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9화: 기사 이후의 침묵
통화가 끝났을 때,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손가락이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그것이 준호의 말을 계속 잡아두고 있는 것처럼. 카페의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민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또는 모든 것이 들렸지만, 모두 같은 톤으로 들렸다. 배경음. 소음. 세상의 무관심.
라떼는 완전히 식었다. 표면에는 갈색 막이 생겨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바라봤다. 처음 주문했을 때의 따뜻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 식었을까. 언제부터 자신은 그것을 마시지 않은 채로 들고만 있었을까. 시간이란 이렇게 일어난다. 눈깜짝할 사이에.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의 옆 테이블에 앉은 대학생 두 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둘 다 휴대폰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웃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마도 SNS에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본 것일 테다. 밈이라고 부르는 것. 민준은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이미 그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 아니, 방금 올라탄 것인가. 아니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인가.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누군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알림이 울렸다. 민준은 화면을 확인했다. 우리였다.
“민준아, 준호 형이랑 통화했어? 뭐 했어?”
민준은 답장을 썼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진실을 쓸 수는 없었다. 준호가 자신을 질책했다는 것.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 화났다는 것. 그것을 쓰면 우리도 같은 마음이 될까. 자신도 배우니까. 자신도 아직 기회를 기다리는 배우니까. 그렇다면 민준이 올라가는 것이 우리를 짓누르는 건 아닐까.
“응. 잠깐 얘기했어. 형 바빴던 것 같아.”
민준은 거짓말을 썼다. 손가락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거짓말은 이렇게 쉽게 나온다. 특히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바로 답장을 했다.
“아, 그래. 형 요즘 바빠. 근데 진짜 축하한다. 정말로. 나도 민준이처럼 기사 나올 날 기다려야겠다. ♥”
하트 이모지. 그 작은 기호가 민준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축하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지만 준호는 질책했다. 같은 일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 맞는 것일까.
민준은 카페를 나갔다. 시간은 오후 8시 15분이었다. 거리는 더 어두워졌다. 강남역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민준은 자신의 얼굴을 여러 번 봤다. 광고판에서. 편의점의 거울에서. 지하철 역사의 큰 스크린에서.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다른 배우들의 얼굴이었다. 영화 포스터. 드라마 광고. 뮤지컬 소개. 모두가 누군가의 꿈이었다. 모두가 누군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지금, 민준도 그 벽 중 한 곳에 이름이라도 올라 있을까.
지하철 플랫폼은 붐볐다. 저녁 시간의 강남. 직장인들, 학생들, 관광객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또는 어딘가에서 오고 있었다. 민준은 플랫폼의 가장자리에 섰다. 앞에는 검은 터널이 있었다. 그 터널 속에서 기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자신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정말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검은 터널로 빨려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일까.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준호였다.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에 준호의 이름이 계속 떴다. 호출음이 울렸다.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는 민준을 봤을 것이다. 휴대폰을 받지 않는 청년.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바빴다. 자신의 삶에 바빴다. 민준은 그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가장 외로운 감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통화 알림이 사라졌다. 그 대신 메시지가 왔다.
“미안해. 내가 심했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일단 축하해. 정말로.”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진정한 것일까. 아니면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배우들은 말을 다루는 방법을 안다. 진정한 감정을 거짓으로 표현하는 방법. 거짓된 감정을 진정한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진정하고 누가 거짓인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올라탔다. 민준도 올라탔다. 자리는 없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주변은 낯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각자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각자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세계 속에 있었다. 그것이 서울이었다. 수십만 명이 한 공간에 있지만, 모두가 혼자인 도시. 민준은 그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그 중 가장 혼자인 한 명이었다.
오피스텔에 돌아온 것은 밤 9시였다. 거리의 편의점 불빛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작은 방. 침대. 책상. 옷장. 거울. 그것이 민준의 전부였다. 그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누가 자신일까. 거울 속의 사람일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일까.
휴대폰을 들었다. 포털을 켰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여전히 떠 있었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내려와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민준은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 순위가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댓글 수는 이제 4,200개를 넘었다. 새로운 댓글들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 배우 이전에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좋네.”
“PD 평가가 이 정도면 앞으로 뜰 거 같은데?”
“얼굴이 특이하긴 한데, 연기력이 있네.”
“누구냐고? 인스타 팔로우 몇 개?”
“아직 팔로워가 적네. 나중에 팔로우하고 싶은데, 이 배우 이름이 뭐지?”
민준은 댓글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투명한지를 느꼈다. 기사가 나고,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한 번의 기사는 한 번의 반짝임일 뿐이었다. 그 다음에는 어둠이 다시 온다. 더 짙은 어둠이.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준호의 말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넌 아직도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배우를 하고 있는 거 같아.”
그것이 가장 아팠다. 가장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자신이 왜 배우를 하는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무엇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자신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 “민준아, 넌 배우가 되고 싶구나. 그럼 해봐.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넌 다를 수 있어.”
그때는 단순했다. 아버지가 믿어주었으니까, 자신도 믿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으니까,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선택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을 잃어버렸다.
그 이후로, 민준은 계속 증명하려고 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 증명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다. 기사. 실시간 검색어. PD의 평가.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준호는 오직 자신의 고통만 봤다.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우리였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민준은 받았다. 목소리를 준비했다. 밝은 목소리. 감사한 목소리. 모든 것이 괜찮다는 목소리.
“여보세요?”
“민준아. 혹시 자고 있었어?”
우리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무언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아니에요. 뭐하세요?”
“그냥… 뭐, 잠이 안 와서. 생각이 많았어. 민준이 기사 나온 거, 정말 축하한다고 하고 싶었어. 근데 준호 형이 뭐라고 했대? 우리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
민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가 알아챘다는 뜻이었다. 준호와의 통화가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민준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형이… 뭐라고 하셨어요.”
“그건 직접 말해줄 수 있어?”
“네. 내일 만날 수 있어요?”
“응. 내일 오후에 어때? 그 카페, 우리 항상 가던 카페.”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이 우리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아니, 이미 준호가 자신을 다치게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우리를 다치게 할 것인가.
창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불빛들. 수십만 개의 불빛들. 각각의 불 뒤에는 한 사람의 삶이 있었다. 한 사람의 고통이 있었다. 한 사람의 선택이 있었다. 그리고 민준도 그 수십만 명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눈에 띄는 불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 밝은 불. 더 주목받는 불.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불을 꺼버리려고 할 불이기도 했다.
밤이 깊어졌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민준은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는 척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사가 나던 날 밤처럼. 그 밤에도 자신은 천장을 바라봤다. 희망으로 설렌 가슴으로.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불안함으로 꽉 찬 가슴으로. 그것이 성공의 다른 이름일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실시간 검색어는 이미 상위 50위 밖으로 나가 있었다. 기사가 올라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몇 시간일 뿐인데, 이미 관심은 식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연예계였다. 빠르게 올라가고, 빠르게 내려간다. 그 사이클 속에서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사라진다. 그리고 민준은 지금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마침내 자신의 눈이 감겼다. 꿈을 꿨는지, 아니면 그냥 의식을 잃어버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침이 다시 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우리와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대화가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갈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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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민준은 약속의 시간보다 15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강남역 근처 작은 골목에 있는, 낡은 간판의 카페였다. “Tiny Brew”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은 영어지만, 내부는 한국식이었다. 손때 묻은 목재 테이블. 벽에 붙은 낡은 포스터들. 주인장이 손으로 쓴 메뉴판. 그곳에는 시간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마치 아무도 나이 먹지 않는 곳.
민준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같은 자리였다. 어제 준호와 통화했을 때와 같은 자리였다. 마치 자신이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려고 하는 것처럼. 아니면 어제의 고통을 다시 경험하려고 하는 것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거품이 없는, 순수한 쓴맛. 그것이 현재의 자신을 더 잘 표현할 것 같았다.
우리가 나타난 것은 오후 3시 정각이었다. 검은 후드 티에 청바지. 얼굴에는 마스크가 있었다. 외출 준비를 제대로 한 모습이었다. 아니, 자신을 숨기려고 준비한 모습이었다. 마스크 너머로 우리의 눈이 보였다. 그 눈은 걱정하고 있었다.
“안녕.”
우리가 민준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민준이 대답했다. 존댓말이 나왔다. 자신도 놀랐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존댓말이 나올 줄은.
“어? 왜 갑자기 존댓말? 우리 사이가 이 정도야?”
우리가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가볍지 않았다.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아, 죄송해요. 습관이…”
“아니, 괜찮아. 근데 준호 형이 뭐라고 했는지 빨리 얘기해줄래? 내가 물어봤을 때 대답이 이상했거든.”
우리가 직결했다. 마스크를 내렸다. 그 아래에는 피곤한 표정이 있었다. 밤을 새운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민준은 그것을 알았다. 자신의 기사 때문에 우리가 밤을 샜다는 것을.
“형이 말씀하신 건…”
민준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을. 아버지의 얘기. 트라우마의 얘기. 자신이 진정으로 배우가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배우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 모든 것을.
우리는 조용히 들었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았다. 민준의 모든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민준이 말을 다 마쳤을 때,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준호 형 말이 맞아. 그런데…”
우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예요?”
“그런데 넌 그걸 이미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물어본 거야? 왜 형이 말해줘야 깨닫는 거야? 넌 자기 감정도 자기가 챙겨야 하는 거 아냐?”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지만 화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플 때 나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민준은 답할 수 없었다. 우리의 질문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정말로 자신의 감정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민준이 작게 말했다.
“뭐가 미안해? 넌 뭘 잘못했어? 나한테 미안해할 것도 없어. 그냥… 너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정말로. 이 기사가 나오고, 준호 형이 화내고, 그 모든 게 너를 힘들게 할까봐 걱정했어. 그런데 막상 와보니, 넌 더 힘들어 보여. 뭔가 부서진 것처럼.”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정확했다. 민준은 부서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부서져 있었다. 기사가 나던 밤부터.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아버지가 죽던 날부터. 자신은 계속 부서지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뭘 할 거야?”
우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민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것도 괜찮아. 모르는 거. 그냥 천천히 생각해봐. 아버지 때문에 배우를 하는 거면, 그건 멈춰야 해. 자신 때문에 배우를 하는 게 뭔지 생각해봐. 그게 뭔지 찾아봐. 그리고…”
우리가 말을 멈췄다.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준이 물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여기 있을 거. 넌 혼자가 아니야. 준호 형이 화낸 건, 너 때문이 아니라 형이 자신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야. 형은 이미 올라갈 수 없는 곳에 있어. 그런데 넌 올라가고 있어. 그게 형을 힘들게 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그냥 네 길을 가면 돼.”
우리의 말이 민준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열었다. 또 다른 방향으로. 또 다른 감정으로.
“근데 형이 기뻐할 줄 알았어요.”
민준이 작게 말했다.
“형도 기뻐할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넌 그 시간 동안 넌 너 자신에 집중해야 해. 넷플릭스 드라마가 어떻게 될지,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그 모든 걸 생각해야 해. 형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너 자신한테 충실해.”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지막 문장처럼 들렸다. 마치 이것이 둘 사이의 마지막 대화인 것처럼. 아니, 시작인 것처럼. 뭔가가 바뀌고 있었다. 미묘하게. 보이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민준과 우리는 그 카페에서 한 시간을 더 앉아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함께 앉아 있으면서. 그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모든 말보다 큰 위로였다.
밤이 되었을 때, 민준은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우리는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탔다. 헤어질 때, 우리는 민준의 어깨를 한 번 쓸어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했다.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CEO 이수진이었다.
“민 배우. 지금 회사에 올 수 있나? 중요한 얘기가 있어.”
민준의 심장이 철렁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남은 분량 체크: 약 14,500자 ✓
# 부서진 것들에 대하여
## 1부: 만남
카페의 입구에서 민준은 잠깐 멈췄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실내의 따뜻한 불빛이 마치 자신을 심판하려는 듯 보였다. 손잡이를 잡기 전에 그는 깊게 숨을 쉬었다. 공기가 차갑게 폐 깊숙이 들어왔다. 11월의 저녁은 이미 겨울의 예고였다.
“왔어?”
문을 열자마자 그 목소리가 들렸다. 카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 민준은 그를 보는 순간 자신의 모든 방어막이 흔들렸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걱정이 깊게 패여 있었다. 미간의 주름, 입가의 팽팽함—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민준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사이의 거리는 겨우 50센티미터 정도였지만, 그 거리가 마치 수십 미터처럼 느껴졌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어떤 재즈 피아노곡. 슬픈 곡은 아니었지만, 현재 이 순간을 감싸는 분위기와 어울려 모든 것이 슬프게 들렸다.
“왜 불렀어요?”
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약한 사람처럼. 하지만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약해 보였을 테니까.
“화내고, 그 모든 게 너를 힘들게 할까봐 걱정했어. 그런데 막상 와보니, 넌 더 힘들어 보여. 뭔가 부서진 것처럼.”
그 말이 나왔을 때, 민준의 호흡이 잠깐 멈췄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움켜쥔 것 같았다. 부서진 것처럼. 정확한 표현이었다. 너무나도 정확해서 오히려 아팠다.
“네, 제가 부서져 있습니다.”
민준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실제로는 울음에 더 가까웠다.
“언제부터?”
“기사 나던 날부터요.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부터. 사실 그때부터 저는 계속 부서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민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카페의 따뜻한 공기가 마치 자신을 질식시키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거리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마다의 짐을 가지고.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뭘 할 거야?”
그 질문이 던져졌을 때, 민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손을 카페 테이블 위에 놓고, 그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떨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 떨리기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것이 민준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아. 모르는 거. 그냥 천천히 생각해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마치 깨진 도자기를 다루듯이. 민준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은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버지 때문에 배우를 하는 거면, 그건 멈춰야 해. 그건 너를 위한 게 아니니까. 자신 때문에 배우를 하는 게 뭔지 생각해봐. 그게 뭔지 찾아봐. 혹시 배우 자체가 맞는 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그런데…”
“뭔데?”
“형이 기뻐할 줄 알았어요. 넷플릭스 드라마 캐스팅이 되면 형도 기뻐할 줄 알았어요. 형의 동생이니까. 가족이니까.”
민준의 목소리에는 상처가 묻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었다. 배신감이었다. 자신이 가장 응원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서 받은 배신감.
“형도 기뻐할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필요해.”
그 사람은 민준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조심스럽게. 마치 자신도 처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처럼.
“준호 형이 화낸 건, 너 때문이 아니야. 형이 자신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야. 형은 이미 올라갈 수 없는 곳에 있어. 그런데 넌 올라가고 있어. 그게 형을 힘들게 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그냥 네 길을 가면 돼.”
## 2부: 위로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가슴이 다시 열렸다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감정으로. 마치 어두운 방에 창문이 열리는 것처럼.
“근데 형이…”
“형은 언젠가 이해할 거야. 그리고 그때까지 넌 너 자신에 집중해야 해. 넷플릭스 드라마가 어떻게 될지,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그 모든 걸 생각해야 해. 형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너 자신한테 충실해.”
카페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더 밝은 곡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슬픔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음악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밝은 곡이든, 그 안에는 어떤 슬픔이 숨어 있는 것일지도.
“형은 언제 터질 거 같아요. 그 감정들이.”
민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는. 하지만 그건 형의 문제야. 너는 그 짐을 나눠가지지 않아도 돼. 이미 충분히 많은 짐을 가지고 있잖아.”
그 사람은 민준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손의 온기가 전해졌다. 실제의 온기. 그것이 민준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말보다도. 조언보다도.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카페의 시계를 봤지만, 그 숫자들이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함께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생각나?”
그 사람이 물었다.
“뭐요?”
“아버지.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했어?”
민준은 그 질문 앞에서 오래 침묵했다. 아버지. 이제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하는 사람.
“배우가 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불안정하다고. 위험하다고.”
“그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셨겠지. 아버지 세대는 그런 꿈들을 위험한 것으로 봤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했어요. 그 다음엔 아버지를 증명하려고 했어요. 제가 잘 할 수 있다는 걸.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더 집요하게.”
“그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준비도 없이. 제가 아직 그걸 증명하기 전에.”
그 순간, 민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눈물들이. 드디어 흘러내릴 준비를 하는 눈물들이.
“그래서 계속했어요. 아버지가 돌아오면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을 위해서요. 아버지의 부재를 위해서요.”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민준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가장 옳은 반응이었다.
“근데 이제 알겠어요. 그건 제 길이 아니라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던 거였어요.”
## 3부: 깨달음
카페의 한구석에서, 두 사람은 대화를 멈췄다.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혹은 너무 많아서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함께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함께 느끼면서.
카페의 다른 테이블들에는 연인들이 앉아 있었다. 손을 마주잡고. 웃으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민준은 그들을 봤다. 그들의 단순한 행복이 부러웠다. 동시에 그런 행복도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알았다. 모든 것은 부서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혼자라고 생각해?”
그 사람이 갑자기 물었다.
“네?”
“혼자라고 생각해? 이 모든 것을 혼자 견뎌내야 한다고?”
“네. 형은 화났고, 엄마는… 엄마도 힘들어하고 있고. 친구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고 있고. 그래서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틀렸어. 넌 혼자가 아니야. 나는 여기 있어. 항상 여기 있을 거야. 이미 그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 말이 나왔을 때,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누군가의 약속. 누군가의 확실한 현존. 그것이 어느 정도로 자신을 붙들어주고 있었는지를.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사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표현이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카페의 조명이 더 밝아졌다. 마치 외부의 어둠과 대조를 이루려는 것처럼. 민준은 창밖을 봤다.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각각의 불은 각각의 방에서. 각각의 삶에서.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고통받고, 누군가는 단지 살아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잘 모르겠어요. 넷플릭스 드라마 촬영이 있고, 그 다음에…”
“그냥 한 발씩 내딛어. 멀리 봐서 좋을 건 없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만 해. 아버지를 위해서도 아니고, 형을 위해서도 아니고, 엄마를 위해서도 아니고. 너 자신을 위해서만.”
그 말은 단순해 보였지만, 민준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누군가를 위해. 항상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항상 어떤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근데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제외하고는.”
“그래. 그럼 알아보는 거야. 천천히. 서두를 필요 없어. 넌 아직 어려. 실수할 자격이 있어. 길을 잃을 자격도 있어.”
카페의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은 이미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4시간을 카페에서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리고 넌 강해. 생각보다 훨씬 강해. 넌 아버지의 죽음을 견딜 수 있었고, 형의 질책을 견딜 수 있었고, 기사의 파장을 견딜 수 있었어. 그것들은 작은 일이 아니야. 그런데 넌 여전히 서 있어. 여전히 살아 있어. 그것이 강함이야.”
## 4부: 헤어짐과 새로운 시작
시간이 더 흐르고, 카페는 서서히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의자들을 정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손님들을 위한 신호였다.
“가자.”
그 사람이 일어섰다. 민준도 따라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민준은 자신의 다리가 얼마나 뻣뻣한지를 느꼈다.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이 육체에 남은 흔적이었다. 마치 자신의 감정이 남긴 흔적처럼.
밖은 영하의 온도였다. 11월의 밤이 이미 겨울의 혹독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민준은 옷의 깃을 세웠다. 옆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의 입구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난 반대 방향이야.”
“네.”
“그래. 그럼 조심해서 가.”
그 사람이 민준의 어깨를 한 번 쓸어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말이 아니라, 그 손길이 모든 것을 전달했다. 응원을. 위로를. 약속을.
민준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 사람은 이미 반대쪽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멀어져갔다.
지하철 열차 안에서,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여러 개의 알림이 있었다. 엄마로부터의 문자. 준호로부터의… 아니, 준호로부터는 아직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문자들. 에이전시의 연락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계의 소식인 것처럼.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넘었다. 민준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방.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공간. 책들, 영화 DVD들, 그리고 아버지의 사진 한 장.
그 사진을 봤다. 아버지의 얼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안에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
“미안해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위해서 배우를 하지 않기로 했어요. 아버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할 거예요. 아버지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저 자신한테는 필요한 결정이에요.”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CEO 이수진의 이름이 떠올랐다.
“민 배우. 지금 회사에 올 수 있나? 중요한 얘기가 있어.”
민준의 심장이 철렁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가겠습니다.”
## 5부: 밤의 도시 속으로
택시를 탔을 때, 민준은 창밖의 도시를 바라봤다. 밤의 서울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불빛들이 하나하나 켜져 있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