼버린 거야. 그리고 도구는 결국…”
준호가 말을 멈췄다.
“도구는 결국 버려져.”
그 말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판결문처럼.
#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 – 확장판
## 제1장 소환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형의 이름을 보는 순간, 민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호.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아, 넌 뭐하고 있어?”
형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차분했다. 그러나 그 차분함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흐르고 있었다. 위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 민준은 그것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요즘 자신의 상태가 그랬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연기인지, 무엇이 감정이고 무엇이 표연인지—그 경계가 자꾸만 흐릿해졌다.
“형, 지금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 있어.”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전달했다. 마치 신문사에 기자회견을 하듯이. 그렇게 정확하게, 그렇게 무감정하게.
“지금 당장 나한테 와. 우리 집이야.”
명령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 형과의 관계가 이렇게 변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민준은 순간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게 된 그 순간부터였을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수진 감독을 만나면서부터였을 것 같다.
“네, 형. 지금 가겠습니다.”
민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구멍을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연기인지, 아니면 이미 자신이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신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통화가 끝났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민준은 카페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왜 떨렸을까?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기대감 때문일까?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우리”라고 했었다. 누가 “우리”였을까? 이수진인가? 아니면 준호인가? 아니면 자신의 과거 자아인가?
*아니면 우리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그 생각이 완전히 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낯설었고, 동시에 너무 익숙했다. 마치 이미 몇 번을 경험했던 것처럼.
카페를 나왔다.
5월의 햇빛이 서울 강남의 거리를 황금빛으로 칠하고 있었다. 한낮의 햇빛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매서웠다. 민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 때문이 아니라, 마치 수천 개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강남역 주변의 거리는 늘 붐볐다. 젊은 여자들이 쇼핑백을 들고 다니고, 회사원들이 빠르게 걸어가고,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었다. 평범한 서울의 평범한 오후였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무대처럼 보였다. 각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무대.
*나도 그 중 한 명인가? 아니면 나는 무대 밖에 있는 것인가?*
택시를 탔다.
기사는 중년의 남자였다. 목에 금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민준이 준호의 주소를 말하자 기사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기사도 매일같이 수백 명의 손님들을 태우고 내려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사에게 민준은 무엇일까? 단지 하나의 손님일까?
택시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의 음성, 엔진음, 거리의 소음이 들렸지만, 민준에게는 모두 먼 곳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물 아래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남겨둔 그 글.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
민준은 그 글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누가 썼던 글이었을까? 자신이 쓴 글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입시킨 생각이었을까?
그 글은 명확했다. 너무도 명확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쓴 것처럼.
*그 글이 정말로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연기의 더 깊은 덫으로 빠져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건지.*
손톱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민준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더 깊은 의문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지금 이 순간 택시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 이 생각들이 정말로 자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의 뇌에 심어놓은 생각인가?*
**“당신은 지금 연기 중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생각은 이미 각본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택시 기사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는 라디오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남대로를 지나갔다. 신논현역, 강남역, 교보문고. 모두가 낯익은 거리였다. 민준은 이 거리를 수백 번 지나갔다. 드라마 촬영, 스케줄, 미팅. 강남은 이제 그의 두 번째 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의 강남은 마치 낯선 도시처럼 보였다. 마치 처음 보는 거리처럼. 그 거리의 모든 것이 세트장처럼, 프로덕션처럼 느껴졌다. 저 건물들도 가짜일 수 있고, 저 사람들도 엑스트라일 수 있고, 저 햇빛도 조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에요?”
민준이 물었다.
“강남구 삼성동이에요. 곧 도착할 거 같은데요.”
기사의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마치 자신도 이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거리 밖에 있는 것처럼.
그 순간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니, 울린 것이 아니라 진동했다. 메시지가 들어온 것이었다. 민준은 화면을 켰다.
발신자: **“알 수 없음”**
메시지 내용을 읽는 순간, 민준의 혈액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민준아. 난 네 엄마야. 오랜만이지.”**
엄마.
그 단어가 민준의 가슴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10년. 정확히 10년이었다. 자신의 엄마를 본 지 10년이 되었다. 아니,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말도, 연락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민준은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화면을 다시 읽었다. 마치 그 글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듯이.
**“기사 봤어. 잘하고 있는 것 같네.”**
엄마가 자신의 드라마를 보았다는 것인가? 어떻게? 어디서? 언제부터?
**“한 번 만나자. 우리 집에서. 주소는 따로 보낼게. 못 거절해. 이건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야.”**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라니. 그 말 자체가 명령처럼 들렸다.
민준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마치 뜨거운 탄처럼 느껴졌다.
택시 기사가 뒷거울을 통해 민준을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한 듯했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습니다.”
민준은 거짓말을 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면을 내렸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창밖을 봤다.
서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끝없이. 마치 루프처럼. 마치 자신이 같은 거리를 계속 도는 것처럼.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혹시 자신의 인생도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 아닐까? 같은 각본을 계속 반복하면서.*
## 제2장 준호의 집
택시가 준호의 집 앞에 정차했다.
강남구의 고급 주택가. 담장이 높은 한옥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준호는 자신의 성공을 건축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민준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여기가 맞나요?”
기사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민준은 돈을 건넸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렸지만, 얼굴에는 평온함을 띠우고 있었다. 그것이 연기였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이제 구분할 수가 없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원이 있었다. 작지만 정교하게 꾸며진 정원. 돌 위에 이끼가 끼어있었고, 분재처럼 다듬어진 나무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위적으로 보였다.
“민준아!”
준호가 나왔다.
형은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팔뚝에 근육이 단단하게 박혀있었고, 얼굴에는 까만 수염이 피어있었다. 한때 자신이 닮고 싶던 남자. 지금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남자.
“형.”
민준이 고개를 숙였다.
“늦었네. 전화한 지 한 시간 반이 됐어.”
“죄송합니다, 형.”
준호는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재산을 감정하듯이.
“안으로 와.”
거실은 크고 밝았다. 벽면에는 그림이 걸려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신문과 잡지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모두 민준에 관한 기사들이었다.
**“신인배우 민준, 드라마 ‘런어웨이’에서 주연 확정”**
**“민준의 연기력, 업계 평가 상승 중”**
**“캐스팅 논란 속 민준, 시청률 상승의 주역”**
준호는 그 신문들을 자세히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문의 일부에는 형의 필기가 있었다. 동그라미, 밑줄, 물음표.
“앉아.”
민준은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값비싼 이탈리아 가죽 소파였다. 몸이 파고들었다.
준호는 마주보는 소파에 앉지 않고, 민준의 옆에 섰다. 마치 심문관처럼.
“넌 이수진 감독이 누구인지 알아?”
“네, 감독입니다. 드라마 연출을 하시는.”
“그것뿐인가?”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수진은 단순한 감독이 아니야. 그녀는 이 업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야. 왜냐하면 그녀는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준호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넌 지금 이 신문에 나온 대로, 이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됐어. 네 사진은 스포츠신문 1면에 나왔고, 방송국은 너한테 출연료를 올려줬고, 광고사들은 너한테 광고료를 주려고 줄을 서고 있어. 알아?”
“네, 형.”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시작된 것 같아? 누가 너를 여기까지 끌어올렸다고 생각해?”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었다.
“이수진이야. 그녀가 너를 선택했고, 그녀가 너를 홍보했고,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어. 그리고 그 이유는?”
준호가 손가락으로 신문을 쿡 찔렀다.
“권력 때문이야. 이수진은 이 업계의 대형 제작사들과 방송국들의 권력 구조를 흔들어놓고 싶어.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 너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넌 도구야, 민준. 그것도 일회용 도구.”
그 말이 공중에 떠 있었다.
민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준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두려웠다.
“형이… 확실한가요?”
“내가 확실한 게 아니라, 이건 사실이야.”
준호가 다른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 신문을 봐. 3개월 전 기사. ‘이수진 감독, 새로운 신인 캐스팅에 관심’이라는 제목이야. 그리고 여기 봐. 같은 시기에 너는 자그마한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탔어. 그 이후로 이수진의 눈에 띄었어. 그것도 정확히 이 드라마 캐스팅이 나기 3개월 전에.”
준호가 테이블 위의 신문들을 한 줄로 정렬했다.
“모든 것이 의도된 거야, 민준. 너는 그저 타이밍이 맞은 대상일 뿐이야. 다른 누군가여도 상관없었어. 중요한 건 그 누군가가 이 업계의 권력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상징이 되는 것뿐이야.”
“그럼… 형은 뭘 원하세요?”
민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가 민준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 깊은 것이 있었다. 동정심? 아니면 경멸?
“난 너를 구하려고 해. 넌 아직 때가 안 됐어. 이수진한테 완전히 장악당하기 전에. 넌 지금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어.”
“어떻게요?”
“드라마를 그만둬. 지금당장. 그리고 이수진과 관계를 끊어. 그럼 넌 살 수 있어.”
민준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형의 말이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뭔가 빠져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에서 한 장면이 삭제된 것처럼.
“형… 그런데 왜요? 왜 형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세요?”
그 질문을 하는 순간, 민준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느꼈다.
준호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면을 벗겨낸 것처럼.
“내가 왜 그렇겠어? 넌 내 동생이니까.”
그 말은 너무도 당연했다. 마치 이미 정해진 대사인 것처럼.
“형… 난 형을 믿고 싶어요. 정말로. 하지만…”
민준이 일어났다.
“하지만 뭐? 말해봐.”
“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