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화: 누군가의 눈빛
우리는 라커룸의 문을 열면서 민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의 목소리는 높았고, 조금 서툰 느낌이었다. 마치 매일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하나는 따뜻하고, 하나는 식어가고 있었다.
민준은 로커를 닫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금속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은 처음 무언가를 포착하듯이 움직였다. 라커룸의 형광등 불빛은 그의 얼굴을 더 창백하게 만들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놀람. 또는 긴장.
“앗, 뭐해? 자고 있었어?”
우리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빨랐다. 뮤지컬 배우답게 자신감 있는 보폭. 민준을 보자 그녀의 얼굴은 즉시 표정을 바꿨다.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친근함을 연기하는 것처럼. 아니, 그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배우라는 직업이었다.
“커피. 마셨어?”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마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우리는 그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배우였고, 배우는 무언가를 읽는 일에 능숙했다. 사람의 침묵, 눈 깜빡임, 호흡의 리듬. 우리는 이 남자 배우 민준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이 업계에서 불안했다.
“좋아. 이걸 마시고 우리 좀 이야기하자. 준호 형이 뭘 말했어?”
우리가 한 잔의 커피를 민준에게 건넸다. 컵은 따뜻했다. 민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무언가를 받는 것이 이렇게도 조심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껴야 했다.
“네? 아, 네.”
민준이 커피를 들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봤고, 재빨리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타인의 약함을 직접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라커 옆에 앉았다. 라커룸의 벤치는 좁았고, 낡았고, 누군가의 이름이 나이프로 흠집 내어져 있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라커룸은 마치 신인 배우들의 무덤처럼 보였다.
“준호 형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디션 얘기했어?”
우리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민준의 반응을 측정하려는 듯이. 민준은 커피를 마셨다. 아직도 너무 뜨거웠지만, 그는 마셨다. 혀가 화상을 입을 것 같았지만, 그는 계속 마셨다.
“네.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좀 더 직설적으로. 배우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우리도 명확한 대답을 원했다. 애매함은 이 업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민준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컵이 벤치 옆 작은 테이블에 닿으면서 약한 소리를 냈다. 똑.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라커룸의 침묵 속에서는 총성처럼 들렸다.
“준호 형이… 나를 추천했대요.”
민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우리는 그것을 들으면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준호와 대화를 나눴었다. 아니, 정확히는 준호가 그녀에게 민준의 이름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녀도 민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커룸에서.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로 서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을.
“미안해,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우리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섞여있었다.
“내가 준호 형에게 물었어. ‘민준이 어때?’라고. 그리고 형이 말했지. ‘그 아이는 다르다’고. 그게 뭔가 했어. 뭐가 다르냐고. 그러니까 형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의 눈이 직접 우리의 눈을 만났다. 그 눈은 깊었다. 마치 물속을 바라보는 눈처럼. 우리는 그 눈 속에서 호기심을 읽었다. 그것은 좋은 신호였다. 불안하지만, 호기심은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을 감춘다’고 했어. 대부분의 신인들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해. 광고에 나오려고, 팬들에게 보여지려고. 하지만 그 아이는 반대야. 자신을 최대한 감춘다고. 그래서 연기할 때 뭔가 진짜 같아 보인대. 뭔가… 신비로워 보인다고.”
우리가 그 말을 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민준을 바라봤다. 민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었다. 마치 그 말이 자신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듯한 자세로.
“난 뮤지컬을 해. 알지?”
우리가 자신을 소개했다. 비록 준호가 이미 소개했을 텐데도. 배우는 항상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금방 잊었기 때문이었다.
“네. 들었어요.”
“근데 이번에 드라마를 하기로 했어. 넷플릭스 프로덕션이고, 한국 콘텐츠를 세계에 팔려고 하는 큰 프로덕션이야. 거기서 여자 조연을 찾고 있어. 그리고 남자 조연도. 너처럼.”
우리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 더 빨라졌다. 흥분이 섞여들었다. 배우가 흥분하는 것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무감정한 채로 일상을 살아갔다. 하지만 무언가 가능성이 보일 때, 그들은 변했다.
“그게… 준호 형이 말했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이제 조금 다른 톤을 가지고 있었다. 호기심. 또는 두려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디션이 정말 어렵다고 들었어요. 준비 기간이 일주일밖에 없다고.”
민준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 준호로부터 받은 카톡이 생생했다. ‘우리가 민준이를 추천했어. 일주일 안에 시나리오 외우고 와야 해. 가능할까?’ 그 질문 뒤에는 말 없는 압박감이 있었다. 준호는 민준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준호의 믿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이 업계에서 누군가를 믿는 것은 도박이었다.
“일주일.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아?”
우리가 물었다. 이것은 수사 질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몰라요.”
민준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것이 좋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는 것. 이 업계에서는 그것이 드물었다.
“일주일은 끝이야. 진짜로. 다른 배우들은 몇 달을 준비해. 근데 그들도 떨어져. 그런데 넌 일주일에 준비해야 해. 이게 공정한가? 아니지. 하지만 그게 이 업계야. 불공정함이 공정한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그녀도 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것은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이 담겨있는 듯한 온기.
“그래도 할래?”
우리가 물었다. 이것은 마지막 질문이었다. 이 질문 이후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민준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배우라면 누구나 알았다. 한 번 누군가로부터 기회를 받으면,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였다. 성공하면 무언가를 얻지만, 실패하면 무언가를 잃었다. 그리고 이 업계에서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여전히 깊었지만, 이제 다른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결심. 또는 절망. 아마도 그 사이의 무언가.
“네. 할래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한 일의 무게를 느껴야 했다. 그녀는 이 남자 배우를 절벽으로 밀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절벽에서 그는 날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었다. 대부분은 떨어진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준비해. 시나리오는 내일 아침 카톡으로 보낼게. 배역은… 음, 이건 준호 형이 더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우리가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은 빨랐다. 마치 이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는 무언가를 느끼는 듯이. 라커룸의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책임감은 더 커지고 있었다. 우리는 민준에게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아니면 경고?
“민준아, 하나만 더.”
우리가 라커룸의 문 옆에 서서 다시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다시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배우로서의 얼굴.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민준은 여전히 앉아있었다.
“이 오디션에서 넌 따뜻한 사람처럼 보여야 해. 근데 그 따뜻함 뒤에는 뭔가 깨져있어야 돼. 알겠어? PD들은 그런 캐릭터를 좋아해. 완벽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진짜 같은 사람.”
우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라커룸을 떠났다. 뒷모습만 남겼다. 뮤지컬 배우답게 곧은 등과 빠른 발걸음.
민준은 혼자 남았다. 라커룸의 형광등 불빛 아래. 우리가 준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마셨다. 이번에는 천천히. 입안에서 커피의 쓴맛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현실의 맛이었다. 달지 않은. 예쁘지 않은. 그저 쓴.
일주일. 정말로 일주일인가?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라커룸의 천장으로 사라졌다. 천장의 형광등은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마치 심장이 고르지 않은 맥박을 치는 것처럼.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은 오후 4시 20분이었다. 라커룸의 시계도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똑, 똑, 똑. 시침이 움직였다.
카톡 창을 열었다. 준호가 보낸 메시지가 여전히 화면에 떠있었다. ‘시간 되니? 혼자 카페 한 잔 할까?’ 민준은 이미 그에게 답장을 보냈었다. 그리고 카페에 갔었다. 그리고 기회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 앉아있다.
그는 준호에게 새로운 카톡을 타이핑했다.
[민준]: 감사합니다. 형.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는 즉시 전송되었다. 회색 풍선에서 파란 풍선으로 변했다. 전송 완료.
하지만 준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민준은 화면을 켜둔 채로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라커룸을 바라봤다.
라커룸의 로커들은 모두 닫혀있었다. 각각의 로커 위에는 배우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민준의 로커 옆에는 성준이라는 배우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성준. 그 이름을 볼 때마다 민준의 가슴은 철렁거렸다. 성준은 민준과 같은 시기에 입사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광고, 뮤직비디오, 그리고 이제 드라마 주연까지.
민준은 로커를 다시 열었다. 안에는 여전히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낡은 운동화. 그리고 3년 전 입사 때 받은 회사 명함. 명함의 글자는 이제 완전히 까맣게 바래있었다.
그는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신발끈은 거의 풀어져있었다. 그는 신발끈을 묶었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듯이.
라커룸의 문을 나가면서 민준은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히 평범했다. 하지만 이제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눈빛.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그의 눈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느낌.
거울을 떠나면서 민준은 중얼거렸다.
“일주일. 해볼 수 있겠지?”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그날 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에 돌아갔다. 강북의 어딘가, 지하철역에서 10분 거리의 오피스텔. 월세는 35만 원. 작은 방, 공용 주방, 공용 화장실이 있는 곳. 다른 배우들과 함께 살고 있는 곳.
민준의 방은 6평이었다. 침대, 책상, 그리고 작은 옷장이 전부. 창문은 하나뿐이고, 밖으로는 골목이 보였다. 골목의 음식점들, 편의점, 그리고 사람들의 움직임.
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희색이었고, 한 곳에 물 자국이 있었다. 비가 새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 알림이었다. 우리였다.
[우리]: 시나리오 이메일로 보낼게. 제목은 “낙원의 문”이야. 이거 진짜 좋은 시나리오야. 읽어보면 알 거야. 그리고… 화이팅!
민준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열었다. 낙원의 문. 그 제목은 뭔가를 약속하는 것처럼 들렸다. 구원. 또는 지옥.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PDF 형식이었다. 페이지 수는 143페이지. 장편 드라마 시나리오였다. 민준은 첫 장을 열었다.
낙원의 문
작가: 이준호
PD: 박수현
프로덕션: 넷플릭스 코리아
제1화: 낯선 도시
등장인물:
지현 (남, 28세) — 카페 매니저. 따뜻하지만 깨져있는 사람. 무언가를 잃었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민지 (여, 26세) —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밝지만 외로운 사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한다.
준호 (남, 30세) — 지현의 형. 성공한 회사원.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
민준은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갔다. 창밖의 골목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음식점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준은 읽고 있었다.
지현이라는 캐릭터를 읽으면서, 민준은 자신을 봤다. 따뜻하지만 깨져있는 사람. 무언가를 잃었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은 정확히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밤새 민준은 시나리오를 읽었다. 조연 역인 지현의 대사를 세었다. 약 70개의 대사.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충분히 깊은 역할이었다.
새벽 3시. 민준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제1화일 뿐이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우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민준]: 읽었어요. 좋은 시나리오네요.
몇 초 후, 답장이 왔다.
[우리]: 밤새 읽었어? 정신 차려. 일주일이 얼마나 짧은지 모르지? 내일부터 진짜 지옥이야.
민준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입 모서리를 올려주는 것처럼. 그것은 오래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물 자국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르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눈물 자국처럼.
일주일. 해볼 수 있을까?
민준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할 수 있어. 반드시.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준호의? 우리의? 아니면 아버지의?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을 꾸지 않기를 바랐다.
# 낙원의 문, 혹은 지옥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PDF 형식이었다. 페이지 수는 143페이지. 장편 드라마 시나리오였다.
민준은 첫 장을 열었다.
손가락이 마우스 패드 위에서 떨렸다. 너무 미세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떨림이었지만, 자신은 느꼈다. 이 떨림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불안장애라고 했지만, 민준은 그냥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마치 오래된 기계가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몸.
스크린에 떠오르는 텍스트들을 천천히 읽었다.
**낙원의 문**
**작가: 이준호**
**PD: 박수현**
**프로덕션: 넷플릭스 코리아**
네트플릭스. 그 단어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넷플릭스 코리아.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국제적인 규모의 프로덕션. 이것은 작은 영화도, 웹드라마도 아니었다. 이것은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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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낯선 도시**
**등장인물:**
**지현 (남, 28세) — 카페 매니저. 따뜻하지만 깨져있는 사람. 무언가를 잃었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민준은 이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지현. 28세. 자신과 정확히 같은 나이였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민지 (여, 26세) —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밝지만 외로운 사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한다.**
**준호 (남, 30세) — 지현의 형. 성공한 회사원.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
준호. 그 이름까지도. 우리의 친구 이준호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의 형 이름으로 붙였나?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민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시나리오는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이준호 작가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꺼낸 꿈. 아니면 악몽.
밤이 깊어갔다.
민준이 앉아 있는 원룸의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서울의 남쪽 끝, 상도동의 이 좁은 골목에서는 밤 열한 시가 되면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편의점 하나와 낡은 분식집, 그리고 몇 개의 자취방들만 불을 켜고 있었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온기 있는 집으로. 그곳에는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었다. 엄마, 아내, 아이, 친구.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하지만 민준의 집은 조용했다. 너무도 조용했다.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한 생명의 신호였다. 그것도 기계의 신호일 뿐이었다.
민준은 다시 시나리오로 눈을 돌렸다.
밝은 화면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30인치 모니터의 빛이 어둑한 방 안에서 섬처럼 떠 있었다. 민준은 읽기 시작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치 그것들이 자신의 생명줄인 것처럼.
—
시나리오의 첫 장면은 어두운 카페였다.
**[INT. BEAUTIFUL DAWN CAFE – MORNING]**
**조명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거짓이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의 미소처럼.**
**지현이 카운터 뒤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그의 손은 어떤 불안감으로 떨리고 있지 않다. 오직 정확한 움직임만 있다. 마치 로봇처럼.**
민준은 이 묘사를 읽으면서, 자신을 봤다.
따뜻하지만 깨져있는 사람. 무언가를 잃었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은 정확히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민준은 한 걸음 물러나서 자신을 바라봤다.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28세의 프리랜서 배우. 지난 5년간 주역을 맡지 못한. 광고 3초 역할, 드라마 조연 단역들로 버티던. 어머니는 “사업은 해?”라고 묻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SNS에 자신의 얼굴을 더 이상 태그하지 않고, 가족 모임에서는 “요즘 뭐해?”라는 질문을 받으면 손가락으로 폰을 가리키며 “배우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밤새 민준은 시나리오를 읽었다.
화면의 빛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렬해졌다. 마치 자신의 눈을 녹여버릴 것처럼. 밤 11시부터 읽기 시작한 시나리오는 새벽 2시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민준은 조연 역인 지현의 모든 대사를 세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손가락으로 대사 부분을 표시했다. 약 70개의 대사.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일반적인 조연 역할은 20개에서 30개의 대사를 가진다. 그 정도면 영화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70개? 70개는 거의 이등주인공 수준이었다. 70개는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는 양이었다. 70개는 시청자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양이었다.
민준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물 자국이 있었다. 작은 갈색 원형의 자국. 아마 몇 달 전 윗층 사람이 화장실을 터뜨렸을 때 생긴 것 같았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했지만, “이미 다 닦았는데요?”라고 답했다. 물론 다 닦지는 않았다. 그 자국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새벽 3시.
민준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143페이지. 모두 읽었다.
**[INT. BEAUTIFUL DAWN CAFE – NIGHT]**
**지현이 혼자 카페를 닫는다. 조명을 하나씩 꺼간다. 마지막 조명을 끌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는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처럼.**
**[FADE TO BLACK]**
**[END OF EPISODE 1]**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제1화일 뿐이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었다. 제2화, 제3화, 그리고 그 뒤로도. 이 이야기는 시작이었다. 긴 여정의 시작.
그리고 민준이 그것을 펼쳐야 했다.
민준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켰다. 시간은 03:17. 새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 깨어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었다.
카톡 목록에서 ‘우리’를 찾았다. 우리. 그의 에이전트이자 친구이자, 때로는 아버지 같은 존재. 우리는 10년 전부터 민준을 봐왔다. 연극 학교 때부터. 그때 우리는 학생이 아니라 스태프였다. 무대 조명을 담당했던 그는 민준의 열정을 봤다. 그리고 지금도 본다. 아직도 믿고 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민준]: 읽었어요. 좋은 시나리오네요.
‘좋은’이라는 단어는 약했다. 이 시나리오는 좋은 것을 넘어섰다. 이것은 위험했다. 이것은 아름다웠다. 이것은 민준의 영혼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몇 초 후, 답장이 왔다. 역시 우리는 깨어 있었다.
[우리]: 밤새 읽었어? 정신 차려. 일주일이 얼마나 짧은지 모르지? 내일부터 진짜 지옥이야.
민준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입 모서리를 올려주는 것처럼.
그것은 오래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지난 해? 아니, 더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3년? 5년? 아니면 지난 10년 내내 한 번도 이렇게 웃지 않았던 것일까?
웃음은 자신을 경악하게 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웃음을 들은 것처럼. 그 웃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것이었다. 아니면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던 그 사람의 웃음이었다.
민준은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침대로 향했다. 이제 침대 위에 누웠다. 몸을 위아래로 늘어뜨렸다. 시멘트 천장이 자신의 얼굴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천장 위에 물 자국이 있었다.
물 자국을 바라봤다.
오래전부터 그것이 거기 있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얼굴에 생긴 점처럼. 아니면 상처처럼.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르게 보였다.
그 자국은 더 이상 물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물 자국처럼 보였다. 마치 하늘이 우는 것처럼. 천장이 자신의 슬픔을 함께 하는 것처럼.
민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주일. 해볼 수 있을까?*
그것은 질문이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 자신이 이것을 견디어낼 수 있을까? 이 긴 일주일을 견디어낼 수 있을까? 촬영장에서 날마다 지현이 되었다가, 밤에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것은 미친 짓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유일한 기회였다.
이번에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일까?
민준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할 수 있어. 반드시.*
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우리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 아마 자신이 되고 싶었던 배우, 자신이 되어야 했던 사람의 목소리.
혹은 아버지의 목소리?
민준의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폐암. 아버지는 자신이 배우가 되려는 것을 반대하셨다.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민준은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아들, 계속해. 포기하지 말아.*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일 뿐이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을 꾸지 않기를 바랐다. 꿈은 현실보다 더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는 자신이 배우가 아니었다. 꿈속에서는 자신이 성공했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눈을 감은 채로, 민준은 내일을 생각했다.
내일은 촬영 일정 설명이 있을 것이었다. 감독과의 첫 만남. 배우들과의 인사. 그리고 그 뒤로, 정말로 지옥이 시작될 것이었다.
일주일.
그것은 너무 짧았다. 시나리오의 143페이지를 일주일 안에 촬영한다? 하루에 20페이지를 촬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미친 일정이었다. 보통은 한 달에 20페이지를 촬영한다.
하지만 우리가 했다는 것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민준을 믿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민준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민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의였다. 또는 체념이었다. 혹은 그 둘 다였다.
새벽 3시 30분.
서울의 남쪽 끝 상도동의 좁은 골목, 낡은 원룸의 침대에서, 민준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내일은 지현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현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낼 것이었다. 자신의 슬픔, 자신의 절망, 자신의 희망, 자신의 꿈. 모든 것을.
왜냐하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는 처음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그 사이의 경계에서, 천천히 잠으로 빠져들었다.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꿈은 온다. 항상.
그리고 그것이 현실보다 더 선명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