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1화: 손잡이와 침묵
기차가 움직이면서 우리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민준은 그것을 느꼈다. 그녀가 손잡이를 잡으려다가 어깨가 자신의 팔에 스쳤다. 따뜻했다. 인간의 온기. 그것을 느낀 것이 며칠 만이었을까. 아니, 언제 이런 걸 마지막으로 느꼈을까. 준호와의 통화 이전에는. 아니면 그 이후로는 처음인가.
“민준이 얼굴 봤어? 진짜 다르네.”
우리가 말했다. 기차의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그것은 민준이 배운 배우의 기술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 복식호흡, 성대의 사용, 발음의 명확함. 우리는 뮤지컬 배우였으니까, 더욱 그렇게 훈련받았을 것이다.
“다르다고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항상 그랬다. 마치 자신이 말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응. 더 밝아 보여. 눈빛이 다르다니까. 전에는… 어, 뭐라고 할까. 좀 멀어 보였는데, 이제는 여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상한 설명인가?”
우리가 웃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 웃음은 자신의 설명이 어색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해가 자신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기차가 역을 지나갔다. 강남의 거리들이 창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백화점, 카페, 옷가게, 드라마 촬영 스튜디오의 외벽. 모두가 빛나고 있었다. 저녁의 네온사인. 강남의 밤은 항상 낮처럼 밝았다.
“근데 진짜 잘했어, 그 오디션. 기사 읽었어?”
우리가 계속 말했다. 민준은 답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읽었어. 네이버에 올라온 거. ‘감정의 무게를 표현한 신인 배우, 가능성의 싹을 드러내다’ 이런 거. 그리고 댓글도 봤어. 대부분 좋은 말들이었어. ‘누구야, 이 배우’, ‘다음 작품 뭐예요’ 이런 식으로. 넌 이제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배우가 된 거야, 민준이. 그런데 왜 이렇게 시무룩해?”
우리가 물었다. 그 질문은 순진했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질문이었다.
민준은 창밖을 봤다. 자신의 흐릿한 영상이 유리에 비쳤다. 검은 터널을 지나갈 때는 더욱 선명했다. 그 영상 속의 자신은 실제 자신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더 창백했다. 더 무거워 보였다. 더 외로워 보였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존댓말이 나왔다. 자신도 깨달았다. 그 순간. 우리는 선배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선후배 사이의 거리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말은 항상 상황에 맞게 조정되었다. 상대에 맞게.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
“어, 뭐 이런 식으로… 나한테 존댓말 하면 어떡해.”
우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투정 같은 말이었다. 친구 사이에서만 가능한 투정. 그런데 민준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항상 누군가의 후배였기 때문이다. 항상 누군가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또 다른 역에 도착했다. 인원이 늘어났다. 저녁 8시 반 정도의 시간. 퇴근길의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회사원들, 학생들, 쇼핑백을 든 사람들. 우리는 민준과 더 가까워졌다. 손잡이를 잡기 위해 밀려난 것이었다. 또는 그렇게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너 어디가?”
우리가 물었다. 기차의 소음이 더욱 커졌다. 사람들의 목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기계음.
“신림으로요. 집이 거기.”
민준이 대답했다.
“신림? 오, 그럼 내가 신림이 아니라 강남역에서 내려. 내 친구가 기다려. 근데 진짜 축하해,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말을 멈췄다. 마치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민준은 그것을 느꼈다. 배우들은 침묵의 의미를 안다. 그 침묵 속에 있는 것들을.
“뭐요?”
민준이 물었다.
“다음에 또 봐. 뮤지컬 오디션이 많아서 시간이 없지만, 시간 내서 봐야지. 넌 이제 바빠질 테니까, 내가 시간을 낼 거야. 알지? 친구니까.”
우리가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약간의 슬픔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들었다. 우리도 알고 있다는 것을. 이제 자신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그 아래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의 친구의 성공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면서도.
“네, 고마워요. 정말로.”
민준이 말했다. 그 말은 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안함이었다. 하지만 미안함을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감사로 포장했다.
기차가 강남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손잡이를 놓았다. 민준의 팔이 공기에 노출되었다. 온기가 사라졌다. 그것이 얼마나 빠르게 일어났는지를 느꼈다. 한 순간이었다. 따뜻함에서 추위로. 접촉에서 거리로.
“그럼 이만 가. 안녕, 민준이. 화이팅!”
우리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 손은 인사였다. 또는 축복이었다. 또는 둘 다였다.
“네, 안녕하세요.”
민준이 말했다. 또 존댓말이 나왔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민준은 그것을 봤다. 창을 통해. 그리고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방금까지 우리의 어깨가 닿았던 그곳. 이미 온기는 사라졌다. 피부에는 아무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기차는 계속 움직였다. 강남을 떠나 강북으로. 한강을 건넜다. 검은 수면이 창 아래로 흘러갔다. 야간의 강. 그 위에는 다리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강대교, 남산대교, 동작대교. 모두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어디론가. 어디든지.
민준은 휴대폰을 꺼냈다. SNS를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또는 보고 싶지 않았다. 둘 다였을 수도 있다.
검색 결과가 나왔다. 기사들. 댓글들. 팬페이지. 심지어 자신의 얼굴을 사용한 팬 아트. 모두가 낯설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중 하나의 댓글을 읽었다.
“이 배우, 표정이 진짜 살아있네.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어. 누구야?”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를 모르겠다. 하지만 기사를 쓴 사람은 그렇게 느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표현이 의도한 것이 맞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살아남은 죄책감이,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이, 그것이 모두 눈에 드러났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연기였을까. 아니면 연기가 아니었을까.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창밖의 자신의 흐릿한 영상을 다시 봤다. 그 영상은 말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배우인지 아닌지. 연기하는 것인지 살아가는 것인지.
기차가 또 다른 역에 도착했다. 강북의 어딘가. 민준은 하차 안내를 들었지만, 역 이름을 인식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탔다. 기차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도착하고, 그 사이에 누군가는 그저 앉아 있다.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준호였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미안해. 너를 밟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나는 그냥… 나도 힘들었어.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야. 너는 잘했어. 정말로. 그래서 다음에는 더 잘해야 해. 알지? 넷플릭스 역할을 받았으니, 이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이 진정한 배우가 하는 일이야. 내가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일단 축하해. 정말로.”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것처럼. 그것은 사과였다. 또는 축하였다. 또는 조언이었다. 또는 모두였다.
민준은 답장을 했다.
“감사합니다, 형.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답장을 보낸 후,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여러 번. 마치 그것이 뜨거운 것처럼. 아니면 차가운 것처럼.
기차가 신림역에 가까워졌다. 민준은 일어나 준비했다. 손잡이를 잡았다. 아까 우리가 잡았던 그 손잡이. 따뜻함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금속이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많은 사람들의 손이 닿아 있었을 손잡이였다.
기차가 멈췄다. 신림역. 민준은 내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번 뒤를 봤다. 기차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가져갈 또 다른 사람들을 실고. 또 다른 목적지로.
지하철 역사를 올라갔다. 계단은 길었다. 민준은 천천히 올라갔다. 빠르게 갈 이유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뭘 할 것인가. 자신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와 옷과 책. 그리고 거울. 많은 거울.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지상으로 나왔다. 신림역 주변. 야간의 거리. 카페, 분식점, 편의점, 학원. 모두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학생들, 직장인들, 배달원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또는 어딘가에서 오고 있었다.
민준은 집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한 발 앞에 다른 한 발을 놓는 방식으로. 이것이 삶이었다. 거대한 의미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다른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 민준은 받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받았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는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보세요?”
민준이 물었다.
“안녕, 민준이. 나 우리야.”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아까는 강남역에서 내렸는데, 이미 전화를 할 여유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네? 어…어떻게 됐어요?”
민준이 물었다. 반말이 나왔다. 자신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나온 반말. 경계가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아, 내가 친구를 잠깐 미루고. 너 지금 뭐 해?”
우리가 물었다.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인데…”
민준이 대답했다.
“아, 그래. 그럼 내일 만나자. 내일 낮에. 시간 있지?”
우리가 물었다.
“네, 있어요. 뭐 하려고요?”
민준이 물었다.
“그냥… 뭔가 축하해주고 싶어. 우리 카페에서 만나자. 내가 사줄 거야. 시간 되면 오후 2시?”
우리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어, 또 존댓말… 아무튼 내일 봐. 화이팅!”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통화는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내일. 우리와 만난다. 그리고 뭔가 축하해준다. 그것이 무엇일까. 단순한 축하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일까.
신림역 주변을 계속 걸었다. 보습 크림 냄새, 튀김 기름 냄새, 학생들의 목소리. 모든 것이 일상이었다. 이 거리는 민준이 처음 서울에 왔을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같은 가게, 같은 냄새, 같은 사람들. 아니, 사람들은 계속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같은 속도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낡은 건물. 6층짜리. 엘리베이터는 항상 고장 나 있었다. 민준은 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 자신의 방. 방 번호 304.
문을 열었다. 어둡고 좁은 방. 창은 하나였고, 창 너머는 다른 건물이었다. 햇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겨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는 이 건물의 위치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페인트가 벗겨진 부분들. 습기로 인한 곰팡이의 흔적. 그것이 민준의 하늘이었다.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또 다른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들. 자신의 출신 지역, 자신의 나이, 자신의 학력. 모두가 공개되고 있었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아니, 연예인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공개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 일의 대가였다.
그 중 하나의 댓글을 읽었다.
“26살? 너무 늦은 데뷔인데, 이렇게 잘 나와? 신기하네.”
늦은 데뷔. 맞다. 자신은 늦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을 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난 후에 배우가 되었다. 많은 배우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준비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은 뭘 하고 있었나. 자신은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이 배우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다. 하지만 자신은 배우가 되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준호가 말했던 대로, 자신은 아버지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배우를 하고 있는 건가. 그것이 진정한 배우의 길일까.
천장을 계속 봤다. 곰팡이는 계속 번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도 내부적으로 무언가가 번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감, 죄책감, 의심.
휴대폰이 울렸다. 또 준호였다. 이번에는 음성 통화였다.
민준은 받았다.
“형, 안녕하세요.”
민준이 말했다.
“야, 나 술 마시고 있어. 그래서 감정이 좀 심할 수 있어. 그냥 들어. 넌 잘했어. 진짜로. 그리고 나는 너를 질책한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너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 이 업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주려고. 하지만 그게 질책처럼 들렸나? 미안해. 정말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더욱 진실에 가까웠다.
“감사합니다, 형.”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라는 애, 그 애 조심해. 좋은 애지만,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확실해. 그래서 넌 그 애를 상처주지 말아. 알지? 넌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배우가 될 거야. 그래서 조심해야 해. 모든 사람에게.”
준호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좋아. 그럼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 아, 그리고 축하해. 진짜로.”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통화는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자신을 좋아한다. 그것을 준호가 말했다. 확실하다고. 그렇다면 내일의 만남은 무엇인가. 단순한 축하가 아닌가.
민준은 다시 천장을 봤다. 곰팡이는 여전히 번식하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감정도, 변화도, 붕괴도.
새벽이 올 때까지 민준은 깨어 있었다. 천장을 보면서. 그리고 내일을 두려워하면서. 또는 기다리면서. 둘 다였을 수도 있다.
# 늦은 데뷔
## 1부: 댓글
휴대폰 화면에서 나오는 푸른 빛이 민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밤 11시 53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강제로 내려야 했다. SNS의 알림 아이콘이 자꾸만 깜빡였기 때문이다.
그날 촬영한 드라마의 티저 영상이 올라왔다. 민준의 첫 출연작이었다. 드디어 스크린에 나타날 자신의 얼굴.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 떨림은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공포 때문일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댓글창을 스크롤했다. 대부분은 긍정적이었다. 주연 배우들을 칭찬하는 글들. 드라마의 스토리라인을 기대하는 글들. 그 사이로 몇 개의 부정적인 댓글도 섞여 있었다. 연기 실력을 의심하는 글. 캐스팅 선택을 비판하는 글. 민준은 그런 댓글들을 피하려고 했지만, 눈이 자꾸만 그쪽으로 끌렸다. 마치 혀가 헐은 입 안의 상처를 자꾸만 건드리듯이.
그 중 하나의 댓글을 읽었다.
“26살? 너무 늦은 데뷔인데, 이렇게 잘 나와? 신기하네.”
늦은 데뷔.
단 네 글자였지만, 그 무게는 엄청났다. 마치 누군가 민준의 가슴에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호흡이 얕아졌다.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읽은 댓글을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너무 늦은 데뷔인데.”
그 말은 비난처럼 들렸다. 마치 그가 이 업계의 기준에 미달하는 인간인 것처럼. 마치 그가 이미 실패한 것처럼.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곰팡이가 폈다. 지난 여름 새는 빗물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아직도 그것은 검은색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지문처럼. 혹은 죄의 증거처럼.
그는 생각했다. 곰팡이는 이제 더 번식하고 있을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 검은 자국 아래에서 뭔가가 자라나고 있을까? 곰팡이 포자들이 공중을 떠다니고, 그의 폐 속으로 들어가고 있을까?
## 2부: 늦음의 무게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민준의 친구들은 이미 대학로의 학원들로 향하고 있었다. 배우 지망생들이 모여드는 학원들. 그곳에서 그들은 발성법을 배우고, 연기의 기초를 닦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민준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가 죽었다.
교통사고였다. 그것도 아버지 자신의 실수 때문이었다. 신호를 무시했다고 했다. 왜 신호를 무시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술에 취해 있었다는 말도 있었고, 그냥 무심코 실수했다는 말도 있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는 같았다.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남겨졌고, 민준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시급 9,860원. 8시간 근무에 78,880원. 한 달에 약 200만원 정도. 어머니의 의료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민준아, 공부 좀 더 해. 좋은 대학 가거나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 안정적인 직업 하나는 있어야지.”
어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항상 지쳐 있었다. 마치 매일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처럼. 그것은 아마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실제로 무거운 것을 들고 있었으니까.
“배우는 위험해. 성공하는 사람이 몇이나 돼? 너는 안정적인 것을 선택해야 해.”
그렇게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민준은 들었다. 귀로 들었고, 마음으로도 들었다. 어머니의 염려는 진심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배우를 꿈꾸던 청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20대의 대부분을 그 꿈에 바쳤다. 오디션에 떨어지고, 작은 역할로 연명하고,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보험사 영업사원이 되었다. 좋은 직업이었다.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실패했다. 술에 취해 신호를 무시한 그 순간 말이다.
“배우는 위험해.”
어머니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민준은 깨달았다. 모든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정적인 직업도, 배우도, 생활 자체도. 위험은 어디에나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그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제는 편의점만 아니었다. 식당 서빙, 배달, 카페 알바. 어떤 일이든 돈을 주는 것이라면 했다. 2년이 그렇게 흘렀다. 그의 친구들은 이미 영화배우나 드라마 배우로 활동 중이었다. SNS에는 그들의 활약이 자주 올라왔다. 드라마 출연. 영화 조연. 광고 출연.
민준은 그 글들을 보며 축하해 주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2년 후, 그는 드디어 배우 학원에 등록했다. 나이는 24살이었다. 입학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18살에서 21살 사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미래가 있었다. 광활한 미래. 시간의 여유. 가능성의 무한함.
민준의 얼굴에는 급박함이 있었다. 놓친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그것이 눈빛에 드러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원 선생님은 그를 선택했으니까.
“넌 왜 배우가 되려고 해?”
학원 선생님이 물었다. 기초 연기 수업의 첫 번째 날이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민준이 답했다. 그것은 진실의 일부였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 3부: 준호의 전화
휴대폰이 울렸다. 밤 11시 57분. 화면에는 “준호”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준호는 민준의 선배였다. 같은 학원에서 만났고, 같은 시간대에 여러 영화 촬영장을 돌아다녔다. 3년을 함께 했으니, 이제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준호는 민준보다 2년 먼저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이미 몇 개의 단역과 조연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 업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야, 진짜 축하한다. 네 영상 봤어. 정말 잘 나왔어.”
준호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민준은 그 뒤에 숨겨진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종이 뒤에 숨겨진 문자처럼 투명하게.
“감사합니다, 형.”
“근데 말야, 댓글 봤어?”
“네. 어떤 것들은…”
“인터넷은 항상 그래. 특히 이 업계는. 너를 올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를 깎아내리고 싶어 해. 넌 그런 것들에 신경 쓰면 안 돼.”
준호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정글에서 길을 잃은 친구에게 “저쪽에는 독사가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그런데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그냥… 천장을 봤어요.”
“천장을?”
“네. 거기 곰팡이가 피어 있거든요.”
한 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민준은 그것이 이상한 대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괜찮아?”
준호의 목소리가 변했다. 이제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걱정이었다. 진심의 걱정.
“네, 형. 괜찮습니다.”
“야, 솔직해. 댓글이 신경 쓰이는 거지?”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26살이 늦은 건 아니야. 그리고 너는 늦은 만큼 성실했어. 그게 보여. 너의 연기에. 넌 정말 잘했어.”
“감사합니다, 형.”
“그런데 하나만 더 말할게. 이 업계에서 성공하려면 기술만 가지고는 안 돼. 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거니까 조심해야 해. 너의 모든 행동이, 말이, 표정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거야. 그것을 잊지 말아.”
“네.”
“그리고 넌 왜 배우가 되려고 했어? 진짜로.”
민준은 천장의 곰팡이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 대답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기억해. 배우가 되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누군가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야. 그것을 잊으면 넌 결국 실패할 거야. 진짜로.”
통화가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 4부: 우리의 마음
새벽 1시 23분.
민준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잠을 청해 보려고 했지만, 뇌는 깨어 있었다. 생각들이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쳤다. 댓글, 준호의 말, 그리고 또 다른 생각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 메시지였다.
“축하해. 정말 잘 나왔어.”
발신인은 우리였다.
우리는 촬영 현장에서 만난 스태프였다. 조명팀에서 일하는 여자였다. 키는 작았고, 목소리는 크고, 웃음은 맑았다. 그들은 지난 3개월간 같은 촬영장에서 만났다. 대기실에서, 카페에서, 촬영 대기 시간에.
처음에는 업무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무언가 더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민준이 대사를 외우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민준의 불안을 감지했고, 웃음으로 그것을 흩어버리려고 했다. 우리는 민준의 눈을 자주 마주쳤다.
그리고 민준도 그것을 느꼈다.
“고마워.”
민준이 문자로 답했다.
“내일 만나. 제대로 축하해 주고 싶어.”
우리의 다음 메시지였다.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하트. 아니, 정확하게는 여러 개의 하트였다.
민준은 화면을 들었다 놨다. 여러 번. 마치 그것이 뜨거운 것처럼.
준호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라는 애, 그 애 조심해. 좋은 애지만,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확실해.”
민준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것은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죄책감 때문일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좋아했는가?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있었다. 밤 11시쯤, 촬영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때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 갤러리를 들었다. 거기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있었다. 모두 촬영 현장에서 찍은 것들. 배우들, 감독, 스태프들. 그리고 그 중 많은 장의 사진에는 우리가 있었다. 의도적으로 찍은 것도 있었고, 배경에 우연히 들어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모두 보관했다.
그것이 사랑의 증거인가? 민준은 모르겠었다. 이 나이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으니까.
## 5부: 곰팡이의 번식
새벽 3시.
민준은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이제 그의 눈은 적응했다. 어둠에. 그래서 천장의 곰팡이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검은 지도처럼. 혹은 누군가의 얼굴처럼.
그는 생각했다. 곰팡이는 어떻게 자라나는가?
곰팡이는 포자를 통해 번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포자들.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습기가 있는 곳에 착착 달라붙는다. 그리고 자란다.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자라는지, 사람들은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검은 자국을 발견한다. 그리고 깜짝 놀란다.
“이게 언제 이렇게 됐어?”
마치 자신의 내면처럼.
민준은 자신의 내면에도 곰팡이가 피어 있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불안감, 죄책감, 의심. 그것들이 포자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고, 그의 마음 속 습기 많은 곳에 착착 달라붙는다. 그리고 자란다.
“26살? 너무 늦은 데뷔인데.”
그 한 문장이 포자였다. 아주 작지만, 강력한 포자. 그것이 그의 마음에 착착 달라붙었고, 이제 번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그것도 포자였다. 기쁨의 포자. 설렘의 포자. 책임감의 포자.
“넌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배우가 될 거야. 그래서 조심해야 해. 모든 사람에게.”
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도 포자였다. 경고의 포자. 무거운 책임감의 포자.
민준의 내면은 이제 여러 종류의 곰팡이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이 어떻게 섞이고, 어떻게 자라나고, 어떤 형태를 이룰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6부: 아버지의 그림자
새벽 4시 37분.
민준은 일어나 앉았다. 침대 옆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색이 바래진 사진. 90년대 필름 카메라로 찍은 듯한 노스탤지어가 묻어 있는 사진.
그 사진에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민준의 아버지였다. 무대 위에 선 아버지. 조명에 얼굴이 밝혀진 아버지. 배우 아버지.
그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행복. 미래가 무한할 것 같은 행복.
하지만 그 이후의 아버지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오디션에 떨어지고, 역할을 못 얻고, 결국 보험사 영업사원이 되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